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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천주교회 전교회장의 활동과 의의: 1923~1950년 평양교구 유급 전교회장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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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2-08 ㅣ No.952

한국 천주교회 전교회장의 활동과 의의 : 1923~1950*

- 평양교구 유급(有給) 전교회장을 중심으로 -

 

 

국문 초록

 

회장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 초기부터 준(準)성직자라고 할 정도로 교회 발전의 토양이었다. 이러한 한국 천주교회 회장을 추적하는 작업에 이 글은 각별히 평양교구의 유급 전교회장에 주목하였다. 유급 전교회장은 근대 한국 천주교회에 들어와 새로이 설치 · 운영된 유급의 직분으로 전교사무에 집중한 전문적 인력이었다.

 

이들은 다른 회장과 달리 보수를 받는 직분이었다. 유급으로 본당 신부의 지휘에 따라 전교와 교리교육에 전념하였으며, 기회가 닿는 대로 대세를 줄 의무가 있었다. 정해진 임기가 있기 보다는 ‘평생’ 헌신이 기본 원칙이었고, 한국인 지망생 가운데 시험을 통해 선발하였다. 선발자들은 신부의 지도 아래 교리 공부와 논문을 작성하고, 일정한 시험을 거쳐 임명되었다. 유급 전교회장은 문서선교 · 순회강연 · 교리강습 등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으며, 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큰 견인차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들의 활동을 통해 드러난 한국 천주교회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는 한층 성숙한 것이었다. 사회 구성원이 지향하는 이념의 추구나 도덕의 실현에서 상대적으로 그 역할이나 의미가 소외되었던 환자에 대한 관점이 크게 달라져, 환자 역시 주체적인 전교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로 대우하였다. 여성과 남성의 동등함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가정 안에서 여성(딸, 누이, 아내 등)을 복음의 사도로 세워주었다. 교회는 어린이에 대해서도 매우 주목하였다. 어린이야말로 복음화의 주인공이며 한국을 복음으로 개혁할 무기와도 같은 존재로 강조하였다. 교회가 유급 전교회장에게 특히 어린이를 향한 교리교육에 주목한 까닭도 이 때문이었다. 전문적 훈련을 거치고 본당 신부의 지도 아래 교리교육과 강연, 출판 등을 통한 선교의 현장에서 헌신적 활동을 전개한 유급 전교회장은 근대 이후 한국 천주교회의 성숙한 변화와 질적 성장을 이끌어 낸 밑거름이라고 할 수 있다.

 

 

1. 머리말

 

18세기 이래 천주교를 자신의 신앙으로 수용한 사람들은 교회를 창설(1784)하고 신앙을 이어나갔지만, 국가로부터 백 년이 넘도록 국법을 어긴 범죄자로 박해를 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신앙을 증거하고 전파해 나갔으며, ‘회장’은 그러한 역사의 한 복판에 돌려놓을 수 없는 역할을 수행해온 사람이었다.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를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 회장에 더욱 주목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한국 천주교회 초기부터 회장은 준(準)성직자라고 할 정도로 교회의 발전과 성숙에 견인차였던 것이다.1) 그런데 회장의 삶과 신앙을 구체적으로 추적하는 일에 박해시기는 무엇보다 자료의 부족이라는 어려움에 봉착한다. 일제 강점기 이후는 상대적으로 회장의 신앙과 활동에 학문적 관심이 크게 집중되지는 못하였다. 이 점에서 최근 교계와 학계가 교회 창설 이래로부터 근 · 현대사의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회장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신앙과 활동을 생생하게 되살려보려는 노력을 기울임은 매우 고무적인 의미를 지닌다.2)

 

한국 천주교회 회장의 삶과 신앙을 추적하는 일에 이 글은 각별히 평양교구의 유급 전교회장을 논의의 중심에 두고자 한다. 평양교구에 유급 전교회장은 메리놀회3)의 한국 진출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목격된다. 메리놀회가 한국에 진출하기 이전인 1918년 10월에 작성된 아시아 천주교회에 관한 보고에 따르면 아직 ‘한국에서는 선교사가 전교회장(Catechists)을 고용하지 않고 있다’라고 보고하고 있다.4) 하지만 메리놀회가 한국에 진출한 직후인 1923년 이후로 평양교구에는 유급 전교회장의 다양한 활동이 목격된다.5) “유급”(有給)으로 전교활동에 전념한 사람을 분석하는 작업은 신앙의 자유를 맞은 이후 한국 천주교회가 거둔 변화와 성장을 가늠하게 해 주는 좋은 길잡이라고 믿어진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이 글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다루고자 한다. 첫째, 유급의 전교회장이 설치된 배경과 목적을 검토한다. 둘째, 유급 전교회장은 어떻게 양성되고 운영되었는가를 알아본다. 셋째, 유급 전교회장의 구체적인 활동을 알아보고 그 활동이 한국 천주교회사에 갖는 의의를 정리해 본다.

 

‘유급 전교회장’은 평양교구에서 이 제도를 시행 · 운영한 메리놀회의 자료에 “Catechists”로 기록되어 있다. 한국 천주교회 문헌에는 “전교회장” 과 더불어 “전교사”, “전도사”, “교리교사” 등으로 나타난다. 서술의 편의상 이 글에서는 ‘전교회장’으로 통일하였다.6) 전교회장에는 유급과 무급이 있었지만, 명확히 서술하지 않아 그 구분이 모호한 경우가 매우 많다. 이 글이 주목한 시기는 평양에 메리놀회가 진출하여 유급 전교회장이 시행된 기간으로, 시기적으로는 1923년 이후부터 캐롤(George Carroll, 安) 신부7)가 교구장 서리로 임명되어 교회 복구 작업을 착수했지만 다시 ‘침묵의 교회’로 남게 된 1950년 이전으로 한정하였다.8)

 

 

2. 유급 전교회장 설치의 배경과 목적

 

유급의 남녀 전교회장은 1923년 메리놀회가 한국에 진출하여 평양교구를 담당하면서 기존의 회장에 더하여 설치 · 운영되었다. 한국 교회에도 이미 순회 전교회장이 존재하였지만, 유급으로 고용된 전교회장의 활동은 평양교구에서 본격적으로 목격된다. 메리놀회가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함과 동시에 유급 전교회장이 등장한 배경은 다음 몇 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가장 먼저 지적할 문제는 선교사의 공백을 보완하고,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선교와 교리교육을 이루어갈 사람이 중요하고 필요했기 때문이다. 1차 대전으로 유럽은 전쟁터가 되었고, 선교지에서 활동하던 유럽 신부들은 본국으로 불러 들여졌다. 한국은 물론 중국 · 일본 등 아시아 여러 지역 천주교회는 성직자의 부족이라는 어려움에 봉착하였다.9) 한국인 성직자가 배출되었지만 외국인 선교사가 떠난 자리를 메울 여력은 아직 부족하였다.10)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전개되는 가운데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미국 천주교회를 향해 외방 선교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호소하였다. 이 문제에 특히 적극적으로 나섰던 드망즈 주교는 1915년 5월에 메리놀회 잡지인 《그 먼 땅에》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하였다.

