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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세계] 알렉산드로 발리냐노의 일본선교와 동아시아 적응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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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5-14 ㅣ No.1028

알렉산드로 발리냐노의 일본선교와 동아시아 적응주의*

 

 

국문 초록

 

이 연구는 동아시아 적응주의 선교규범을 창시한 알렉산드로 발리냐노의 일본선교를 인식과 행위전략의 차원으로 살펴봄으로써, 동아시아 적응주의의 성격과 방법을 재구성한다. 그리스도교가 선교지의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자신의 종교적 목표(복음화, 문화권력의 선점)를 획득하기 위해 적합한 행위전략을 방법론적으로 모색하는 일련의 과정과 형상을 적응주의라고 부른다.

 

발리냐노는 민중들의 성격, 주거, 식문화, 일과 여가, 인간관계와 같은 일상생활의 문화에 대해 깊은 존경을 가지게 되었고, 문명화의 관점에서 일본문화가 가지고 있는 우수성을 항상 유럽과 다른 선교지 국가들(인도, 모잠비크 등)과의 비교를 통해 표현했다. 문화에 대한 인식과 이해의 맥락은 새로운 행위의 규범적 자원들을 적합하게 선별하고 구성한다. 고도 문명으로 각인된 동아시아 일본에 대한 이미지는 선교의 행위 전략으로서 엘리트주의를 산출하게 된다. 엘리트주의로서의 적응주의 행위전략은 세 개의 제도적 수준에서 추구된다. 첫째, 엘리트 영주계층의 복음화에 선교역량을 강화(계급의 장), 둘째, 그리스도교 헤게모니 강화를 위한 엘리트 양성으로서 학교교육의 확산(교육의 장), 셋째, 사회의 윤리와 규범 생산자로서 문화권력 선점을 위한 불교와의 경쟁(종교의 장). 세 개의 제도적 수준 내에서 전개되는 선교사와 토착 문화의 행위자(요소) 사이의 상호작용은 사회의 종교가 되기 위한, 혹은 상징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인정투쟁이다. 선교는 선교사라는 계급이 지닌 특정한 세계관과 문화를 선교 지역 내에서도 자연스럽고 보편적이며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발리냐노의 이러한 엘리트주의 행위전략은 이후 동아시아 선교사의 경로 의존적 선(先)모델이 된다. 발리냐노의 엘리트주의는 동아시아 일본이라는 사회적 맥락에서 출현한 특수성을 갖지만, 그 이후 중국과 다른 지역에까지 영향을 주고, 규범화됨으로써 선교에 있어 적응주의적 방법의 한 전형(典型)이 되었다.

 

 

1. 들어가는 말

 

일반적으로 특정 선교의 역사나 사건을 볼 때, 적응/비적응의 이분법적인 틀1)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태도는 초기 근대 선교사들의 경험에서 기인한다. 16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 국왕이 새롭게 발견한 대륙에서 선교사들에게 부여한 선교관할권(Padroado) 제도는 제국의 식민지 야욕을 위한 종교적 장치로 태동하였다.2) 교황의 교령에 의해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아메리카와 인도 및 아시아 일부의 지배권을 보장받았고, 식민지 토착민에 대한 착취와 억압에 선교사가 동원되기도 하였다. 착취와 억압의 명분은 문명과 야만이라는 편견에 의한 기준이었고, 일부 선교사들 역시 이러한 생각을 지니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선교지 문화 적응적인 사고와 태도가 주목을 받게 되었다.3) 특히 하비에르(Francisco Xavier, 1506~1552)가 일본을 경험한 이후 이러한 적응적 입장은 선교의 성공사례로 간주되었고,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 1539~1606)는 하비에르의 원칙을 보다 제도적이고 규범적인 원칙으로 만들었다. 이후 적응주의 원칙은 선교지 문화 요소를 긍정-수용-적응-성공과 부정-거부-비적응-실패라는 단순 이원 대립적 틀에서 인식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특정 선교의 역사적 형상을 적응/비적응이라는 단순 이분법으로 가치판단을 하게 되면, 선교 과정의 다차원성과 역동성에 대해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방해할 수 있으므로 보다 분석적이고 체계적으로 접근하여 그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적응주의 방법을 선교지 문화에 대한 존중으로 축소시켜서는 안 된다. 적응주의 전략은 개인의 자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맥락의 이해와 분석에서 도출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 대한 규명이 필요한 것이다.

 

종교를 부르디외가 주장하는 상징권력이라고 상정한다면, 선교는 선교사라는 계급4)이 지닌 특정한 세계관과 문화를 현지문화 속에서 자연스럽고 보편적이며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여, 그리스도교의 규범이 그 사회에서 보편적이고 문화적인 힘을 갖게 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5)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교의 가치를 담지한 선교사의 행위가 선교지의 정치, 토착종교, 경제, 계급과 같은 다양한 사회체계와 마주했을 때, 여기에는 긍정-수용-적응과 부정-거부-비적응의 과정이 복합적으로 교착한다. 이러한 현상은 하비에르, 발리냐노, 리치(Matteo Ricci, 1552~1610)의 시대에도 나타났다.6) 선교를 문화와 제도, 규범이 다른 사회에 들어가서 영향력 있는 상징체계가 되기 위한 전략적 행위로 이해할 때, 이러한 행위는 선교지 사회문화의 맥락에 의해 구성되는(socio-culturally constructed) 다차원의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적응주의적 선교방법은 고착화된 단일적 도그마가 아니라 선교지역의 문화가치와 맥락을 이해하고, 여기에 준거하여 행위전략으로 구성되는 일련의 흐름과 다원적 유연성을 보인다.7) 다시 말해 적응주의는 선교행위의 결과를 판단하고 구성하는 틀이 아니다. 적응주의적 선교의 특징은 적응주의 선교방법을 제안한 발리냐노8)의 일본선교에서 이미 드러난다. 그의 일본문명의 경험에서 산출된 적응주의적 선교방법은 엘리트주의로 특정되고, 이러한 엘리트주의는 중국과 조선의 그리스도교 토착화9)에 있어 중요한 준거이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즉 일본과 동아시아 맥락에서 태동한 적응주의 방법이 엘리트주의이지 엘리트주의가 곧 적응주의의 확고한 고정값이 아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글은 발리냐노의 일본 경험과 여기에 준거한 엘리트주의의 형상을 조명한다. 그리스도교가 일본사회에 적응적으로 수용되도록 선택한 방법론이 엘리트주의인데,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 사회체계 내에서 전개되었는지를 발리냐노의 선교행위를 통해 분석하고 그 의미를 색출한다.

 

논의에 앞서 주제와 관련된 최근의 연구를 몇 가지 되짚어보자.10) 먼저 볼피의 《순찰사 발리냐노와 일본》11)은 제국주의적이고 폭력적인 맥락에서 이루어진 선교에 대한 부작용의 대안으로서 선교지 문화에 순응적인 규범을 창출한 영웅으로 발리냐노를 묘사하고 있다. 볼피는 발리냐노의 일본선교 성공이 선교지의 문화 존중과 상황 고려에 근거한다고 평가한다. 쿠와하라 나오키[桑原直己]12)는 발리냐노의 적응주의가 일본이라는 특정 지역문화에 대한 경험에서 산출된 직접적 결과라는 것을 강조한다. 적응주의는 동아시아(일본) 문명이 담지한 고도의 인문적이고 윤리적인 사회문화와 유럽 르네상스 문화와의 유사성 속에서 창출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나오키의 생각에는 일본 문명에 대한 주관적 우월성이 녹아있다는 편견을 가질 수도 있지만(볼피도 마찬가지 맥락이지만), 동아시아의 문명성이 적응주의라는 문화상대주의적 태도를 낳았다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점은 일정 부분 수용할 만하다. 김혜경의 연구13)는 일본 · 조선 · 중국이라는 동아시아의 맥락에서 순찰사로서 발리냐노가 보여준 탄력적이고 유동적인 선교정책과 태도에 관한 역사적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세 번에 걸친 일본선교를 통한 경험과 인식이 엘리트 지배계급을 상대로 하는 선교전략의 동기가 되고, 중화문명에 준거한 일본과 조선의 우수한 문화를 알게 됨으로써 선교지 문화에 대한 순응적 적응의 동기가 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연구의 흐름이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발리냐노가 일본과 동아시아 문명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그 우수성을 체감함으로써 선교지 문화에 대한 존중과 수용이라는 인식적 태도가 산출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에서 발리냐노는 선교지 사회공간에서 그리스도교의 인정과 발전을 위해 선교 방법의 원칙으로서 엘리트주의를 구상하고, 이를 수행하기 위한 전략적 선교정책을 다양하게 기획해나갔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발리냐노의 일본문명에 대한 인식과 타자형상, 그리고 여기에 준거한 일상생활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발리냐노의 대응과 원칙의 성격을 규명한다(2장). 발리냐노는 동아시아의 일본에 대한 인식에 기초하여 엘리트 선교전략을 세 개의 제도적 층위에서 구사한다. 세 개의 제도적 층위는 계급(사회지배계급의 이용), 종교(토착종교로서의 불교비판), 교육(엘리트 지도자 양성)이다. 첫째, 발리냐노는 계급제도를 이용했다. 강한 가부장적 계급사회에서 지배권력은 일반 국민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리냐노는 동아시아에서 영주와 귀족(엘리트지배층) 선교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둘째, 토착 종교인 불교를 경쟁적 비교대상으로 삼았다. 전국시대 사회를 통합하고 규율하는 기능으로서의 토착불교는 그리스도교가 참조해야 할 파트너이자, 넘어서야 하는 경쟁자이기도 하다. 특히 발리냐노는 불교에 대한 비판을 통해 그리스도교는 사회의 윤리와 이념의 측면에서 더 우월하고 정당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셋째, 선교효과의 극대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교육을 수단으로 삼았다. 교육은 그리스도교 상징권력을 그 사회 안에 강력하게 각인할 수 있는 도구가 된다. 발리냐노는 방인(邦人) 성직자 양성과 귀족 계급의 청소년 교육을 위해 각 지역에 세미나리오와 콜레지오를 기획하고 세우게 된다(3장). 끝으로 발리냐노의 적응주의가 동아시아 교회에 남긴 의미를 짚어본다(4장).

 

 

2. 동아시아 문명에 대한 인식과 사회적 적응규범의 탄생

 

선교의 적응주의적 태도는 16세기 하비에르와 발리냐노가 일본 및 동아시아 문명을 경험하면서 태동하였다. 이 장에서는 발리냐노가 어떻게 일본을 고등문명으로 인식하였는지에 대한 경위와 맥락을 분석적으로 서술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명에 대한 긍정과 수용적 인식은 일본과 동아시아 문화에 대한 수용적 규범을 형성하게 했다. 발리냐노의 문화적응적 행위전략인 엘리트주의는 이러한 지점에서 출현하였다.

