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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봉쇄의 울타리에서: 하느님의 깜짝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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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1-20 ㅣ No.616

[봉쇄의 울타리에서] 하느님의 ‘깜짝 선물’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어옵니다. 그런데 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유독 낯설게 느껴집니다. 왜 그럴까요? 2017년 10월 14일, 저는 십 년 만에 조국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오묘하신 섭리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지요.

 

 

침묵과 고독의 삶이 좋았습니다

 

흔히들 봉쇄 수녀원이라고 하면 한정된 공간에서 오직 하느님만을 위해 꽃피는 작은 풀꽃처럼 숨어서 기도와 희생으로 자신의 삶을 바치는 수녀들이 사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지요. 우리 봉쇄 수녀들의 사명은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삶, 그러나 세상을 위해 한 생을 바치는 향기로운 제물로 살아가는 것이랍니다.

 

우리의 존재가 온전히 하느님께만 집중하려면 침묵과 고독의 장소가 필요하기 때문에 한정된 공간에 머무릅니다. 과학자가 중요한 실험을 하는 데 조용히 집중할 수 있는 연구소가 필요하듯 우리는 영혼이라는 아주 섬세한 것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지요.

 

그러나 성 도미니코 수도회는 온 세상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교의 카리스마’가 있답니다. 하느님의 종 예수의 데레사 마리아 오르테가 수녀가 스페인 바야돌리드교구의 올메도(모원)에서 수도원을 쇄신했지요. 전 세계로 퍼져 푸에르토리코(미국령), 벵겔라와 쿠이토비에(앙골라), 구라사오(네덜란드령), 완친(대만), 산토린(그리스), 아냐투야(아르헨티나), 투미(카메룬), 라메고(포르투갈), 배론(한국), 이렇게 열 곳의 수도원이 ‘천주의 모친’ 연합회를 구성하여 영적, 물질적 교류를 나누며 서로 도움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1997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입회한 저는 여느 성소자들처럼 관상 봉쇄에 대한 막연한(?) 꿈과 이상을 가지고 수녀원에 들어왔습니다. 침묵과 고독의 삶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한 번뿐인 내 인생이 온 세상에 생명을 주는 유익한 삶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 대답은 바로 기도요, 하느님 은총의 선물이라는 생각에 이르렀지요. 그리하여 이 배론 골짜기에 한평생을 묻으리라 마음먹고 용감히 투신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생각은 저의 생각과 조금 달랐습니다!

 

 

하느님의 숨결에 떠밀려

 

우리는 양성 기간 동안 스페인 모원에 가서 ‘보충 양성’을 받습니다. 저 또한 스페인의 올메도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받은 인상은 한마디로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이었습니다. 스페인 사람, 아시아 사람, 아프리카 사람, 아메리카 사람이 모두 한데 모여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사랑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 이것은 하느님께서 하시지 않으면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라고 느꼈으니까요.

 

비록 외모나 언어, 풍습 등은 다를지라도 ‘사랑’이라는 한 가지 언어는 모두에게 통한다는 것을 절실히 실감하였습니다. 누구나 사랑하고 싶고, 또 사랑받고 싶어 한다는 것을요.

 

삼 년의 양성 기간을 마치고 돌아온 저는 하느님의 새로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 분원 가운데 첫 번째로 세워진 푸에르토리코 수도원에서 오르간 반주자가 필요하다는 요청이 들어온 것입니다. 장상 수녀님이 저에게 물었을 때, 갓 장엄 서원을 한 저는 이 같은 하느님의 뜻에 “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 같은 방콕(?)이 다른 나라에? 그것도 양성받으러 가는 것도 아닌, 사명을 가지고 가야 하는데 내가 무슨 능력이? 이곳에서 뼈를 묻을 생각이었는데….’ 이런저런 생각이 몰려왔지만 어느새 하느님의 숨결에 떠밀려 푸에르토리코 수도원에 자리를 잡게 되었답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무수한 세계

 

푸에르토리코는 카리브해에 있는 작은 섬으로 미국령의 한 주입니다. 야자수 나무 사이에 달아맨 해먹 위에서 기타와 만돌린을 퉁기며 노래하는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보셨을 테지요. 이런 전형적인 아메리카 분위기! 사시사철 따끈한 기후 때문인지 사람들 또한 열정적이고 기쁩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맞이한 성탄절을 저는 잊을 수가 없답니다. 12월, 1월이면 꽁꽁 얼어붙은 길을 조심스레 걸으며 콧속까지 얼얼한 차가운 바람에 질세라 두꺼운 코트 깃을 세우고 길에서 파는 붕어빵을 후후 불며 먹던 것이 전부였는데! 12월에도 돌아가는 선풍기, 푸른 들판과 예쁘게 피어난 꽃들, 그 주위를 사뿐히 날아다니는 나비들을 보며 세상에서 내가 체험하고 내 눈으로 보고 아는 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이러한 한계 있는 체험을 두고 그것만이 전부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착각이라는 것, 그리고 이 세상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무수한 세계와 개념이 있으며 그 모두가 다 아름다움과 선함, 진실을 지닌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던가! 마치 내 생각, 내 개념, 내 체험만이 전부라 생각하여 집착하고 고집부리며 착각하고 있었다니!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시기에 모두에게 자비로우시고 또 사랑하실 수 있으시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비자 문제로 다시 한국에 돌아온 지 어느덧 일 년이 지났습니다. 그 따뜻한 나라에서 십 년의 세월을 지낸 것이 무상이 아니었던지 저에게 한국의 추위가 새삼스럽게 느껴집니다. 이 스산한 바람, 마른 낙엽, 아침에 내린 서리, 휘날리는 눈발을 보며 나의 생각은 어느덧 더 높이 더 멀리 저 피안의 세계로 올라갑니다.

 

제가 수녀원에 입회할 때 상상도 못한 것을 하느님께서는 마련해 두셨습니다. 저에게 관상 수도자와 선교사라는 두 가지 성소를 한꺼번에 주신 것이지요.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늘 ‘깜짝 선물’을 우리에게 마련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몫은 그저 어린아이처럼 두 팔 벌리고 그분이 주시는 선물을 활짝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분은 사랑의 아버지이시기에 가장 좋은 선물을 마련해 주실 것이니까요.

 

[경향잡지, 2019년 1월호, 이주경 교회의 로사 마리아 도미니코회 천주의 모친 봉새수도원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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