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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 자비의 특별희년을 보내며: 적과의 화해 그리고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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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2-20 ㅣ No.420

[경향 돋보기 - 자비의 특별희년을 보내며] ‘적’과의 화해 그리고 구원

 

 

“신부님, 북한에게 어떻게 용서란 말을 쓸 수가 있어요? 그러면 IS(이슬람국가)도 용서해야 한다는 말이세요?” 교구 내 한 본당에서 후원회원을 위한 미사가 끝나고 인사를 드리는데, 연세가 지긋하신 한 자매님이 강론 내용을 따지며 물었다.

 

당신 평생에 이렇게 분심이 든 미사는 처음이었다고 역정을 내시는데, 갑작스러운 공격에 내 얼굴이 벌게지는 게 느껴졌다. 짧은 대화였지만, 성서공부도 하셨고, 평일미사도 빠지지 않는 열심인 신자임이 분명했다.

 

평소 강론에서 본디 색깔을 다 드러내지 않고 ‘약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스스로 약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날은 그 교회를 사랑하는 성실한 신자에게 나의 강론이 용납되지 않았던 것이다(감사하게도 그 자매님은 나중에 전화로 사과의 마음을 전해주셨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북한을 용서할 수 있을까?

 

 

‘적’을 위한 자비

 

이 땅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로서 특별히 자비의 특별희년까지 지내온 교회이지만, 우리에게 북한은 자비의 대상이 아니다. 남과 북의 적대적 분단 상황이 북한을 늘 경계하게 만든 것이다. 최근 함경도 지역에 발생한 수해를 보면서, 유엔 기구나 국제 적십자사, 중국 정부까지도 인도적 지원을 언급하고 있는데, 정작 남한 사회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오히려 대북 경제제재의 효과가 감소될지 걱정들을 하는 것 같다.

 

신자들 또한 섣부르게 북한을 연민하고 도왔다가는 우리가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요즘에는, 민족화해에 대한 강의를 듣는 신자들의 표정에서 더 커진 불편이 묻어나곤 한다. 조별 나눔을 해보면 북한 정권을 무너뜨리려면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나오고, 더구나 일부 ‘신자들’이 사드 배치를 우려하는 주교님들을 향해 ‘종북’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새로운 현상’까지 등장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오히려 가톨릭 신앙에 충실하다고까지 주장한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 교회는 북한에게 과연 자비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우리는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는 ‘적’과 화해할 수 있을까? 서로에 대한 적대의 마음이 더 강해지고 있는 이 땅에서 교회는 어떻게 자비와 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평화를 위한 용서, 화해를 위한 참회

 

교회의 가장 본질적인 사명은 이 땅에서 죄의 용서를 통한 그리스도의 평화를 전하는 것이다. 「간추린 사회교리」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세계 평화의 증진은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구원 활동을 계속해 나가는 교회 사명의 필수적인 한 부분이다. 사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사이며, 세상 안에서 세상을 위한 평화의 표지이며 도구이다”(제516항). 그리고 평화를 위한 길로 용서와 화해를 제시한다. “교회는, 진정한 평화는 오로지 용서와 화해를 통해서만 가능해진다고 가르친다”(제517항).

 

그렇다면 우리 한국 천주교회는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고자 평화를 위한 노력에 얼마나 충실했는가? 사실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냉전의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 교회는 동서 대결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였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보편교회 차원에서 공산주의는 교회와 양립할 수 없는 악의 세력이었고, 이 땅에서 교회를 직접적으로 박해하는 북한정권은 강력한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분열과 적대의 죄를 마주하고 있던 교회가 화해를 중재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평화와 화해를 위해서는 이 ‘지상의 교회’가 지난날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평화를 온전히 전하지 못하고 미움과 보복의 악순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반성과, 교회가 공산주의를 두려워하고 미워했던 것 이상의 선택을 하지 못했던 점을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 천주교회의 반공주의

 