 

1) 일본문명에 대한 인식

 

발리냐노의 일본에 대한 긍정적이고 수용적 인식은 일본에 첫발을 내디딘 그의 예수회 선배 하비에르의 영향이 크다. 하비에르의 일본문명에 대한 인식은 예수회 안에서 동아시아 타자형상의 초석을 형성했다.14)

 

1549년 8월 15일 하비에르, 토레스 신부와 죠안 페르난데스 수사 등 3명의 예수회원은 안지로와 함께 그의 고향인 가고시마에 상륙했다. 이로부터 시작된 하비에르의 2년간의 일본 경험15)은 동아시아 선교의 적응적이고 수용적인 방법론 구상을 산출했다. 하비에르는 일본의 정치체계가 대단히 엄격한 위계질서 아래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당시의 일본사회에 가장 효과적인 선교방법은 봉건영주와 무사 엘리트계급을 대상으로 하는 톱−다운 방식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하비에르는 규슈 서남부의 유력 다이묘인 오토모 가문의 신원보증을 이용하여 교토의 천황을 알현하려고 모색했다. 하비에르는 영주 중심의 선교활동에 집중하였다. 영주의 종교가 신민의 종교가 된다는 사실을 하비에르와 예수회 선교사들은 깊이 체험했다.16) 하비에르 이후 30년 동안 그의 후예들은 일본의 정치 지형을 읽고, 그것을 이용해 일본선교를 발전시켰다.17) 하비에르는 자기를 낮춰서 대중의 마음을 얻는 평민선교의 접근방식이 일본인들에게는 별로 효과적이지 않았으므로, 선교사의 신분적 습속을 엘리트 승려 신분과 동일시하는 행위전략을 선택한다.18) 이러한 엘리트 문화를 이해하고 거기에 적합한 적응주의적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유훈은 발리냐노에 이르러 체계적 규범화의 과정을 밟는다.

 

하비에르의 후임 코스메 데 토레스(Cosme de Torres, 1510∼1570) 신부는 하비에르의 선교 정책 즉, 엘리트 귀족을 중심으로 한 톱-다운 방식의 선교전략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그 선교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문화와 일본인에 대한 긍정적 수용. 둘째, 포르투갈 상선의 일본 내항을 선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이용. 셋째, 봉건영주의 선교허가를 통해 신하와 영민에 대한 선교의 자유 확보. 넷째, 기회를 활용하여, 수도인 미야코(교토) 선교에 착수. 이러한 하비에르의 유훈은 잘 지켜졌으나, 토레스 이후 2대 선교장인 카브랄(Francisco Cabral, 재임기간 1570~1581)의 엄률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정책은 일본사회와 예수회 안에서 많은 갈등을 야기했다. 1579년 동인도 순찰사19)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한 발리냐노는 카브랄 체제를 개혁하면서 선교지 문화에 적응적인 정책을 규범화한다.20) 선교는 다른 문화에 친화적으로 적응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일본 경험의 산물로서 이러한 선교지 문화 존중과 수용적 자세는 이후 다른 지역의 복음 선교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일본 문명 인식에 대해 살펴보자. 발리냐노가 일본에 도착할 무렵, 그는 일본이 다른 선교지역과 비교해서 인종적, 문명적으로 우수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다 피부가 하얗고, 아주 예의 바르다. 일반 서민이나 노동자임에도 그 사회에서는 감탄할 만한 예절을 갖고 품격있게 양육되어, 마치 궁정관리와 같이 보인다. 그 점에서는 동양의 다른 제 민족뿐만 아니라 우리 유럽인보다 우수하다(…). 국민은 유능하고 뛰어난 이해력을 가졌고 아이들은 우리 유럽인의 공부나 규율을 모두 잘 배우고 유럽 아이들보다도 훨씬 쉽게 우리들의 언어로 읽고 쓰는 것을 익힌다. 또한, 하층민들 사이에서도 우리 유럽인 사이에서 보이는 난폭하거나 무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일반적으로 모두 우수한 이해력을 가지고 잘 양육되었으며 맡은 일에 숙달돼 있다.21)

 

발리냐노는 동인도와 유럽 문화를 비교하는 시각에서 일본문명을 인식한다.22) 검은 피부색과 열등한 카스트의 비지성적 문화를 가진 인도와 달리23) 일본과 중국이라는 동아시아는 완전히 다른 문명이었으며, 오히려 유럽을 능가하는 것으로도 인식했다. 그는 피부색과 더불어 문명의 척도가 되는 교육, 에티켓, 학문능력의 우수성의 관점에서 일본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24)

 

일본인은 전 세계에서 가장 체면과 명예를 중시하는 국민이라고 생각한다. 즉 그들은 모멸적인 말은 말할 것도 없고 화를 품은 말을 견딜 수 없다. 그래서 가장 하층민이나 농부와 말할 때도 우리는 예절을 다해 지켜야만 한다. 아니면 그들은 그 무례한 말을 가만히 참지 않고 그 일을 포기하거나 얻을 수 있는 수입이 있어도 다른 일을 찾는다.25)

 

그들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인내심이 강하고 그 불행을 견뎌낸다. 아주 강한 국왕이거나 영주가 그 소유하는 것을 모두 잃고 자국으로부터 추방되어도 부끄러움과 빈곤을 참아내면서,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는 것처럼 조용하고 처연하게 생활하는 것을 볼 수 있다.26)

 

발리냐노는 일본인의 성격을 말하면서 자존심과 인내를 가장 두드러진 점으로 꼽고 있다. 일본선교에 있어 현지문화의 맥락을 긍적적으로 수용하고, 사회적 관계 속에 내재된 민중의 사고방식과 관습을 고려하라고 강조한 데에는 일본인들의 습속에 대한 인식을 근거로 하고 있다.

 

아이들 간에도 듣기 싫은 말을 입 밖에 내지 않고, 우리 유럽인들에게서 보이는 것처럼 뺨을 때리거나 주먹질로 서로 때리지 않는다. 아주 의례적인 언어로 서로 이야기 나누고, 아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어른스러운 이성과 냉정과 착실한 태도가 유지되어 서로 경의를 잃을 일이 없다. 이것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극단적이다(…). 복장, 식사, 그 외 모든 것에 있어서 대단히 청결하고, 아름다운 조화가 유지되며, 모든 일본인이 마치 같은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일본인은 다른 것에서는 우리보다 열세이지만, 결론적으로 말해서 일본인은 우아하고 예의 바르고 뛰어난 천성과 이해력을 소유하고, 이상의 점에서 우리를 능가하는 우수한 점은 부족한 것 없이 넘칠 것이다.27)

 

일본의 지리, 역사, 문화, 성격에 대한 발리냐노의 인식에는 유럽과의 비교는 물론 다른 선교 지역과의 비교를 통한 그 독특함과 우수함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결국 일본의 문화적 준거인 중국에 대한 존중과 중국선교에 대한 비전을 형성하게 했다. 인도, 아프리카, 아메리카에서 형성된 인종주의적 야만의 형상은 동아시아 극동의 섬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조형되었다. 발리냐노의 선교지 중심의 규범과 정책은 바로 이러한 특수한 인식에서 기인한 결과로 볼 수 있다.28)

 

2) 일본문화와 사회적 적응규범

 

발리냐노는 순찰사로 일본에 온 첫 2년 동안 일본에서의 선교상황에 대단히 고무적이었는데, 그것은 규슈에서 얻은 놀라운 선교 성과에 관한 보고를 접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곧 일본이 동아시아 예수회 선교의 중심 거점이 될 것으로 확신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당시 선교장이었던 카브랄과 몇몇 유럽 중심주의적 근본주의자들의 행태에 발리냐노는 위기감을 느꼈다. 즉 선교사들이 일본 사회질서에 적합하도록 통합되지 않으면 당시의 유리한 상황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위기를 감지한 것이다.29) 이러한 맥락에서 발리냐노는 선교지에서 일상생활의 사회적 관계방식에 친화적으로 적응할 것을 주문하였다. 즉 선교지에서 일상생활의 사회적 요소들, 언어, 예절, 복식, 생활습관들 속에 배태된 사회적 상징체계들을 수용하는 자세를 갖도록 하였다. 발리냐노는 이러한 측면에서 선교지 문화를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존중하는 규범을 채택한 효시로 볼 수 있다.30)

 

발리냐노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예수회 내에는 세 개의 신분적 계층이 존재했다. 첫 번째 신분은 사제들이다. 이들은 교회 내에서 권위가 있으며, 처음엔 모두 유럽인이었다. 다음이 수도자(이루만, イルマン)로서 다수가 유럽인이었지만, 1592년 발리냐노가 두 번째 일본을 방문했을 때는 일본인이 60명 정도로 상당한 수에 달하고 있었다. 마지막 신분은 도슈꾸[同宿], 즉 일본인 평신도 선교 보조자라 불리던 사람들로 1604년에는 260명에 달하고 있었다. 이 마지막 신분은 성직자에 속하지는 않지만 포교활동의 성공을 위해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31) 이미 첫 번째 일본체류 기간에 발리냐노는 예수회의 일본인 협력자(도슈꾸)나 수도자를 평등 원칙에 따라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당시 일본 선교장이었던 카브랄(Francisco Cabral)은 여기에 반발했다.32) 우스키에서 열린 일본 예수회원 협의회 이후 1580년 10월 27일 발리냐노는 로마의 총원장 앞으로 서간을 보내면서 카브랄의 지도하에 초래된 ‘예수회 파멸의 위험’을 보고하였다.33) 카브랄의 일본문화에 대한 부정과 폄훼는 예수회 내부에서도 일본선교에 대한 위기감을 불러일으켰고, 여기에 대해 발리냐노는 현지문화를 존중하는 새로운 생활원칙을 제시하였다.

 

첫째, 예수회에 들어오는 일본인을 모든 면에서 유럽인 선교사와 동등하게 대우하고,34) 도슈쿠[同宿]도 그 신분에 따라 동등하게 대우하는 것이다(…). 둘째, 예수회의 회칙에 따라 온화와 애정을 가지고 일본인을 대우하고 통할하며, 덕과 종교적 속죄를 가르치도록 노력한다. 그리하여 우리 마음속에 상스러움이나 격정, 분노로 인한 동요, 무례나 모욕적 언사가 느껴지지 않도록 한다(…). 셋째, 습관이나 태도, 행동거지가 다른 타 국민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거나 험담을 해서는 안 된다(…). 넷째,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일본인을 도와주기 위해 고향을 등지고 수많은 고난을 거쳐 왔기 때문에 우리가 일본인에게 순응하는 것을 거부하여 성과와 사업을 파멸시켜선 안 된다. 일본인은 그들의 습관, 의례, 태도, 행동을 최고라고 여기고 있으므로, 그것을 (우리가) 준수함으로써(…), 예수회와 거룩한 신앙은 좋은 평판을 얻게 될 것이다(…). 다섯째, 우리는 유럽인의 기호를 모두 포기하고 스스로 절제하여 그들의 기호에 맞춰 그들의 음식에 적응해야 한다.35)

 

일본문화를 경시했던 카브랄과 반대로 발리냐노는 유럽인이 일본문화에 적응하는 것을 추구했고, 그러기 위해 생활양식과 사회관계의 규범을 명문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동아시아 특히 일본에 파견되는 선교사들의 적응 매뉴얼로 ‘예수회사례법지침’36)을 저술했다. 이 책 안에서 발리냐노는 예수회원 자신을 불교승려에 준하는 지위로 정립하고, 일본의 신분질서 안에 자신의 습속과 정체성을 형성하게 했다.