 

“의심의 여지없이 사람들은 유럽이 전쟁으로 말할 수도 없이 고통받고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나 선교지는 말할 수 없이 심한 고통을 받았으며, 안타깝게도 지금부터 몸과 영혼을 돌보는 책임을 가진 선교사들도 좌절에 대항하여 싸워야만 합니다. 유럽은 우리보다 훨씬 빠르게 회복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엄청난 파괴의 한복판에 처한 멀리 떨어져 있는 선교지는 누가 생각해 줄 것인지요? 하느님이 우리를 보호해 주시기를, 하느님이 미국에 많은 소명을 일으켜 세워 주시기를!”(《그 먼 땅에》, 1915년 5월호, 70쪽)

 

드망즈 주교를 비롯해 한국 천주교회의 주교와 신부들은 미국 천주교회를 향해 전쟁 이후 비참해진 선교지를 돌아볼 것을 적극 호소하였다. 미국 천주교회에게 아시아 선교에 대한 책임을 촉구하며, 일정한 역할을 수행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외방 선교에 참여하는 것은 미국 천주교회의 명예를 세우는 일이라는 것, 이를 위해 유럽 천주교회가 헌신해 온 아시아 선교활동에 참여하라는 것, 그리고 한국은 동양의 그 어떤 나라보다도 영성이 일어나는 준비된 선교지라고 강조하였다.11)

 

마침내 창설 이래 아시아 천주교회와 소통해 온 메리놀회 월쉬 총장은 1917년 9월부터 1918년 4월까지 중국, 한국, 일본 등의 아시아 천주교회를 직접 순방하였다.12) 아시아 천주교회의 현장에서 월쉬 총장은 특히 재정적 후원 못지않게 빈 선교사의 자리가 큼을 목격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준 성직자와도 같은 회장’은 매우 긴요한 인력이었으며, 월쉬 총장이 여러 지역에서 목격한 회장의 활동을 기록으로 남긴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라고 해석된다.

 

다음으로 중국 · 일본 등 아시아 다른 천주교회는 이미 유급 전교회장이 등장하여 긍정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중국에서 온 메리놀 선교 편지》(Maryknoll Mission Letters – China -)에 수록된 여러 서신이 참고 된다. 중국에서 전개한 메리놀회 선교사의 상세한 활동을 접할 수 있는 이 서신에는 유급 전교회장 운영의 필요와 효과가 잘 드러나 있다. 1918년 10월 25일 버라드(Bernard F. Meyer)13) 신부는 서신을 통해 중국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활동을 전개한 전교회장인 陸伯鴻(Lo Pa Hong, 1875~1937)을 소개하였다. 버라드 신부는 ‘로(陸)씨의 병원’(Mr. Lo's Hospital)에서 미사를 봉행했는데 그곳은 정신병자, 절름발이, 가난한 환자, 죄수, 버려진 아이 등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 곳이었다. 로씨는 본래 사업가지만 천주교에 헌신하여 전교회장으로 이 병원을 열정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매년 2천명 이상의 어린이와 성인에게 대세를 준다고 보고되었다. 어느 날은 곧 죽어가는 노동자가 실려 왔는데, 로 회장은 기본 교리를 가르치고 병에 든 세례수로 대세를 베풀었다. 로 회장은 이러한 위급한 상황을 위해 늘 세례수가 들어있는 병을 지참하고 다녔다고 한다.14)

 

중국 선교사였던 버라드 신부가 전문적 전교회장의 필요를 주장한 일련의 일기도 참고가 된다. 버라드 신부는 1918년 11월 10일 <중국인의 특징과 필요>(Chinese Traits and Needs)라는 글에서 중국에 가장 필요한 것은 어린이를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시키는 전교회장이 선생으로 있는 학교라고 강조하였다.15) 보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으로 어린이에게 교리를 가르칠 인력을 양성하여 운영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촉구하였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다음 자료에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되었다. 버라드 신부는 <버림받은 사람들>(the outcast of the people)이라는 제목으로 일련의 글을 발표해 교구 전체에 남녀 교리교사가 크게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전쟁으로 인해 선교지가 황폐해졌다고 안타까워하며 더 이상의 손실을 막기 위한 즉각적인 조처를 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교리교사를 각 구역에 파견하여 신자들을 돌보고, 유아세례를 베풀고, 어린이를 가르치고 개종자를 격려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이를 위해 양장(yeung-kong, 阳江) 교구에 적어도 6명의 남자 교리 교사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양장에는 5명의 여성 교리교사도 필요하며, 다른 지역도 차차 여성 교리교사가 필요하다고 호소하였다.

 

여성 교리교사는 어린아이를 가르치는데 유용할 뿐만 아니라 특별히 여성에 대한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력이라고 하였다. 현재까지 여성 교리교사는 없는 실정인데, 그래서 더 많은 수의 개종자들은 남성이지만 그들의 아내들이 여전히 이교도라고 안타까워하였다.16) 선교사들은 여성에 대한 선교를 적극 진행해야 할 필요로 축첩제도와 더불어 중국의 영아 유기문제를 심각하게 지적하였다. 한 선교사는 이미 3명의 아이를 버렸는데, 그것이 죄인지조차 몰랐다고 하는 여성을 만난 이야기를 전하였다. 또한 딸을 죽이면 그다음 출생하는 자녀는 아들이라는 미신이 중국에 퍼져있다고 하였다.17) 그러므로 여성을 위해 활동할 여성 교리교사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리교사는 우선 전쟁으로 인한 선교사의 공백을 최소화할 인력으로 필요하였다. 또한 어린이 신앙교육과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선교활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여성’ 교리교사도 긴요한 상황이었다. 이에 부응하여 중국에 교리교사는 교회의 성장과 더불어 크게 증가하였다. 1930년대에 이르러 중국 천주교회는 1만 2천 명의 교리교사와 1만 5천 명의 교사가 있었다. 그리고 교리교사는 매년 증가해 나갔다.18)

 

일본에서도 유급 전교회장의 활동은 매우 효과적으로 보고되었다. 프란시스(Francis X. Ford) 신부는 1918년 10월 28일 서신에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인 제레미 세투르(Fr. Jérémie Cettour, 1867~1962) 신부의 활동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세투르 신부는 일본에서 25여 년을 선교에 헌신하며 젊은이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는 선교사로 평가된 인물이다. 그는 매우 탁월한 일본인 신자를 유급 전교회장으로 고용하였다고 한다. 일본인 전교회장들은 매년 2주간 가톨릭 교리에 대해 연속 강연을 하였으며, 사람들이 아주 많이 온다 하였다. 이 비용 충당을 위해 세투르 신부는 옛 친구로부터 연례 선물로 60달러를 받았는데, 이제 전쟁으로 인해 지원이 끊겼다고 아쉬워하였다.19) 이와 같이 중국, 일본 등 아시아 다른 지역에서는 유급 전교회장이 이미 설치 운영되고 있었고, 매우 긍정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셋째, 아시아 여러 교회의 상황을 파악하며 한국 진출을 추진하던 메리놀회는 전문적 인력인 유급 전교회장의 활동에 많은 시사를 받았다고 여겨진다. 이와 관련해 메리놀회 창설자인 프라이스 신부(Thomas F, Price)20)의 다음 설명이 참고 된다.

