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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성모병원의 기초를 다진 의사 박병래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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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3-19 ㅣ No.46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성모병원의 기초를 다진 의사 박병래 요셉(1903-1974)


(1) 교회 의료 활동의 중요성

 

 

영국의 의사이며 가톨릭 작가인 A.J. 크로닝(1896~1981)의 「천국의 열쇠」는 1941년에 발표된 이후 지금까지도 세계 수많은 독자를 감동시키고 있는 소설이다. 가난하고 겸손한 삶을 지향하는 ‘치셤’(프란치스코) 신부가 중국 오지에 파견되어 선교 활동을 하는 내용이 감동적으로 그려진 소설이다.

 

- 1900년대 초, 바오로 수녀회의 매화동 시약소. 간단한 치료와 약을 나누어 주는 정도의 초라한 의료 활동이었다.

 

 

선교지에 도착해 보니 성당은 허물어져 폐허가 되어 있고, 주일이 되어도 성당을 찾아오는 신자들이 없자 치셤 신부는 고민에 빠진다. 생각 끝에 그는 임시로 세 들어 지내는 집 뒷방에 조그만 진료소 하나를 차린다. 영국에 있을 때 종합병원에서 응급처치 단기 과정을 이수한 경력과 의사 친구 ‘윌리 탈록’에게서 배운 간단한 소독 기술만 가지고 무작정 진료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사람들이 하나둘 치료를 받기 위해 진료소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치셤 신부는 너무 기뻤다. 그리고 그는 선교를 위한 교리교육에 앞서 먼저 아프고 굶주리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깨닫게 된다. 이후 치셤 신부는 더욱더 환자 진료에 성의를 다했고 이를 통해 마을 사람들과도 가까워지게 된다. 물론 그때부터 성당을 찾아오는 사람도 하나둘 늘기 시작했다.

 

30년 동안 중국에서의 사목 활동을 마치고 본국으로 귀환하려는 치셤 신부에게 평소 그에게 별로 우호적이지 않던 마을 재력가 ‘챠’ 씨가 찾아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신부님, 전에도 말씀드렸죠.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고, 어느 종교에도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고요. 그런데 저는 이제야 당신 종교의 문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에 제 자식이 신부님 덕분에 죽기 직전의 병을 고쳤을 때만 해도 저는 그저 고맙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사실 그때는 신부님의 그 진실된 생활이, 그리고 그 어려운 일들을 이겨내는 인내와 용기가 제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종교의 좋고 그름은 거기 몸담고 있는 사람의 생활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신부님… 당신은 결국 당신의 모범으로 저를 정복하셨습니다.”

 

순전히 가정(假定)이지만, 소설 「천국의 열쇠」를 읽으면서, 만일 초창기 우리나라에 진출한 선교회 사제들이 의술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이들이 진료 활동도 할 수 있었다면, 그래서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는 일에 많이 기여를 했더라면 과연 천주교가 조선 조정으로부터 그렇게 심한 박해를 받았을까 하는 다소 엉뚱한 생각마저 했던 때가 있다.

 

- 박병래(요셉, 1903~1974)

 

 

열악했던 초기 한국천주교회 의료 활동 

 

천주교가 처음 우리나라에 소개된 18세기 조선 후기에는 해마다 각종 전염병이 창궐해서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던 시기였다. 예컨대 콜레라나 장티푸스, 두창 그리고 홍역 같은 전염병들이 매년 대유행을 했지만 나라에서도 별 대책이 있을 수 없던 때였다. 천주교 신자라고 이런 질병들로부터 예외일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면서부터는, 몸을 피해 깊은 산 속에 숨어들어 살아야 했기 때문에 무엇보다 병이 들었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큰 두려움이었지만 그때도 교회는 전혀 이들을 도울 형편이 되지 못했다. 

 

물론, 기록에 의하면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복자 최필제(베드로, 1769~1801)가 당시 한양에서 약국을 경영하며 아픈 신자들을 진맥하고 한약재를 제공했다고 되어 있다. 이후 이어진 박해시대에도 신자들을 위한 약국이 주로 교우촌을 중심으로 설치되어 운영되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나, 실제적인 천주교의 구료(救療) 활동은 1800년대 말 프랑스와 독일의 남녀 수도회들이 진출하면서부터다. 이때도 간호 수녀들이 간단한 약을 나누어 주고 상처를 소독해 주는 정도가 전부였고, 의사가 직접 참여한 진료 사업은 1920년대 이후의 일이다. 주로 의사 수녀들에 의해 진료가 이루어졌던 서울과 평양, 연길 등지의 진료소는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인기는 대단했던 것 같다. 당시 기록에 보면, “병원은 외교인들을 교리와 신앙으로 인도하는 길이었다”라는 언급과 함께 “실제로 진료소가 설치되는 곳마다 천주교 신자 수가 늘어났다”고 기술되어 있다.

 

 

개신교 의료 활동의 자극과 영향

 

이즈음 우리나라 천주교회의 의료 사업은 무엇보다 개신교로부터 받은 자극이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천주교보다 100년이나 늦게 이 땅에 들어온 개신교가 처음부터 의료와 교육사업을 그들의 선교활동에 적극 사용함으로써 최소한 신자 확보를 위한 전교에 관한 한, 천주교보다 훨씬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개신교는 1800년대 말 조선에 진출한 이후 제일 먼저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에 나선다. 190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는 연희전문학교나 이화학당 같은 고등 교육기관을 설립해 현대식 교육을 시작했고, 1904년에는 서울역 부근에 40병상의 현대식 종합병원인 ‘세브란스 기념 병원’을 설립한다. 

 

이런 일로 1920년대에는 한때 천주교의 포교가 개신교의 위세에 눌려 위기에 처한 적도 있다. 이때부터, 복음 전파를 위해서는 천주교회도 교육과 의료사업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런 영향에 자극받은 천주교에서도 1930년을 전후로 덕원, 신의주, 연길, 인천, 서울 등지에 교회 의료시설들이 만들어지기는 했으나 역시 그 규모나 활동에 있어서는 개신교의 의료기관들에 비교되지 못했다.

 

- 1904년에 서울역 건너편에 세워진 개신교 ‘세브란스 기념병원’. 40병상 규모의 서양식 의료기관으로 많은 조선인에게 의료혜택을 베풀었다.

 

 

‘성모병원’ 설립 계획과 의사 박병래의 등장 

 

이처럼 천주교회가 좀 더 전문적이고 규모 있는 의료 활동을 전개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했던 시기에 서울교구가 지금의 중구 저동 1가 39번지(현재 가톨릭회관 후문 쪽에서 명동으로 오르는 길)에 있던 일본인 소유의 조그만 병원(24병상)을 매입해 설립한 것이 바로 ‘성모병원’이다.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경성교구 청년연합회를 중심으로 몇 가지 기념사업을 계획하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병원 설립이었다. 그리고 이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인물이 바로 의사 박병래(朴秉來, 요셉, 1903~1974)다. 

 

1924년 경성의학전문학교(지금의 서울의과대학)를 졸업한 박병래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 경의전 부속병원 결핵내과 강사로 이름을 날리던 의사였다. 신기하게도 그는 당시 동성상업학교 교장이었던 아버지 박준호(朴準鎬)와 해방 후 국무총리를 지낸 장면(張勉), 그리고 경향신문 사장을 지낸 한창우(韓昌愚) 등 걸출한 인물들과 함께 교구 청년연합회 회원으로 활동했는데, 당연히 의사인 그가 병원 설립 계획에 앞장서게 되었고, 결국 1936년 5월 11일에 개원한 성모병원의 초대 원장에 취임하게 된다.

 

사실, 경의전 교수직을 버리고 겨우 24병상 규모의 조그만 성모병원 원장직을 맡는다는 것이 박병래에게는 하나의 모험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저 없이 그 길을 택했다. 그것이 가톨릭 의사인 자신의 오랜 꿈이었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召命)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성모병원 초대 원장이 된 박병래는 혼신을 다해 병원 발전을 위해 노력했으며, 결국 이 병원이 기초가 되어 오늘날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사립 의료네트워크인 가톨릭중앙의료원(CMC)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연재를 시작하며

 

박병래 선생님이 성모병원을 떠난 것이 1957년이고 제가 가톨릭의과대학에 입학한 것은 1962년입니다. 따라서 제가 선생님을 직접 뵌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대학 재학 중 학보사 기자를 하면서 초창기 성모병원 역사를 통해 그분이 어떤 분이었는지 조금은 알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가톨릭의사의 전형이며 무엇보다 의사이기 전에 참 그리스도인이셨던 선생님의 삶을 재조명해 보면서 ‘빛’과 ‘소금’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새기게 된 것을 큰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평화신문, 2016년 3월 20일, 맹광호 이시도르(가톨릭의대 명예교수)]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성모병원의 기초를 다진 의사 박병래 요셉(1903-1974)


(2) 박병래의 출생과 그 신앙의 뿌리

 

 

박병래는 1903년 5월 27일, 지금의 충남 논산읍 욱동(旭洞)이라는 마을에서 천주교 신자인 아버지 박준호(朴準鎬) 요한과 마리아라는 본명을 가진 어머니 민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말하자면 박병래는 태중 천주교 신자다. 그 스스로 하느님을 찾아 천주교 신자가 된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부모로부터 신앙을 이어받아 신자가 된 것이다. 그렇게 박병래는 특별히 하느님의 선택을 받아 그의 자녀가 되었고, 어쩌면 이후 그의 삶도 그런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살도록 정해져 있었는지 모른다.

 

원래 박병래의 아버지 박준호는 전북 완주 고산(高山) 지역 되재(升峙)라는 곳에 살았다. ‘되재’라는 명칭은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승치리에 자리 잡은 고개 이름으로,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천주교회가 처음 그 역사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지역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된 1784년 이후 첫 번째 천주교 박해가 시작된 1791년 신해박해를 겪으면서 형성된 교우촌이기 때문이다.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면서 주로 충청도와 경기도 지역에 살던 신자들이 상대적으로 박해가 심하지 않았던 전라북도와 충청남도 경계 지점인 이곳 산악지대로 피신해 살면서 교우촌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성당에 걸려 있는 ‘출발’ 그림.