 

한편 발리냐노는 언어, 표정, 동작과 같은 일상생활의 상징적 상호작용 속에서 일본사회의 마음을 읽고 그것을 수용하려고 하였다. 일본인이 중시하는 형식의 존중, 속마음(진실)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들, 표정, 몸짓은 물론이거니와 돌려 말하기, 신분의 상하 관계에 따라 변하는 언어 양식들, 예컨대 말머리(お, ご)의 바뀜에 따른 미묘한 뉘앙스 차이, 이것들 모두가 사회적 관계를 부드럽게 하기 위한 기능적 장치라는 것을 발리냐노는 알고 있었다. 유럽과 다른 예법과 다양한 문화적 기표에 대해 그는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주문하였다.37)

 

결국 발리냐노가 제시한 현지문화의 수용과 적응이란, 동아시아 일본이라는 특수한 고등문명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획득한 경험적 산물이며, 이러한 경험에 의거하여 일상의 사회관계에서 나타나는 상징체계들, 즉 언어, 표정과 몸짓, 예절, 생활습관을 선교 차원에서 수용하고 규율화함으로써 그리스도교를 현지문화에 정합적으로 맥락화하고 있고, 이러한 그의 인식과 태도는 선교의 방법론적 엘리트주의로 귀결된다.

 

 

3. 행위전략으로서의 방법론적 엘리트주의

 

스위들러에 따르면 자신의 출신문화국을 떠나 새로운 문화에 적응할 때, 이주자(선교사)는 자신이 출신문화국에서 습득하고 사회화되면서 얻게 된 다양한 자원들, 즉 특정한 양식, 습성, 기술, 지식과 같은 것들을 모아서 구성한 레퍼토리(연장통, tool kit)를 가지고 이주지에서 새로운 행위전략을 만들어낸다고 했다.38) 즉 선교지 문화의 행위 결정의 구조적 기회들은 거기에 적합한 새로운 행위의 규범적 자원들을 선별하고 구성한다. 발리냐노는 일본의 현지문화를 이해하면서 자신의 출신국에서 경험했던 문화적 자원들을 동원하여 선교행위의 전략을 선별적으로 수립한다. 발리냐노 역시 그가 유럽에서 사회화 과정을 겪으며 체득한 다양한 문화적 자원과 아비투스(habitus)를 일본선교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발리냐노가 수립한 일본에서의 적응주의적 선교전략(방법)을 방법론적 엘리트주의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발리냐노가 엘리트주의적 문화 요소들을 그의 행위전략의 자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엘리트주의는 다양한 사회의 장(제도)내에서 선교행위의 전략으로 수행되었다. 발리냐노는 선교의 발전과 동력을 ‘위로부터의 선교’, 즉 엘리트 귀족에 대한 선교에서 발견하는데 이것은 유럽 봉건 귀족 사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유럽에서 사제는 지도자로서 귀족 신분과 가까웠고 지배계급을 이용하여 어떻게 교회사업을 관철시킬 수 있는지 발리냐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발리냐노는 불교라는 전통적 문화권력과 경쟁하는데, 유럽사회에서 스콜라철학으로 이교도와 대화적 논쟁을 하는 방법을 불교와 대결하는 데 적용하였다. 마지막으로 학교교육을 통해 엘리트 지도자를 양성하여 일본교회를 발전시키려 하였다.39) 유럽 역시 대학교육을 통해 성직 엘리트와 법률가를 양성함으로써 도시의 기능을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 장에서는 선교의 동학(動學)과 행위전략의 관점에서 발리냐노의 엘리트주의가 방법론적으로 세 가지 제도, 즉 귀족 중심의 선교(계급제도), 종교 엘리트로서의 불교비판(종교제도), 엘리트 인재양성(교육제도)의 차원에서 시도되었음을 분석한다.

 

1) 귀족중심의 선교

 

서구와의 무역을 원했던 일본은 포르투갈 국왕의 선교관할권을 가진 선교사들을 주요한 행위자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비에르가 안지로를 대동하고 1549년 가고시마에 들어왔을 때부터, 사츠마[薩摩] 영주 시마즈 타카히사[島津貴久]는 하비에르의 체류보장은 물론 시마즈 가신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것을 포함한 선교활동을 허가해 주었다. 그러면서 하비에르는 영주로부터 선교허가를 얻는 일이 그리스도교 선교의 미래에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수도인 미야코[京都, 교토]로 상경하여 일본의 왕이나 쇼군을 알현하려고 했다. 1551년 1월 중순 하비에르는 수도 미야코에 도착했으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천황이나 쇼군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전국시대의 현실에 적응하여 지방의 유력 다이묘로부터 보호와 지원을 얻는 방향으로 선교방법을 바꾸었다.40) 그리고 일본 서부의 중심인 야마구치를 선교의 거점으로 삼았다. 하비에르 이래 선교사들은 중앙의 권력자가 가장 강력한 선교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인식하였다. 유럽중심적이고 엄격한 태도를 보인 일본의 두 번째 예수회 선교장 카브랄 역시 귀족 엘리트에 집중하는 선교방식을 견지하고 있을 만큼 일본 봉건제가 가지고 있는 신분질서의 영향력은 강력했다. 카브랄은 1571년 9월 5일 로마의 총장 앞으로 보낸 서간에서 일본의 봉건 영주들이 강력한 세속의 선교사가 될 수 있다고 보고하였다.41) 이런 맥락에서 발리냐노는 예수회 톱-다운 선교방식의 성과를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일본에는 동양의 다른 지방과 달리 신분이 낮은 하층민들이 그리스도교인이 될 뿐만 아니라 무사나 신분이 높은 영주 및 왕(다이묘) 조차도 우리들의 거룩한 신앙을 앞장서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일본에 있어서 (선교)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쉽고, 가치가 있다.”42) 이후 예수회의 동아시아 선교는 방법론적으로 엘리트 계층의 선교에서 시작하여 평민에로 내려가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발리냐노는 인도의 분절적 카스트와 달리 위계적이면서 가부장적인 일본의 신분제 논리에 따라 엘리트 영주계층이나 승려와 같은 학자계급에 대한 선교가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당시 일본사회의 세력가들이 모인 수도 미야코(교토) 선교의 중요성을 피력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전반적으로 사람들이 고귀한 능력이 있고, 도리에 밝기 때문에 예수회원은 일본 전역에 걸쳐서 충분히 심사숙고하여 활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특히 수도(미야코) 주변에 있는 지역과 국가는 다른 지역보다 한층 주의를 필요로 한다. 거기에는 수많은 이유가 있다. 첫째 이유는 수도에는 궁정이 있다. 따라서 그 주변의 제 국가에는 가장 빛나는 귀족이 살고 있고, 또한 일본에서 가장 부유한 제 영주가 많이 있다. 그러므로 그 사람들은 가장 유능하고 그들에 의해 최대의 (선교)성과를 거둬들일 수 있다.43)

 

발리냐노는 세 차례의 일본방문에서 수도인 미야코[京都]를 방문하고,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 히데요시, 이에야스를 만났다. 특히 귀족 선교의 관점에서 발리냐노의 첫 번째 방문(1579~1583) 시기에 형성된 노부나가와의 관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발리냐노는 놀라운 선교성과와 귀족들의 관심, 순찰사에 대한 사회적 명예와 존경을 경험할 수 있었고, 일본 교회의 미래에 대해 대단히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44) 노부나가는 법화종 신자였지만 서양선교사들에 대해 호기심이 많았고 호의적이었다.45) 노부나가는 발리냐노와 당시 선교사로 활약한 오르간티노 신부, 프로이스 신부를 환대하고, 필요한 지원을 해주었다. 그는 사제관과 교회, 그리고 교회 운영에 대한 비용을 충당해주었을 뿐 아니라, 미야코 주변에 있었던 유력 다이묘들과 네트워크를 맺게 해주었다.46) 혼노지[本能寺]의 정변 이전까지, 노부나가의 장인이 세례를 받고, 그의 두 아들도 세례를 준비 중이었으며, 노부나가 자신도 개종하려는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한다.47)

 

한편 귀족엘리트 선교의 중요한 전략적 기획이 발리냐노에 의해 실행되었는데, 그것은 유력 신자 다이묘들의 자제를 유럽의 사절로 파견하는 것이었다. 발리냐노가 1581년 가을 규슈[九州]로 돌아와 아리마[有馬]의 세미나리오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교육받고 있는 소년들을 눈여겨 보았다. 12월 나가사키[長崎]에서 회의를 마친 후,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기 위해 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의 산조성[三城城]에 초청되었을 때 스미타다와 의논하여 소년들을 사절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사절은 규슈[九州]에 있는 세 명의 그리스도교인 다이묘, 오토모 소린[大友宗麟],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 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의 이름으로 파견하기로 했다. 주된 목적은 두 가지였다. 로마 교황과 포르투갈 국왕에게 일본교회의 인사말을 전하고 교회를 위해 필요한 지원을 요청하는 것과 귀국 후 일본인에게 유럽과 그리스도교의 영광을 적절하게 소개하는 것이었다. 파견되는 소년들은 정사(正使)로 휴가[日向]의 원로 다이묘 이토 요시스케[伊東義祐]의 손자 이토 만쇼[伊東満所], 오무라 스미타다의 조카 지지와[千々石] 미카엘이었고, 수행원으로는 오무라[大村] 가신의 아들 하라[原] 마르티노와 사이카이[西海] 마을 출신의 나카우라[中浦] 줄리앙이 뽑혔다. 그들은 1582년 2월 20일, 나가사키[長崎]항을 떠나 마카오와 말라카를 거쳐 고아에 도착한 후, 희망봉(喜望峰)을 돌아 포르투갈로 향했고, 1584년 8월 11일 리스본에 상륙했다.48) 이들 텐쇼[天正]소년사절은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각 도시와 로마를 순회하며 환대를 받았고, 유럽인에게는 호기심 어린 타자로서 새로운 지역과 문화에 대한 상상을 촉발시켰다. 또한 장래의 지도자인 일본 소년들에게 그리스도교 유럽문화는 일본사회를 보다 발전시킬 수 있는 새로운 문화적 전거로 각인되었다.

