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6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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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성사] 신앙교리: 성체에 대한 공경 (5) 중세말기와 근대교회에서의 성체공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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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5-11 ㅣ No.300

[공부합시다! 신앙교리] 성체에 대한 공경 (5) 중세말기와 근대교회에서의 성체공경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한 교회 전례법규의 확정

 

가톨릭교회에 반하는 종교개혁가들의 주장과 공격이 심해지자 가톨릭교회는 그에 대한 반발로 성체공경을 더 강화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프로테스탄트교회가 가톨릭교회의 성체론을 공격하면서 라틴어 외의 모국어 전례집전을 강조하자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는 “라틴어가 아닌 모국어로만 미사가 드려져야 한다는 자는 파문에 처한다.”(미사성제에 관한 전문 9항) 라는 규정을 발표하였습니다. (1661년에는 알렉산더 7세 교황은 ‘라틴어 미사경본’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일 자체를 금지하였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당시 전례에 대해 심도 깊은 개혁을 관철하지 못한 채로) 교회의 수장인 교황에게 모든 전례서적에 대한 발행을 위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교황은 (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1570년에는 로마 미사 경본을 발간하고, 1588년에는 교황청 내 예부성성을 창설하여 전례법규를 규제하고 감독토록 하였습니다. 이후 400년간 가톨릭교회의 전례는 (불행하게도 이렇다 할 발전과 변화가 없이) 완전히 획일화되고 고정화되었습니다. 다음의 글은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의 전례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의 전례는 ‘중세기의 계속으로 [···] 성직자의 특별한 전례로 [···] 남아 있었다. 언어는 예전과 같은 라틴어이며 강론을 제외하고는 하느님 백성을 약간 고려했을 뿐이다.’ 백성은 ‘미사에 참례’하고, 그들의 참여는 듣고 보는 데에 한정되었다. 평범한 백성에게 미사 전례는 대부분 이해하지 못하는 신비로 남아 있었다. 바로크 시대에 와서 교회의 공적 전례는 점점 더 화려하게 거행된다. 수많은 바로크 성당들의 화려한 공간, 다성(多聲)의 노래와 악기가 동원된 음악은 미사 전례를 하나의 ‘눈과 귀의 향연’으로 만든다. 강론은 대부분 미사 전에 행해졌으며 그럼으로써 말씀의 전례의 구조적인 틀에서 벗어났다. ‘중세기의 발전은 출발점을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계속된다.’” (아돌프 아담, 성찬례, 29.)

 

 

약(藥)으로써의 영성체 신심

 

그럼에도 트리엔트 공의회는 나름 쇄신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공의회의 결실과 이후의 노력으로 성체를 새로운 양식으로 깨닫고 적어도 매주 한번은 성체를 모시려고 노력하는 신자들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의 미사 참례는 여전히 수동적이었고, 성체 안의 그리스도의 실제적 현존에 대한 신자들의 신심은 아직도 그 도가 지나친 상태였습니다.

 

이를테면 17-18세기를 거치면서 그리스도의 성체가 신비한 영약(靈藥)으로 여겨져,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가장 효과적인 약’인 성체를 모신다는 ‘약으로써의 영성체’ 의식이 널리 퍼지게 된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미사 통상문에서 볼 수 있는 영성체 후 사제의 기도가 그것이지요. (“주님, 저희가 모신 성체를 깨끗한 마음으로 받들게 하시고 현세의 이 선물이 영원한 생명의 약이 되게 하소서.”)