 

나는 (선교)활동하는 방법이 장소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한국에서는 선교사들이 ‘전교회장’을 고용하지 않으며, 그들을 원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나가서 개종자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가톨릭 교리를 가르쳐 사제에게 데리고 오는 평신도 사도직을 수행하는 사람을 양성하는 것이 목표이다 ; 그리고 이러한 활동은 매우 잘 이루어지고 있으며, 주교와 사제는 다른 방법을 원하지 않는다. 평신도가 각 공동체의 지도자를 맡고 있으며 어린이 세례를 포함한 많은 성무를 수행하고 있다.21)

 

전문적인 전교회장을 특별히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한국 천주교회는 평신도의 활동이 매우 잘 이루어지고 있다는 평가이다. 앞서 본 것과 같이 메리놀회의 창설자인 월쉬 총장과 프라이스 신부는 아시아에 선교사 공백과 재정적 어려움, 그 와중에 전개되고 있는 전문적인 유급 전교회장의 활동을 직접 · 간접으로 목격하였다. 한국 진출을 계획하던 이들은 평신도의 사도직 활동이 매우 잘 이루어진다고 평가하였지만, 보다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 다른 지역에서 실행되던 유급 전교회장 제도에도 크게 고무되었다고 보인다. 특히 비로소 신앙의 자유를 갖게 된 시점에서 보다 정확하고 체계적인 교리교육은 교회의 발전과 성숙을 위해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여기에 일정한 훈련과 시험을 거쳐 양성된 유급 전교회장은 선교사의 부족이라는 시대적 어려움을 보완하고 보다 전문적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하는 매우 요긴한 인력이었다.

 


3. 유급 전교회장의 양성과 운영

 

한국 천주교회 창설부터 교회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한 회장은 그 임명 및 해임권이 본당 신부와 교구장에게 있었으므로 전교회장 역시 그 틀 안에서 운영되었다고 보인다. 개항 이후 회장에 대한 내용이 정리되고 법조문화 되기는 하였지만 회장의 임명과 역할에 대한 체계적인 지침서는 마련되지 못하고 있었다. 회장의 직분을 다룬 지침서들은 1910년대를 넘어서면서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전교회장’의 명칭과 역할도 정리되어 있다. 전교회장과 관련한 한국 천주교회의 지침은 1923년 10월에 회장들을 위한 지도서로 간행된 《회장직분》(會長職分)을 통해 대략을 그려볼 수 있다.22) 이 지침서의 서문에서 뮈텔 주교는 모든 교우들이 주교와 신부를 도와 전교 사무에 더욱 힘을 기울여 줄 것을 강조하며 신자들의 전교활동을 크게 독려하였다. 그런데 전교 활동은 주교의 지휘를 따라 하는 것이고, 실행하기 전에 본당 신부와 필히 상의할 것을 기억하라고 규정하였으므로,23) 전교회장의 임명과 활동도 주교와 본당 신부의 지도 아래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전교회장의 특징으로는 다른 회장과 달리 특정 공소나 본당에 정착해 활동하는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다만 본당 신부의 지휘에 따라 전교 사무에만 힘을 쓴다고 설명되어 있다. 냉담 교우를 찾아다녀 권면하고 외교인을 권화하며 기회가 닿는 대로 힘써 대세를 줄 의무가 있다고 하였다.24) 하지만 유급 · 무급의 구분이나 기준에 대한 지침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유급으로 전교회장을 고용하는 제도의 실행은 메리놀회가 중국과 일본 등 다른 아시아지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실행했다고 보인다.

 

평양교구의 유급 전교회장은 1923년 메리놀회가 평안도의 전교를 맡아 한국에 진출한 직후부터 확인된다. 1922년 11월 교황청이 평안도에 대한 포교권을 메리놀회에 위임하여 1923년 5월 메리놀회 번 신부(Byrne, Patrick J., 1888~1950, 초대 평양교구장, 주교)25)가 평양 지목구 설정 준비 책임자로 한국에 도착하였고, 이어 10월에 클리어리(Cleary, Patrick, 1896~1970) 신부와 11월에 모리스(Morris, John Edward : 1889~1987, 제2대 평양교구장) 신부가 입국하였다. 이때 모리스 신부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1924년 5월에 학교 교사 4명, 교리교사 2명이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메리놀회 진출 즉시 평양교구에는 학교 교사와 거의 차이가 없는 급료를 받던 유급 전교회장이 이미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메리놀회는 중국과 일본 등 다른 지역의 유급 전교회장의 경우를 참고하여 한국에 진출한 직후부터 이를 시행한 것이라 판단된다. 전교회장을 양성하여 운영하는 것에 대한 원칙과 방법에 관해서는 영유 성당 모리스 신부의 다음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다음을 곰곰이 되씹으며 심사숙고해 주십시오. 저희 전교사 양성학교는 평생을 교리교사로 헌신할 열망을 지닌 본방인들을 상대로 우리 연구소에서 정기 시험을 실시하며 출범하고 있습니다. 현재 15명 정도가 자기 집에서 공부하며 우리가 제시한 종교적 주제로 논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모이면 필기시험을 치고 점수를 매깁니다. 그들은 능력에 따라 보수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본방인 교사팀을 구성하고 전교사 지망생들을 모아 전인교육을 시킬 몇 개의 중앙학교들을 세우기 전에 할 수 있는 최상의 일입니다.26)

 

이 당시 모리스 신부는 영유 성당(1902~1950)의 4대 주임신부(1924~1927)로 재직하고 있었으며, 위의 글은 성탄을 맞아 미국 뉴욕 메리놀 본회에 보낸 서신이다. 이를 통해 유급 전교회장의 양성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유급 전교회장은 정해진 임기를 두기보다는 ‘평생’ 헌신을 기본으로 하는 일이었다. 한국인 지망생 가운데 시험을 통해 선정하였으며, 교리를 공부하여 논문을 준비하고 일정한 시험을 치른 뒤 점수에 따라 선발되었다. 보수는 능력에 따라 주어졌다고 한다. 지망생들은 종교적 주제로 논문을 작성하고 학습과 시험을 거쳐 보다 전문적인 교리지식을 갖춘 유급 전교회장으로 양성되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출범하여 시행되고 있었지만, 모리스 신부는 지망생들이 한데 모여 공부하는 ‘중앙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있었다. 지망생들을 각자 자기 집에서 공부하도록 하는 것 보다는 학교를 통해 보다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양성하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앞 <표>에 보인 모리스 신부의 기록보다 2년 뒤인 1926년에도 전교회장 양성은 개별 본당에서 이루어진 것이 확인된다. 진남포 본당의 5대 주임 신부로 부임한 메리놀회의 더피 신부(Fr. Duffy, Patrick)가 신자 가운데 신덕이 두텁고 일정한 소양을 갖춘 사람을 선발하여 전교를 담당할 전교사로 양성하였으며, 교리 연구반도 신설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그러하다.27)

 