 

2) 그리스도교의 불교비판

 

적응주의 선교의 선구적 모델로 평가받는 발리냐노는 일본의 종교인 불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종교적 비(반)적응주의라고 표현하지만, 이러한 표현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종교란 사회의 마음과 행위를 규율하는 상징권력의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의 엘리트주의적 선교전략의 궁극적 목표는 불교가 충분히 제시하지 못하는 진리의 영역을 전하고, 사회의 풍속과 의식을 선도하는 종교가 되는 데 있다. 따라서 선교지의 토착 종교는 그리스도교의 토착화를 위해 배우고 존중해야 할 대상이지만, 일정 부분 경쟁적이고 비판적인 대상일 수밖에 없다. 드러먼드(Drummond)가 말한 것처럼 선교사들의 목표는 일본종교에 대한 적응이 아니라, 그들의 전체적인 종교의 장을 바꾸는 데 있었다.49) 물론 토착 종교는 선교지의 문화적 상징으로 작동하기에, 토착 종교가 갖는 종교적 규범적 상징체계를 일정 부분 수용하거나 변용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초기 동아시아 예수회의 선교원칙은 하비에르 이래 종교 다원주의에 대하여 대체로 보수적 태도를 보인다.50) 예컨대 하비에르에게 어떤 개종자가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죽은 그들 부모의 구원을 위해 기도와 선행의 효력에 대해 물었을 때, 하비에르는 하느님의 자비로움과 선함의 속성에 대해 말하면서도 그 부모의 구원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으로 대답하였다.51) 발리냐노 역시 단호하고 강렬하게 최후의 심판과 죽은 자의 부활의 확실성을 일본종교와 대비하여 주장하고 있다.52) 유럽에서 이슬람과 대결하면서 발전한 스콜라 철학과 신학은 그리스도교 교리와 윤리의 절대적 우수성을 논증하는 것이 주요 골자이다. 하비에르 이후, 선교사들은 모두 승려의 복장과 사회적 행위의 상징체계들(말씨, 표정, 행동습관 등)을 답습하였지만, 교리와 윤리에서는 토착종교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유지하며 그리스도교 교리와 윤리의 우월함을 역설하였다. 낯선 문화에서 그리스도교는 토착종교를 능가하는 사상과 윤리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종교로 인정받는 것을 최종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53) 스콜라 신학의 전통적 자원으로 무장한 발리냐노는 일본인과 일본문화에 대해 긍정적이고 좋은 인상을 받았으나, 교리와 윤리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부정적으로 대하였다.

 

일본인의 종교는 그들 사이에서 다수의 종파가 있는데 어떤 것은 본래 일본 고유의 종교도 있고, 아니면 중국인으로부터 유래한 것도 있다. 우선 그들은 두 종류의 신들을 갖고 있다. 하나는 ‘카미’[神]이고, 다른 것은 ‘호토케’[仏]라 불리며 그 둘을 함께 숭배한다. ‘카미’라 불리는 것은 일본인의 오래된 신들로 그것은 일반적으로 국왕이었던 사람이나, 옛날 일본에 생존했던 위인들이 많다. 그것에 대해서는 이교도의 제신(諸神) 역사가 늘 그랬듯이 굉장히 어리석고 오염되었으며 아주 입에 올리기에도 민망한 이상한 역사가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신들이 일본에 있어서 숭배되고 있는 것은 영혼을 구제한다는 믿음보다 현세의 (복락을 위해서) 어떤 힘을 가진다는 잘못된 생각, 혹은 일본의 제왕 및 귀족의 혈통에 대한 막연한 경외에 기초하고 있다.54)

 

발리냐노에게 일본의 토착종교인 신도와 불교는 현세적이고, 비합리적이며, 이교도적인 어리석음으로 받아들여진다. 발리냐노는 이러한 종교에 대해 그리스도교 교리의 우수성(종교적 순정성과 합리적 교리체계)을 강조하는데, 방법론적으로 그는 신도와 습합한 불교 윤리와 교리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을 피력한다. 먼저 교리적인 차원을 살펴보자.55)

 

발리냐노의 《니혼카테키즈모》는 《도치리나 키리시탄》처럼 유럽의 교리서를 일방적으로 번역한 교리서가 아니라 일본의 토착종교인 불교를 그리스도교적으로 논박하면서, 현지의 종교적 심성과 상징체계에 준거하여 그리스도교 교리의 정당성을 논술한 책이다.56) 이 책은 서론에서 스콜라 철학의 관점에서 이성 · 영혼 · 신에 대해 논하며, 이것을 기준으로 불교를 비판한다. 발리냐노는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고, 인간은 이성에 의해 사물의 형상을 파악하고 비판한다’는 관점에서 이성의 보편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이성의 보편성은 만물의 지고(至高) 유일(唯一)한 근원적 존재를 긍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근원의 성격과 형태에 대해서 사람들의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57) 이 근원, 내지 진리의 관점에서 일본불교 교리의 논리는 모순된다. 발리냐노는 불교의 근원(절대자)에 대한 교의가 ‘권실’(權實, Gonjit)이라 불리는 상호모순 개념으로 수렴된다고 보았다.58) ‘권’(權)이란 ‘임시적’ ‘방편’의 가르침이라는 뜻이며 ‘외적으로 현현되는 사물의 형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의견’(통속적 교설, 정토신앙)을 의미한다. ‘실’(實)은 ‘참된 진리’ 즉 ‘진실이라 부르는 내면에 숨겨진 것(진리)을 추구하는 자’의 행위(空思想, 禪宗)를 의미한다. 발리냐노는 일본승려들이 스스로를 진리라 칭하며 실교(實敎)를 추구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권교(權敎)를 가르치는데 발리냐노는 이러한 ‘권’과 ‘실’의 논리를 모순적으로 보았다.

 

불교는 종파가 각양각색인데, 상호 모순되고, 그 문제에 대하여 몹시 난잡하게 다루고 있다(…). 들리는 말(불승들에 의한)은 대부분 이해되지 않을뿐더러 설명하는 바가 제각기 다르다. 그러나 모든 설명은 ‘權實’이라는 단어로 해석될 수 있다. ‘權實’에는 두 개의 의미가 있는데, 즉 본체와 현상을 나타낸다. 사물의 현상에서 파악되고, 외면으로 드러나 인식되고, 언표될 수 있는 것을 추구하는 자가 있다면(權), 진실이라고 부르는 내면에 은폐된 것을 추구하는 자(實)가 있기 때문이다.59)

 

자신의 종파가 가장 잘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그들(불승)은 아미타나 석가가 사람들에 대하여 얼마나 크게 자비를 보여주는가를 강조하고, 인간의 구제는 쉬운 일이며 얼마나 큰 죄를 범했다할지라도 아미타나 석가의 이름을 부르며 그 공덕을 확신한다면 그 죄는 모두 정화된다(…) (權). 외면적으로는 영혼의 구제가 있다는 것을 민중에게 설교하면서 불승들의 대부분은 그 마음속에 내세가 없고(믿지 않고), 만물은 이 세상만으로 모두 끝나버린다고(즉, 공(空) 이라고) 믿고 있다(實).60)

 

상선벌악(賞善罰惡)의 관념에 의해 행위의 결과로 결정되는 내세를 인정하면서(윤회론에 입각한 정토(천당), 지옥), 한편으로는 일체의 물질과 영혼이 존재하지 않음을 아는 경지(깨달음)를 주장하는 것은 발리냐노에게 모순으로 보였다. 게다가 신자들에게는 윤리적 규율과 종교적 권위로 현세의 행복과 규범을 가르치며, 자신들의 비윤리적이고 비규범적인 생활과 행위들을 진여(眞如)의 초 세간적 본질(實)을 추구한다는 명분으로 정당화하는 승려들의 허위적 실상을 고발하고 있다. 즉 권교(權敎)에 대해 승려들 자신이 믿지 않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비판한다.61) 결국 ‘권’과 ‘실’은 모순이며, 불교는 이교도적인 비합리성을 지닌 교리체계로 폄훼된다.

 

《니혼카테키즈모》에서 일본불교의 교의에 대한 비판은 상권 제4강까지 전개된 후, 상권 제5강에서는 불교 제종파의 교설에 대한 윤리적 비판을 전개한다.62) 구체적으로는 ⓵ 우상숭배, ⓶ 승려의 여색을 금기하면서 남색을 인정하고 있는 것. ⓷ 동물을 살생하고 자살(할복)하는 것. ⓸ ‘나무아미타불’을 암송하는 것, 혹은 ‘묘우호우렌게교우’[妙法蓮華経]를 암송하거나 일상에서 늘 그것을 부르는 것만으로 죄를 정화하고 고통이 경감된다는 믿음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윤리적인 관점에서도 발리냐노는 불교의 승려와 처사의 비윤리적인 악표양이 일본민중을 잘못된 길로 이끈다고 비판한다.63) 발리냐노는 일본인의 부정적이고 비윤리적인 행위는 두 개의 원인에 기인하는데, 하나는 불교의 승려이고, 다른 하나는 전국시대의 혼란이라고 본다. 여기서 그리스도교 규범과 윤리가 일본사회 내 선악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의 논리가 가능해진다. 발리냐노는 다른 선교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불교를 ‘이교도’로 간주하며, 이교도의 비윤리적 규범을 극복하고 선교지의 질서와 발전을 위한 에토스로 그리스도교의 가치를 역설한다. 그는 선교사들에게 끊임없이 불승들과 토론하고 그리스도교가 가진 우위성을 설교할 것을 주문했다. 한편 발리냐노의 《니혼카테키즈모》는 토착종교(불교)의 교리와 윤리를 염두에 두고 그리스도교 교리를 전달했다는 관점에서 중국과 조선의 교리교육에 상당 부분 영향을 끼쳤다. 즉, 중국과 조선의 교리서 편찬에 있어서 종래의 사상과 종교를 흡수하고 재해석한 교리서의 표준이 되었다. 마에다는 《니혼카테키즈모》, 《천주실의》, 《주교요지》를 비교하면서 목차와 내용의 유사성을 발견한다. 예를 들면, 첫째, ‘유일한 근원자의 존재’에 대한 분석, 둘째, 하느님에 대한 설명을 ‘거울의 비유’로 설명하는 것, 셋째, 인간의 ‘영혼불멸’과 ‘상선벌악’에 대한 설명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니혼카테키즈모》→《천주실의》→《주교요지》로 이어지는 흐름을 보인다.64) 발리냐노가 일본의 토착종교인 불교를 비판하며 선교지 맥락에서 재해석한 교리서를 편찬함으로써 이후 중국과 조선에서의 교리서 편찬의 기준을 제시하였고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그리스도교의 확산에 기여하였다.