 

 

조선대목구 설정과 파리외방전교회

 

이런 상황에서 초기 한국 교회 신자들은 사제를 모시기 위해 끊임없이 로마에 청원했고, 1831년,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그때까지 북경교구에 속해 있던 조선 천주교회를 독립시켜 초대 대목구장에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브뤼기에르 주교(Bruguiere, Barthelemy, 1792~1835)를 임명한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초대 조선대목구장에 임명된 것을 크게 기뻐하며 당시 중국 쓰촨대목구의 선교사로 있던 앵베르 신부에 이어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를 함께 일할 조선교구 사제로 받아들인다. 1832년 6월 26일자에 쓴 한 편지에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왕국에 도착하면, 그곳에서 우리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온 삶을 바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스스로를 위하여 성사를 거행하고, 성교회의 경계를 넓혀 나갈 조선인들을 사제로 서품할 것입니다”라고 조선 포교에 대한 비장한 각오를 보여주고 있다.

 

조선 입국을 위해 말레이시아 페낭에서 출발해 조선으로 오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그러나 1835년 10월 20일 중국 열하성(熱河省)의 한 교우촌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다음 달 그곳에서 선종하는 비운을 맞는다. 조선을 향해 출발한 지 4년여 세월이 흘렀지만, 그는 결국 조선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중국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서울대목구에서는 대목구 설정 100주년이 되는 1931년 10월에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를 서울로 옮겨와 지금 용산성당 성직자묘지에 안장했다. 참으로 눈물겨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파리 시내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가면, 1663년 이후 이 선교회가 약 300년 동안 해외에서 활동해 온 선교 역사, 특히 동양에서 163명(한국에서만 25명)의 순교자를 낸 역사를 보여주는 많은 기록물과 그림, 그리고 물건들을 볼 수 있다. 그중에 눈길을 끄는 그림이 하나 있다. 샤를르 쿠베르탱이라는 화가가 아시아로 떠나는 네 명의 사제 파견식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그렸다는 ‘출발’(The Departure)이라는 그림이다. 파견식에 참석한 신자들이 차례로 나와 검은색 긴 수단을 입은 사제들과 작별하는 모습을 그린 감동적인 그림이다.

 

당시에 아시아 지역, 특히 조선에 선교사로 파견된다는 것은 거의 목숨을 내놓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복음 선포만을 위해 박해와 핍박의 땅으로 가는 젊은 사제들의 모습에 숙연함을 금치 못한다. 명동성당 옆 문화관 2층 ‘코스트’ 홀 입구에도 커다란 액자에 담긴 같은 그림 한 장이 걸려 있다.

 

- 올해로 설립 358년을 맞은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건물.

 

 

비에모 신부와의 운명적인 만남

 

1831년 조선대목구가 설정된 이후에도 사실상 50여 년간 천주교 박해는 이어졌고, 이로 인해 신자들은 되재 같은 산속 마을로 피신해 살아야 했다. 이런 신자들을 위해 사제가 절실했을 이 지역에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비에모(Villemot, 1869~1950) 신부가 부임해 온 것은 1893년의 일이다. 1892년 초, 23세에 사제품을 받고 그해 6월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온 비에모 신부는 다음 해인 1893년에 전라도 지방으로 내려와 선교 활동을 시작하게 되는데, 놀랍게도 그 나이에 그는 이곳에 한옥 성당을 짓기로 결심한다. 

 

프랑스은행으로부터 직접 대부를 받아 건축 공사를 시작한 지 1년 만인 1895년에 완공한 되재성당(지금의 고산성당)은 이보다 3년 앞서 1892년에 세워진 서울 약현성당(현재의 중림동약현성당)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성당이다. 재미있는 일은 이때 지은 성당 내부 제대 앞에서 성당 출입구까지 사람 키 높이의 칸막이를 해서 남녀 자리를 구분했다는 점이다. 공개적으로 남녀가 함께 있지 못하게 한 우리나라 유교 풍습을 그대로 반영한 일이다. 

 

비에모 신부가 박병래의 조부 박현진(朴賢鎭)을 만난 것도 이때이고, 이후로 그는 박준호와 박병래 부자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당시 고산 지역에서 비교적 넉넉한 생활을 했던 박현진은 7형제가 모두 순교자였을 만큼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고 한다. 그런 그의 자손인 박준호와 박병래가 이어 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된 연유는 참으로 기적과 같은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추측건대, 고산 지역의 뿌리 깊은 천주교 신앙은, 우리나라 천주교회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인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742~1791)으로부터 교리를 배운 충청남도 예산 출신 하느님의 종 이존창(루도비코, 1752~1801)이 신해박해 중에 이곳에 피신해 전교하게 된 일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 비에모 신부가 세운 되재성당. 이 성당은 6·25 한국전쟁 때 소실됐으며, 현재는 옛 모습을 복원한 건물이 들어서 있다.

 

 

고산에서 놀뫼로, 그리고 다시 서울로

 

박병래의 아버지 박준호는 1900년을 전후해서 충청도 놀뫼(지금의 논산시 부창동)로 이사를 한다. 그리고 1903년에 아들 박병래를 거기서 낳게 된다. 당시 놀뫼에는 공소나 성당이 없었는데 이곳에 처음 공소가 생기게 된 데는 일화가 있다. 놀뫼로 이사를 와서 살던 박준호는 그곳에 함께 살던 누이동생의 혼인성사를 주례해 주도록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나바위(현재 화산)본당 베르모렐(Vermorel, Joseph) 신부를 초청한다. 그러나 베르모렐 신부는 자신이 그곳에 가서 별도의 혼인성사를 집전하면 다른 가난한 신자들이 위화감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걱정하면서 먼저 놀뫼에 공소를 설립할 것을 제안한다. 이 말을 듣고 박준호는 놀뫼에 공소를 설립한다. 이때가 1907년이다. 이 공소는 박준호 가족이 서울로 떠난 뒤 1921년에 전라북도 화산본당에서 분리되어 지금의 논산 부창동본당이 된다. 

 

박준호 가족은 아들 박병래가 열두 살 되던 해 서울로 이사한다. 이 결정은 특히 평소 박준호의 집안과 가깝게 지냈던 비에모 신부의 강력한 권고와 도움에 따른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비에모 신부는 되재성당을 떠나 1898년부터 서울로 임지를 옮겨 조선대목구 살림을 담당하고 있던 때였다. 그는 1895년 국내 두 번째 성당을 전라도 산골 마을 되재에 설립한 능력을 인정받아 조선대목구청으로 불려 오게 된 것이 분명하다. 

 

놀랍고 신기한 일은, 그가 되재에서 사목하는 동안 박준호의 비범함과 성실함에 탄복하고, 아들 박병래가 태어나 몇 년 뒤 소학교를 마치자 이들 부자(父子)를 서울로 이사시켜 신학문을 배우도록 하게 한 일이다. 결국, 비에모 신부의 생각대로 이들 부자는 서울로 올라와 각각 교육과 의료 분야에서 한국 천주교 발전에 큰 공을 세우게 된다. 새삼 비에모 신부의 지혜로운 판단과 실천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평화신문, 2016년 3월 27일, 맹광호 이시도르(가톨릭의대 명예교수)]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성모병원의 기초를 다진 의사 박병래 요셉(1903-1974)


(3) 아버지 박준호로부터 배운 박병래의 교회 사랑

 

 

박병래만큼 잘 알려지지는 않지만, 박병래의 아버지 박준호(요한, 1884~1936) 역시 그의 아들 못지않게 한국 천주교회에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 무엇보다 박병래에게 깊은 신앙심을 심어주고 의사로서 명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사람이 바로 박준호다. 박준호가 없었다면 후세 사람들이 기리는 박병래도 존재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그만큼 박준호는 박병래의 삶에 거의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단적인 일화가 있다. 박병래가 경성의학전문학교 강사 생활을 접고 천주교 경성대목구(지금 서울대교구)에서 설립한 성모병원 초대 원장직에 임명될 때 교구에서 첫 월급을 300원으로 제시해 오자 아버지 박준호가 200원으로 깎게 했다고 한다. 처음부터 월급을 많이 받으면 자칫 자신이 하는 일을 돈과 연관 지어 생각하게 되고 정작 자기가 하는 일의 진정한 가치를 잊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신학문을 접한 박준호, 그리고 그의 교회 활동

 

1884년 전북 고산에서 태어난 박준호는 비교적 넉넉한 집안을 이룬 선친 박현진(朴賢鎭) 덕분에 어린 시절 부족함이 없이 자란 듯하다. 무엇보다 일찍 이곳에 선교의 뿌리를 내린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을 통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이들 신부와의 교류를 통해 넓은 세상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젊어서부터 가난하고 억눌린 삶을 사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던 지성인이었다.

 

박준호는 1906년 비에모 신부가 고산 되재성당에 설립한 ‘신성학교’(晨星學校)에서 신자 가정 아이들에게 한글과 한문을 가르친다. 2년 뒤에 학교 이름을 ‘태극계명학교’(太極啓明學校)로 바꾼 후에도 이곳에서 교육 활동을 계속한다. 낮에는 젊은이들을, 밤에는 농사일로 낮에 시간을 내기 힘든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글, 한문, 산수, 화학, 물리, 지리, 국사 등 신학문을 가르쳤다.

 

이런 박준호의 헌신적 활동은 무엇보다 비에모 신부의 조선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에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박해를 피해 산골 생활을 해야 했던 가난한 천주교 신자들에게 글과 기술을 배우도록 해야겠다는 비에모 신부의 계획에 참여하는 일만으로도 박준호는 한없이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 경성교구 청년연합회 교육사업의 하나로 교구에서 세운 ‘동성상업학교’(현 동성중고등학교) 전경. 왼쪽 멀리 보이는 첨탑 건물은 옛 혜화동성당.

 

 

박준호의 교회 사랑과 교육 활동에 대한 열성은 거꾸로 비에모 신부를 감동시켰을 것이다. 결국 비에모 신부는 되재성당의 교육 사업이 입게 될 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박준호와 그의 아들 박병래를 서울로 이사시켜 신학문 교육을 받도록 돕는다. 이것이 박준호와 박병래를 지방의 한 성당이 아닌 한국 천주교회 전체를 위한 지도자로 만든 계기가 됐다.

 

서울로 이사 온 박준호는 아들과 함께 양정고등보통학교에 각각 1학년과 2학년으로 입학해서 공부를 시작한다. 그러나 다음 해 부자가 한 학년 차이로 같은 학교에 다니는 것이 불편하다고 생각한 박준호는 단기 교육 과정인 경성전수(專修)학교로 전학하여 아들보다 먼저 중등 교육을 마친다. 당시 경성전수학교는 법조인을 양성하는 경성법학전문학교의 전신으로 이 학교를 졸업한 박준호는 잠시 재판소 서기와 경성부 부의원(지금의 시의원) 등 관직에 종사한다.