앞서 알아본 《회장직분》의 <제삼편 전교회장>(뎨삼편 젼교회쟝)에 따르면 전교회장이 되려면 회장의 직분을 다 알아야 한다고 하며 특히 전교회장이 수행해야 할 직분으로 네 가지를 강조하였다. 그 가운데 ‘천주교의 모든 요긴한 도리를 배우고, 외교인과 열교인[프로테스탄트]의 의심과 반대를 물리치기 위하여 성교회의 여러 가지 성서를 공부할 것’이 있다. 본당 신부의 지도 아래 전교회장은 교리와 성서에 대한 일정한 훈련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유급 전교회장을 운영하는 자금은 절대적으로 후원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28) 유급 전교회장의 본분은 전교사무에만 힘을 쓰고 이를 위해 교리를 익히고 성서를 공부하는 것이 무엇보다 최우선이었다. 이와 같은 전문성을 가졌기 때문에 유급 전교회장의 활동은 선교와 교육이라는 두 축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와 관련해 원산교구의 베네딕도회 선교사이자 덕원 본당의 칼 슈테거(Fr. Karl Steger, Gregor, 1900~1950) 신부에 관한 자료가 참고된다. 칼 슈테거 신부는 산골보다는 도시에 성당을 세워 유급 전교회장의 활동을 격려하며 선교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그는 가족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전교회장만이 선교사를 각 가정으로 인도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열 수 있으며, 교리 수업이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보완해 줄 수 있습니다. 순박한 한국인들은 의문이나 망설임이 있으면 전교회장을 찾아갑니다. 전교회장은 또 한국인의 관례와 풍습, 교우들의 생활, 가족과 친족 관계와 관련해 선교사에게 조언해 줍니다. 아울러 선교사는 어린이들을 모아야 합니다. 어느 정도 학력을 갖춘 전교회장의 도움을 받을 때만 선교사는 어린이들을 모을 수 있습니다. (슈테거 신부, 가족에게 보낸 1931년 10월 5일 편지 중에서)29)

 

유급 전교회장은 신자들이 신앙과 관련한 의문이나 어려움이 있을 때 크게 도움이 되는 존재였다. 특히 전문성을 갖추었기 때문에 어린이 교육 등 교회가 중요하게 지향하는 선교 사업에 매우 긴요한 인력이었다.

 

 

 

교구가 설정될 때 89명이던 전교회장은 십 년도 채 안되어 7.8배가 되어 300명 가까운 인원으로 확장되었다. 그 가운데 유급 전교회장은 14명으로 출발하여 70~90명으로 증가하였다. 평양교구에서 유급 전교회장의 규모가 확대되어 나간 것은 그들의 활동이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들의 활동과 관련해 제2대 평양교구장 모리스 몬시뇰을 돌아보며 남긴 다음 기록이 주는 의미가 크다.

 

목주교는 만 六년간 신설교구를 위하여 다방면으로 너무 로력하신 것이 그 사직의 원인이 되었다. 六년 동안 각하의 업적은 웋[위]에 대략말한바이지마는 평양교구가 창설 十주년에 본당이 二十처가 되고 교도가 一만 八천에 달하였고 예비자가 三천 二백이며 교육기관과 자선기관이 거의 본당마다 시설되여 있으며 유급전도사 남녀 七十여명이오 매년에 영세자 二천여명을 헤아리게 되었으니 어젯날 이단자의 가라지밭이든 평안도는 오늘날 풍성한 추수를 하는 주의 밀밭이 되었도다.31)

 

모리스 몬시뇰은 1930년 4월 평양교구의 2대 교구장에 임명되어 1936년 9월 한국을 떠나기까지 9개 본당과 65개 공소, 총 신자 수 7천여 명이던 교구를 불과 6년 만에 19개 본당과 134개 공소, 신자 총수 1만 7,738명으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역사를 정리하는 자리에서 ‘풍성한 추수를 하는 주의 밀밭’이 되기까지의 각별히 ‘유급 전도사’를 지목할 정도였다. 한국 여러 교구의 연혁과 상황을 전망하는 자리에서도 평양교구 유급 전교회장은 특별히 주목을 받았다.

 

1923년 경성교구의 사무가 복잡하고 교구구역이 너무 광활하므로 부로데스당 교파의 전성지인 평안남도를 분립하여 거기에 적응한 전교회 신부를 초빙하기로 되어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신부들이 조선에 들어와 1927년까지 조선어와 풍속을 연구한 결과 1927년에 평양교구로 분리하였다. … 이 교구의 전교방침 중 특색은 본당과 중요지대마다 남녀유급전도사를 두엇스며 인쇄물로 선전하며 순회강연과 교구적으로 개최되는 교리강습과 작년에 조직된 가톨릭운동 연맹회원들이 개인전도에 노력하는 사실이다.32)

 

교구의 연혁을 돌아보는 자리에서 ‘유급 전도사’의 강연 · 문서선교 · 교육활동을 평양교구 선교정책의 특징으로 강조하였다. 평양교구의 성장, 나아가 한국 천주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유급 전교회장의 활동은 하나의 견인차였던 것이다.

 

 

4. 유급 전교회장의 활동과 한국 천주교회의 성숙


1) 유급 전교회장의 활동

 

평양교구에서 유급 전교회장으로 활동한 사람은 많게는 수백 명에까지 이르렀다. 그들을 모두 알아내기 어렵지만, 기록으로 남아있는 사례만으로도 그 활동의 대략을 짐작할 수 있다.

 

 

 

메리놀회가 진출하였을 때 평양교구 본당은 7개였고, 서울교구 소속 김성학 신부만이 교구 신설을 돕기 위해 1922년부터 평양 성당(관후리 성당)에 파견을 나와 있었다. 김성학 신부는 평양교구가 설정된 이후에도 교구에 남아 사목을 지속하면서 전교회장의 활동을 크게 격려하였다.42) 그는 새로이 한국에 진출한 메리놀회 소속 신부들은 물론 교구 소속 한국인 신부의 협력자로 활동하면서 선교 사업에 전교회장을 적극 관여시켰다. 김성학 신부의 이러한 사목 방침은 평양교구에서 전교회장으로 활동한 김구정을 통해 잘 드러난다. 대구에서 대를 이어 회장을 지낸 집안 출신인 김구정(<표>의 1)은 1931년부터는 평양교구 전교회장으로 교리를 가르치고 강연과 잡지 간행, 그리고 교회사 연구 등에 큰 족적을 남겼다.43) 강계 본당의 이병모 유급회장(<표>의 19)은 1년 사이에 56명의 영세자를 얻을 정도로 열심히 활동한 인물로 본당사에도 그 족적이 남아있다. 강계 본당은 부속 공소인 前川 시내에도 전도사를 파견하여 30여 명의 신도를 얻었고, 만포진에 공소를 세워 전도사를 파견하여 20여 명의 신자를 얻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별하 공소에도 전도사를 파견하여 전도에 힘써 1년 만에 30명의 영세자와 7~80명의 예비자를 얻었다고 하였다.44) 서포 교회도 다음과 같은 소식이 보도되었다.