 

3) 학교교육과 엘리트 선교의 재생산

 

일본인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것을 거부했던 카브랄과 달리 발리냐노는 ‘일본인이 그리스도교의 견습생 정도가 아닌 유럽의 학문을 받아들일 능력의 소유자’로 평가했다. 일본인은 다른 아시아인과는 다르다고 보았기 때문에 일본인에게 유럽의 학문을 광대하게 도입하는 방침을 명했다.65) 일본에서 세미나리오, 콜레지오를 설립하고 어학교육과 인문교육을 실시하며, 최종적으로는 일본인 사제를 육성하는 체제를 수립하고자 했다.66)

 

하비에르 이후 유럽인들의 눈에 비친 일본인의 성격과 자질은 일본과 동아시아에 그리스도 교회가 크게 도약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의 꿈을 갖게 했다. 발리냐노는 일본과 동아시아 선교의 시작은 바로 교육과 양성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그는 ‘위로부터의’ 선교를 통해 사회의 지도층부터 그리스도교적으로 규율화하는 행위전략을 취하였다. 이러한 전략은 두 개의 계급적 대상을 지향한다. 하나는 일본이라는 고도문명국에서 교회가 사회적 종교로 인정받기 위해 우선 일본인 사제의 양성이 필요했고, 다른 하나는 정치와 문화의 장(場)에서도 지도적 임무를 수행할 우수한 신자들의 육성이 필요했다. 이는 그리스도교의 사회적 기반과 역량을 강화하고자 하는 목적을 위한 것이다.67)

 

우선 발리냐노는 미야코[京都], 분고(동규슈), 시모(서규슈)라 불리는 세 개의 포교구에 각각 1개씩 3개의 세미나리오(seminario, 중등교육학교)를 개설하고(1580년경), 전도유망한 청소년들에게 인문과 과학의 기초과정을 습득하게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학교가 이미 신자가 된 유력 영주들의 지원 속에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시모의 세미나리오는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 1567~1612]가, 미야코의 세미나리오는 오다노부나가가 지원하여 22명의 학생으로 개교했다.68) 세미나리오 위의 상급교육기관으로 미야코와 분고에 콜레지오(collegio, 고등교육기관)를 개설하려고 했다. 세미나리오에서 3년 아니면 4년의 면학기간을 마친 후, 학생들은 신학을 공부해 사제가 될지, 일반신자로서 학문을 더 심화시킬지를 선택한다. 미야코에 설치된 콜레지오에서는 교구사제를 양성하기 위한 신학 과정 및 다이묘와 같은 사회지도층 무사계급의 자제들을 그리스도교 지식인으로 양성하기 위한 철학, 법률, 정치 등의 과정을 두고자 계획했다. 발리냐노는 콜레지오를 동양 그리스도교 교육의 중심으로 키워 유럽의 각 대학과 교류하는 미래를 생각했다.69)

 

세미나리오 졸업 후 예수회에 입회하고자 하는 학생은 1582년 개교한 분고의 우스키 수련원(noviciado)으로 들어가고, 일본에 입국한 외국인 선교사들을 위해 준비교육과 어학교육을 담당할 학교를 오무라에 설치하려 했으나 최종적으로는 분고의 후나이[府內]에 개설했다. 일본인과 외국인의 차별 없이 모두에게 예수회원 양성과정을 위한 철학과 신학과정이 제공되었다. 1584년에는 동아시아 최초의 스콜라철학 강의가 후나이의 콜레지오에 개설되었다.70) 일반적으로 콜레지오에서는 신학과 과학, 문화 일반 외에, 새로 입국한 유럽 선교사들을 위한 현지 언어를 강의했다. 유럽 출신의 수도자들은 여기에서 일본어와 일본종교를 배워야 했고, 일본인 수사들도 신학 외에 라틴어를 배워야 한다는 의무가 부과되었다. 그것은 소수의 서양인 선교사보다 그리스도교적으로 내면화되고 규율화된 방인 성직자들이 현지 사회에서 그리스도교를 보다 효과적으로 가르치고 전파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71)

 

그러나 엘리트 교육으로 문화권력을 선점하려던 발리냐노의 계획은 완성되지 못했다. 계획대로라면 매년 300명의 일본인 청년들이 고등교육을 받고, 사제, 수도자, 신자로서 일본사회를 이끌어가는 엘리트 집단이 되었을 것이다. 발리냐노의 계획은 시모와 미야코, 두 개의 세미나리오, 우스키의 수련소, 그리고 분고의 후나이에 콜레지오만이 현실화될 수 있었다. 발리냐노의 계획이 좌절된 것에 대해 구와하라[桑原直己]는 두 가지 원인을 꼽고 있다. 첫째는 1582년에 일어난 혼노지[本能寺]의 정변이다. 오다 노부나가가 급서하면서 미야코에 새로 개설하려던 콜레지오와 세미나리오가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둘째는 인재와 재정의 부족이었다. 발리냐노의 이러한 큰 구상을 현실화하기에 당시 일본사회에는 인재와 재정이 부족했다. 따라서 발리냐노는 세미나리오와 콜레지오의 기능을 일본인 성직자 양성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당시 신자 15만 명에, 예수회원은 55명이었고 그중 일본인 수사는 7명이었으며 일본인 사제는 아직 1명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미나리오와 콜레지오는 소신학교로서 각각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이며, 10세에서 18세까지의 청소년들이 입학했다. 중학교인 세미나리오를 졸업하면, 예수회원, 교구사제, 평신도 지도자(선교사)의 세 가지 진로가 놓인다. 예수회원의 길을 선택한 학생은 졸업 후에 수련원에 들어가 수도자로서의 기초교육을 받은 후, 콜레지오에 진학한다. 현실적인 상황에서 발리냐노는 세미나리오와 콜레지오를 성직자 양성 목적으로 운영할 수밖에 없었지만,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엘리트 교육에 대한 생각을 단념하지는 않았다. 발리냐노는 학교를 통하여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지도자 모두에게 그리스도교 정신에 준거한 교양과 윤리를 가르침으로써 이들이 일본과 동아시아 지역에서 새로운 그리스도교 문화 창출의 전위대로 활동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 학교는 교회를 위한 선교사를 양성하는데, 어떤 자는 예수회에 입회하고, 어떤 자는 재속성직자가 되고, 또 어떤 자들은 세상의 각종 전문직능을 맡기 위해 교육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일본에서 열린 협의회 제 5자문 제2부에서 논한 여러 이유로 이 소년들 간에 장발한 이(비성직지망 귀족자제들)를 (신학교)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보다도 선교사의 시간과 인원, 그리고 거기에 충당되는 데 필요한 경비가 생기면, 별도의 성직지망생 신학교를 설립하고, 거기서 일본의 풍습대로 장발의 일본 영주, 무사, 귀족의 자제를 교육하는 것도 적절할 것이라고 생각한다.72)

 

결국 학교교육은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그리스도교 금령이라는 정치적 조치로 좌초되었다.73) 그러나 이러한 교육으로 많은 일본 방인 수도자와 선교사들이 일본 복음화에 기여할 수 있었고, 영주와 귀족들은 서구 르네상스의 학문과 그리스도교 정신을 전수받음으로써 일본사회가 보다 근대적으로 발전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하게 되었다. 나아가 엘리트 선교라는 행위전략으로서 교육이라는 제도적 실험은 이후 예수회의 교육 사도직을 발전시켜 나가는 데 경험적 자원이 되었고, 이후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엘리트 선교방법으로 전유되었다.

 

 

4. 나가는 말

 

선교에 있어서 적응/비적응이라는 이분법적 논의는 선교와 관련된 복잡한 메커니즘과 변수를 축소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적응주의를 고정된 보편이론인 듯한 착오를 가져올 수도 있다.74) 선교행위란 선교지 문화의 맥락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선교사들의 문화적 자원을 행위의 전략으로 선별하고 전유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맥락에서 필자는 발리냐노의 일본선교에 있어서의 적응주의적 인식과 방법론적 전략을 체계적으로 조명하려고 하였다. 적응주의는 그리스도교가 선교지의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자신의 종교적 목표(복음화, 문화권력의 선점)를 획득하기 위해 적합한 행위전략을 방법론적으로 모색하는 것이다.75) 이 글에서는 일본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의 적응주의 모델이 ‘위로부터’ 내려가는 하향 인과성을 담지한 엘리트주의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렉산드로 발리냐노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하비에르의 일본문명에 대한 경험과 여기에서 나온 문화친화적이고 적응적 태도와 방침의 유훈은, 그 반명제로서의 보수주의(카브랄)에 의해 훼절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발리냐노는 하비에르의 방침을 체계적이고 규범적으로 만들어 나갔다.

 

동아시아 적응주의는 특정 개인의 자질과 성격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요인에 의해 형성되었다. 아프리카(모잠비크)나 동인도 지역의 경직된 카스트 문화와 비문명적 사회의 맥락과 대조적으로 동아시아의 발달한 문자문명과 여기에 준거한 사회적 질서는 이전과 달리 선교방법의 질적 변화를 추동하였다. 발리냐노는 일본문화, 특히 민중들의 성격, 주거, 식문화, 일과 여가, 인간관계와 같은 일상생활의 문화로부터 긍정적인 인상을 받게 되었고, 문명화의 관점에서 일본문화가 가지고 있는 우수성을 늘 유럽과 다른 선교지 국가들(인도, 모잠비크 등)과 비교하면서 표현하고 있다.76) 발리냐노는 일본과 동아시아 문화를 그리스-로마와 같은 문(文)을 기초로 한 제국의 시스템과 동일시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문명이해는 선교지의 상황에 순응하는 개방적이고 탄력적인 태도와 엘리트주의를 낳게 되었다.77) 즉 일본문화에 대한 높은 존중과 이해를 기초로, 엘리트주의라는 행위전략이 세 개의 제도적 수준(場)에서 추구되었다. 첫째, 엘리트 영주의 복음화에 집중하는 선교역량의 강화(계급), 둘째, 사회의 윤리와 규범을 생산하고 지배하는 문화 권력의 선점을 위한 불교와의 경쟁(종교), 셋째, 엘리트 양성 제도로서의 학교교육 확산(교육)이다.