 

그 뒤 1922년 경성대목구가 인수하여 운영하게 된 서울 남대문상업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본격적으로 교회 교육사업에 투신한다. 남대문상업학교는 1931년에 동성상업학교(東星商業學敎)로 이름을 바꾸게 되는데, 박준호는 1936년 9월 16일 52세 나이에 위암으로 선종하기까지 5년간 이 동성상업학교 교장으로 활동한다. 박준호가 사망하고 이어서 이 학교의 교장이 된 사람이 바로 후에 우리나라 국무총리와 부통령을 지낸 장면(張勉) 박사다. 동성상업학교는 1940년 10월 박준호의 헌신적 교육 활동을 기리기 위해 교내에 ‘박 교장 기념 강당’을 건립하기도 했다.

 

주로 교육자로서 활동하던 박준호는 다른 여러 교회 활동에도 적극 참여한다. 특히 1922년 6월 3일 명동성당에 경성대목구 천주교 청년연합회가 결성되자 이 모임의 총무로 선출되었고, 1924년부터 1936년까지 3년 임기의 회장을 3회에 걸쳐 연임할 정도로 지도력을 발휘한다.

 

- 박병래의 아버지, 박준호(朴準鎬, 1884~1936).

 

 

여담이지만, 박준호의 아들 박병래와 동갑으로 40여 년간 두 부자와 가까이 지내면서 특히 박병래를 교회 내에서 많이 도와준 윤형중(尹亨重, 1903~1979, 초대 성신대학의학부장) 신부의 회고 글에 보면 박준호는 우리나라 최초의 평신도 지성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3·1 운동에 우리 천주교 신자가 참여하지 못한 것은 일부러 빠진 것이 아니라 이 시기에는 박준호 같은 신식 교육을 받은 신자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쓰고 있다.

 

 

아버지에게서 배운 박병래의 교회 사랑

 

한편 1919년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박병래는 경성의학전문대학에 진학해서 1924년 졸업과 동시에 대학 부속병원 ‘이토(伊藤)내과’에서 12년간 결핵 전문 내과의사로 활동한다. 이후 1936년 경성대목구가 설립한 성모병원 초대원장으로, 그리고 1957년 이후에는 성 루가병원 개업의사로 수많은 환자를 보살피는 한편, 아버지 박준호와 함께 교회 활동에도 적극 참여한다. 특히 1924년 경의전를 졸업하고 부속 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는 동안에는 아버지가 회장이던 교구 청년연합회 일반회원으로 있다가 1936년 아버지가 선종하고 1939년 장면이 회장이 되자 체육부장직을 맡기도 했다.

 

글솜씨가 좋았던 박병래는 당시 장면, 정지용(鄭芝鎔) 등과 함께 출판한 교회 청년회지 「별」, 그리고 1933년 이후 서울교구가 발간한 「경향잡지」 「가톨릭청년」 등에 고정 필자로 건강에 관한 많은 글을 실었다. 특히 「조선일보」 사주였던 방응모(方應謨)와 친분이 깊던 그는 이미 경의전 강사 시절부터 이 신문사 ‘보건 고문’으로 위촉되어 여러 글을 썼으며, 그의 이런 글쓰기 활동은 성모병원장으로 재직하면서도 계속되었다.

 

박준호와 박병래가 서울에서 그토록 열심히, 그리고 활발하게 교회 사업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두 사람에게 신학문 교육을 받도록 기회를 마련해 준 비에모 신부의 공로라고 할 수 있다. 이들보다 먼저 1898년 서울로 올라온 비에모 신부는 명동성당 경리 담당과 중림동성당 주임을 맡는 등 초기 한국 천주교회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박준호와 그의 아들 박병래가 서울로 이사를 온 뒤에는 가까이에서 이들을 지켜보며 함께 교회 발전에 기여하게 된다.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한 사람의 삶의 가치나 성공 여부는 그가 세상을 사는 동안 누구를 만나 어떤 인간관계를 맺고 살았는지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로부터 사랑과 도움을 받은 사람은 다시 다른 사람들과 사회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선(善)순환을 이루게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만드는 기적인 것이다.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박준호와 박병래라는 두 거목의 탄생에 비에모 신부의 존재가 더욱 빛나는 이유다.

 

비에모 신부는 6·25 전쟁이 나던 해 7월, 교황사절 번(Byrne) 주교, 춘천교구 퀸란(Quinlan) 주교 등과 함께 북한군에 체포되어 평양으로 끌려갔으며, 그해 겨울 그 악명 높은 ‘죽음의 행군’ 끝에 11월 11일 중강진에서 옥사한다. 박준호 박병래 부자에게는 물론 우리 한국 천주교회 역사에서 비에모 신부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은인이다. [평화신문, 2016년 4월 3일, 맹광호 이시도르(가톨릭의대 명예교수)]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성모병원의 기초를 다진 의사 박병래 요셉(1903-1974)

 

(4)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 ‘성모병원’의 탄생

 

 

- 1936년 5월 11일 개원 당시 성모병원 전경.

 

 

1922년에 결성된 경성교구 청년연합회는 사실상 우리나라 천주교회 발전에 관한 중요한 논의의 장(場)이었다. 실제로 이 연합회에 참여했던 인사들 면면을 보면 당시 경성 시내 주요 중등학교 교장과 교사들이 많았고, 이들 모두 비교적 젊고 활기찬 인물들이어서 교회 사업을 위한 의지 또한 컸다. 

 

무엇보다 이들은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연합회의 모든 논의와 실제 활동은 교회 정신을 실천하는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따라서 당시 교회 성직자나 수도자들로부터도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 연합회에서 논의했던 주요 사업을 보면, 교육 지원 사업, 출판 사업, 순교자 현양 사업, 의료 사업, 그리고 기타 자선 사업 등이었다.

 

 

경성교구의 성모병원 설립 계획

 

특히 주목할 일은,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기념 병원을 설립하자는 의견이 바로 이 모임에서 처음 거론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계획이 가능했던 것은 역시 그때 경성의학전문학교(현재 서울의과대학) 부속 병원 내과 강사로 실력을 인정받은 박병래가 이 청년연합회의 열성적인 회원이었던 것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 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추진키로 한 병원 설립 계획은 박병래를 중심으로 이후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우선 1931년 6월 14일 병원 설립을 위한 기성회를 조직하고 ‘병원 기성회 취지서’를 발표하여 전국 천주교 신자들에게 병원 설립의 목적과 필요성을 알리고 도움을 호소했다. 

 

이 취지서에서 교구 청년연합회는, 우선 교회 의료 사업이 교회의 영혼 구제 사업과 더불어 육신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하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 중 하나임을 밝히고 있다. 특히 이 일을 통해 비신자들을 가톨릭으로 인도하는 전교에 나서는 한편, 병들거나 임종을 앞둔 신자들을 위한 전문 교회 의료기관을 세움으로써 신자들의 자부심을 키워 주자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었다.

 

- 제9대 경성교구장 겸 성모병원 초대 이사장 라리보 주교.

 

 

물론 당시 경성교구 형편에서는 병원을 설립하는 일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1930년 10월에 발간된 교구 소식지 「별」 40호에 실린 다음과 같은 글이 그때의 어려움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우리의 형편을 생각하면 날이 갈수록 경제가 응축(凝縮)되는 이때에 큰돈이 드는 무슨 사업을 계획함이 힘에 너무 넘치고 어려움이 있음은 물론 일반이 동감할 바이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것을 침체와 낙망에만 희생하고 만다면 도리어 낙오(落伍)에 낙오를 재촉함이니, 우리는 여기에서 유일한 방법을 연구하여 부분의 힘으로 성취하지 못할 것을 단합으로 힘을 모아 노력한다면 성공할 희망이 있고도 남을 것이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 병원 건립에 모두 힘을 모으자는 결의가 엿보이는 애절한 글이다.

 

놀랍게도, 이런 교회 청년연합회의 결의와 호소에 신자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일제 식민지 아래의 어려운 경제 사정에도 불구하고 경성에서는 물론 전국 각지에서 설립 기금이 답지하였고, 그렇게 모인 1차 성금으로 경성교구는 1935년 3월 11일 자로 당시 교구청 가까운 곳에 있는 일본인 소유의 ‘무라가미’(村上)병원을 인수하게 된다. 그 뒤에도 모금을 계속하여 개원에 필요한 병원 내부 수도, 전기 공사를 포함하여 건물 보수와 의료기기 및 약품 등을 구입하는데 당시 돈으로 총 10만 원에 가까운 기금을 확보하게 된다. 그때 건물 내 총수도공사비로 1665원이 들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결코 적은 액수의 돈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증·개축된 성모병원 규모는 약 540평 대지에 350평 정도의 2층 목조 건물이었다.

 

- 진료 중인 박병래 원장.

 

 

초대 성모병원장에 임명된 박병래

 

제9대 경성교구장이던 라리보(Larribeau) 주교는 주교관 구역 안에 병원 건물을 신축하고 싶어 했다. 물론 경비가 많이 드는 일이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때마침 무라가미병원 매각 소식을 듣고 이를 매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병원 개원을 준비하면서 라리보 주교는 새 병원의 명칭을, 동방의 박사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하늘의 별을 보고 산과 바다를 건너 찾아갔다는 의미를 살려 ‘해성(海星)병원’으로 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병원장에 내정되어 개원 준비를 책임지고 있던 박병래는 성모님의 부드럽고 자상한 이미지를 살려 ‘성모병원’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역 제안해서 주교님도 그에 따르기로 했다고 한다. 

 

지금 우리나라 교회 병원이나 개인 신자 의사들이 그들 병원 명칭에 ‘성모’라는 말을 즐겨 사용함으로써 전국 어디에서고 성모님을 생각하게 하는 ‘성모’라는 이름의 병원이나 의원들이 퍼져 있는 것을 보면 새삼 박병래의 혜안(慧眼)이 돋보인다. 

 

무라가미병원 매입이 이루어진 이후, 1년여의 개축과 보수 공사를 거쳐 마침내 이듬해인 1936년 5월 11일에 거행된 성대한 개원식에서 박병래는 성모병원 초대 원장에 취임하게 된다. 모든 일이 그렇듯, 이렇게 중요한 교회 사업이 가능하자면 무엇보다 이 일을 책임지고 완성하고 이끌어가야 할 전문가가 필요하게 마련인데, 당시 경성교구 청년연합회에는 바로 박병래라는 유능한 의사가 있었던 것이다.

 

박병래는 1924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에 모교 내과에서 부수(副手), 조수(助手)를 거쳐 1935년에는 결핵내과 강사(講師)로 명성을 날리던 의사다. 지금도 비교적 경제 상태가 좋다는 30여 개 OECD 국가 중에 우리나라 결핵 환자 유병률이 가장 높아서 부끄러운 일인데, 당시에는 우리나라에 결핵 환자가 너무 많아 ‘결핵 왕국’으로 불릴 정도였다. 실제로 그때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망 원인 중에 가장 많은 병이 결핵이었고 따라서 유능한 결핵 전문의가 꼭 필요했던 시기였는데 박병래는 이미 그때 이 분야 최고의 의사였다. 