 

서포는 적은 빈촌으로써 평양교구 중앙관리소의 거대한 건물과 부속기관이 있게된 관계로 적은 본당의 이름을 차지하여 오륙년을 지내오나 별로 전교상황으로나 발전 상 특기할 바 없더니 작년 이래로 본당신부와 전교회장들의 활동으로 예비자의 수가 날로 늘어 영세입교하는 자가 발끝을 이어 생기게 되어 금년 1년동안 영세자가 백 명가량이며 매주일 모이는 문교자와 및 예비자는 근방 촌락에서 모여들어 백여 명에 달하야 현재 서포본당 교우 총수가 3백이란 수자를 돌파하였다 한다.45)

 

이 기록은 서포 교회의 성장을 본당신부와 전교회장의 활동으로 돌리고 있다. 본당신부는 말할 것도 없겠지만 전교회장이던 김관택, 강유선, 강왕보, 손 안토니오, 그리고 권 요세피나 등의 활동을 짐작하게 해준다. 교회의 성장을 축하하기 위해 소인극[서포 祝賀素人劇]을 열었는데, 관람객이 무려 6~700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강유선 전교회장은 서포교회 개최로 열린 70여 명이 참가한 소년소녀 수양회에서 강사로도 활동하였다.

 

서포본당 소년소녀수양회 - 3월 25일부터 29일까지 소년소녀수양회개최, 참가아동 70여명, 지도신부는 황해도 신천본당 주임 임 신부, 강사로 순안교회 전도사 강요셉(有善)씨와 본사 강 양고버(昌熙)씨였다더라.46)

 

전교회장의 활동에 힘입어 각 본당은 대인반/소년반으로 구분한 교리강좌와 경쟁대회를 가졌고, 전 교구 차원의 교리시합도 열렸다. 본당 교리경쟁회에서 선발된 사람은 교구 차원의 대회에 진출하였다.47) 1936년 연말에 5백여 명의 관람자가 있는 가운데 평양교구 내 10개 본당에서 31명이 참가한 교리시합이 있었는데,48) 이러한 대회는 각 본당 전교회장의 교리교육, 강의, 강연회가 바탕이 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톨릭연맹 비현지회 주최와 주임 ‘레이’ 신부의 후원으로 지난 11월 중순부터 시작하야 본 교회 각 공소에 교리강습회를 열었는데 낮에는 교리강습, 밤에는 강연회, 수양강화 등을 하였는데, 일반 신자들에게 영육간 다대한 이익을 주엇다고.

 

기간 : 공소마다 각1주일

강사 : 전도사(金鍾植) 바오로, 녀전도사(金正熙) 마리아

부기할 것은 이번 성탄첨례에 영세자가 본당에 48인, 공소에 54인. 주임신부의 민활한 수완과 전도사들의 맹활동이 결승이 아니고 무엇일까?49)

 

전교회장은 공소마다 다니면서 1주일 동안 낮에는 교리강습, 밤에는 여러 강연을 담당하였다. 전교회장의 이와 같은 ‘맹활동’으로 영세자가 백여 명이 넘었다는 소식이다. 공소에는 공소회장이 있었지만 유급 전교회장은 공소를 순회하며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비현 교회만이 아니라 평양교구에 특히 유급 전교회장은 본당 신부의 지도 아래 여러 공소를 두루 다니며 강연을 담당하였다.

 

현재[1937년] 전교사무의 봉조자로 박 요안(박봉서) 전도사 이하 남녀 3인 유급전도사를 다리고 소속공소 5개소 신도 5백여 명을 통솔하였다.50)

 

유급 전도사가 선교의 조력자로 공소의 신자들을 돌보고 있음이다. 이처럼 교회는 일정한 지적 수준을 갖춘 사람을 전교회장으로 고용하여 교리공부와 문맹퇴치를 목적으로 다양한 연령의 남녀 모두를 대상으로 한 선교활동을 전개하였고, 전교회장은 전문 인력으로 신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으며 활동해 나갔다.

 

2) 유급 전교회장을 통해 본 한국 천주교회의 성숙

 

신앙의 자유 이후 조금씩 체계화되고 보완된 회장 제도는 유급 전교회장 제도까지 정착 · 운영되었다. 한국 천주교회의 전통이며 특징이었던 평신도의 사도직 활동 위에 전문 인력인 유급 전교회장의 설치와 운영은 천주교 신앙을 한층 성숙시키는 바탕이 되었다. 여기에서는 그 일단을 분석하기 위해 구체적인 기록으로 남아있는 몇 가지 사례를 보려고 한다.

 

첫 번째 사례로 서포 본당 유급 전교회장 문만복이 신자 아내를 핍박하던 비신자 가장(家長)을 선교한 일화이다.51) 분노와 좌절로 점철되어 아내의 신앙생활마저 금지시킨 고집 센 한 노인을 문만복 전교회장이 기어이 마음을 돌려놓은 이야기이다. 여기에 등장한 김 노인은 만주 투자를 명목으로 땅과 소, 그리고 집까지 없앨 정도의 큰 금액을 사기당하고 혼자 장기를 두며 분노로 싸인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내 마리아가 이를 인내하고 절제하는 것을 보며 그 인종(忍從)을 가능하게 한 새로운 종교에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더욱 화만 내었다. 마침내 김 노인은 아내가 다시는 미사에 출석하지조차 못하게 하였다.

 

마리아는 이러한 사정을 주임신부인 라킨 신부(Fr. Larkin)에게 호소하였다. 라킨 신부에게 마리아의 사정을 들은 전교회장 김만복은 지금은 직접 신부가 방문하는 것보다 자신이 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김만복은 한국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이웃으로 잠시 들려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면 좋을 것이라고 제안하였다. 그 뒤로 김만복은 매일 김 노인을 찾아가 장기를 두었고, 매일 그에게 졌다. 마침내 김 노인은, “나는 천주교가 이렇게 친절한지 몰랐었다. 나는 집사람이 미사에 출석하는 것을 금지하였었다. 그런데 내일은 그녀가 갈 것이다. 당신의 종교에는 분명히 무엇인가 있다. 아마 나도 언젠가 미사에 갈 것이다”고 하였다. 김만복은 신부에게 이 상황을 보고하였고, 신부는 웃으면서, “바오로 당신은 정말 장기를 못두는 사람이군요! 하지만 좋은 전교회장입니다”라고 칭찬하였다. 김만복은 김 노인이 진정하게 개종할 때까지 이를 지속해 나갈 것이라고 하였다. 김만복의 인내하고 지혜로운 활동은 가장 선교하기 어려운 대상이라 할 수 있는 고집 센 가장의 마음을 마침내 움직이는데 성공하였다고 평가되었다. 이 일화는 천주교 신자인 아내의 순종과 인내, 그 사정을 돌아본 신부의 관심과 후원, 그리고 무엇보다 자칫 거리감을 느낄 수 있는 선교사를 대신해 끈기 있게 노인의 벗이 되어 준 전교회장 김만복(바오로)의 활동을 잘 드러내고 있다.