일제강점기부터 조선 천주교회는 분명한 반공주의 노선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해방과 함께 남한에 미군이 진주하면서, 한국 천주교회의 반공주의는 한층 더 강화된다. 서울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미 군정과의 우호적인 관계는 한국 천주교회에 여러 가지 ‘이익’을 주었고, 이것 또한 교회가 강한 반공노선을 유지하는 데 영향을 준다. 해방 정국에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주저하지 않고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이를테면, 노기남 대주교는 신자들에게는 ‘순교정신을 가지고 반공 투쟁에 나서라.’고 독려하고, 한국민주당에 가입하여 민주국가 건설에 앞장서 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오랜 박해시대를 거치고, 또 일제강점기를 막 벗어난 한국 천주교회의 가장 큰 관심은 어떻게 하면 교회가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받는지에 있었다. 그래서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일과, 세상에 평화를 선포하려는 교회의 존재 이유를 고민하기보다는 ‘교회의 평화’를 위한 일에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적대가 가중되는 냉전의 시대에서 가톨릭교회를 박해하는 세력과 싸우는 것이 더 절박하고 당연한 임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당시는 세계 각지에서 공산주의와 가톨릭교회의 대립이 격화되는 상황이었고, 연길지역과 북한지역에서 전해오는 실제적인 박해의 소식은 한국 천주교회가 공산주의를 더욱 경계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 반면, 남한에 진주한 미 군정이 종교(그리스도교)에게 ‘너그러운’ 통치를 베푸는 것을 경험하면서, 한국 천주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서라도 공산주의는 단호히 배격하고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해야 한다고 믿게 된다.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도 민족이 분단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것이 더 긴급한 과제로 다가왔던 것이다.

 

1948년 1월, 유엔의 한국임시위원단이 입국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가시화되는 시점에서, 이제 가톨릭교회는 한반도에 반공주의 정부를 수립하는 데 집중하게 된다. 총선거를 앞두고 「경향잡지」는 1948년 5월 호에 ‘이태리 총선거와 조선에 총선거’란 제목의 기사로 이태리에서는 다행히 공산주의에 대항에서 그리스도교적 민주주의가 승리했다고 전했다.

 

또한 조선의 총선거에서도 교우가 출마한 지역에선 그에게 투표하고, 교우의 출마가 없는 지방에는 만일 공산주의적 사상을 가진 자들이 출마하였으면, 출마한 미신자 가운데 가장 가톨릭에 가까운 이에게 투표할 것을 독려하였다. 이처럼 교회의 지도자들은 남한만의 총선거를 교회의 세력을 확장하는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비록 남한지역에서만 이루어진 총선거였지만, 공산주의 세력이 확산되는 것을 막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던 것이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경축식에서 초대 교황사절이 교황의 강복을 전하면서 축하 연설을 하는 등 가톨릭교회는 대한민국의 탄생을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알렸고, 유엔에서 합법정부로 승인받는 데 기여한다.

 

 

용서와 자비,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힘

 

독일 출신의 정치 이론가 한나 아렌트는 그의 저서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 행위의 환원 불가능성이라는 제약을 넘어서는 힘으로서 용서에 대한 개념을 설명한다. 그에게 예수는 인류의 역사 안에서 이 용서의 역할을 발견한 사람으로, 이 나자렛 사람은 신만이 용서하는 힘을 가진다는 기존의 주장에 대항했다.

 

예수는 인간에게도 용서의 힘이 있으며, 보복이라는 (무한한) 자동반복 과정으로부터의 자유로서의 용서, 이 용서란 힘을 서로에게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참회와 용서, 적을 용서하는 것, 또 용서를 청하는 것에서부터 그리스도의 평화는 출발한다. 그리고 아렌트의 얘기처럼 용서는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 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근현대사 안에서 동서냉전의 진행과 전쟁의 체험은 교회가 용서하는 평화의 사도라는 역할을 수행하는 데 분명한 제약을 가져왔다. 무신론적 사상과의 대결, 그리고 실제적인 폭력의 경험은 교회를 위협하기에 충분했고 가톨릭과 공산주의와의 갈등은 불가피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 교회는 스스로의 안위에 집착하느라 세상의 평화를 더 진지하게 고민하지 못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열전과 냉전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교회가 용서하는 하느님의 그 자비로우신 얼굴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던 것이다.

 

최근 불거진 한반도 사드 배치 문제는 남한과 북한의 갈등만이 아니라 강대국 미국과 중국의 충돌이 이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더 나아가 북한과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남한과 미국과 일본의 대립을 보면서 평화를 위한 노력과, 용서와 화해를 위한 노력이 더욱 절실한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 적대의 냉전이 재현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자리에서 지금 우리 교회는 어쩌면 새로운 은총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비의 특별희년을 마무리하는 이때에, 한반도의 교회는 하느님께서 가지신 용서의 힘과 그 자비의 얼굴을 닮을 수 있는 은총을 더욱 간절히 청해야 한다. 이 세상의 평화가 너무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 교회가 부족했던 지난날을 반성하고 용서를 청할 수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적’을 용서할 수 있다면, 그래서 우리가 자비로워진다면,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북한(‘적’)이라는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 강주석 베드로 - 의정부교구 신부. 가톨릭 동북아평화연구소 소장과 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2002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미국 미네소타 세인트토마스대학교에서 정의와 평화학을 수료하였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경향잡지, 2016년 12월호, 강주석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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