 

발리냐노가 일본에서의 엘리트주의적 선교전략을 규범화함으로써 중국이나 조선과 같은 다른 동아시아 지역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선교 역사의 반복이란 사건이 아니라 사건이 일어난 과정과 구조의 차원에서 성립되는 것이다. 즉 역사에서의 반복은 같은 사건의 되풀이가 아니라, 그 사건의 배경이 되는 형식 내지 구조에서 나타나는 것이다.78) 발리냐노의 적응주의는 이 후의 동아시아 선교사의 경로의존적 선(先)모델이 된다. 여기서 경로의존이란 시간상 앞서 발생한 사건이 이후 발생하는 사건에 연쇄적 영향을 주는 것이다.79) 즉 발리냐노의 적응주의는 이후 중국과 인도에서 활약한 리치와 로베르토 데 노빌리(Roberto de Nobili, 1577~1656) 같은 선교사들에게 현지문화를 수용하는 능력을 강화하게 했고, 문(文)에 기반을 둔 엘리트 선교방법에 영향을 주었다.80) 예컨대 리치와 노빌리는 각각 중국과 인도의 사회적 맥락에 따라 선교방법을 변용하였다. 리치는 중국의 유교 지식인과 같은 문화적 습속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설정하고, 중국어와 중국인들의 지적 관심에 부응하는 서구과학과 학문을 활용한 문서선교를 선교의 행위전략으로 삼았다. 그는 중국이 가진 문화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복음의 선포가 보다 문화순응적으로 뿌리내리는 데 기여하였다. 노빌리 역시 인도의 마두라이에서 일어난 예수회의 보수적이고 포르투갈문화 중심적인 태도에 문제를 제기하고, 스스로 인도의 관습에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빌리 역시 발리냐노와 리치의 엘리트주의 방법을 익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산스크리트어와 타밀어를 배워서 인도인에게 익숙한 언어로 설교하고, 인도의 고승처럼 금욕적이고 윤리적 솔선수범을 실천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 역시 첫 번째 선교대상은 최고의 엘리트 계층인 브라만 계급이었고 자신을 브라만과 동일한 계층적 습속에 위치시킨다.81) 이렇게 발리냐노의 선교지 문화에 대한 수용과 존중, 여기에 준거한 방법론적 엘리트주의는 예수회 선교의 규범으로 자리 잡으면서 일본과 중국을 넘어 다른 동아시아 지역의 선교에 영향을 주었다. 동아시아 적응주의의 형태는 엘리트주의로부터 발현했지만, 이것은 상층부 선교의 집중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발리냐노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이 엘리트주의를 선택한 이유는 신분제 사회에서의 사회질서를 유지하면서 선교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방법론적 전략의 동력은 평민들에게까지 미쳐 그들도 그리스도교적인 일상으로 나아가도록 했다. 예컨대 한국교회사의 관점에서도 그리스도교는 엘리트 선교방법인 문서선교로 양반 유교 지식인들에게 우선적으로 전파되었다. 그리고 신앙은 양반층으로부터 기층부까지 확장되었다.

 

발리냐노의 적응주의는 동아시아에서 엘리트주의의 형태로 뿌리를 내렸고, 동서 문화교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동력이 되었다. 선교사들은 동아시아에 중상주의, 과학기술, 그리스도교 세계관과 같은 근대적 자원을 동아시아에 전해주었고, 역으로 유교 인본주의를 서구에 소개함으로써 서구 계몽주의의 인본주의적 에토스 형성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따라서 발리냐노는 동서 상호간의 타자형상을 매개함으로써 상호 문명에 대해 지역과 자의식(자문화)의 영역을 확장한 선구자로 평가할 수 있다.

 

* 이 논문은 2018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18S1A5A2A03037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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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적응 내지 적응주의는 원래 신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와 초대교회 설립과정에서도 드러나지만, 17-18 세기의 성경, 계시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이 가지고 있는 역사 · 사회적 한계와 제약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개념이다. 즉 시대와 사회의 맥락에 따라 하느님의 말씀을 적응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이다(이러한 생각은 이후 해석학의 출현을 가져옴). 나아가 적응은 가톨릭 선교의 열쇠개념이 되어 다양한 문화적 공간에서 복음을 전달하는 규범적 원리가 되었다(Hans Waldenfels, Art. “Akkommodation”, Lexikon für Theologie und Kirche(LThK), Bd. 1, Freiburg : Herder, 1993, pp. 290~291).

 

2)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은 포트루갈과 에스파냐의 영토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교황 알렉산드로 6세가 중재하였다. 아프리카 서쪽 끝 해상 1,500킬로미터 지점에서 지구를 동서로 나누어 서쪽은 에스파냐가 동쪽은 포르투갈이 통할하기로 한 것이다.

 

3) Hans-Werner Gensichen, Art. “Missionsgeschichte”, LThK, Bd. 7, 1998, p. 307.

 

4) 선교지에서 선교사의 계급적 위상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회의 체계가 오늘날처럼 자율성과 독립성을 갖고 분화되지 않은 초기 근대에 포르투갈 국왕으로부터 선교권을 위임받은 예수회 선교사들은 상업, 군대의 동원에 일정 부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하비에르가 가고시마에 처음 도착할 때부터 농업이 발달하지 못한 일본 규슈의 다이묘들은 무역을 원하였는데 선교사들은 이러한 무역을 선교의 중요한 방편으로 삼았다. 예컨대 히라도의 영주 마츠라 다카노부[松浦隆信]는 포르투갈 상인의 내항과 관련된 하비에르와 선교사들의 영향력을 체험하고 적극적으로 선교사들을 환대하였다. 게다가 일본인들은 선교사들을 승려와 같은 계급적 지위와 동일시 하는 경우가 많았다. 발리냐노에 따르면 승려는 일본의 4가지 신분체계에서 영주 다음의 위치를 차지한다. 이방인이자 타자였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일본에서 승려와 같은 엘리트 종교지식인으로서의 계급적 지위를 일정 부분 인정받았다(結城了悟, 《日本の敎会の歷史》, 女子パウロ会, 2008, 14쪽 ; 五野井隆史, 《日本キリスト敎史》, 東京 : 吉川弘文館, 1990, 40쪽).

 

5) Pierre, Bourdieu, “Social Space and Symbolic Power”, Sociological Theory 7-1, 1989, pp. 14~25.

 

6) 이들은 적응주의의 선구자라고 하지만, 적응의 과정에서 무조건 선교지 문화를 긍정하고 수용한 것은 아니다. 발리냐노는 일본 선불교의 승려의 습속과 용어를 수용하였지만, 신론과 구원론 부분은 부정하고 비판하였다. 리치 역시 ‘후고박금’(後古薄今)을 주장하며, 신유학의 ‘理’를 부정하고 고대유학의 ‘天’을 참된 절대자로 변용 긍정하였다. ‘天’은 중국사회 안에서 의미를 획득한 것이 아니라 예수회 신부들이 주체적으로 그 의미를 색출하고 중국사회에 다시금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유교라는 종교철학에 대한 적응주의란 상대방의 문화적 요인을 긍정하고 수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부하고 변용함으로써 성취된 것이다(전홍석, 《초기 근대 서구지식인의 동아시아상과 지식체계》, 동과서, 2018).

 

7) 상징권력은 한 사회의 집단적 의식, 규범, 행위를 특정방향으로 결정짓는 문화적 힘을 의미하며, 상징체계는 이러한 상징권력이 발출하는 사회의 체계를 의미한다.

 

8) 1539년 이탈리아 키에티 출신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1557년 파도바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예수회에 입회하여 1571년 사제서품을 받았다. 로마의 수련장으로 있으면서 마태오 리치와 같은 제자를 양성하였고, 1573년 34세 때 동양 순찰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일본선교에 깊은 관심을 두었고,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비전과 적응주의적 방법론을 예수회 내에 규범적 지침으로 제시하였다.

 

9) 유교 엘리트 지식인들에 집중한 선교와 문서선교, 학교교육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10) 고전적 연구로 가장 권위있는 작품은 “Schütte, Josef Franz, Valinanos Missionsgrundsätze für JaponⅠ/Ⅱ, Roma : Storia e Retteratura, 1951”가 있다. 슛테는 발리냐노의 일본과 아시아 관련 선교의 역사를 생애사와 선교의 발전론적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특히 슛테는 발리냐노의 편지, 일기, 공문서 등을 풍부하게 참조하고 인용하고 있다. 2차 문헌이지만 풍부한 자료의 직접인용은 1차 사료로 활용할 수 있을 만큼 충실하다.

 

11) Vittorio Volpi, Alessandro Valignano Il Visitatore : Un testimone oculare nel misterioso Giappone del ⅩⅥ secolo, Piemonte, Piemme, 2004 ; (日語版) 原田和夫 (訳), 巡察師ウァリニャーノと日本, 東京 : 一藝社, 2008. 이 논문에서는 일어판 쪽수를 인용한다.

 

12) 桑原直己, 〈A. ウァリニャーノの適應主義と《日本のカ〒キズも》〉, 鶴岡賀雄 · 桑原直己 · 田畑邦治(編), 《キリシト敎の深層》, 東京 : オリエンス宗敎文化硏究所, 2012, 97~114쪽 ; 桑原直己, 《キリシタン時代とイエズス会敎育 : アレッサンドロ・ウァリニャーノの旅路》, 東京 : 知泉書館, 2017.

 

13) 김혜경, 〈왜란 시기 예수회 선교사들의 일본과 조선 인식 : 순찰사 알렉산드로 발리냐노의 일본방문을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49, 2016, 7~53쪽.

 

14) 트레드골드(Donald Treadgold)는 하비에르가 일본에 도착한 이후에야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회가 탄생했다고 지적한다(D. Treadgold, The West in Russia and China. Vol. 2, Cambridge : Cambridge Univ. Press, 1973, p. 7).

 

15) 1549년 8월 : 가고시마 도착하여, 약 1년 체류. 1550년 9월 : 가고시마 → 히라도(10월) → 야마구치(11월∼12월) →교토 1551년 1월 : 교토(도시진출) → 히라도(3월) → 야마구치(4월∼9월) 오우치씨로부터 大道寺를 받았으며, 선교 허락받음. 비파법사 로렌소 了齊(복자 다카야마 우콘 가족에게 큰 감화를 주었음)와의 만남. 1551년 9월 : 분고(11월) → 일본에 영향을 많이 준 중국에 선교의 뜻을 두고 일단 인도의 고아로 향함. 1552년 4월 : 고아 → 말라카(5월) → 중국을 향해 가다가 상천도(上川島)에서 귀천(12월 3일).

 

16) 톱-다운 선교의 견지에서 하비에르는 일본보다도 ‘더욱 큰 나라’에의 선교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야마구치에서 일본 엘리트 귀족들과 접촉을 계속해가면서, 일본과 중국과의 관계가 밀접하다는 것을 강하게 인식했고, 일본선교 초기에 이미 중국선교의 필요성을 인식했던 것 같다. 하비에르는 중국선교의 성공은 곧 일본선교의 성공으로 귀착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하비에르가 이냐시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중국인들이 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의 종파(불교)에 대한 신앙을 곧바로 버리게 될 것이다.”라고 단언하고 있다(河野純德 訳, 《聖フランシスコ · ザビエル 全書簡》, 書簡96, 東京 : 平凡社, 1985, 522~540쪽).

 

17) W.G. Beasley, The Japanese Experience, Berkely : UC Press, 1999, pp. 147~148.

 

18) V. Volpi, Alessandro Valignano Il Visitatore : Un testimone oculare nel misterioso Giappone del ⅩⅥ secolo, p. 217.

