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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자료

[인물] 성경 속의 여인들: 마르타와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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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8-14 ㅣ No.5868

[성경 속의 여인들] 마르타와 마리아

 

 

얼핏 보면, 마르타와 마리아는 예수와 아주 가까운, 그래서 예수를 제대로 이해할 것 같은 인물로 여겨진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 않은 것이, 라자로를 살리는 이야기에서(요한 11,1-54) 마르타와 마리아는 형제 라자로의 죽음엔 슬퍼하나 지금, 여기서 시작된 예수의 부활과 생명엔 무딘 반응을 보인다. 부활과 생명을 갈망한 마르타와 마리아는 지금의 예수가 아니라 ‘마지막 날’의 예수를 기다린 것이다. 예수와 가깝지만 예수의 진면모를 꿰뚫어보지 못하는 마르타와 마리아는 오래되어 진부한 신앙에 갇혀 새로운 ‘지금’을 아쉽게 만든다.

 

향유를 붓는 이야기는 어떤가(요한 12,1-11). 향유를 붓는 여인을 마르코 복음은 무명으로 소개하지만, 요한 복음은 마리아로 내세운다. 도유의 행위는 예수의 장례 날을 가리키고 있으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으며 도유를 한 마리아조차 예수의 죽음에 대해 어떠한 말도 하지 않는다. 도유의 본디 의미는 예수가 걸어가는 십자가 길을 톺아 보는 일련의 이야기 안에서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에 대한 진정한 믿음의 길을 막 터놓은 셈이다. 비록 예수가 누군지 정확히 알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루카 복음에는 마르타와 마리아 사이에 다소 미묘한 긴장감이 형성되는 이야기도 있다(루카 10,38-40). 손님을 맞아 식사를 준비하는 마르타와 다르게 마리아는 마치 제자인 듯 예수 앞에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마르타는 분주했다(루카 10,40). ‘분주하다’로 번역된 그리스 말 동사 ‘페리스파오마이(περισπαομαι)’는 과도한 일에 억눌려 집중하지 못하는 자기 상실의 상태를 말한다. 마르타는 예수를 시중드는 일을 중요하게 여긴 듯 하나, 중요한 일을 해내는 자신이 버거웠다. 예수를 모시려 했으나 예수를 잊고 자신을 잃었다.

 

반면 마리아는 앉아 있고, 듣고 있을 뿐이다. 그런 마리아의 모습을 예수는 ‘좋은 몫’이라 한다. 무엇이 중한가. 무엇이 값진 것인가. 예수 앞에 어떤 모습이 과연 정당하고 합당한가. 교회는 전통적으로 마르타를 활동 수도회로, 마리아를 관상 수도회로 이해하는 습관이 있었다. 하느님 일에는 활동도 관상도 필요한 법이다. 그러나 두 여인을 비교우위의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그때부터 문제는 심하게 뒤틀려 어지럽게 된다. 누가 더 나은가, 라는 질문은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의 본질을 비껴간다. 우린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왜 자신의 일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가. 마리아는 더 혹은 덜 좋은 몫을 누리고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제 몫을 누리고 있을 뿐이고, 예수는 그것을 좋은 것이라 했다. 예수는 제 일과 몫을 제 것으로 즐길 줄 아는 이에게 드러날 뿐이다.

 

제 삶과 일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실은 제 삶과 일에서 적당히 벗어나 있어야 한다. 일에 파묻히고 일에 저당잡혀 일 그 자체를 제 삶으로 여기는 경우, 우리는 제 것 외의 다른 삶을 허망한 것이라 우긴다. 허망하다라는 해석은 대개 다른 이의 삶을 재단하고 고단하게 만든다. 무뚝뚝한 가부장적 아버지는 제 일이 곧 가정의 일이고, 가정을 건사하는 일이라는 이유로 어머니의 집안일을 허망하게 폄훼했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쓸고 닦고,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개고 넣고… 이 모든 일을 ‘집에서 노는 일’이라 했다. 노는 그 일이 아프고 슬프고 그럼에도 꿋꿋하고 아름답고…, 좋은 일이라는 사실은 어머니의 손에 길러진 수많은 자녀들의 삶이 증명한다. 예수를 향한 믿음과 사랑의 길 역시 안타까운 유한함에 갇혀 제 것을 전부로 착각하는 지금의 모습을 성찰하는 데서 시작한다. 제 일과 삶에 얼마간의 객관적 거리가 제 일과 삶의 미학적 심연을 더욱 깊게 만든다. 예수 앞에서 그의 말을 곰곰이 듣고 있는 마리아. 그녀는 실은 제 삶 안에 비친 예수를 통해 제 삶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곰곰이 듣는 것이 지금, 진부하고 고착화된 우리의 신앙 안에 갇힌 예수를 숨 쉬게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저마다 숨 쉬게 된다.

 

[2022년 8월 14일(다해) 연중 제20주일 대구주보 3면,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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