 

당시 국내 최고 수준의 의학 교육과 진료를 담당하고 있던 경의전 입장에서 박병래를 떠나보낸다는 것은 크나큰 손실이었지만 의사이기 전에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교회를 위해 자신을 바치기로 마음먹은 박병래로서는 대학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성모병원으로 자리를 옮기는 일이 조금도 주저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성모병원 초대 원장에 취임한 박병래는 곧 의사 4명과 약사, 간호사 등 10여 명으로 의료진을 구성하여 진료를 시작했다. 동시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협조를 얻어 같은 병원 구내에 ‘무료 진료소’를 별도로 설치하여 가난한 환자들에 대한 무료 진료도 함께 실시했다. 병원 운영을 위한 유료 환자 진료와 함께 무료 진료를 병행함으로써 처음부터 교회가 지향하는 ‘자선’의 의미를 살리는 데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박병래가 아버지 박준호와 함께 일찍부터 교회 교육과 의료 사업 등을 논의하던 경성교구 청년연합회의 중요한 인물로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당시 교구 청년연합회의 주요 사업 계획 중 하나였던 병원 건립에 의사인 박병래가 앞장서게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박병래가 초대 성모병원 원장에 임명되었다는 것은 오랫동안 마땅한 교회 병원이 없었던 우리 교회 입장에서 볼 때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었다. 

 

한 가지 믿기 어려운 사실은, 박병래가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던 1924년은 아버지 박준호가 조선총독부 재판소 서기와 원주, 전주의 법원 서기직을 거친 뒤 경성교구에서 운영하는 남대문상업학교와 계성보통학교 교장을 겸직하는 등 교회 교육 사업의 중심에 있었던 해였고, 박병래가 성모병원 초대원장에 취임하던 1936년은 박준호가 세상을 떠난 해라는 점이다. 1924년에 아들이 의사가 되는 것을 자랑스럽게 지켜본 박준호는 1936년 5월 11일 아들이 성모병원 초대 원장에 취임하는 것을 보고 그해 9월 16일에 눈을 감은 것이다. [평화신문, 2016년 4월 10일, 맹광호 이시도르(가톨릭의대 명예교수)]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성모병원의 기초를 다진 의사 박병래 요셉(1903-1974)

 

(5) 초기 성모병원 모습과 발전의 원동력

 

 

초창기 성모병원 외과 수술 장면.

 

 

1936년 5월 11일에 성대한 개원식과 함께 문을 연 성모병원은 실상 24개 병상 규모의 조그만 2층 목조건물에 불과했다. 그러나 성모병원은 개원하자마자 교회 안팎으로부터 대단한 환영을 받았고 하루가 다르게 병원의 모습이 변해 갔다. 무엇보다 명동성당이 올려다보이는 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곳을 외래로 방문하거나 입원해 있는 환자들에게 더 없는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몸이 아파서 성모병원을 찾는 사람 중에는 그가 천주교 신자건 아니건 진료 후에 명동성당까지 들러 기도로 마음의 평화를 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성모병원은 저렴한 진료비와 의료진들의 친절한 보살핌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경성 시내에서 가장 우수한 병원 중 하나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실제로 개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외래 환자가 100명을 넘었고, 입원실도 항상 여유가 없을 정도였다. 박병래 원장을 비롯한 직원 모두가 환자들을 진정한 사랑으로 돌보았기 때문이다. 입원 환자들의 급식을 위한 김치도 수녀들이 직접 배추를 사서 담그는 등 환자들을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 

 

성모병원과 함께 병원 구내에 별도로 개원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무료 진료소를 찾는 환자도 크게 늘어갔다. 지금은 우리나라도 1977년부터 시행된 정부의 의료보호제도 정책에 의해 경제능력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도 의료비 부담 없이 기본적인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성모병원 개원 당시에는 그런 공적인 의료보호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개원 초기부터 가난하고 불우한 환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자선 진료를 중요한 일로 생각했던 성모병원의 인기는 대단했다. 성모병원은 이렇게 자체적으로 무료 진료 활동을 계속하는 한편, 1954년에는 서울역 뒤 중림동에 성 요셉 자선병원을 개설했고 1964년에는 새로 신축한 성모병원 부속으로 별도의 무료 진료소 건물을 확보하는 등 교회의 자선 의료 정신을 꾸준히 이어갔다. 성모병원의 이런 자선 의료 활동은 처음 교구 차원의 의료 사업을 계획했던 박병래의 강한 의지가 담긴 일이기도 했다.

 

- 성모병원 입원 환자에 대한 병자 영성체 장면(1937년).

 

 

박병래의 모범 - 열과 성을 다한 진료 활동

 

개원 당시 성모병원의 의료진은 원장 박병래를 포함한 의사 4명과 일본인 약사 1명, 간호사 10명(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 9명 포함) 등 총 15명이었고 주 진료 과목은 내과와 소아과였다. 진료를 위한 공간은 좁았지만, 박병래는 특히 2층에 조그만 경당 즉 기도실을 설치하여 의료진이나 환자들이 수시로 들러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게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원목(院牧)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매일 아침, 그는 외래환자 진료를 앞두고, 그리고 병실에 입원한 환자들을 회진하기 전에 자신의 방에서 반드시 십자성호를 긋고 기도를 했는데, 이런 모습을 보는 모든 직원이 그의 깊은 신앙심에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우리 모두가 굉장히 바빴습니다. 그러나 직원들 사이에 우의(友誼)도 두터웠고, 한 가족처럼 일했습니다. 그때는 정말 모든 의료진이 정성을 다해 환자를 돌보기도 했지만, 환자들도 우리 의료인들을 진심으로 신뢰했습니다. 이 모든 일이 박병래 원장님의 자상하고 부드러우신 마음씨와 깊은 신앙심에 모두가 감동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박병래와 함께 일했던 어느 후배 의사가 뒤에 성모병원 초기 활동에 대한 회고담에 남긴 글이다. 

 

박병래는 시간만 나면 입원한 환자들을 한 번이라도 더 찾아보려고 했다. 병원 일 말고도 교회 일이나 사회단체 일이 많았기 때문에 거의 매일 퇴근을 하고도 곧장 집으로 가지 못하고 시내에서 일을 보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아무리 늦은 시간에도 꼭 병원에 다시 들려 입원 환자들을 찾아보곤 했다. 환자들이 좋아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이렇게 원장 박병래의 밤늦은 시간 방문은 환자들의 마음을 한결 편안하게 해주었고 환자들이 깊은 잠을 잘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당시에는 사람들이 대부분 집에서 임종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박병래는 종종 환자를 집으로 찾아가는 왕진(往診)도 해야 했다. 그럴 때마다 박병래는 함께 가는 간호 수녀에게 꼭 대세(代洗) 준비를 하도록 했다. 한 사람이라도 천주교 신자를 만들려는 박병래의 선교 정신이 그대로 반영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박병래와 성모병원 생활을 함께했던 의사나 간호 수녀들, 그리고 일반 직원들이 지켜본 박병래는 오직 인술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한 참 의사였다. 병원 모든 직원도 헌신적으로 일했다. 특히 병원 간호 수녀들의 활동에 많은 환자가 감동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모병원을 ‘수녀 병원’으로 부르기도 했다. 무엇보다 친절하고 병원비도 싸다는 소문이 많아 더욱 환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서는 아예 치료비도 받지 않고 약까지 지어주는 무료 진료소를 별도로 운영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원장 박병래의 명성과 병원 전 직원들의 친절한 진료 때문에 성모병원이 유명해지고 많은 사람이 믿음을 갖고 찾아오게 되면서 어려움을 무릅쓰고 병원을 설립한 교구는 큰 자부심과 보람을 느끼게 되었다.

 

- 1937년 성모병원 개원 초기 의료진과 직원.  점선 안이 라리보 주교(오른쪽)와 박병래 원장.

 

 

교회의 자부심, 성모병원

 

100년이 넘는 교회 역사에도 불구하고 아픈 사람들을 제대로 도와주는 변변한 의료 기관 하나 없이 시약소(施藥所) 수준의 의료 시설을 운영해 오던 한국 천주교회가 비록 내과와 소아과 중심의 제한적인 진료이긴 하지만 입원 환자 진료까지 할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박병래와 함께 병원 설립 계획에 직접 참여하고 기금 모금에도 앞장섰던 교구 청년연합회 회원들의 기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시기에 발간된 한 신문에 의하면 성모병원은 개원 첫해 8개월 동안 입원 164명, 외래 환자 8496명을 진료했으며, 다음 해인 1937년에는 그 수가 각각 232명과 2만 2194명으로 크게 증가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 꽤 빈번했던 왕진까지 포함하면 이보다 더 많은 수의 환자가 성모병원의 혜택을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성모병원을 찾는 이들 환자 중에는 천주교 신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비신자들이었다. 그만큼 당시만 해도 의료 활동은 교회가 외인들을 접촉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였고, 이를 통해 적극적인 선교 활동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교회 의료 활동이 교회 정신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교회 관계자 모두가 실감하게 되었고 그래서 더욱 성모병원은 교회 안에서 큰 사랑을 받게 되었다. 

 

실제로 1938년 2월호 「경향잡지」를 보면 1936년과 1937년 2년 동안 성모병원을 통해 대세(代洗)를 받은 사람이 1000명이 넘었던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특히 이들 중 많은 수가 집에서 사망한 영유아(乳兒)들로서 당시는 전염성 질환과 영유아 사망이 많았기 때문에 그만큼 ‘왕진 대세자’가 많았다. 왕진을 갈 때마다 위독한 어린아이들의 생명이 하느님의 품에 안길 수 있도록 간호 수녀에게 꼭 대세 준비물을 챙기게 한 박병래의 속 깊은 마음이 그대로 느껴지는 진료기록이다.

 

박병래가 이끄는 성모병원은 그렇게 한국 천주교회의 자부심으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평화신문, 2016년 4월 17일, 맹광호 이시도르(가톨릭의대 명예교수)]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성모병원의 기초를 다진 의사 박병래 요셉(1903-1974)

 

(6) 일제 말기를 거쳐 8·15 광복을 맞은 격동기 박병래의 활동

 

 

1947-1949년 사이에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김구와 박병래(앞줄 오른쪽). 김구가 안고 있는 손녀 딸 김효자를 김구 서거 후 박병래가 키워 대학까지 졸업시켰다.