 

19) 예수회 선교의 현장에서는 총장과 다름없는 직위로서 커뮤니케이션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에 즉각적이고 원활한 선교 활동을 위해 고안한 제도였다. 교통 · 통신이 발달하지 못한 초기 근세에 원거리의 선교 현장에서 선교사들의 요청에 즉각적으로 대응해주는 일은 선교의 효율성을 위해 필요했고, 발리냐노는 1568년에 최초로 임명된 알바레스(Gonçalo Alvares, 1568∼1573)에 이어 1574년부터 1606년까지 두 번째 순찰사로 활동하였다(김혜경, 〈왜란시기 예수회 선교사들의 일본과 조선인식〉, 《교회사연구》 49, 2016, 13쪽).

 

20) 발리냐노가 순찰사로 고아에 온 것은 1574년 9월 6일이었으며, 약 5년 뒤인 1579년 7월 25일 시미바라반도의 구찌노츠항[口之津港]을 통해 일본에 입국하였다. 이 최초의 일본체류는 1582년까지 계속되었다. 발리냐노의 일본 방문은 총 3차례였고, 첫 번째 방문 중에 일본교회의 제도적 체계화를 완성하였다. 제1회 : (1579∼83) 시찰과 포교회의(우스키 · 아즈키 · 나가사키), 덴쇼 유럽 파견소년사절. 제2회 : (1590∼92) 伴天連 추방령 철회 요청 제1회 관구회의. 제3회 : (1598∼1603) 세르케이라 주교 동반,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의 새로운 정치 상황에 맞는 선교 정책의 재검토.

 

21) Alejandro Valignano S.J., Sumario de las cosas de Japón(1583), Adiciones del sumario de Japón(1692), Editados por José Luis Alvarez-Taladeiz. Tome 1, Tokyo : Sophia University, 1954(松田毅一他 訳, 《日本巡察記》, 東京 : 平凡社, 1973, 5쪽. 이하 《日本巡察記》).

 

22) 슛테에 따르면, 발리냐노의 인도인과 그 문명에 대한 낮은 인식은 그의 경험이 인도 남부 해안지역의 열등한 문화에 국한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인도에는 다양한 종족과 문화가 존재하고, 심오한 철학과 종교가 발달한 문명 지역도 많다(Josef Franz Shütte, Valignano’s Mission Principles for Japan. Part 1 : The Problem, tran. John J. Coyne, St. Louis : The Institute of Jesuit Sources, 1980, p. 130).

 

23) “이 국민들(인도인)에 대한 일반적인 특성은 분별과 재능의 결핍이라고 말하고 싶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그들은 명령하기보다는 섬기기 위해 태어난다. 그들은 비참하고 몹시 가난하며 낮고 천한 일을 하도록 운명지워졌다(Letter in note 181, Goa 12Ⅰ 197/7v. in : Josef Franz Schütte, 같은 책, p. 131).”

 

24) 발리냐노 역시 인종주의적 편견이 있었다. 그는 인도인을 두 그룹으로 나누는 데 하나는 검은 피부의 사람들(니그로)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이나 중국인처럼 피부톤이 하얀 사람들이다. 특히 모잠비크에서 로마의 예수회 총장에게 보낸 편지(1574년 8월 7일 자)는 이러한 그의 인종관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들은 재능 없는 인종이며(…), 우리의 거룩한 종교를 이해하거나 실천할 능력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일정 수준 이상 이해할 수 없는 낮은 지능을 천성적으로 가졌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짐승같이 살고 있다(Josef Franz Schütte, 같은 책, pp. 130~131).”

 

25) 《日本巡察記》, 第 一章, 6쪽.

 

26) 《日本巡察記》, 第 一章, 11~12쪽.

 

27) 《日本巡察記》, 第 一章, 13~14쪽.

 

28)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선교지 중심의 적응적인 태도와 방법은 발리냐노 개인의 경험뿐 아니라, 외부적인 요인도 작용했다. 포르투갈인인 카브랄에 대해 네덜란드(현 벨기에)인이었던 예수회 총원장 에버라드 머큐리안(Everard Mercurian, 1514~1580)에 의해 동인도 순찰사로 임명된 발리냐노 자신은 이탈리아인이었다. 동양에 파견되기 이전부터 머큐리안의 뜻을 받은 발리냐노는 예수회 내부에 있어서 포르투갈인들의 내셔널리즘과 포르투갈 정부의 간섭(선교관할권)으로부터 교회의 자율성과 순정성의 확보를 위한 싸움을 전개해 갔다. 아시아 지역의 예수회 총 책임자로서 발리냐노는 동양에 선교를 위하여 파견하는 인원으로서 포르투갈인보다 이탈리아인이나 스페인인을 선호하였고 그때까지 포르투갈 관구장에게 인정되었던 동양 각지의 예수회원들의 서간을 개봉하는 (쯔마리검열) 특권을 폐지했다(桑原直己, 〈A. ウァリニャーノの適應主義と《日本のカ〒キズも》〉, 99쪽).

 

29) Samuel Hugh Moffett, A History of Christianity in Asia. Vol.Ⅱ, New York : Orbis, 2005, p. 77.

 

30)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다른 선교 지역에서는 대단히 유럽중심적인 우월감을 보이기도 하였다.

 

31) 이들은 통역을 하거나 사제들을 대신해 교리를 가르치고, 그 밖에 교회운영과 관련하여 사제들을 도왔다.

 

32) Volpi, 앞의 책, p. 218.

 

33) 게다가 15년 후 1595년 11월 23일 발리냐노는 예수회 총원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카브랄의 지도원칙은 일본 그리스도교 및 예수회를 파멸로 이끄는 길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슛테는 이 내용을 7가지 항목으로 정리하고 있다. ⓵ 일본인 수도사의 지도에 대해 엄격하고 가혹한 말로 굴욕감을 주었다. ⓶ 일본인 수사에게 포르투갈 수사와 다르게 대하였다. ⓷ 일본인들에게 혐오감이나 경멸감을 일으키게 한다. ⓸ 유럽인은 자신들이 기이하게 느꼈던 일본의 습관을 존중하지 않고 나쁘게 말했다. ⓹ 일본인 수사에게 포르투갈어 혹은 라틴어 교육을 허가하지 않았다. ⓺ 일본인이 학문을 배울 필요가 없고, 사제도 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⓻ 유럽인이 일본어를 배우는 것을 거부했다(Josef Franz, Shütte, Valinanos Missionsgrundsätze für JaponⅠ, Roma : Storia e Retteratura, 1951, pp. 325~327).

 

34) 쿠와하라는 예수회가 일본인 이외의 아시아인을 예수회에 입회시키는 것에 대해 꺼렸기 때문에 완전한 인종적 평등관을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본다. 즉 일본이나 중국인과 같은 문명국의 국민만을 유럽인과 어느 정도 대등하게 간주했다(桑原直己, 앞의 글, 112쪽).

 

35) 《日本巡察記》 第 16章, 94~95쪽.

 

36) A. Valignano, Advertimentos e avisos acerca dos costumes e catangues de Jappão(矢沢利彦 · 筒井砂 訳, 《日本のイエズス会士礼法指針》, 東京 : キリシタン文化硏究会, 1970).

 

37) 발리냐노가 제시한 생활의 예법 지침을 몇 가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사제, 혹은 수도사와 협력자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행동기준을 정했다. 서로에게 ‘사마’[様]라고 하는 접미사를 붙여서, 존경과 정중함을 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 관습을 속단하거나 과장하지 말고 진중하게 처신하는 것이다. 다이묘와의 만남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예의 바른 태도를 보이면 오히려 바보로 보일 우려가 있다. 따라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중용과 절제가 필요하다. 이러한 태도의 모델은 일본의 선승에게서 나타나며, 침착하고, 냉정하면서도 부드럽게 행동하는 것의 중요함을 강조한다. 셋째, 모욕이나 도전적인 행위에 대해서도 태연하게 대할 필요가 있다. 자기 억제가 가능치 않고, 자기의 감정을 격하게 드러낼수록 일본인의 눈에 꼴사나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천박한 웃음이나 동작은 절대로 피해야 한다. 도발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정중하고 동시에 의연한 태도로 대처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무기요, 나를 욕보이는 상대를 굴욕시키는 것이다(V. Volpi, 앞의 책, pp. 221~222).

 

38) Ann, Swidler, “Culture in Action : Symbols and Strategies”,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51, 1986, pp. 273~286.

 

39) 이러한 행위전략 역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유훈으로서, 다이묘와 귀족, 궁극적으로는 최고 권력자가 사는 수도 미야코[京都]의 복음화를 목적으로 한다. 

 

40) 톱−다운 방식의 선교는 상층 계층을 선교하고 이들을 통해 평민이나 하층민의 개종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 이래 실천되어온 전통이다. 하비에르는 인도 여러 지역의 선교에서 이 전통적인 선교 방법을 채택했고, 일본에서도 이러한 관점에서 천황과의 만남을 희망했던 것이다(五野井隆史, 같은 책, 41쪽).

 

41) “지금 있는 최상의 선교사는 영주와 귀인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에게 주어진 영지와 봉록으로 생활하고 있으며, 모든 영민들은 경작에 의해 얻는 농작물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영주에게 의존하며 다른 신을 모릅니다. 이 때문에, 영주가 어떤 신앙을 받들도록 영민에게 명하면 그들은 간단하게 그 명령에 따라 그들이 신봉해 오던 종교를 버립니다. 그리고 그들이 다른 신앙에 귀의하기 위한 허가를 영주가 내려 주지 않으면 영민이 아무리 바라더라도 새로운 종교로 귀의할 수는 없습니다(Jap.Sin. 7Ⅰ, 20v, 五野井隆史, 같은 책, 92~93쪽).” 귀족 엘리트 선교는 1562년 경 규슈 서부의 유력 다이묘 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가 알메이다 신부에 의해 개종하면서 다른 다이묘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물론 오무라의 개종이 포르투갈 상선의 영내 유치와 관련된 점도 있지만, 오무라의 개종으로 인해 7개월 만에 오무라 영지의 20,000명이 세례를 받게 되었다. 오무라는 예수회에 나가사키를 선물로 양도했고, 나가사키는 예수회와 포르투갈 무역의 본거지가 되었다(Samuel Hugh Moffett, A History of Christianity in Asia. Vol. Ⅱ, New York : Orbis, 2005, p. 75).

 

42) 《日本巡察記》 第 六章, 46쪽.

 

43) 《日本巡察記》 第 十一章, 71쪽.

 

44) フロイス, 松田毅一, 川崎桃太 訳, 《日本史》 券3, 東京 : 中公文庫, 2016, 93~107쪽.

