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7일 (수)
(백)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성경자료

[신약]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이 빛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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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0-16 ㅣ No.3866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이 빛을 만나다

 

 

요한 복음의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 이야기(9,1-12)는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극적이고 흥미롭다. 태어날 때부터 눈먼 그의 이름은 모른다. 그와 예수님은 운명처럼 만난다. 유다인들과의 과열된 논쟁으로 성전 안에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몸을 피하시려고 성전 밖으로 나오셨다. 그리고 길을 가다 그를 만났다.

 

 

남들이 보기에 그는 ‘왕따’

 

그가 남들의 시선을 끄는 사람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눈먼 이를 본 제자들이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9,2)라고 물었다.

 

이 질문은 당시 눈먼 이에 대한 유다인들의 사고를 보여 주는데, 질병과 고통은 ‘죄’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보았다. 욥기에서 엘리파즈도 질병과 고통을 얻은 욥에게 “생각해 보게나, 죄 없는 이 누가 멸망하였는가?”(4,7)라며 불행의 근거가 욥에게 있다고 본다.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이는 그 자신의 죄이든 또는 부모의 죄로 태어났든 당시 유다인들에게는 한마디로 죄의 어둠에 속한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내내 사람들의 병을 고치시고, 죄를 용서하시며 은총을 베푸신다. 진정한 ‘하느님의 일’은 사람을 살리는 일임을 보여 주신다. 길에서 구걸하던 눈먼 이는 그동안 보지 못한다는 이유로 편견과 소외, 억압의 삶을 이어 왔다.

 

예수님께서는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이에 대한 사람들의 인과응보적인 사상으로부터 사랑과 해방의 하느님을 보여 주시려 다가가셨다. 빛이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 곧 그의 두 눈에 ‘생명의 빛’을 주고자 하신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진흙을 개어 눈에 발라 주셨다. 여기서는 공관 복음서에 나오지 않는 ‘진흙’을 사용하신다. 현대에도 진흙은 마사지 등 다양하게 사용된다.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에겐 치유의 과정이 좀 더 세밀하게 묘사된다.

 

‘파견된 이’라는 뜻을 지닌 실로암 못으로 그는 보내졌다. 본디 실로암은 예루살렘 성 바깥에 있었다. 그런데 남유다의 히즈키야 임금 때 아시리아에 멸망한 북이스라엘의 난민이 많이 유입되자 도시를 확장하는 바람에 성안에 놓이게 되었다고 한다.

 

실로암 못으로 눈먼 이가 혼자 갔다기보다는 아마 사람들이 그를 부축하여 데리고 갔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는 씻었고, 처음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어두운 현실 속에서 굽히지 않은 소신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한다. 사람의 얼굴에서 눈은 아주 중요한데 시각뿐만 아니라 눈을 통해 상대의 마음을 읽기도 한다. 그리고 눈빛은 그 사람의 심성을 드러낸다고도 한다.

 

두 눈을 뜬 채 사람들에게 돌아왔다. 그런데 오랫동안 눈먼 이의 얼굴에 익숙했던 마을 사람들은 이제 눈빛이 있는 그의 얼굴을 금방 알아보지 못한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혼란일 것이다.

 

평생을 눈이 먼 채 살던 사람이 눈을 떴다면 모두 기뻐해 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그런데 슬프게도 본문 어디에도 예리코의 눈먼 이의 치유 때처럼 눈먼 이와 군중이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며 기뻐했다는 내용이 없다.

 

마을 사람들이 그를 바리사이들에게 데려간다. 눈을 뜬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이였던 사람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이 갑자기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화제로 옮겨진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해 기록한다.

 

치유 사화에서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예컨대, 치유된 이의 고백이며 선포이기도 한 ‘다윗의 자손’, ‘하느님의 아들’, ‘주님’ 등이 그것이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이 아니라는 바리사이들과, 죄인이 그런 일을 행할 수 없다는 다른 무리 사이에 갑론을박이 오간다. 이때 눈먼 이는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소신 있게 말한다.

 

치료와 치유는 둘 다 아픈 사람을 낫게 하는 것이다. 몸이 치료되어도 마음의 치유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예컨대, 벳자타 못 가의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요한 5,14).

 

그의 몸은 건강해졌지만, 그가 죄에 빠질 마음의 가능성이 남아 있음을 말하는데 그건 개인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병이 나았는데도 누가 자신을 고쳐 주었는지 모른다.