 

 

몰려드는 환자 진료에 여념이 없는 속에서 성모병원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1930년대 말, 사회적으로는 점차 혼란기를 맞고 있었다. 1894년 청일 전쟁과 1904년의 러일 전쟁, 그리고 1931년 만주 사변의 승리를 통해 한껏 사기가 고조된 일본은 드디어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켰고 계속해서 동남아 전 지역을 장악하려는 침략 야욕으로 태평양 전쟁에 돌입한다. 조선 전국이 일본의 전쟁 야욕에 휘말려 온갖 고통을 받게 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천주교회도 점차 어려움에 직면하지만, 환자 진료라는 특수한 활동을 이유로 박병래는 흔들림 없이 성모병원을 운영해 갔다.

 

 

성모병원 분원, ‘성요셉병원’ 개원

 

일본은 전세가 점차 불리해지자 교회에 대해서도 강압적 정책을 쓰기 시작했고, 그런 정책의 하나로 일제 당국은 용산에 있던 예수성심신학교를 무허가 건물이라는 이유로 강제 폐교하려 했다. 속셈은 이곳을 일본군 시설로 활용할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이때 이 건물의 원래 주인이었던 성심수녀회가 서둘러 이 시설을 요양원으로 변경 운영하겠다고 신청을 했고, 이어서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와 상의를 거쳐 이 신학교 건물에 성모병원 분원을 개설하기로 했다. 

 

노기남 주교로부터 성모병원 분원 설립 계획 지시를 받은 박병래는 서둘러 건물을 임시 개조하는 등 많은 노력 끝에 결국 1944년 이곳에 분원인 ‘성요셉병원’을 개원한다. 분원이 문을 열자마자 환자들이 밀어닥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박병래는 더욱 바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틀에 한 번씩 명동에서 분원이 있는 용산으로 가서 진료해야 했다. 

 

드디어 1945년 8월 성모병원도 환희의 해방을 맞이한다. 광복의 기쁨을 맞은 나라 전체가 희망으로 들끓었고 특히 그동안 독립을 위해 국내외에서 투쟁해 온 정치인들은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자신들의 주장을 펴고 암투를 벌이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박병래와 성모병원은 이런 사회 변화와 무관하게 더욱더 바빠졌다. 제대로 된 공공 의료 시설이 없던 당시 극심한 사회적 혼란과 경제 파탄으로 많은 국민이 빈곤과 기아에 허덕이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들을 앞장서 돌보아야 했던 성모병원의 존재는 그래서 더욱더 빛을 발휘했다.

 

 

개원 10주년 기념과 ‘방지거 사베리오 의료회’의 설립

 

1946년 5월 11일, 박병래는 성모병원 개원 1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사회가 매우 혼란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팎의 인사들이 대거 참석해서 성황을 이루었다. 당시 사진을 보면 라리보· 노기남 주교를 비롯한 교회 어른들과 장면 박사를 포함한 평신도 인사들, 그리고 미 군정청 관계자들까지 참석해서 축하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또한 박병래 원장의 평소 폭넓은 활동을 보여 주는 일이다.

 

다음 해인 1947년 4월에는 성모병원 임직원들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의료인 모임인 ‘방지거 사베리오 의료회’(‘서울가톨릭의사회’의 전신)를 창설하여 초대 회장도 맡았다. 당시 서울에는 천주교 신자 의사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의사는 물론, 치과의사, 간호사 등  관련 분야 의료인 20여 명을 모두 아우르는 모임으로 시작했으며 무엇보다 회원들의 신앙과 사회봉사 활동을 모임 결성의 목표로 했다.   

 

어쩌면 박병래는 자신이 한국 천주교 신자 중에서 가장 먼저 서양의학을 접한 의사라는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떻게든 우리나라 천주교 의료 사업을 정착시키는 일에 자신이 앞장서야 한다는 결심을 했을 것이다. 

 

사실, 한국 사람 중에는 구한말에 일찍 미국에 건너가 의사가 된 서재필이나 김점동 같은 주로 개신교 의사가 몇 명 있었고, 1900년대 초 서양식 의료 기관이었던 ‘제중원’과 ‘대한의원’에서도 도제식 의학 교육을 통해 소수의 한국인 의사들이 양성되기도 했다. 또한, 자신이 졸업한 경성의학전문학교가 1916년에 설립되어 의사들을 배출한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박병래는 이들 중에 천주교 신자가 있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말하자면 박병래는 사실상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자 의사였던 셈이다. 이런 자의식이 박병래로 하여금 교회 의료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실천 의지를 갖게 했던 것이리라.

 

또한, 박병래는 하느님께 대한 자신의 신앙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이 시기에 성 프란치스코회 재속회원으로 가입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정신을 본받아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삶을 살기로 맹세한 것이다.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과의 인연

 

1945년 광복을 맞고 성모병원은 다음 해 1946년 개원 10주년을 맞으면서 박병래는 직원들과 함께 점점 자신감을 가지고 병원을 운영해 간다. 그러나 사회는 혼란했다. 1948년 남한만의 정부를 수립하지만 사회는 전혀 안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런 격동과 혼란 시기에 박병래에게 있었던 운명 같은 아름다운 일화 한 가지는, 백범 김구(1876~1949) 선생과의 인연이다. 

 

김구 선생은 1945년 11월 귀국 뒤 성모병원에서 탈장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아무래도 김구 선생의 며느리 안미생(수산나)이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박병래를 존경하는 며느리의 소개로 박병래를 믿고 찾은 것으로 보인다. 퇴원 후에도 박병래는 김구 선생 왕진을 위해 경교장엘 자주 들렀다. 당시 박병래는 어떻게든 김구 선생을 천주교로 입교시키고 싶었다. 몸이 아플 때면 늘 성모병원을 찾았던 김구 선생에게 실제로 수녀들을 통해 입교 권고를 했고, 그럴 때면 언제든 자신도 죽기 전에 천주교에 입교할 생각이라는 언약도 했다고 한다. 

 

특히, 국사에 바쁜 김구 선생이 미국에 가 있던 며느리를 대신해서 어린 손녀 효자(孝子)를 돌보는 것을 본 박병래는 그 손녀를 자신이 양육하겠노라고 제안한다. 효자는 김구 선생의 며느리이자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안미생의 딸이다. 박병래에게는 마침 효자와 같은 나이 또래의 딸도 있었기 때문에 함께 지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실제로 이때부터 박병래는 효자가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갈 때까지 20년 이상 친딸처럼 데리고 살았다. 

 

박병래는 1949년 6월 26일 낮에 일어난 일을 잊을 수가 없다. 명동성당에서 주일 12시 미사를 마치고 병원으로 돌아와 잠시 입원 환자들을 회진하고 점심을 먹으려는 순간 김구 선생 비서로부터 급한 전화 연락을 받는다. 김구 선생이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을 맞고 쓰러졌다는 것이다. 곧 경교장으로 달려가 이미 그곳에 와 있던 적십자병원 이기섭 외과 과장과 함께 강심제를 놓고, 총탄을 맞은 부분의 피를 거즈로 닦으며 인공호흡을 시도했지만, 김구 선생은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김구 선생의 사망을 확인한 박병래는, 현장에 같이 간 간호 수녀들과 함께 김구 선생의 시신을 깨끗이 닦고 염습(殮襲)을 마친 다음 곧장 천주교 예식대로 세례를 베풀고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주었다. 박병래는 그 엄청난 사건 앞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김구 선생에게 세례를 줄 생각을 하고 실제로 대세까지 베푼 것이다.

 

김구 선생이 암살된 후, 사회는 점점 불안해지고 있었다. 매일 청년들의 데모가 이어지고 국회도 싸움질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벌써부터 북한에서는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다. 박병래도 왠지 불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매일 몰려드는 환자들을 돌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정부 수립 이후 정세 불안까지 겹쳐 힘들게 지내던, 1948년과 1949년은 사실 박병래 개인적으로도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부인 서경이(徐景伊, 마르티나)가 1948년에, 외아들 노영(魯永, 미카엘)이 1949년에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특히 겨우 열다섯 살이던 아들 노영을 결핵성 뇌막염으로 잃고 나서 박병래는 한동안 거의 넋을 잃은 사람이 되어 살았다. 오직 매일 미사에 참여하면서 하느님께 위로를 받으며 견뎌내야 했다. 그렇게 1949년을 보내고 1950년 봄을 맞은 박병래는 성모병원과 성요셉병원 환자 진료를 하며 바쁜 생활 속에 묻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평화신문, 2016년 4월 24일, 맹광호 이시도르(가톨릭의대 명예교수)]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성모병원의 기초를 다진 의사 박병래 요셉(1903-1974)

 

(7) ‘성신대학 의학부’의 설립과 박병래의 새로운 도전

 

 

- 1956년 5월 성모병원 개원 20주년 기념사진. 앞줄 가운데 왼쪽부터 노기남ㆍ라리보 주교, 박병래. 당시 박병래는 공군 군의감으로 전역해 성모병원장과 제3대 성신대학 의학부장을 맡고 있었다.

 

 

1950년 6월 25일에 터진 전쟁으로 한참 발전을 거듭하던 성모병원도 큰 타격을 입는다. 박병래와 간호 수녀들을 포함한 직원들은 아예 피란 갈 생각조차 못 했다. 성모병원은 인민군이 장악했고, 일반 환자들 대신 인민군 전상(戰傷) 환자들 치료하는 내무성 산하 군병원이 되었다. 젊은 인민군 군의관이 원장을 맡았고 박병래는 부원장으로 그들 지시에 따라 인민군 전상 환자를 치료해야 했다. 박병래는 수녀들에게 수녀 복장 대신 일반 평복으로 갈아입도록 했으며, 수녀들의 안전을 위해 집에도 가지 않고 진료실 한구석에 군용 목침대를 놓고 살았다. 키가 작은 박병래는 어떻게든 인민군들에게 좀 더 위엄 있게 보이려고 이때부터 한동안 콧수염을 기르기도 했다. 

 

다행히 그런 생활은 3개월로 끝이 났다. 9월 28일 서울이 유엔군의 참전으로 다시 국군의 손에 수복된 것이다. 그리고 그 길로 국군은 북으로 진격을 계속해 11월에는 평양까지 회복했다.