 

45) 전국 통일을 목전에 둔 노부나가를 통해 일본의 권력자들이 필요한 것이 바로 서양의 대포였고, 서양 선교사들은 이러한 무기 무역을 통해 선교가 원활하게 수행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노부나가는 유럽의 통치기술에 관해 물었고, 발리냐노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중심으로 한 국가 체제와 법률, 무기, 식민지 개척과 같은 상황에 대해 설명하였다(김혜경, 〈왜란 시기 예수회 선교사들의 일본과 조선 인식 : 순찰사 알렉산드로 발리냐노의 일본방문을 중심으로〉, 20~21쪽).

 

46) 사제관과 교회 신자상황 그리고 노부나가와 귀족들이 주는 특혜와 교회 운영비에 대해 발리냐노는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日本巡察記》 第四, 五章, 32~45쪽). 그러나 이러한 지원들이 늘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모란이 지적하는 것처럼 16세기 일본은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않았고, 오토모 소린과 몇 명 영주들을 제외하면 부유한 군주들이 별로 없거나 영향력이 쇠퇴하는 그리스도교인 귀족들이 많았다(J. F, Moran, The Japanese and the Jesuits. Alessandro Valignano in sixteenth-century Japan, London and New York : Routledge, 1993, pp. 129~130).

 

47) James Murdoch, Yamagata Isoh, A History of Japan during the Century of Early Foreign Intercourse(1542-1651). Vol. 2, Kobe : The Chronicle, 1903, p. 172.

 

48) 結城了悟, 앞의 책, 38~41쪽.

 

49) Richard H., Drummond, A History of Christianity in Japan, Grnad Rapids, Mich : William B. Eerdmans, 1971, p. 59.

 

50)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비에르는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개념을 번역하면서 토착종교인 불교의 용어를 많은 부분 차용하거나 수용하였다. 이러한 부분은 과거의 선교경험과는 다른 태도였고, 토착화 신학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데 일정부분 의의는 있다(Andrew C. Ross, A Vision Betrayed : The Jesuit in Japan and China. 1542-1742, NY : Orbis, 1996, p. 28).

 

51) Samuel Hugh Moffett, 앞의 책, p. 78. 

 

52) Alejandro Valignano S.J., Cathechismus Christianae Fidei, Olyssipone : Antonius Riberus & Emmanuel de Lyra, 1586(家入敏光 訳, 《日本カ〒キズモ》, 東京 : 天理図書館, 1970, 下券 第 三講, 四講. 이하 《日本カ〒キズモ》).

 

53) 이러한 운명은 하비에르가 머물렀던 짧은 시기 동안 이미 시작되었다. 하비에르는 그리스도교 교리의 중심인 창조주, 유일신 하느님에 대한 관념을 일본에 전달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라고 판단하였다. 하비에르는 당연히 일본종교에 관심을 가졌지만, 전통 ‘神道’의 ‘카미’(神)는 원시적 민간 신앙으로 간주하였고, 불교를 일본의 지배 종교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불교 개념을 매개로 하여 창조주 하느님을 제시하려고 하였다(前田 智惠美, 〈일본과 한국의 천주교 초기교리서 비교연구 : 《일본의 카테키즘》과 《주교요지》를 중심으로〉, 서강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7, 22쪽).

 

54) 《日本巡察記》, 第 三章, 27쪽.

 

55) 발리냐노는 어떤 의미에서 일본인의 종교가 다른 고대 이교전통보다는 도덕적으로 우수하다고 판단하였지만, 그리스도교 문화상징을 사회에 배태시켜야 한다는 목적성의 견지에서, 불교는 약화하고 없어져야 할 경쟁 대상인 것이다(J. F. Moran, The Japanese and the Jesuits, London and New York : Routledge, 1993, p. 99).

 

56) 1580년경 편찬된 《니혼카테키즈모》는 상 · 하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권은 8강, 하권은 4강으로 되었다. 일반적인 교리문답서라기보다는 당시의 신학생, 이루만(수사), 나중에는 동아시아(중국) 선교사들을 위한 교육용 지침서로 사용되었다. 이 책의 대부분은 일본불교의 해설과 비판이 주를 이루고 교회의 교의에 대한 해설은 뒤쪽에 할애되고 있다. 이 《니혼카테키즈모》를 바탕으로 일본을 비롯한 중국선교사들은 이교도(특히 불교) 교리가 갖는 한계와 모순을 설명하고, 그리스도교 교리가 갖는 합리성과 우월성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 교리서는 중국의 《천주실의》와 조선의 《주교요지》 같은 대부분의 교리서의 제1 典範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마에다의 논문은 《니혼카테키즈모》의 역사신학적 가치를 비교적 시각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前田 智惠美, 앞의 글).

 

57) 《日本カ〒キズモ》, 5~6쪽.

 

58) 《日本カ〒キズモ》, 6~7쪽.

 

59) 《日本カ〒キズモ》, 6쪽.

 

60) 《日本巡察記》, 28 · 31쪽.

 

61) 《日本カ〒キズモ》, 55~57쪽.

 

62) 《日本カ〒キズモ》, 73~83쪽.

 

63) 井手勝美, 《キリシタン思想史硏究序說-日本人のキリスト敎受容》, 東京 : ペリカン社, 1995, 92~93쪽.

 

64) 前田 智惠美, 앞의 글, 62~65쪽.

 

65) 실제로 동인도 세미나리오의 인도인 학생에 대한 발리냐노의 평가는 일본과는 반대로 상당히 부정적이다. “이 콜레지오에는 두 개의 학교가 있다. 하나는 문법의 학교이고, 다른 하나는 소년들의 읽기와 쓰기, 그리고 계산을 가르치는 학교다. 학교는 이것 이상 불필요하다(…). 소년들은 어느 누구도 배울 의욕이 없고 양친도 자기 아이가 배우는 것을 희망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다음에 말하는 것과 같이, 인도 전역의 사람들이 면학이나 학문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Alejandro Valignano S.J., Sumario de las cosas que pertenecen a la Provincia de la India Oriental y al govierno della, comquesto por Padre Alexandro Valignano, visitador della, y dirgido a nuestro Padre General Everardo Mercuriano en el año 1579(高橋裕史 訳, 《東インド巡察記》, 東京 : 平凡社, 2005, 91쪽).

 

66) 원래 예수회는 이방인(무어인)과 가난한 계층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실시된 무상교육을 추구하였다가 선교지의 성직 지도자 양성과 같은 엘리트 재생산에 집중하였다.

 

67) 桑原直己, 《キリシタン時代とイエズス会敎育》, 東京 : 知泉書館, 2017, 115~116쪽.

 

68) 분고 지구에 예정된 세미나리오는 야마구치 지역에 개설될 예정이었으나, 전란으로 실현되지 못했다(桑原直己, 같은 책, 117쪽).

 

69) 長崎県北有馬町 編, 《有馬のセミナリヨ》, 長崎 : 關係資料集, 2005, 7쪽.

 

70) 桑原直己, 앞의 책, 118쪽.

 

71) V. Volpi, 앞의 책, p. 222.

 

72) 《日本巡察記》, 第 十二章, 79쪽.

 

73) 발리냐노가 계획했던 교구신학교는 나중에 일본포교구가 주교를 중심으로 한 독립교구가 된 후 1601년 나가사키에 작은 규모의 신학교로 현실화되었다(桑原直己, 앞의 책, 119~120쪽).

 

74) 선교란 선교지에서의 적응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데, 특정 시기와 지역의 적응과정에서 구조적이고 유형적인 선교의 형상이 주조된다. 그 형상이 다른 지역과 시대에 어느 정도 구조적이고 반복적인 형태를 유지할 때 일정 부분 보편화할 수 있는 방법론이 되기도 한다.

 

75) 김혜경 역시 선교의 적응주의를 방법론적 적응주의로 간주한다(김혜경, 앞의 책, 11쪽).

 

76) 발리냐노의 일본에 대한 이해의 한계 역시 존재한다. 첫째, 발리냐노는 일본문화의 종주국이자 준거로서 중국을 지목하고 중국을 일본문화에 준하여 상상하였으나 중국과 조선은 일본과 비교할 때 실상 많은 부분이 달랐다. 둘째, 예수회와 발리냐노의 귀족선교에 의한 개종자의 신앙은 생각만큼 견고하지 못했다. 규슈지방에서 분명히 교회는 수적으로 많은 신자를 획득했지만, 개종하지 않은 기리시탄 다이묘의 영민도 많았다. 그 이유는 당시 영주도 남만무역이라는 이해관계가 개종과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리시탄 영주가 전쟁에서 패배하여 상황이 바뀌면 쉽게 신앙을 버리기도 한다. 발리냐노는 이런 현실에 크게 환멸을 느꼈고 충격을 받았다.

 

77) 발리냐노는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시아 문화를 열등하게 간주했으며, 일본이나 중국에서의 그리스도교의 적응적 토착화 정책을 고수하지 않았다(Andrew C. Ross, “Alessandro Valignano, S.J.”, Missiology 27-4, 1999, p. 511). 

 

78)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역, 《역사의 반복》, 도서출판 b, 2008, 18쪽.

 

79) William Sewell, “Three Temporalities : Toward an Eventful Sociology,” in T. McDonald ed., The Historic Turn in the Human Sciences, Ann Arbor : Univ. of Michigan Press, 1996, pp. 262~263. 채오병, 〈역사 반복의 경로의존〉, 《사회와 역사》 115, 2017, 201쪽에서 재인용.

 

80) 야자와 토시히코(矢沢利彦)는 예수회의 중국 선교방침인 ① 読書人重視主義 ② 北京中心主義 ③ 科學主義 ④ 禮物主義와 같은 내용들이 하비에르와 발리냐노의 적응주의적 선교방식의 연속이라는 점에서 예수회 적응주의의 기원은 16세기 일본의 전국시대라고 말하고 있다. 특히 하비에르의 유지를 제도적 규범화 한 발리냐노의 적응주의 방침에 따라 중국의 선교사들은 쉽게 중국사회에 정착할 수 있었고 현지 관리까지 될 수 있었다. 矢沢利彦, 《中国とキリスト敎典礼問題》, 東京 : 近藤出版社, 1972, 64~65쪽. 前田 智惠美, 앞의 글, 7쪽에서 재인용.

 

81) 김혜경, 앞의 책, 64쪽.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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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ario de las cosas que pertenecen a la Provincia de la India Oriental y al govierno della, comquesto por Padre Alexandro Valignano, visitador della, y dirgido a nuestro Padre General Everardo Mercuriano en el año 1579. 高橋裕史 訳, 《東インド巡察記》, 東京 : 平凡社,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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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キリシタン時代とイエズス会敎育 : アレッサンドロ・ウァリニャーノの旅路》, 東京 : 知泉書館,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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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pi, Vittorio, Alessandro Valignano Il Visitatore : Un testimone oculare nel misterioso Giappone del ⅩⅥ secolo, Piemonte : Piemme, 2004. (日語版) 原田和夫 訳, 《巡察師ウァリニャーノと日本》, 東京 : 一藝社, 2008.

 

[교회사 연구 제53집, 2018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최영균(수원교구 호계동 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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