 

두 번째로 유급 전교회장 박 요한이 한센병 환자를 선교하여52) 마침내 본격적인 구라 사업으로까지 이어진 사례를 보고자 한다. 유급 전교회장 박 요한은 집에 구걸하러 온 한센병 환자들에게 친절을 베풀며 교리를 가르쳤고, 그 친절과 가르침에 감동받아 마침내 많은 환자가 개종하였으며, 신부와 전교회장이 한센병 환자 수용소에 정기적으로 방문한 일이다.53) 전교회장 박 요한은 본당 신부의 지도 아래 공소를 돌아보며 분주하게 하루를 보내고 귀가하였다. 비로소 피곤함을 씻으려는 순간에 마침 세 명의 한센병 환자들이 구걸하러 왔다. 박 요한은 그들을 집안으로 맞아들여 방안에 자리하게 하고 저녁식사까지 대접하였다. 식사를 마친 뒤 박 요한은 그리스도교를 전하였고, 비록 육체에 많은 시련과 고통이 있지만 결코 죽지 않는 영혼이 있다고 전하였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한센병 환자를 치유하였는가, 특히 육체적인 건강함 이상으로 훨씬 더 위대한 선물, 바로 믿음을 한센병 환자에게 주었다는 것을 말하였다. 이야기 끝에 밤이 늦어지자 요한 회장은 차가운 밤거리에 나가지 말고 자신의 집에서 자라고 고집하며 이부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다음 날 아침 식사 뒤 한센병 환자들은 눈물 어린 눈으로 감사의 인사를 하며 길을 떠났고, 박 회장은 다시 전교활동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어느 날, 박 회장은 다른 본당으로 발령받아 활동하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장날에 마을 광장에 나갔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데 누군가 자기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것을 느꼈다. 그때 박 회장은 질병이 더욱 심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미소를 머금고 인사를 건네는 한센병 환자를 발견하였다. 그는 깊고 쉰 목소리로 전교회장인 박 요한이 아니냐고 물었다. 나이 많은 한센병 환자는 자신이 이 년 전 그토록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세 명의 환자 가운데 하나라고 말하였다. 그는 거기 모인 많은 사람들에게는 물론 구걸하고 돌아다니면서 만나는 모든 한센병 환자들에게 전교회장의 집에서 친절한 대접을 받고, 먹고, 잠까지 잤던 사실을 말하곤 했다고 하였다. 그 친절한 행동은 일종의 전설이 되었으며, 모든 한센병 환자들은 박 요한을 숭상한다고 하였다. 박 회장이 대세(代洗)의 방법에 대해 설명해 준 이래 그동안 적어도 스무 차례 대세를 주었으며, 죽어가는 한센병 환자들이 세례를 받았다고 하였다. 박 회장이 설명해 준 것을 기억하여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죽어가는 다른 환자들을 인도하였다고 한다. 이미 전교회장이 가르쳐 준 약간의 천주교 신앙에 대한 설명과 작은 친절로 인해 수십 명의 한센병 환자들이 천국에 갈 수 있었다고 하였다.

 

그 환자는 박 회장에게 현재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곳에만도 대략 200명가량의 한센병 환자가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심지어 한센병 환자에게 그런 친절함을 보여준 신자가 믿는 그 신앙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 한다고 전하였다. 그들은 박 회장에게 그 한센병 환자들을 방문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박 회장이 모시는 베드로 신부와 박 회장은 한센병 환자 수용소를 정기적으로 방문하였다.54)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곧 세례를 받을 준비에 들어갔다.55) 박 전교회장의 친절과 교리에 대한 가르침은 한센병 환자에게 감동을 주었고, 결국 구라 사업으로 이어져갔다. 이를 통해 드러나는 환자에 대한 천주교의 인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환자는 전통시대 이래 늘 긍휼과 구호의 대상이었다. 그렇지만 환자는 공동체가 지향하는 목표나 가치를 실천하는 존재로 적극 포용된 경향은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환자 역시 동등한 인격과 영혼을 가진 존귀한 존재이며, 더 나아가 믿음과 구원의 선물을 주체적으로 누리고 전하는 존재로 자리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교회적으로 한센병 환자를 위한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구호사업이 시작하게 된 것 못지않게 천주교회가 보인 성숙함이다.

 

세 번째로 여성 전교회장의 구체적 활동의 일단을 검토하고자 한다.56) 폐결핵 말기로 죽음 직전에 이른 어린 소녀에게 신부의 지시에 따라 여 전교회장이 필요한 교리를 가르쳐 주어 세례를 받게 하였다. 소녀는 곧 사망하였지만 천주교회가 나서서 장례를 치러주었고 그로 인해 주변의 많은 사람이 큰 감동을 받고 교회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10대의 어린소녀가 11킬로 남짓 떨어진 거리로부터 4명의 남자가 임시로 만든 들것에 실려 왔다. 이미 폐결핵으로 매우 쇠하여진 상태인 그 소녀는 세례를 받고 싶다고 하였다. 사제는 즉시 여 전교회장에게 필요한 교리를 가르쳐 주라고 하였다. 세례를 위한 교리 공부를 수행하였고 그 소녀는 마리아라는 이름을 받았다고 한다. 마리아는 곧 세상을 떠났고, 교회는 마리아의 장례를 치러 주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직접 교리를 가르쳐 세례에 이르도록 지도하는 여성 전교회장의 활동을 목격할 수 있다.

 

네 번째로 전교회장이 사제와 신자와의 중간 연결자로서 자리매김하였음을 보고자 한다.57) 캐롤 몬시뇰이 예비자 교리시험과 공소 신자들의 고해성사 집전 등으로 아주 길고 힘들게 보낸 날의 일이었다. 마침내 막 잠자리에 든 시각에 전교회장이 찾아왔다. 20킬로 남짓 떨어진 마을에 사는 죽음이 임박한 나이든 신자를 방문해 달라는 요청을 전하였다. 캐롤 몬시뇰은 급하게 전교회장과 매섭게 추운 밤에 길을 나서 가파른 산길과 오솔길을 건너 환자 집을 방문하였다. 성유를 바르고 종부성사(병자성사)를 주고 몇 시간을 보낸 뒤에 돌아왔다고 하였다. 전교회장이 한밤중에 멀리 떨어진 신자의 위급한 소식을 전하고, 선교사를 그의 집으로 안내한 이 실화는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던 그의 활동을 짐작하게 해 준다. 전교회장은 흩어져 살고 있는 신자들의 거처와 상황을 파악하며 신자들과 소통하고 있었다. 그는 긴급한 상황에 처한 신자가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 존재였으며, 신자를 돌보는 사제의 사목에 긴요한 조력자였다.

 

전교회장의 활동을 보여주는 이러한 구체적인 사례는 한국 천주교회의 보다 성숙함을 알게 해 준다. 아내가 먼저 신자가 되어 남편인 가장을 전교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그려지고, 가정의 사도로 아내, 딸, 누나, 여동생 등 여성이 조망되었다. 여성이 남편, 부모를 비롯한 가족과 이웃을 개종하게 이끈 경우가 부각되었다. 당시 한국 천주교회는 남녀의 동등함에 바탕을 둔 결혼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도 자주 언급하였다. 다른 생명을 먼저 창조한 예를 들면서 남성이 먼저 창조된 것이 우월함의 증거가 아니라고 하며 성(聖)가정을 향한 천주교의 가르침을 가르쳤다. 더 나아가 여성이 남성과의 동등함을 넘어 보다 적극적인 가정의 사도로 그리기까지 하였다. 환자에 대한 관점도 주목된다. 한센병 환자가 신앙을 받아들여 다른 한센병 환자를 구원으로 이끌었고, 죽음이 임박한 환자였던 마리아가 가족과 이웃을 회심하게 한 일이 보도되었다. 환자가 구령의 대상으로서만이 아니라 주체적인 전교자로 그려졌다. 환자가 동등한 인격과 영혼을 가지고 전교자로서의 역할을 능동적으로 수행하며 믿음과 구원을 이루어가는 존재로 세워졌다.