 

 

9·28 수복과 평양 진료, 그리고 입대

 

박병래는 그냥 서울에만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당시 북한에는 아무런 민간 의료 시설이 없을 것을 염려한 박병래는 성모병원 의사 2명과 간호 수녀 등 7명으로 ‘가톨릭 의료 봉사단’을 꾸려 국군을 따라 북으로 갔다. 1950년 11월 11일 평양에 도착한 가톨릭 의료 봉사단은 임시 진료소를 마련하여 환자들의 진료를 시작했는데 불과 20여 일 사이에 6000명이 넘는 환자가 몰려와 진료를 받았다고 한다. 아마도 우리나라 가톨릭 역사상 최초의 국제(?) 진료 활동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격한 연합군은 금방 한반도를 통일할 것 같은 기세였다. 그러나 12월의 혹한과 중공군의 개입으로 연합군은 후퇴해야 했고 이것이 그 유명한 1ㆍ4 후퇴다. 다시 서울로 온 박병래는 병원을 잠시 다른 후배 의사에게 맡기고 자신은 공군 군의관으로 입대한다. 그때 박병래는 47세나 되어 군에 입대할 나이가 아니었지만, 전쟁터에서 다치고 죽어가는 군인들을 위한 의사 수가 절대 부족이라는 얘기를 들은 박병래는 공군 중령 계급을 달고 군의관으로 입대한다. 군대에 있는 동안 박병래는 부산과 마산 공군병원장을 거쳐 4년 뒤 대령으로 진급하여 공군 군의관의 최고 책임자인 군의감(軍醫監)까지 맡아 지도력을 발휘한다.

 

 

제대 후 성모병원 복귀와 새로운 도전

 

박병래는 1956년 3월 제대하게 되는데, 마침 그해 5월은 성모병원 설립 20주년이 되는 해였다. 박병래는 6월에 다시 성모병원 병원장에 취임하게 되고, 동시에 그가 군대에 있던 1954년에 설립된 성신대학 의학부 부장(지금의 가톨릭의과대학 학장)직도 겸하게 된다. 그러나 환자 진료와 대학행정을 책임지게 되고, 무엇보다 새로운 병원 설립 문제 등을 고민해야 하는 일이 박병래에게는 미처 예기치 못했던 큰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1954년에 설립된 성신대학 의학부와 성 요셉 간호고등기술학교(현재의 가톨릭대학교 간호대학) 설립에는 당시 노기남 주교의 지원을 받아 일을 추진한 의사 유을준(兪乙濬, 1912~1993?)의 역할이 크다. 유을준은 원래 중국 연길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한국에 와서 1938년 의사 검정고시를 통해 의사 자격을 취득한 사람이다. 1950년에는 개신교 신학교도 졸업했으나 목사 안수를 거부하고 곧장 천주교에 귀의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천주교로 개종한 이후로는 오직 교회 정신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을 진료하며 일생을 살기로 결심하고,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와 함께 부산에 ‘성 분도 자선병원’을 개원하여 불과 2년여 만에 대형 종합병원으로 발전시킨다. 유을준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곳에 의과대학을 설립하려고 시도하지만, 수녀회의 반대로 계획이 무산되고 오히려 이 일로 수녀회와 갈등을 빚게 된다.

 

이때, 유을준과 수녀회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중재에 나섰던 노기남 주교가 유을준에게 서울교구에 와서 일해 줄 것을 제안한다. 이렇게 해서 1954년 1월에 서울로 올라온 유을준은 놀랍게도 불과 2개월 남짓 사이에 교육부로부터 성신대학 의학부와 성 요셉 간호고등기술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낸다. 그러나 유을준의 역할도 거기까지였던 것 같다. 의학부 설립 이후 성 요셉 병원 원장과 의학부 교학감(敎學監)직을 맡으면서 자신이 모든 운영을 책임지겠다고 했던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그는 다음 해인 1955년 2월에 의학부 교수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 뒤 미국과 일본에서 유학하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간 유을준은 1993년경 부산 변두리 어느 작은 아파트에서 가족도 없이 쓸쓸히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1957년 양기섭 신부에 의해 시작된 새 성모병원 신축 기공식 장면. 제10대 경성대목구 노기남 주교와 뉴욕대교구 스펠만 대주교가 병원 신축을 위한 첫 삽을 뜨고 있다.

 

 

성모병원을 떠나는 박병래

 

다시 성모병원과 의학부 교육을 책임지게 된 박병래는 처음부터 많은 어려움에 직면한다. 무엇보다 그때 막 의대 본과(本科)에 진입한 학생들을 위한 강의와 실습 공간 확보부터 어려웠다. 교구청 구내 건물 한 동을 사용코자 교구에 요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나름대로 온갖 노력을 다해 보지만 형편이 나아지지 않자 그는 심한 좌절감에 빠지게 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대학과 재단 일부에서는 의과대학 운영에 대한 회의론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결국, 1956년 말경 재단은 의과대학 운영을 포기하기로 하고 고려대학교와의 합병을 결정한다.

 

그러나 당시 본과 1학년에 진급한 학생들이 합병에 반대하여 20여 일간 수업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학부형들로 구성된 후원회에서도 강력히 반대하고 나섬으로써 고대와의 합병 건은 잠시 주춤하게 된다. 

 

이때 마침 미국 뉴욕에 파견 사목 중이던 양기섭(梁基涉, 1905~1982) 신부가 이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하여 제4대 의학부장에 취임한다. 그리고 고려대학교와의 합병을 무산시키는 한편 적극적인 모금 운동을 펼쳐 우선 성모병원 신축 계획을 추진하게 된다. 새 병원 신축을 위한 기공식에 당시 뉴욕대교구 스펠만 대주교를 초청하고 그에게서 적잖은 후원금까지 받아낸 일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것이 1961년 12월에 완공한 지하 2층 지상 6층의 ‘명동성모병원’(지금의 ‘가톨릭회관’ 건물)이다. 

 

그러나 양기섭 신부 또한 새 병원을 짓는 과정에서 많은 사채(私債)까지 써야 하는 등 무리한 모금으로 인한 잡음 때문에 잠시 병원을 떠나 있어야 했다. 오늘의 성모병원이 있기까지 겪어야 했던 힘든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재단의 결정에 따라 추진하던 고려대학교와의 통합이 무산되고 대학 운영에 자신감을 잃은 박병래는 결국 성모병원 복귀 반년 만인 1957년 1월에 성모병원장과 의학부장직을 사임한다. 충분한 준비 없이 시작한 의과대학의 초기 어려운 상황에 대한 책임을 박병래가 모두 짊어진 셈이다. 후에 박병래는 성모병원을 떠날 때의 심정을 “고향을 떠날 때 느끼는 참담한 심경이었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사실, 성모병원을 기반으로 해서 의과대학을 설립하는 것은 박병래의 오랜 꿈이기도 했다. 1945년 12월 미 군정청 학무국이 우리나라 의학교육 발전과 의대 신설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조선의학교육평 의회’를 구성한 일이 있는데, 이때 총 9명의 평의회위원 중 8명이 당시 국내 의과대학 학장들이었고, 박병래가 유일하게 당시 대학과 무관한 성모병원장 자격으로 여기 참여했던 일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2008년 서울대학교에서 발간한 「한국의학인물사」에는 1957년 박병래의 성모병원장 사직에 대해 “가톨릭 의사 중에 그만큼 의료계와 의학 교육 분야에서 이름을 날린 사람도 없었고, 그만큼 신망이 두터운 사람도 없었기에 그의 갑작스러운 사직은 의외의 일이었다” 라고 적고 있다. [평화신문, 2016년 5월 1일, 맹광호 이시도르(가톨릭의대 명예교수)]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성모병원의 기초를 다진 의사 박병래 요셉(1903-1974)

 

(8) ‘성 루가병원’ 개원으로 이어진 박병래의 인술

 

 

1963년 12월, 박병래(가운데)가 대한결핵협회 회장 시절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공관으로 육영수 여사를 예방하고 크리스마스 씰 을 증정하는 모습.

 

 

1957년 1월 성모병원을 떠난 박병래는 한동안 운현궁(雲峴宮) 터 안에 조그만 집 한 채를 얻어 개업하면서 병원 이름을 ‘성 루가 병원’으로 정했다. 갑자기 성모병원을 떠나게 되면서 경황이 없는 중에도 박병래는 병원 이름 짓는 일에 신경을 썼다. 그리고 네 복음사가 중 유일하게 의사 직업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진 ‘루카’의 이름을 따서 병원 이름을 정했다. 실제로 루카 복음사가는 의사들의 수호성인이어서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그의 이름을 딴 병원들이 많다. 내과 의사로 이미 장안에 이름이 난 박병래는 병원에 환자들이 쇄도하기 시작하자 종로구 관철동에 5층짜리 새 병원 건물을 짓고 이사한다.

 

성모병원에 이어 두 번째로 박병래가 직접 이름 붙인 병원이 ‘성 루가 병원’인 것은 그만큼 그가 어디에서 활동하든지, 치유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톨릭 의사로서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 사람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박병래는 예수님의 공생활 3년 중에 실제로 환자들을 고쳐 주고 죽은 사람까지 살리는 기적까지 보여주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환자를 고치는 의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가톨릭 의사로서 죽는 날까지 환자를 진료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기로 다짐한다.

 

 

개원의 생활 속에서 펼친 폭넓은 사회 활동 

 

성 루가 병원을 개원한 뒤부터 1974년 봄 세상을 떠나기까지 15년여 기간이 어쩌면 박병래에게는 시간적인 면에서나 신앙생활 면에서 지난 어느 때보다 바쁘고 보람 있는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이 시기에 교회 안에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1957년 1월에 성모병원을 떠날 때만 해도 자신이 의도했던 가톨릭 의사로서의 삶이 벽에 부딪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서글픈 마음이 잠시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몇 년간 군의관 생활을 마치고 다시 성모병원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이 군에 있는 동안 신설된 성신대학 의학부의 제3대 부장(학장)에 임명된다. 그러나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대학과 병원 운영의 어려움에 부딪혀 결국 취임 반년 만에 대학과 병원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박병래는 그런 변화가 규모나 내용 면에서 좀 더 발전해 가야 하는 한국 가톨릭 의료의 미래를 위해서 하느님께서 미리 정해 놓으신 일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마음도 편했고 실제 개업의로서의 삶에 새로운 용기와 의욕도 생겼다. 저항하거나 불만을 표시하기보다 오히려 순명하는 그의 모습에서 참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보게 된다. 

 

다행히도 그가 개원한 관철동 부근에는 당시 종로를 중심으로, 저동(苧洞), 명동 일대에 내과, 외과 계통의 대학 선후배 의사들이 운영하는 병ㆍ의원들이 많아 재미가 있었다. 무엇보다 수입이 크게 늘었다. 덕분에 경의전 부속병원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시작한 조선 도자기에 대한 공부와 수집도 성모병원에 있을 때보다는 좀 더 여유 있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가난하고 불쌍한 환자들을 돌보아 주어야 한다는 가톨릭 신자로서의 사명감을 잊어본 적이 없다. 진료를 받기 위해 찾아오는 성직자나 수도자는 물론 프란치스코 재속형제회원답게 가난한 환자들을 위한 무료진료에도 최선을 다했다. 가톨릭 의사로 산다는 것이 그렇게 기쁘고 감사할 수가 없었다.

