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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신앙] 공감과 기억의 장소인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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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4-21 ㅣ No.1289

[길을 나서는 교회] 공감과 기억의 장소인 신앙

 

 

2014년 4월 16일 성주간 수요일, 인천에서 제주도로 가던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하여 300여 명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일어났다. 세월호에는 설렘을 안고 수학여행을 가던 324명의 단원고 학생이 타고 있었다.

 


노란 리본

 

참사 뒤 우리 모두는 노란 리본을 달고 ‘기억할게, 미안해, 잊지 않을게, 행동할게.’라고 마음에 새기며 눈물을 흘렸다. 진실을 감추려는 세력에 맞서 분노하고 세월호의 조속한 인양과 참사의 원인을 밝히라고 외쳤다.

 

3년 넘게 바닷속에 묻혀 있었던 세월호는 참사 1,091일 만에 인양이 완료되어 목포로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의 진실은 아직도 낱낱이 밝혀지지 않았다. 미수습자 5명은 지금도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아마도 참사의 진실이 밝혀지길 기다리며 어딘가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느님께서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시기를 마음을 다해 두 손 모아 기도한다.

 

 

가만히 기다려라?

 

그때나 지금이나 세월호의 아픈 기억을 지우려는 사람들이 있다. 참사 당일 박근혜의 일곱 시간을 비밀문서로 묶어버린 사람들.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에 비유하고, 세금을 들여서 왜 세월호를 인양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자식을 팔아서 보상을 더 받으려고 생떼를 쓴다며 유가족을 비난하고 희생자들을 비아냥거리며 막말하던 사람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요구하는 유가족과 시민을 선동꾼으로, 좌경 · 용공세력으로 몰아붙이고, 단식하는 유가족과 시민 앞에서 치킨과 피자를 시켜 먹으며 조롱했던 사람들. 전원 구조의 오보를 전하고도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보다 세월호 이야기를 봉쇄해 버리는 언론과 기자들. 사건의 진실을 숨기고 은폐하는 상황은 변한 것이 하나 없다. 더 놀랍고 기막힌 것은 신자들 가운데에도 이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다.

 

세월호 참사와 그 희생자들을 기억하며 진상 규명을 위한 미사와 기도회에 나타나 천주교를 수호한다는 미명 아래 “북한으로 가라. 천주교를 떠나라. 사제복을 벗어라.” 등의 구호를 외쳤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나? 지금도 그때처럼 외치고 있을까?

 

 

신앙은 공감 능력

 

다른 사람이 눈물을 흘리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고, 다른 사람이 행복해 하면 나도 행복해지는 것이 공감이다. 그러나 공감 능력이 없는 사람은 ‘나’ 혼자만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든 말든 ‘나만’ 잘살면 문제없고, ‘나만’ 불편하지 않으면 되며, ‘나의 행복’ 이외의 모든 것이 불행해져도 상관없다고 여긴다.

 

하지만 나 혼자만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 수 없다. 내가 행복하고 평화로우려면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행복하고 평화로워야 한다.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고 가던 길에서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린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만이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치료해 주고 여관에 데리고 가서 그가 쉴 수 있도록 돌보아 주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하고 되물으신다(루카 10,29-37 참조).

 

지금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가? 세월호 안에서 ‘기다려라!’ 하는 말만 믿고 힘없이 죽어 간 희생자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처참하게 부서지고 구겨진 채 세워진 세월호 그 안에서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시는 것은 아닐까?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다. 참으로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든 신자들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사목 헌장, 1항).

 

 

기억의 기록인 복음

 

신앙인들이 어떻게 기억하지 않고 쉽게 잊어버릴 수 있는가! 잊어버리고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기억’에서 출발하고 기억에서 살아간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이 이를 온몸으로 기억했고 그 기억을 전해 주었으며, 이를 기록하여 후대에 남겼다. 이 기억의 기록이 성경이고 복음이다. 우리가 믿는 신앙은 이처럼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몸에서 몸으로 전해져 온 십자가 사건의 증언들이다.

 

기억한다는 것은 지난날을 추억하거나 기념일처럼 상을 차려 축하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 사건을 기억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지금 여기서 그대로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24). 미사 때마다 되뇌는 이 기억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과 의 계약을 새롭게 갱신하고,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지금 여기서 다시 느끼는 것이다.

 


기억의 장소인 신앙

 

신앙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기억하는 데서 출발한다. 신앙을 이야기하는 신학의 출발점도 기억이다. 기억이 만들어지는 곳은 사건의 현장이다. 이는 비단 사건이 일어난 때와 장소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십자가 사건을 지금 우리가 여기서 기억하는 것은 시공을 뛰어넘어 이천 년 전으로 돌아가 우리가 그 사건의 목격 증인이 되는 것이다. 더불어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신앙인의 언어와 감각으로 바라보고 그 사건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 신앙은 시대의 징표를 복음의 눈으로 보고 하느님의 뜻으로 해석하여 복음이 보여 준 예수님의 행동을 따라 사는 것이다. 그래서 현장을 떠난 신앙과 신학은 공허한 울림과 같다.

 

교회가 사건의 현장을 떠나 예수님의 복음만을 믿고 그 뜻을 실천한다면 그것은 십자가 없는 부활만을 기억하는 것이다. 인간의 구체적인 삶과 역사로부터 동떨어진 세상 밖의 집단이 된다.

 

십자가 사건의 기억은 고통과 죽음의 암울한 기억이다. 그리고 그 고통의 기억은 우리에게 선택과 결단을 요구한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고통을 선택했다. 그 고통의 기억을 후대에 전했고 그 기억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되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이 암울한 고통의 기억을 후대의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와 이집트에서 고생했던 기억을 잊어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져 하느님을 저버린 기억과, 십자가상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을 기억했다.

 

우리 교회는 이 땅에서 일어나는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늘 기억해야 한다. 이천 년 전에 한 번 일어났던 사건으로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한다.

 

교회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은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에 따라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편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 송년홍 타대오 – 전주교구 호성만수성당 주임 신부.

 

[경향잡지, 2019년 4월호, 송년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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