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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정진석 회고록44: 하느님의 뜻으로 세운 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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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10 ㅣ No.447

[추기경 정진석] (44) 하느님의 뜻으로 세운 병원

 

교구와 지역민 위한 병원 봉헌하고 서울로

 

 

- 청주성모병원 개원 미사를 집전하고 있는 정진석 주교. 가톨릭평화방송DB.

 

 

조선 시대와 구한말은 엄격한 신분제도가 있었고 서민들의 인권이 무시당하던 때였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회는 거의 1세기에 걸친 박해로 1만 명 안팎이 순교하는 시련을 겪으면서도 의료ㆍ시약 사업을 통해 병자들에게 구호 손길을 베풀어 왔다. 가톨릭 신자 중에서 중인 계급이었던 의원(醫員)들이나 전통 의술과 약방문을 체득했던 양반들이 가난한 병자들에게 의술을 베풀고 약제를 제공했다.

 

비밀리에 전교 활동을 하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1859년에 시약소를 설치해 병자를 진료하고 약을 나눠주었지만 1866년 박해로 시약소가 폐쇄됐다. 중단됐던 한국 천주교회의 의료 활동은 1886년 한불수호조약으로 종교 자유가 허용되고,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미국 메리놀외방선교회, 독일 성 베네딕도회가 시약소와 진료소를 잇달아 설치해 수많은 환자들을 보살피면서 재개했다.

 

조선 교회 차원에서는 1931년 6월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경성교구 청년 연합회’를 중심으로 정식 병원 설립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천주교 경성교구 유지재단은 현재 명동성당 옆(중구 저동 1가 38번지)에 무라카미병원 건물을 매입해 1936년 5월 11일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정식 병원인 성모병원을 개원했다. 그 후 1950년을 기점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의료 사업은 극적인 전기를 맞게 된다. 한국 전쟁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피난민이 발생해 각국 가톨릭교회가 그리스도적 형제애를 발휘해 긴급 구호에 앞장섰고, 해방과 더불어 선진 의학과 의료 기술이 도입됨에 따라 새로운 의료 시설과 전문 인력을 갖춘 병원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정진석 주교가 내빈들과 축하 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DB.

 

 

부산 메리놀병원을 시작으로 목포, 부평, 대구, 의정부, 전주, 광주에 천주교 병원들이 개원하면서 병원 중심의 가톨릭 의료 사업이 활성화됐다. 특히 전문 의료인을 양성하고자 1954년 설립된 가톨릭대학 의학부와 병설 성 요셉 간호학교 역시 우수한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으로 발전해 우리나라 가톨릭 의료 활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병들고 약한 이들에 대한 사랑이 가득했던 교회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정진석 주교는 교회의 의료 사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김영식 신부님과 부평 성모자애병원 설립을 가까이에서 지켜봤기에 더욱 그 뜻이 분명했다. 의료사업이 사회 속의 교회가 되어 지역 주민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고, 선교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그는 굳게 믿었다. 그래서 청주교구장이던 그는 교구 신자들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종합병원을 선물하는 것이 아주 간절한 꿈이었다. 청주 지역은 중환자가 발생하면 대전 등지의 큰 도시로 나가야 하는 어려움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1997년 2월 임시 확대 사제평의회가 열렸다. 평의회 사제들은 의료 사업을 통해 교회 이념을 구현하자는 취지를 모아 정 주교와 뜻을 함께했다. 당시 청주 시내에는 리라병원이라는 꽤 괜찮은 병원이 있었다. 그런데 이 병원이 부도가 나서 법원 경매로 나온 상태였다. 청주교구는 이곳을 인수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곧 경매 절차에 참여했다. 하지만 이내 여러 번 유찰이 됐다. 당시 낙찰 예상액이 약 100억 원이었다. 낙찰되기 위해서는 법원에는 기본적으로 10%를 내야 했는데 당시 교구 재정 1년 예산이 약 10억이던 때였다. 덜컥 낙찰되어 10억 원을 모두 법원에 내니 무일푼이 됐는데, 더 큰 문제는 낙찰비 100억 원을 내야 했다. 막막해진 정 주교는 서울대교구 총대리인 김옥균 주교님께 하소연했다.

 

“주교님! 이번에 이 병원을 놓치면 우리 신자들이 아플 때 찾을 병원 지어주겠다는 제 평생 소원이 없어집니다. 도와주실 방법이 없으실까요?”

 

김 주교는 한참 고민 끝에 정 주교에게 시중 은행 한 곳의 행장을 소개해줬다. 연락을 받자마자 정진석 주교는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서 곧장 소개받은 은행장을 만난 정 주교는 또다시 연거푸 하소연했다.

 

“지난 28년 동안 병원이 없어서 여러 가지 불편한 게 많았습니다. 우리 교구 병원을 하나 갖는 것이 제 소원이었어요. 우리 청주교구 좀 도와주십시오.”

 

교구민을 위해 큰 병원을 만드는데 이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정 주교의 노력에 하느님도 도움의 손길을 보내셨다. 우여곡절 끝에 자금이 마련된 것이다. 청주교구는 리라병원을 인수했고, 곧장 ‘청주성모병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리고 개원 준비위원회를 발족하여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1년 만에 감격스러운 개원 미사를 봉헌하고, 진료를 시작하자 정 주교는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자신의 간절한 소원을 주님께서 모두 이뤄주셨음에 말 못할 감격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고 있었다. 이제 의료 사업을 통해 이웃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해야 할 차례였다. 주님의 도우심에 보답하겠다는 다짐을 기도하던 정 주교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발신지는 교황 대사관이었다.

 

“정 주교님, 교황님께서 주교님을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하셨습니다.”

 

주님의 뜻은 다 알고 있는 것 같다가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정 주교는 잔뜩 준비한 계획을 내려놓고 순명해야 했다. 다시 짐을 쌌다. 그리고 여전히 정비해 나갈 것이 많던 청주성모병원을 마음의 큰 빚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게 됐다.

 

그가 다시 청주교구를 방문한 것은 추기경에 서임된 이후인 2006년이었다. 청주를 떠난 후 처음으로 그의 큰 자랑이자 마음의 빚이던 청주성모병원을 방문했다. 이날 병원 관계자들과 사제들이 그동안의 병원 운영 현황을 보고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어려움을 딛고 융자금을 갚아나가며 계속해서 발전해왔다는 발표를 마무리하던 사제가 이내 눈시울이 붉어지며 말했다.

 

“교구장님이 서울로 막 떠나시고, 이 큰 병원을 운영하려니 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동안의 어려움이 갑자기 밀려와서인지 그는 목이 메어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장내에 있던 모든 사람이 말을 멈췄고, 이내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정진석 주교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미안함과 대견함이 교차하는 심정이었다.

 

정진석 주교는 한참이 지난 후에 생각을 해보아도 당시 무엇을 믿고 그렇게 무모하리만큼 일을 진행할 수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도 모든 것이 잘 해결되었고 결과도 좋았다. 아마 하느님께서 시골 신부들과 신자들을 돌봐주신 은총이라 믿는다. 지금도 청주성모병원은 청주교구 내 사제들과 수도자, 신자들 그리고 지역민의 의료를 책임지고 있다. 정 주교는 생각했다.

 

“계산적으로 했으면 못했을 것이다. 그저 하느님의 뜻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4월 9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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