 

이 시기에 박병래는 학자로서도 생애 최고의 기량을 발휘한다. 1962년에 대한내과학회 회장에, 그리고 다음 해인 1963년에는 대한결핵학회 회장에 취임했다. 1970년에는 서울의대 동창회장직도 맡아 동창회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1963년과 1964년에는 각각 서울대학교 의과대학과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에 위촉되어 강의나 학회 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당시 개원의였던 박병래가 이 시기에 대한내과학회와 결핵학회 회장을 맡았었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때 이미 전국에 8개 의과대학이 있었고 특히 결핵과를 포함한 내과의 경우 대학마다 많은 교수가 포진하고 있던 때여서 현직 교수가 아닌 개원의(開院醫) 박병래가 이들 학회 회장에 취임했다는 사실은 의사로서의 그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었는지를 여실히 증명해 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1963년에는 대한결핵협회 회장까지 맡아 전국적인 결핵 예방 사업과 기금 마련을 위한 크리스마스 씰 제작 판매에도 온 정성을 기울였다. 결핵학이 자신의 전공 분야이기도 했지만, 당시 가장 중요한 보건 문제였던 결핵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가톨릭 신자로서 진정한 박애 정신을 발휘하는 귀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평소에 박병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많은 결핵을 퇴치하는 일을 캐나다 출신 선교사 의사 셔우드 홀(Sherwood Hall, 1893~1991)이 처음 시작했다는 사실이 고맙기도 하면서 늘 미안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더욱더 결핵협회 일에 열성을 다했다.

 

 

평신도 지도자로서의 교회 활동과 기부(寄附) 실천

 

바쁜 개업의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박병래는 여러 가지 교회 활동에 참여한다. 1948년 8월에 우리나라 천주교 평신도단체의 효시인 ‘대한천주교연맹’이 처음 결성되었을 때부터 참여했던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그리고 1년 뒤에 발족한 ‘천주교순교자현양회’ 중앙위원으로도 위촉받아 활동했다. 이 현양회는 한국인 최초 사제였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순교 100주년을 기념해서 만들어진 기구로,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인 1984년에 시성된 103위 순교자들의 영광을 실현한 시초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 1960년에 축성된 혜화동 성당의 현재 모습. 박병래가 1954년부터 이 성당 ‘신축 건립위원회’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또 1966년부터 작고하던 해인 1974년까지 당시 서울에서 종현(명동)과 약현(중림동)에 이어 세 번째로 설립된 혜화동본당의 총회장직을 맡아 봉사하기도 했다. 그는 이미 총회장이 되기 전인 1954년부터 ‘혜화동 성당 신축 건립위원회’ 부회장으로 당시 회장이던 장면과 함께 성당 건립에 온 힘을 보탠다. 특히 성당 옆에 소유하고 있던 집 한 채를 기증하기도 했는데 지금 그 자리에 가톨릭교리신학원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그는 작고 직전인 1974년 4월, 평생 수집한 국보급 도자기 360여 점을 국립박물관에 기증했다. 이 일은 우리나라에서 국가문화재급 보물을 개인이 최초로 국가에 기증한 사례로 알려져 있다. 

 

교회와 사회를 위한 그의 기부는 그가 죽고 난 이후에도 가족들을 통해 이어진다. 1986년에는 부인 최구 여사가 박병래의 유언에 따라 불암산 밑에 있던 배밭 농장 3만여 평을 성 베네딕도 수도회에 기증해 지금 성 요셉 수도원이 들어서 있다. 1992년에는 최구 여사의 사망 1주기 모임에서 가족들이 박병래 부부가 살던 성북동 집을 판 돈과 연전에 기증한 1억 원을 합쳐 총 5억 원을 모교인 서울대학병원 연구비로 기증하기도 했다.

 

1991년 9월,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발간하는 「교회와 역사」 제196호에 보면, “박병래는 세속에 살면서도 늘 수도 생활을 사모했다. 청빈의 성자 성 프란치스코의 수도 정신을 본받아 살고자 프란치스코 제3회 재속회원이 된 것도 이런 그의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선종하기 전 마지막 몇 주간은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기도 속에 살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박병래는 자신의 호(號) ‘수정’(水晶)처럼 하느님을 위해 그렇게 맑고 아름답게 살았던 사람이다. [평화신문, 2016년 5월 8일, 맹광호 이시도르(가톨릭의대 명예교수)]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성모병원의 기초를 다진 의사 박병래 요셉(1903-1974)

 

(9) 박병래의 도자기 사랑

 

 

- 수집한 도자기를 닦는 박병래의 모습. 그는 죽음을 한 달 남짓 앞두고 조선백자 362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박병래를 기억하고 있거나 오래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을 굳이 두 그룹으로 나누자면, 하나는 그를 성실한 가톨릭 의사로 기억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일제강점기 하에서 사라져가는 우리나라 역사적 유물들, 특히 아름다운 도자기를 열심히 수집해서 나라에 기증한 애국자로 기억하는 사람들이다. 당연히 가톨릭 교회 인사들이나 성모병원과 인연을 맺고 살았던 사람들은 그를 훌륭한 가톨릭 의사로 기억하겠지만, 문화 예술계 사람들은 그를 우리나라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국보급 도자기 수집가로 기억하고 있다.

 

특히 박병래를 유명한 도자기 수집가로 기억하는 사람 중에는 그의 도자기 사랑이 단지 값비싼 도자기들을 모아 국가에 기증했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 자신이 누구보다 도자기에 대한 전문가적 식견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라는 사실에 놀란다.

 

 

조선미(朝鮮美)의 탐구자, 박병래

 

우리나라 전통 예술에 관한 책 중에, 일본 상지대학을 졸업하고 일본미술사학회 회원이기도 한 재일교포 한영대가 1992년에 일본어로 쓴 「조선미의 탐구자들」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1997년 우리나라에서도 번역 출간되었는데, 우리나라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을 전 세계에 소개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석탑과 불상, 도자기 등 우리의 문화 예술 작품에 대한 자료집이자 역사적 뒷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책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 문화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을 깊이 연구하고 사랑한 사람들 열 명의 업적을 소개하는 형식으로 꾸며진 이 책에는 일본인 다섯 명과 서양인 세 명, 그리고 한국인 두 명이 소개되고 있는데, 놀랍게도 박병래가 간송 전형필(1906~1962)과 함께 소개되어 있다. 박병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모두 문화나 예술 분야 전문가들인 점을 볼 때, 의사 박병래의 우리나라 도자기 사랑과 도자기에 대한 그의 전문적 지식이 결코 보통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박병래가 도자기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29년 그가 경성제대부속병원의 내과 의사로 재직하던 시기였다. 하루는 박병래에게 지도교수인 노사카 교수가 물건 하나를 보여 주며 물었다. “박군, 이게 뭔지 알겠나?” 그저 그런 하얀 접시 하나였다. “조선 것은 아닌 듯합니다.” 20대 중반의 조선인 제자에게 스승이 정색을 했다. “조선인이 조선 접시를 몰라서야 말이 되는가?” 그 순간 박병래는 다소 부끄럽기는 했으나 별생각 없이 퇴근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집에 와서 지도교수의 말을 곱씹어보니 왠지 분한 마음이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가난한 조선인 대부분은 그렇다 치더라도 명색이 이 나라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자신조차 우리나라의 귀한 물건을 귀하게 볼 줄 아는 안목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한없이 부끄럽고 분하기까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개성(開城) 주위 산은 고려청자를 노리는 일본 도굴꾼들이 조선인을 앞세워 벌집으로 만들어 놓았고, 전국 시골집에 있던 조선백자는 일본 골동상들이 훑고 있던 때였다. 그날 이후 박병래는 병원 일이 끝나면 경성 시내에 있는 일본인 골동품상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우선 무엇이 골동품으로 나오고 있으며 그것들이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싶었다.

 

그제야 자신에게도 도자기를 포함한 우리나라 골동품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도자기에 관심을 갖다 보니, 놀랍게도 병원에 입원한 환자 가족이 들고 온 김치 그릇 중에 조선 후기 청화백자(靑華白磁)가 눈에 띄었다. 그뿐 아니었다. 소변 검사를 받기 위해 환자 가족이 꺼낸 오줌통이 청화 소병(小甁)이었으며, 그가 수시로 가는 냉면집 젓가락통도 자세히 보니 백자필통이었다. 

 

박병래는 그때마다 이런 물건들을 사들였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물건 주인들에게는 그것이 우리 조상들이 만든 ‘특별한 예술품’이라며 되도록 후하게 제값을 치렀다. 그렇게 한번 박병래의 손에 들어간 도자기는 두 번 다시 시중에 나오지 않았다.

 

 

도자기 전문 저술가, 박병래

 

사실 박병래가 우리나라 도자기의 최대 개인 수집가 중 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도자기의 예술적 가치를 직접 연구하고 책으로까지 출판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는 1972년에 그가 소장하고 있는 도자기들에 대한 「소장품도록(所藏品圖錄)」을 출판했고, 사망하기 1년 전인 1973년에는 중앙일보에 몇 달간 연재했던 도자기에 관한 얘기들을 모아 「도자여적(陶磁餘滴)」이라는 수필집을 출판했다. 그가 죽고 난 뒤인 1980년에는 역시 박병래가 남긴 도자기 수집과 사랑에 관한 글들을 모은 「백자에의 향수」라는 산문집이 나오기도 했다. 이들 책을 보면 박병래의 도자기 수집이 얼마나 전문적이고 또 그의 도자기 사랑이 얼마나 순수하고 아름다운 행위였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는 산문집에서 “도자기 수집에 취미를 붙이고 나니 처음에는 차디차고 표정이 없는 사기그릇에서 차츰 체온을 느끼게 되었고, 나중에는 다정하고 친근한 마음으로 대하게 되었다. 또 고요한 정신으로 도자기를 한참 쳐다보면 그릇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까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라고 도자기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수정(水晶) 박병래 전시실

 

- 박병래 서거 10주기를 맞아 박물관신문 1면에 실린 박병래 도자기 기증 관련 기사.