 

이런 배경에서 ‘사제가 위령미사를 드리면, 연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영혼이 천사에게서 성체를 영한다.’는 생각까지 퍼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성체는 ‘가벼운 죄들로부터 영혼을 정화하고 연옥불에서 받을 고통과 정화의 시간을 단축시키는 약’으로써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에서 나온 그리스도상(像)이라고 할 ‘죽은 이를 위한 약제사(藥劑士)로서의 그리스도’는 17,18세기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들이 즐겨 사용하던 소재였지요. 한편 프란치스코 회원의 노력으로 확산된 ‘십자가의 길의 신심’, 그리고 도미니코 회원이 보급한 ‘로사리오 기도의 신심’이 신자들의 건전한 신앙생활을 위해 큰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근대교회에서의 전례쇄신과 영성체 강조

 

근대에 들어와 교회 내에 전례를 쇄신하자는 바람이 일어났습니다. 그러한 운동의 선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프랑스의 솔렘 수도원을 부흥시킨 베네딕토회의 게랑제(Prosper Guėranger, 1805-1875) 신부였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비오 10세 교황도 전례쇄신 운동에 동참하면서 신자들에게 주일(主日)의 우위성과 영성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그들의 능동적인 전례 참여를 독려하고 권고하였습니다.

 

또한 교황은 1905년 영성체교령(Sacra Tridentina Synodus)을 반포하여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성체를 영할 것을 권장하였고, 어린이들의 조기(早期) 영성체와 그를 위한 첫영성체 준비의 중요성도 강조하였습니다. (어린이 첫영성체는 19세기 가톨릭 신자들에 있어서 중요한 가족축제의 하나였습니다.) 교황은 이때 영성체자는 ‘은총 지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과 ‘올바른 지향을 가지고 모셔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이에 따라 교회 내의 전례 쇄신은 활기를 띠어갔습니다. 그러면서 이 시기의 성체신심에도 우려스러운 미신적인 요소가 발견됩니다. 신자들 중에는 영성체 효과에 대한 과신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영성체를 하는 경우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1917년에 반포된 교회법에서는 ‘같은 날 한 번 이상의 영성체를 금한다’는 규정을 발표하였습니다. (구교회법 857조의 이 규정은 1983년의 새교회법 917조에서 ‘같은 날이라도 자기가 참여하는 성찬 거행 중에서는 다시 [두 번까지] 영성체할 수 있다’는 문장으로 바뀌었습니다.)

 

한편 19세기 후반부터 세계성체대회를 비롯하여 여러 지역에서 성체대회가 자주 열리게 되었습니다. 중세기부터 계속되어 오던 ‘예수성심(聖心)에 관한 신심’은 1856년 비오 9세 교황의 예수성심축일 제정으로 심화 확산되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능동적 미사참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를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교회 쇄신의 바람은 먼저 전례 부문의 개혁으로 뚜렷이 드러났습니다. 공의회의 전례헌장(Sacrosanctum Concilium)에 의하면, 신자들은 미사전례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사제와 더불어 제물을 바치며, 자기 자신을 제헌하는 것을 배우고, 서로 간의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신자들이 이 신앙의 신비에 마치 국외자(局外者)나 묵묵한 방관자인 양 참여하지 않고, 예절과 기도를 통해서 이 신비를 잘 이해하고, 거룩한 행사에 의식적(意識的)으로, 경건하게,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또한 하느님의 말씀으로 육성되고, 주의 성체의 식탁에서 보양되고, 하느님께 감사하도록, 성교회는 이에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또 신자들은 티 없는 제물을 사제의 손으로 뿐 아니라, 사제와 함께 제헌하면서, 자기 자신을 제헌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그럼으로써 중재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의 일치 또 자기들 상호간의 일치가 날로 긴밀하게 되어, 하느님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 되시도록 해야 한다.”(48항)

 

전례헌장은 이제 미사성제를 모국어로 드리는 것을 전면적으로 허용하고(40항, 54항), 신자들의 영성체를 강조하였습니다. “사제의 영성체 후에, 신자들이 같은 성제에서 (축성된) 주의 몸을 받아먹도록 하는, 더욱 완전한 미사성제의 참여를 크게 권장한다.”(55항) 이어서 전례헌장은 미사의 사제 공동 집전을 원칙으로 제시하면서, 사제들이 한 성당에서 같은 시간에는 한 대의 미사만 드리는 것을 원칙으로 제시하였습니다.(57항)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9년 5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목국장, CBCK교리교육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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