 

또 치료는 되지 않았지만, 마음의 치유가 된 경우도 있다. 예컨대, 동성애자의 권리를 다룬 ‘필라델피아’란 영화에서 앤드루는 에이즈가 치료되지는 않았지만 그를 변호해 준 조 덕분에 마음이 치유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그런 반면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이는 육신의 눈을 떴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일어난 은총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진 것으로 보아 치료와 치유가 다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생명을 살리는 안식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은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이 아니라고 단언하는 근거는 안식일이다. 루카 복음서에는 안식일 치유가 가져온 분란의 강도를 알 수 있는 사화가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열여덟 해 동안이나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 없었던 여자를 치유하셨을 때이다.

 

그때 회당장이 분개하여 군중에게 이렇게 외쳤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루카 13,14).

 

또 서른여덟 해나 앓던 사람을 치유해 주셨을 때도 바리사이들은 병이 나은 그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요한 5,10)라고 했다.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해질 무렵까지 하느님 안에서 창조적인 ‘쉼’을 갖는 날이다. 이 안식일은 현재에도 충실히 실천되고 있다.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불을 피우는 것을 금하기 때문에 그날은 요리조차 하지 않는다. 전자 제품을 사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행위나 자동차 운전도 금지한다.

 

안식일 준수로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았다. 기원전 2세기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는 유다인들이 안식일에는 싸우지 않는 것을 이용해서 예루살렘을 공격해 많은 유다인을 죽였다. 그리고 6일 전쟁으로 알려진 제3차 중동 전쟁, 욤 키푸르 전쟁으로도 부르는 제4차 중동 전쟁도 안식일과 연관이 있다.

 

그들에겐 그토록 긴 세월 동안 고통받았을 사람들에 대한 연민은 보이지 않는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병이 나은 사람들에게 회당장이나 바리사이들이 그토록 매정하게 말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치료 행위를 노동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공관 복음에서는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사람들을 치유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을 죽이기로 모의할 정도로 그들에겐 율법 준수가 중요했다(마르 3,6; 마태 12,14 참조).

 

이렇게 형식이 강조되어 본질적인 의미를 잃은 경직된 율법에 맞서 이루어진 예수님의 안식일 치유는 생명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 주고 있음을 복음서는 말해준다.

 

 

‘보는 이’의 힘

 

놀랍게도 전에 눈이 멀었던 이가 눈을 뜬 것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바리사이들은 믿지 않는다. 마음이 얼마나 완고하면 그럴 수 있는지 궁금하다.

 

결국 부모가 불려 왔다. 부모도 자기 자식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예수님께 얼마나 고마워했을까! 그러나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면 회당에서 내쫓기로 한 유다인들의 합의 때문에 대답을 아들에게 미룬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요한 복음의 공동체가 기원후 90년께에 얌니아에서 열렸던 회의의 결정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뒤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는 얌니아에서 회의를 열어 민족적 재난에 대응하여 자신들의 종교를 보전하고 유지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였다.

 

이때 채택된 기도문 중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을 생명의 책에서 없애 주고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않게 해 달라는 내용이 있다. 그리스도인들로 판명되면 회당에서 쫓겨나는 것뿐만 아니라 마을 공동체에서 소외되어 생활도 어려워졌기에 눈먼 이의 부모는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눈먼 이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한 바리사이들 앞에서 예수님에 대한 제 생각을 당당하게 피력한다. 이에 바리사이들은 비겁한 비난을 퍼부으며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당신은 완전히 죄 중에 태어났으면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오?”(요한 9,34)

 

바리사이들의 비난은 눈먼 이가 바리사이들보다 훨씬 뛰어난 심안을 가졌음을 역으로 말해 준다.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이는 누구보다 먼저 진리를 알아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두둑한 배짱과 용기는 그가 높은 자존감을 지녔음을 보여 준다.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이는 자신을 치유해 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은 사람들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그는 남들의 편견이나 비난 속에서도 예수님에 대한 감사와 믿음을 끝까지 지켜나갔다. 진리를 수호하고 자신을 지켜 나갈 줄 아는 그는 진정 ‘보는 이’이다.

 

* 허귀희 클라라 -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교수녀회 수녀. 예수회 영성 센터에서 ‘성경과 영성’을 가르치며, 성경의 학문적이고 영성적 의미를 통합하고자 연구하고 있다. 미국 엘름스대학교에서 종교학과 신학을 전공하고, 가톨릭대학교에서 성서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7년 10월호, 허귀희 클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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