 

 

1974년 4월 30일, 죽음을 한 달 남짓 앞두고 박병래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조선백자 362점을 기증했다. 700여 수집품 가운데 고르고 고른 명품들이었다. 당연히 국보·보물급이 즐비했고 당시 돈으로 따져도 10억 원이 넘었다고 한다. 현재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2층에는 그가 기증한 도자기들을 전시한 ‘박병래 기증 전시실’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그의 기증품들을 모두 이곳에 전시할 수가 없어서 3층 ‘백자 전시실’에도 일부 전시하고 있으며 지방의 박물관에도 빌려 주어 좀 더 많은 사람이 박병래가 수집한 도자기를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박병래가 기증한 도자기들은 대부분 18~19세기에 경기도 광주 금사리와 분원리 가마에서 만든 단정한 도자기로 청화백자가 많다고 한다. 한결같은 품위를 지닌 이 도자기들은 조선 시대 백자 연구와 감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품들이다. 특히 돋보이는 것은 선비의 사랑방을 장식했던 다양한 연적(硯滴)들이다. 갖가지 모양의 연적은 감상의 재미와 함께 박병래의 우리 미술에 대한 애정과 정성이 얼마나 다양하고 깊었는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박병래가 이들 문화재를 기증하기 전,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이 가끔 성북동 박병래 집을 방문했다고 한다. 박병래가 가지고 있는 도자기들을 빌려 때때로 특별전을 열기 위해서였다. 학예실장이 경이로운 눈빛으로 도자기들을 보고 있으면 박병래는 “그거 그렇게 눈이 뚫어지게 안 봐도 나중에 다 박물관으로 갑니다”라며 밝게 웃었다고 한다.  

 

평소 이런 남편의 의중을 안 아내 최구(崔鳩) 여사가 미리 집안 곳곳에 있는 백자를 모아 박병래가 사망하기 직전에 이 중 362점을 국립박물관에 기증했다. 광복 후 국가에 문화재를 기증한 첫 사례였다고 한다. 박병래의 도자기 기증 의사를 전해 들은 국립박물관장이 임종을 얼마 앞둔 박병래를 찾아와 눈물을 흘리자, 박병래는 “고생했소. 고맙구려. 이제 마음을 놓고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을 것 같소”라고 말했다.

 

귀중한 도자기들을 국립박물관에 기증하고 난 뒤 박병래가가 사망하자 국내 신문들은 “문화재는 개인의 것일 수 없다”라는 박병래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의 문화재 사랑과 통 큰 선행을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평생 모아 아끼고 사랑했던 도자기들을 국립박물관에 기증한 공로로 박병래는 사후에 국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지만 그의 공이 어디 이 훈장 하나로 보상이 될 일이겠는가! [평화신문, 2016년 5월 15일, 맹광호 이시도르(가톨릭의대 명예교수)]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성모병원의 기초를 다진 의사 박병래 요셉(1903-1974)

 

(10 · 끝) 박병래의 죽음과 그가 남긴 교훈

 

 

박병래는 1974년 5월 15일에 혜화동 자택에서 세상을 하직했다. 이 날은 국립박물관에서 그의 만 71세 생일에 맞추어 ‘박병래 기증 도자기 특별전시회’를 개최하기로 한 5월 27일을 열이틀 앞둔 날이다. 

 

박병래는 1974년 2월 말부터 지병인 폐암 증세가 심해지면서 자신이 초대 원장직을 맡았던 성모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으나 병세가 점점 심해져 약 두 달 뒤인 4월 말에 집으로 퇴원했다. 환자 자신에게 여러 가지로 불편한 집으로 가기보다 병원에 그대로 있자는 일부 가족들의 의견도 있었으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안 박병래는 집에서 조용하게 가족들과 함께 지내며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다. 

 

입원해 있는 동안에는 말할 것도 없고, 집에서 지인들의 마지막 문병 인사를 받으면서도 박병래는 시종일관 밝은 얼굴로 사람들을 맞았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는 사람들은 그것이 박병래의 깊은 신앙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감탄했다.

 

박병래는 자신이 다른 병이 아닌 암으로 죽게 된 것에 대해서 우선 감사했다. 암이라는 병이, 대개는 어느 정도 투병 기간을 가질 수 있는 병이어서 삶을 정리하고 죽음을 맞기 위한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병이 심해지면서 때때로 견디기 힘든 통증이 오기도 했지만, 그래도 비교적 의식이 분명한 상태에서 가족들과 얘기도 나누고, 오래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을 문병을 통해서나마 다시 만나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무엇보다 박병래는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자신의 지난 삶을 뒤돌아볼 수 있는 것이 감사했다. 어려서부터 그가 만났던 사람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그들을 통해 자신의 삶이 풍부해진 것에 대해 감사했다. 비에모 신부를 비롯해 자신의 삶을 인도해 주고 교회를 위해 일을 할 수 있게 해 준 교회 내 어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물론, 사랑하는 외아들 노영(미카엘)을 불과 열다섯 나이에 먼저 하늘나라로 보냈을 때와 3남 1녀를 낳아 키우면서 젊은 시절 자신을 뒷바라지하느라 고생만 했던 첫 아내 서경이(마르티나)를 먼저 떠나보낸 일 등 가슴 아픈 일들도 없지 않았지만, 어느 한순간도 그는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 속에 살았음을 잊지 않았으며 그 모든 것에 감사했다.

 

 

“아버지, 저 잘 살았지요?”

 

박병래는 누구보다 자신에게 천주교 신앙을 물려주었을 뿐 아니라 의사로서의 삶을 살게 해 준 아버지 박준호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자신을 꼭 의사로 만들고 싶어 했던 이유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는 당신의 고향인 전북 고산 되재 지역에 숨어들어온 천주교 박해 시대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특히 젊은 나이에 낯선 땅에 와서 전교하다가 2~3년도 못 되어 풍토병으로 목숨을 잃는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들을 보면서 우리나라에 실력 있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느꼈을 것이고, 특별히 천주교 신앙을 가진 의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되재성당을 찾았을 때, 박병래는 성당 뒤 나지막한 언덕 위에 허름하게 자리 잡은 두 개의 봉분(封墳)을 본 적이 있다. 하나는 조선에 온 지 2년 만인 1886년 서른셋의 나이에 선종한 조스 신부 (J. Josse)의 묘였고, 다른 하나는 1887년에 부임해서 단 1년을 사목하고 겨우 스물여덟 살에 역시 병으로 세상을 떠난 라푸르카드 (A. Lafourcade) 신부의 묘였다. 

 

어린 박병래는 이 두 젊은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 묘지 앞에서 곧장 의사가 되겠다고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열심한 천주교 신자가 되어 자신도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아서 두 신부의 희생적 삶에 보답하겠다는 다짐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박병래는 열심히 공부했고, 당시 한국 최고의 수재들만 입학할 수 있다는 경성의학전문학교를 거쳐 의사가 되었다. 더구나 한국 교회가 자력으로 설립한 최초의 병원인 성모병원 초대 원장이 되어 그는 사실상 우리나라 천주교회 의료 사업을 개척했으며, 가톨릭 신자 의사로서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쳤다. 

 

박병래는 가진 모든 것을 교회와 사회에 내놓은 사람이기도 하다. 평생 의사로 살면서 아픈 환자들을 위해 자신의 의학적 지식과 기술을 최대한 발휘한 사람이며, 그가 가진 재산까지도 모두 내어준 사람이다. 

 

박병래는 이제 죽게 되면, 먼저 하늘나라로 가신 아버지 앞에 가서, “아버지, 저 잘 살았지요? 이만하면 아버지 마음에 드는 삶을 산 거지요?”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정한 인술의 실천자, 박병래

 

박병래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국내 신문들은 이 사실을 대서특필했고, 교회 성직자, 수도자들은 물론 의료계, 정계, 그리고 문화계 등 각 분야 명사들이 진정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가톨릭 신자로서, 의사로서, 그리고 사회 지도자로서 그의 삶과 명성이 어떠했는지를 한눈에 알게 해 준 일들이었다. 

 

그의 장례식은 5월 17일 명동대성당에서 김수환(金壽煥) 추기경 집전으로 치러졌다. 그만큼 박병래는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증거다. 각계각층 사람들의 애도 속에 진행된 장례식에서, 김 추기경은 미사 강론을 통해 “박병래 선생님이 한국 천주교회 발전에 끼친 공은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무엇보다, 선생님은 성실과 사랑에 찬 고매한 인격자로서 사람들의 육체적 질병뿐 아니라 마음의 병까지도 고쳤던 인술(仁術)의 실천자였습니다”라고 추도했다. 

 

우리가 지금 박병래를 20세기 ‘빛과 소금’과 같은 존재로 기억하는 것은 단지 그의 훌륭한 삶을 기리자는 데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그런 그의 삶을 통해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고 우리가 어떻게 그의 삶을 조금이라도 본받을 것인지 생각해 보자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가톨릭 신자인 우리 각자는 그의 ‘교회 사랑’과 ‘나눔 정신’을 본받아야 하고, 교회 의료 차원에서는 그의 ‘사랑의 인술’ 실천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특히 그의 삶은 교회 의료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지금은 성모병원을 설립했을 때처럼 교회 의료가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는 자선적 의미만을 꼭 강조해야 할 이유는 없다. 지금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국가의 의료보호 제도가 있어서 그런대로 이들에 대한 의료가 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으로 돌보며 이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했던 박병래의 적극적인 ‘선교’와 ‘원목’(院牧) 정신을 배워 실천해야 할 것이다. 교회 병원들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해 다른 병원들과 경쟁하는 ‘또 하나의 병원’이 아니라, ‘기술 의료’라는 이름으로 의료가 상품화되고 인간성을 잃어가는 상황에서 좀 더 친절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환자들을 대하는 교회 의료의 참모습을 모범적으로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북한산 자락에 영원히 몸을 누인 박병래

 

서울 전철 1호선 도봉산역에서 북한산 둘레 길을 걷다 보면 남쪽 산자락 한적한 곳에 4개의 봉분과 비석이 있는 아담한 묘역이 보인다. 박병래 가족이 모셔진 곳이다. 제일 위쪽에 박병래의 아버지 박준호(요한)의 묘가 있고 그 밑에 박병래(요셉)의 묘가 있다. 그리고 그 아래쪽 좌우에 1949년에 사별한 박병래의 첫 부인 서경이(마르티나)와 1991년에 사망한, 재혼한 부인 최구(레지나)의 묘가 있다. 박병래의 묘 앞에는 당대 전서(篆書)와 전각(篆刻)으로 유명했던 이기우(李基雨) 선생의 솜씨가 돋보이는, 박병래의 삶을 정리한 예사롭지 않은 비문(碑文) 입석이 세워져 있어 이 묘역 앞을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을 잡는다. [평화신문, 2016년 5월 22일, 맹광호 이시도르(가톨릭의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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