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자료

[성경]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물 위를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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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0-08 ㅣ No.3859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물 위를 걷다(Auf dem Wasser gehen)

 

 

복음서들이 2000여 년 전에 일어난 과거의 일만을 우리에게 들려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서가 전해주는 사건들은 현재의 우리 삶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세기를 지나며 해마다 또 날마다, 과거의 사건이 새롭게 일어납니다. 다시 살아 숨 쉬고, 새롭게 펼쳐지며, 믿는 이들에게 위로와 힘을 줍니다.

 

우리의 현실은 자주 고통스럽고 힘에 겹습니다. 믿음도 끊임없이 흔들리지요. 하느님의 능력과 권능을 의심하며 우리는 작아집니다. 나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의탁하지 않는다면 실패하고 말 것이라는 불안 때문에 의기소침해지기도 하고요.

 

내면에서만 우리 믿음이 위협을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외부의 요인 때문에도 우리 믿음은 흔들리고 위협을 당합니다. 곧 그리스도 신앙을 증오하는 적대자들 때문에, 또 무엇보다 ‘안다는 이들’의 냉소적인 비웃음 때문에 우리 믿음이 위협을 받습니다. 그들은 우리 믿음을 순진하고 유아적이며, 이미 오래전에 만료된 것으로 치부합니다.

 

 

호수 위의 밤

 

이처럼 끊임없이 우리 믿음이 위협을 당하는 상황을 복음서들은 여러 비유와 표상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러한 비유와 표상들은 많은 경우, 외적인 사실들이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더 실제적인 진실을 말해줍니다. 물론 그렇다고 성경의 비유와 표상들이 역사적으로 실제 일어난 사건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무튼 복음서가 전하는 이야기를, 그것이 정말로 당시에 그런 식으로 실제 일어난 일인지 아닌지 하는 것만을 묻고 따진다면, 이는 온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당시 역사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는 데서 더 나아가, 무엇보다 이 옛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지 물어야 합니다. 오늘날 그 이야기를 읽고 듣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건네는지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럴 때만 그 이야기들은 우리에게도 역사가 됩니다. 바로 그럴 때만 옛 사건이 우리 한가운데서도 살아 있는 현실이 됩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마태오 복음서 14장 22-33절이 전하는 이야기를 살펴봅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를 타고 겐네사렛 호수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이미 날이 저물었지요. 한밤중이었습니다. 그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은 호수 한가운데 있습니다. 온통 물밖에는 보이지 않지요. 도달하려는 목적지에 그들은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나운 맞바람이 불어 배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 모든 것이 말하자면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라면 누구에게나 닥치는 상황이라고나 할까요. 맞바람과 어둔 밤, 마구 흔들어대는 파도 말입니다.

 

복음서는 이처럼 우리 믿음이 위협을 당하는 상황을 다양한 표상들을 동원해 아주 선명하게 묘사합니다. 우리의 불안과 안팎에서 우리 믿음을 위협하는 어두움과 우리가 몸담고 사는 사회의 역풍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지요. 복음서는 또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곧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뿔뿔이 따로 보내시며 각자가 다른 목적지를 향해 가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한 배에 태워 함께 보내셨지요. 이 배는 공동의 협력과 우정을 상징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공동의 협력과 우정이라 해도 그것이 금세 바닥을 드러내기 일쑤지요. 함께 쌓아올린 공통의 목표와 공감도 쉽사리 소진되기 마련입니다. 서로의 연대보다 대개는 개인의 이기주의가 훨씬 더 강력하지요.

 

 

예수님의 현존

 

한밤중 어둠 속에서 제자들이 탄 배를 지켜준 것은 예수님의 현존이었습니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지요.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예수님의 현존이라고요. 그분은 신비한 방식으로 당신 제자들 가운데 계십니다. 곧 그분께서는 제자들과 떨어져 멀리 산에서 기도하시지만, 바로 이렇게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계심으로써, 그분은 온전히 당신 제자들 곁에 계십니다. ‘아버지와 함께 계시던’ 그분께서 동이 터오는 ‘새벽녘에’ 제자들에게로 오십니다. 그분이 바로 제자들을 돕고 구원할 분이십니다.

 

그분은 물 위를 걸어오십니다. 아무것도 그분에게는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깊은 물속의 암흑도 그분에게는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분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분은 하늘의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분,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일치하는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런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에게도 늘 거듭 다가오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신해도 좋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도 당신 자신을 알려주시고, 우리에게도 당신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곧 당신 몸의 지체인 교회 안에서, 믿는 이들의 모임에서, 성사들을 통해 그렇게 하십니다.

