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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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행복하십니까: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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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1-20 ㅣ No.1357

[경향 돋보기 - 행복하십니까]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서

 

 

2017년 새해를 맞으며 「경향잡지」의 모든 구독자와 가족에게 인자하신 주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의 은혜가 풍성히 내리시길 바라며 기도드립니다. 우리는 모두 행복을 원합니다. 그 이유는 행복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어내실 때 주님의 행복 유전자를 심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면 우리는 서로 복을 빌어줍니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 모르는 사람에게도 복을 빌어주는 이유는 우리 안에 복의 원천이신 주님의 축복이 들어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도 행복해질 뿐만 아니라, 이웃도 행복해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서로 복을 빌어주면서도 우리는 누가 복을 주시는 분인지 밝히지 않은 채 말합니다. 중국 식당에는 ‘복(福)’자를 써넣은 등을 거꾸로 달아놓는 관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는 이유는 복이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라고 알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복을 내려주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바로 만복의 근원이시며 우리의 행복을 바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지어내실 때 인간이 행복해지도록 계획하고 실행하셨습니다. 모든 권한을 부여하셨습니다. 짐승의 이름까지도 사람이 부르는 대로 정하게 안배하셨습니다.

 

 

선하신 하느님

 

하느님의 성품을 성경을 통해서 종합하면, 첫째로 선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을 원치 않으십니다. 악은 다 악마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을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근성을 지닌 악마는 매사에 불행을 일으키는 장본인입니다. 원조의 경우에도 악마는 행복을 누리는 아담과 하와를 불행의 도가니에 잡아넣었습니다. 부부가 서로 미워하게 만들며, 형제끼리 살인을 저지르게 하고, 자연도 인간에게 반항하게 만듭니다. 그 이유는 악마가 하느님의 반대편에서 인간의 불행을 획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펼치시고 멸망의 구렁텅이에 깊이 떨어진 인간에게 당신의 사랑하시는 외아들 예수님을 구원자로 세상 가운데로 보내셨습니다.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을 받들어 인간의 죄를 모두 없애셨습니다. 요한 세례자는 예수님을 보는 순간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하고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하느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도록 복을 내리셨습니다. 죄인을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의 희생과 죽음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교환의 신비’가 이루어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내려오시고, 인간이 올라가게 만드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비우시고, 인간이 채워지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돌아가시고, 인간이 살아나도록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시고, 인간이 우뚝 서게 만드셨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당신을 ‘아버지’라 부르고 당신의 자녀, 곧 아들과 딸이 되게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이 교환의 신비로 우리는 행복을 되찾게 되었으니, 행복의 출처는 분명 하느님 자신이십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교부는 그런 이유에서 원조의 죄를 ‘복된 탓(죄)’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하느님의 은총이 더 많이 내린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성경에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은혜로 선택받은 죄인입니다(MISERANDO ATQUE ELIGENDO).”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하심, 곧 선하심의 은혜로 은총의 나라에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진실하신 하느님

 

하느님의 두 번째 성품은 진실하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거짓을 모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예.” 할 것은 “예.” 하라고 가르치시며, 그 이상 지나친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악마는 거짓을 일삼습니다. 인간을 유혹하여 행복을 잃게 만드는 화려한 거짓을 만들어냅니다. 진실은 순수하기 때문에 요란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거짓은 화려하고 요란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진리로 초대하십니다. 당신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진리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사도들의 모습은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예수님을 처음 뵙고, 기적적인 고기잡이를 보았을 때 예수님 앞에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당함을 고백하였습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우리가 진실하게 스스로의 부족함과 미약함을 고백할 때 우리는 행복의 문으로 들어갑니다. 하느님 앞에 겸손하게 자기 죄나 허물 또는 약점을 고백하는 사람은 새 삶의 은총을 받습니다. 요한 사도는 그런 이유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우리 안에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1요한 1,8-9).

 

성인들은 회개한 죄인들입니다. 베드로와 바오로, 막달레나 등 수많은 성인성녀는 행복의 비결을 깨닫고 실천하신 분들입니다. “어떤 성인도 과거가 없는 성인이 없고, 아무리 막중한 죄인이라도, 미래가 없는 죄인은 없다.”라는 말이 꼭 맞습니다.