 

한편 전교회장의 주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는 교리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대개 성인반과 아동반으로 나누어 담당하였다. 그런데 이 시기 어린이에 대한 교회의 관점도 크게 성숙하였다. 교회는 어린이 자체의 독립적인 영혼 구령을 목표로 한 신앙교육을 전개하였다.58) 교리 습득 지식을 어린이와 청년 자신이나 부모에게 맡길 수만은 없다고 하며 주일학교 교육에도 주력하였다.59) 주일학교 교재를 연속 기고한 오기선 신부는 어린이들을 “나의 동포들아”라고 칭하며, ‘좋은 신자로 천국에 갈’ 동등한 존재라고 하였다. 또한 “너희의 모든 존재가 아득한 조선 땅의 희망의 싹이다” “너희는 우리 조선 가톨릭의 구원이다” “너희 두 주먹과 다리는 땅으로부터 하늘에 이르기까지 죄악과 불의를 대상으로 한 모든 개혁의 무기이다”라고 하며 복음화의 무기로 어린이를 강조하였다.60) 어린아이를 공동체의 변화를 불러올 만큼 신앙의 본을 보인 존재로 묘사하였고, 특히 어린 소녀나 여성(딸, 누나, 아내 등)의 신앙이 가정과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낸 주요 동기로 설정되었다.61)

 

근대 이전 어린이는 공동체 구성원이 함께 지향하는 이념의 추구나 도덕의 실현에서 상대적으로 그 역할이나 의미가 소외된 존재였다. 하지만 천주교 안에서 어린이는 그 독립성과 인격이 존중되고 강조되었으며, 신앙의 자유 이래 어린이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보다 적극적으로 발전되었다.62) 이는 천주교가 수용된 이래 한국사회와 소통하면서 일으킨 여러 변화 가운데 주목되는 사실이며, 바로 그러한 변화의 현장에 어린이 교리를 담당하는 유급 전교회장이 있었다. 이러한 교회의 성숙이 전교회장만의 노력은 물론 아니다. 그런데 전문적 훈련을 받은 유급 전교회장의 활동은 한국 천주교회를 한층 성숙하게 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5. 맺음말

 

오랜 박해기를 견디며 성장해 온 한국 천주교회는 19세기 후반을 지나서야 비로소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일제 식민정권의 통제가 가해졌고, 다른 형식의 억압과 박해가 이어졌다. 다종교 사회라는 또 다른 시대를 맞은 어려움에도 처하였다. 천주교 수용과 박해, 그리고 근대사회로 진입하기까지의 여정에 회장은 시대에 따른 변화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헌신적인 활동을 전개해 왔다. 특히 근대 한국 천주교회에 등장한 유급 전교회장은 일정한 훈련과 시험을 거친 전문적 인력이었다. 유급 전교회장의 활동을 검토한 이 글은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유급 전교회장은 선교사의 공백을 보완하며 신앙의 자유를 맞아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선교와 교리교육을 담당한 매우 긴요한 존재였다. 교회 창설 이래 선교사는 언제나, 어느 지역에서나 부족한 실정이었다. 특히 1차 대전으로 유럽이 전쟁에 휘말리면서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천주교회는 재정적 어려움과 선교사의 부족이라는 이중고에 봉착하였다.

 

이 시기에 이미 중국 · 일본 등 아시아 다른 지역은 유급 전교회장이 설치되어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러한 유급 전교회장의 활동에 메리놀회는 주목하였다. 특히 박해기를 지나 본격적인 신앙의 자유기를 맞은 시점에서 체계적이고 정확한 교리교육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사실 한국 천주교회는 전문적인 전교회장을 특별히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평신도의 활동이 매우 잘 이루어지고 있다고 평가될 정도였다. 이와 같이 축적되어 온 평신도의 역량 위에 전교활동에 전념하는 유급 회장제의 시행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한국 천주교회 창설부터 교회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한 회장은 그 임명 및 해임권이 본당 신부와 교구장에게 있었으므로 전교회장 역시 그 틀 안에서 운영되었다. 전교회장은 본당 신부의 지휘에 따라 전교에 힘을 기울였다. 교회에서 멀어진 신자를 찾아가 권면하고 외교인을 교회로 인도하며 기회가 닿는 대로 힘써 대세를 줄 의무가 있었다. 이들은 정해진 임기가 있기보다는 ‘평생’ 헌신이 기본 원칙이었다. 한국인 지망생 가운데 시험을 통해 선정하였고, 교리 공부와 논문을 작성하고, 신부의 지도로 일정한 시험을 거쳐 선발되었다. 보수는 능력에 따라 주어졌다고 한다. 이들은 전문적 교리지식을 갖춘 교회의 인력으로서 교리교육, 강연, 출판을 통한 선교, 그리고 일반적인 선교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평양교구에 유급 전교회장이 증가해 나간 것은 그들의 활동이 성과를 거두고 있었음을 반증한다. 한국 여러 교구의 연혁과 상황을 전망하는 자리에서도 평양교구 유급 전교회장은 특별히 주목받는 존재였다. 이들의 활동으로 문서선교 · 순회강연 · 교리강습 등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평양교구의 성장, 나아가 한국 천주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유급 전교회장은 큰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유급 전교회장의 활동을 통해 드러난 천주교회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는 한층 성숙한 것이었다. 고집 센 가장을 비롯해 환자, 여성, 어린이를 향한 전교회장의 활동은 환자의 치유나 영혼 구령을 넘어선 성숙한 인식의 표현이었다. 그들의 활동을 통해 사회 구성원이 지향하는 이념의 추구나 도덕의 실현에서 상대적으로 그 역할이나 의미가 소외되었던 존재를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교회는 단지 긍휼이나 때로 기피의 대상이었던 환자를 공동체 안에서 동등한 가치를 지닌 존재로 자리매김 하였다. 심지어는 전교회장의 활동을 통해 환자가 주변 사람을 향해 사도직 사명을 수행하는 경우까지 나타났다. 전통적으로 환자는 긍휼과 보살핌의 대상이었다. 특정한 종교나 사상에서 그 이념의 구현을 위해 환자가 주체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로 자리하지는 못했었다. 그런데 유급 전교회장의 활동을 통해 드러난 당시 한국 천주교에서의 환자는 전통적인 환자에 대한 가치관이나 관점과는 전혀 달라진 것이었다. 여성이 교회라는 공적 영역에서 활동을 시작한 것에서 더 나아가 오히려 여성(딸, 여동생, 누나, 아내 등)이 교리를 먼저 배워 가족과 주변의 전교자가 된 실화도 자주 소개되었다. 가정 안에서 어린 소녀나 젊은 여성이 복음의 사도로 그려졌다. 교회는 어린이에 대해서도 매우 주목하였다. 어린이의 독립성과 인격을 존중하고 강조해 온 것에 이어, 이제는 어린이야말로 복음화의 주인공이며 한국을 복음으로 개혁할 무기와도 같은 존재로 강조하였다. 교회가 유급 전교회장에게 특히 어린이를 향한 교리교육을 강조한 까닭도 이 때문이었다. 이러한 교회의 성숙이 유급 전교회장만의 노력은 물론 아니다. 그런 데 전문적 훈련을 받은 유급 전교회장의 활동은 한국 천주교회를 한층 성숙하게 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전문적 훈련을 거치고 본당 신부의 지도 아래 교리교육과 강연, 출판 등을 통한 선교의 현장에서 헌신적 활동을 전개한 유급 전교회장은 한국 천주교회의 성숙한 변화와 질적 성장을 이끌어 낸 밑거름이라고 할 수 있다.