 

안타까운 일은 다만 이것이지요. 곧 그분께서 우리에게 오실 때, 우리는 대개 그분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다른 일에 온통 사로잡혀 있어서, 그분의 오심을 전혀 눈치채지 못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마태 14,26)

 

제자들의 그런 반응이 바로 우리의 반응이기도 하지요.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이들을 통해 하느님은 우리를 도우러 오십니다. 당신께서 파견하신 이들을 통해 그분은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도움의 손길을 전혀 감지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반대로, 두려움 속에서 그 모든 것을 유령 따위로 치부해버리고 맙니다. 우리 자신의 독립성과 자유, 우리 자신의 자존성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나 자신에 대한 염려로 두려움에 빠지고, 결국은 실상을 왜곡하여 거기서 유령을 만들어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면, 제자들은 두려움에서 영영 헤어나지 못했을 테지요.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예수님의 이 말씀 이후에야 제자들은 불신에서 벗어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제자들의 눈에서 너울이 벗겨집니다. 제자들은 비로소,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이 유령이나 허깨비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베드로의 용기와 두려움

 

마태오는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하며 여기에 또 하나의 사건을 덧붙입니다.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병행 구절을 이루는 마르코 복음서나 요한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습니다(마르 6,45-52; 요한 6,16-21 참조). 곧 마태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만이 아니라 베드로도 물 위를 걷습니다. 물 위를 걸어 자신들이 탄 배로 가까이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본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지요.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마태 14,28)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너라.”(마태 14,29)

 

베드로가 물 위를 걷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의 바람을 심리학적인 차원에서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요. 자유롭게 날고 싶은 욕망 말입니다. 우리 역시 그러한 갈망을 가지고 있어서, 밤에 새처럼 나는 꿈을 꾸기도 합니다. 하늘 높이 자유롭게 나는 것이나 물 위를 걷는 것이나 모두 같은 갈망이지요. 어디든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갈 수 있는 그런 자유에 대한 갈망이 우리 내부에도 깊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해석은 성경 본문의 실제 의미에는 들어맞지 않는 설명입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시몬 베드로인 점이 그저 우연에 불과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매번 그렇듯이 베드로는 이번에도 앞에 나섭니다. 그러고는 실패하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를 붙들어주십니다.

 

사실 베드로가 걸은 소명의 길이 온통 그렇지 않았나요? 예수님은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종말론적 이스라엘을 건설하고자 하십니다(마태 16,18-19 참조).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하지요(마태 26,69-75 참조). 그런 베드로를 예수님은 용서하십니다(요한 21,15-19 참조).

 

물 위를 걸으려는 베드로는 바로 예수님이 계신 그곳에 자신도 온전히 있고 싶어 하는 제자입니다. 스승과 일치하고, 그분 품에 자신을 의탁하고, 그분이 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똑같이 하고 싶어 하는 제자이지요. 물 위를 걸어 예수님에게 가는 시몬 베드로의 모습은 온전히 그분과 함께하려는 열망의 표현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은 아니지만, 그 역시 ‘주님을 따르는 일’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제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 곧 믿음 안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이는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이는 물 위에서도, 바닥이 없는 곳에서도 가라앉지 않습니다. 세상의 혼돈도, 공허한 무의미의 심연도 그를 집어삼키지 못합니다. 그에게는 발아래 확실한 버팀목이 존재합니다. 물론 시몬 베드로의 이 이야기는, 주님을 따르는 일이 그저 심심풀이 놀이가 아니라는 사실도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따름은 굳건한 믿음을 전제합니다. 믿음을 잃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순간, 우리는 베드로처럼 물속으로 빠져들고 말겠지요. 아무것도 우리를 더 이상 지탱해주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4,30 참조).

 

하지만 모든 유혹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믿음 안에 굳건하고 충실하게 머무른다면, 믿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그럴 때 믿는 이는 물 위를 달리고 하늘을 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종류의 자유는 지극히 인간적인 갈망들에서 나오는 자유와는 다른 것이지요. 믿음에서 오는 자유는 자기 자신에게서 자유로워질 때 가능합니다. 내 뜻과는 다르더라도 바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데서, 충실하신 그분의 약속에 귀 기울이는 데서 생겨납니다.

 

 

체험과 고백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갑니다. 곧 예수님은 당신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아주십니다. 이제 예수님과 베드로는 배에 오릅니다. 그런 뒤에 바람이 그칩니다.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태 14,33) 하고 말하지요. 이 고백을 보면, 이 이야기에는 두 종류의 체험이 서로 얽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제자들이 ‘지상의 예수님’과 겪은 체험이지요. 이는 예수님의 부활 이전의 체험입니다. 이 체험에 따르면, 생전의 예수님은 이미 하느님의 현존 자체이셨습니다. 그분의 현존에서 제자들은 구원과 도움을 체험합니다. 하지만 두 번째로, 마태오 복음서와 그 밖의 다른 복음서들이 전하는 이 이야기에는 이미 ‘교회’의 체험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부활 이전 예수님의 지상 여정에서 겪은 구원에 대한 체험 이야기가 부활 이후 초대 교회에서도 새로운 방식으로 계속 이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그 체험은 당연히 믿음의 언어로 표현되고 표출됩니다. 자신의 삶을 온통 떠받치고 있는 체험에 대한 ‘언어적 표현들’이 계속 쌓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후대의 우리 역시 이 체험들 속으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나와 나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내가 속한 공동체와 온 교회 안에서 예수님이 늘 다시 혼돈을 몰아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똑같이, 새벽녘 겐네사렛 호수 위의 제자들처럼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7년 8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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