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 (수)
(백) 부활 제4주간 수요일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성경자료

[신약] 예수님 이야기30: 풍랑을 가라앉히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시다(루카 8,1-3)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9-10 ㅣ No.3811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 루카복음 중심으로] (30) 풍랑을 가라앉히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시다(루카 8,1-3)


거센 풍랑처럼 흔들린 제자들의 믿음

 

 

- 쿠르시는 갈릴래아 호수 동쪽 휴양지인 엔게브에서 북쪽으로 5㎞쯤 떨어진 곳으로, 비잔틴 시대 수도원과 성당의 유적이 남아 있다. 사진은 쿠르시의 유적. 가톨릭평화방송여행사.

 

 

예수님께서 어느날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호수 저편으로 건너 가십니다. 호수 저편은 갈릴래아 호수 동쪽 곧 시리아의 골란고원이 있는 쪽을 말합니다. 루카는 그 여정에서 두 가지 일화를 소개합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풍랑을 잠잠하게 하신 사건과 호수 건너편 이방인들의 지방에서 많은 마귀가 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일입니다.

 

 

풍랑을 가라앉히시다(루카 8,22-25)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호수 저편으로 가시고자 합니다. 열두 제자 중 적어도 4명 곧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 출신입니다. 호수와 배에 관해 일가견이 있다는 뜻이지요. 

 

제자들은 배를 저었고 예수님은 잠이 드셨습니다. “그때에 돌풍이 호수로 내리 몰아치면서 물이 차들어와 그들이 위태롭게 되었다”고 루카는 전합니다. 다급해진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면서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고 소리칩니다.(8,23-24) 

 

‘호수에 돌풍이 내리쳐 풍랑이 인다 해도 얼마나 대단할까’ 하고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갈릴래아 호수는 그 지방 사람들은 바다라고 불렀을 정도로 큰 호수입니다. 호수 넓이가 약 170㎢ 여의도 면적의 20배에 이르지요. 게다가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서풍과 동쪽 시리아 사막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호수에서 마주치면서 일으키는 돌풍이 만들어내는 거센 풍랑은 뱃사람들조차도 겁을 낼 정도로 위력이 대단하다고 합니다. 

 

제자들의 소동에 잠이 깨신 예수님은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십니다. 그러자 곧 물결이 잠잠해지고 호수가 고요해집니다. 그러고 나서 제자들에게 “너희의 믿음은 어디에 있느냐?” 하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악령들인 이들을 치유해 주시며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일까지도 보았습니다. 하지만 위급한 상황이 닥치자 믿음은 간데없고 제 목숨 구하기에 급급한 제자들의 태도를 나무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귀에는 예수님의 꾸짖음도 들어오지 않는 모양입니다. 두렵고 놀라워서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물에게 명령하시고 또 그것들이 이분께 복종하는가?”(8,25) 하고 수군거립니다.

 

 

마귀들과 돼지 떼(8,26-39)

 

이렇게 한바탕 소동을 치르고 난 후 제자들은 갈릴래아 호수 동쪽의 게라사 지방으로 배를 저어갑니다.(8,26) ‘게르게사’ 혹은 ‘가다라’고도 하는 이곳은 이방인들의 지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 마귀 들린 사람이 마주옵니다. 그는 자기 고을에서 살지 못하고 무덤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는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말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당신께 청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8,28). 

 

마귀 들린 사람의 말은 두 가지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은 바로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또한 말씀 한 마디로 풍랑을 잠잠하게 하신 예수님을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도대체 이 분이 누구신가 하고 서로 수군거린 제자들의 물음(8,25)에 대한 답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줄곧 따라다닌 제자들도 아직 올바로 깨닫지 못했던 예수님의 정체를 마귀 들린 사람이, 곧 마귀가 대신 알리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둘째,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당신께 청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는 예수님과 마귀와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을 마귀 들린 사람의 입을 통해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이름을 물으시자 “군대”라고 대답합니다. 많은 마귀가 그 사람에게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귀들은 예수님께 자기들을 지하 세계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내리지 말아 달라면서 대신에 근방에 놓아 기르던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께 허락하시자 마귀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고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내리달리다 물에 빠져 죽고 말지요.(8,30-33)

 

여기서 지하 세계란 마귀들이 갇혀 지내는 곳을 나타냅니다. 마귀들의 일은 사람들 속에서 살면서 사람들을 사로잡아 격리시키고 파괴하는 것입니다. 마귀 들린 그 사람이 오래전부터 옷을 입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집에 있지 않고 무덤에 지냈고 또 쇠사슬과 족쇄로 묶인 채 감시를 받았지만 묶은 것을 끊고 마귀에게 몰려 광야로 나가곤 했다는 루카의 설명은(8, 27.29) 마귀가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그런 마귀가 지하 세계에 갇히면 더 이상 자기 일을 하지 못하게 되겠지요. 

 

그래서 마귀들은 돼지 속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를 허락하시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유다인 사회에서 돼지는 부정한 짐승입니다. 하느님의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사는 땅과 돼지는 같은 뜻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마귀들이 돼지 떼 속에 들어가고 돼지들이 비탈을 달려 모두 물속에 빠져 죽었다는 것은 마귀 들린 그 사람이 마귀의 권세에서 풀려났고 동시에 이방인의 땅이 더러움에서 해방되었음을 의미한다고 성경학자들은 풀이합니다.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놀라서 고을로 달려가 알리고 고을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무슨 일인지 보러 옵니다. 사람들은 마귀 들린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지역 주민 전체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예수님께 자기들에게서 떠나달라고 요청합니다.(8,34-37)

 

왜 게라사 지역 주민들은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요청했을까요? 마귀 들린 사람과 이방인의 지역은 마귀가 활개를 치는 곳이었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이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부정한 돼지들이 익사했다는 것은 이 고장에 대한 마귀의 권세가 끝나고 이 지역이 더러움에서 해방되었음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자유와 해방 자체가 이전의 행태에 젖어 있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부담스럽고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요청한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되돌아가실 때에 마귀 들렸던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집으로 돌아가, 하느님께서 너에게 해주신 일을 다 이야기해 주어라”며 그를 돌려보내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주신 일을 온 고을에 두루 선포하였다”고 루카는 전합니다.(8,37-39)

 

 

생각해 봅시다

 

- 집에서 살지 못하고 옷도 입지 않은 채 무덤에서 지내는 마귀 들린 사람은 공동체에서 소외된 사람의 처지를 그대로 나타냅니다. 그런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세력에서 풀어준 후 집으로 돌려 보내십니다. 이는 오늘날 여러 가지 이유로 공동체에서 소외되고 버림받은 채 살아가는 이들을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제시합니다. 그들을 공동체의 온전한 일원으로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그렇게 소외되고 버림받은 이는 누구일까요?

 

- 마귀 들린 사람은 예수님의 분부를 좇아 집으로 돌아가 자기 지방에서 복음을 선포합니다. 우리가 체험한 구원의 기쁨을 말과 행동으로 선포해야 하는 우리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 거센 풍랑으로 위험에 처하자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제자들처럼 우리 또한 위급한 상황에 부닥치면 주님께 대한 믿음보다는 다급한 마음에 “어떻게 좀 해주세요!” 하고 절규하지는 않는지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 믿음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9월 10일, 이창훈 기자]



4,267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