 

 

아름다우신 하느님

 

하느님의 세 번째 성품은 아름다우신 분이십니다. 이 세상을 볼 때 아름다움을 보게 됩니다. 「가톨릭 성가」에서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내 영혼 주를 찬양하리니, 주 하느님, 크시도다.”

 

사람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이유는 바로 그 안에 하느님의 아름다운 본성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아름다움은 바로 하느님 안에 내재합니다. 따라서 하느님 안에 머무는 사람은 그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마치 부모님의 사랑 안에 자라나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아빠엄마의 아름다운 모습이 나타나는 이치와 같습니다.

 

 

성경에서 나타난 참행복은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확실하고 진실한 행복을 가르치는 스승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입에서 나온 말씀 가운데 참된 행복을 배우고자 하는 제자들이 많았습니다. 이를테면 산상수훈에 들어있는 참행복의 여덟 가지 단계라고 일컬어지는 ‘진복팔단’(眞福八端)은 많은 교부들의 가르침 안에 인간의 행복의 선언문 역할을 합니다.

 

성 치프리아노 교부는 세상의 헛된 행복과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추구하는 참행복에 관하여 좋은 가르침을 남겼습니다. 락탄시오 교부는 진정한 행복은 육신의 쾌락이나 지상의 재물에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성 바실리오 주교는 지상의 모든 행복, 이를테면 건강이나 재물 또는 지위 등은 다 지나가는 것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밀라노의 주교 성 암브로시오 교부는 선한 양심이 가져다주는 행복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는 행복과 불행을 분별하시는 하느님의 섭리의 놀라우신 은혜를 찬미하였습니다. 그는 악인들의 행복과 경건한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갔는데, 천사들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포장하고 있었습니다. 알아보니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실 선물인 ‘복’이었습니다. 그 포장지는 ‘고난’이라고 했습니다. 이유를 물어보니 ‘고난’이 단단해서 내용물이 파손되지 않고, 또 잘 벗겨지지 않아 포장용으로 제격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포장지만 보고는 고난을 싫어하여 그 안에 들어있는 참된 복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지상의 죄와 결부된 즐거움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레오 교황님은 더러움 속에 즐겨 살며 지내는 사람은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의 달콤함을 결코 맛보지 못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구약성경의 시편과 잠언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시편 1,1-3).

 

“행복하여라, 그분께 피신하는 이들 모두!”(시편 2,12)

 

“행복하여라, 죄를 용서받고, 잘못이 덮인 이! 행복하여라, 주님께서 허물을 헤아리지 않으시고, 그 얼에 거짓이 없는 사람!”(시편 32,1-2)

 

“행복하여라, 지혜를 찾은 사람! 행복하여라, 슬기를 얻은 사람! 지혜의 소득은 은보다 낫고 그 소출은 순금보다 낫다”(잠언 3,13-14).

 

신약성경에서는 인간의 행복이 예수님과 더불어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 곧 다스리심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강조하십니다(루카 14,15; 묵시 19,9 참조).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믿음을 고백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이다”(마태 16,17).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마태 24,46)

 

엘리사벳은 마리아께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7-28).

 

주님께서 마련하신 이 행복에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로운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속합니다(마태 5,3-10 참조).

 

이런 사람들은 하느님을 꼭 닮은 사람들로서, 그들 안에 하느님의 품성, 곧 선하심과 진실하심과 아름다우심이 들어있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으로 우리가 참행복의 길을 걷도록 지혜와 힘을 주시고 손을 잡아 이끌어주시기를 간구하며 노래합시다. “내 생애의 모든 것 알고 계신 주님, 내 생애의 모든 것 살피시는 주님! 어디에 앉아있어도, 당신 함께 계시며, 어디를 걸어가도 살피시는 주님! 내 생애에 모든 것 당신께 드리니 받아주시옵소서!”

 

참행복의 의미를 알려주시고 구체적인 방법까지 일러주시며 힘을 주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그분의 길을 끝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걸어가는 행복을 주시기를 빕니다. 아멘!

 

* 장인산 베르나르도 - 청주교구 신부. 독일 본대학교에서 교부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대구가톨릭대학교와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2016년 8월에 은퇴한 원로 사목자로 현재 강화꽃동네 성녀 헬레나 성당에서 통일을 기원하며 지내고 있다.

 

[경향잡지, 2017년 1월호, 장인산 베르나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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