 

* 이 논문은 2014년 정부재원(교육부)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NRF-2014S1A5B5A02011717).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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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터넷 홈페이지

 

천주교회 총람 ( http://www.catholic-hierarchy.org )

메리놀 외방선교회 아카이브 ( http://maryknollmissionarchives.org/?page_id=2766 )

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 기념성당 ( http://saenamteo.or.kr/martyrs/1040 )

Goodnews ( http://info.catholic.or.kr/saint/view.asp?ctxtSaintId=1093&Orggubun=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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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회장(會長, Catechista)은 전도사, 교리교사를 가리키는 카테키스타(라틴어 cătēchísta)에서 유래하였다. 회장에 관해서는 방상근, <한국교회의 회장>, 한국교회사연구자료 제26집 《회장》,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5~18쪽 해제를 통해 한국 천주교회 회장의 역사, 직분, 그리고 회장 지침서에 대한 상세한 이해를 얻을 수 있다. 방상근, <회장>, 《한국가톨릭대사전》 12, 한국교회사연구소, 9843~9846쪽도 참고된다.

 

2)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가 설립(1995) · 운영하는 순교영성연구소는 순교 유산 위에 선 한국 천주교회의 성숙한 변화와 질적 성장을 이끌어 내는 견인차로 삼고자 ‘회장’을 주제로 국내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2017년 9월 29일)하였다.

 

3) 미국 최초 외방전교회의 공식적 명칭은 ‘Catholic Foreign Mission Society of America’이다. 1911년 4월 27일 전미 주교회의의 인가를 얻고, 6월 29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하여 인준, 창설되었다. 이 글에서는 자료 출처와 서술의 편의에 따라 메리놀 외방전교회(이하 메리놀회)로 서술하였다. 아시아 선교를 목적으로 창립된 메리놀회는 1922년 교황청으로부터 평안도의 포교권을 위임받아 1923년 한국에 전교신부를 파견하면서 한국에서의 선교활동에 들어갔다. 메리놀회에 대한 사전적 설명은 김성희, <메리놀 외방전교회>, 《한국가톨릭대사전》 4, 2004, 2595쪽 참조. 한국 진출 이후 전개한 메리놀회의 활동은 천주교평양교구사편찬위원회 편, 《천주교평양교구사》, 1981에 잘 정리되어 있으며, 메리놀회의 한국 진출과 활동에 대한 개괄적 소개는 방상근, <선교회 · 수도회의 정착과 활동>, 《한국천주교회사》 5, 2014 참조.

 

4) Maryknoll Mission Letters – China -, Vol 1, 2, The Macmillan Company, 1923, pp.29~30쪽, 1918년 10월 27일 자 메리놀회 창설자인 Thomas F, Price 신부(1860년 8월 ~ 1919년 9월)의 서신.

 

5) Ibid., 이 당시 중국과 일본 등에서는 이미 유급으로 전교회장이 설치 · 운영되고 있었다.

6) 인용문에 ‘전도사’ · ‘전교사’ · ‘교리교사’ 등 다른 명칭이 사용된 경우는 그대로 보였다.

 

7) 미국 메리놀회 소속 한국 선교사 캐롤 몬시뇰의 활동에 대해서는 최선혜, <냉전시대 캐롤 몬시뇰의 구호활동과 그 의의>, 《교회사연구》 34, 2010 참조.

 

8) 메리놀회의 한국관련 문서에 대한 필자의 소개와 검토는 최선혜, <한국 천주교회의 미국 천주교 외방선교회(메리놀회)와의 교류와 그 의의 : 1911~1923>, 《교회사연구》 49, 2016의 각주 2)에 정리한 내용 참조. 여기에 더해 이 글에서는 2016년 메리놀회 본부의 문서고를 방문하여 수집한 문서와 서적 등을 추가로 활용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위의 논문, 각주 4) 참조.

 

9) 《그 먼 땅에》, 1916년 4월호, 54쪽, 1917년 7월호, 102쪽, 104쪽, 9월호, 134쪽 등.

 

10) 1898년부터 1910년까지 서품 받은 한국인 성직자는 21명이었고, 전쟁이 발발한 1917년 현재 18명이 생존 · 사목하고 있었다. 15명의 외국인 선교사가 징집되어 한국을 떠난 반면, 한국인 성직자는 1913년 3명, 1914년 1명이 배출된 실정이었다. 윤선자, 《일제의 종교정책과 천주교회》, 경인문화사, 2001, 84~87쪽.

 

11) 미국 천주교회를 향한 한국 천주교회의 이와 같은 정책에 관해서는 최선혜, <한국 천주교회의 미국 천주교 외방선교회(메리놀회)와의 교류와 그 의의 : 1911~1923>, 《교회사연구》 49, 2016 참고.

 

12) 이 여정에서 한국에는 1917년 10월 24일 부산을 통해 입국하여 대구, 서울 등을 돌아보고 1917년 11월 2일 압록강을 통해 만주로 떠났다. 한국 천주교회에 대한 소개는 James A. Walsh, Observations in the Orient, Catholic Foreign Mission Society of America, NY, 1919, pp. 82~97.

 

13) Bernard F. Meyer(June 16, 1891~May 8, 1975). 메리놀회 소속 중국 선교사. 1916년 2월 12일 사제품을 받은 뒤 1917년 남중국에 부임하여 최초의 메리놀회 선교사가 되었다. 2차 세계대전으로 본국으로 송환되었다가, 1946년 중국 광동에 돌아갔지만 1950년 중국으로부터 추방되었다. 메리놀회 아카이브 버라드 신부 전기(http://maryknollmissionarchives.org/?deceased-fathers-bro=father-bernard-f-meyer-mm).

 

14) Maryknoll Mission Letters −China− 1, The Macmillan Company, 1923, pp. 42~43.

15) Ibid., p. 49.

16) Ibid., 1918년 12월 11일, pp. 54~55.

17) Ibid., p. 49, 52.

 

18) <支那에 가톨릭 現勢>, 《가톨릭조선》, 1936년 3권 1호, 105쪽. 당시 중국에는 주교 89인, 사제 4,014명(중국인 1,647명)과 더불어 1만 2천의 전도사[교리교사/전교회장]와 1만 5천의 교원이 있으며, 교우 총수는 270만 2,468명, 예비자는 46만 5천 명이라 보도되었다. 당해 년에 교리교사가 500명 증가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에 보이는 교리교사를 유/무급으로 구분해 알 수는 없다. 그런데 한국 진출을 모색하던 메리놀회는 중국 · 일본과 달리 한국에는 ‘유급’ 교리교사가 아직 설치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정확한 숫자나 현황을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아시아 지역 다른 천주교회는 한국보다 앞서 유급 교리교사가 이미 활동하고 있었다.

 

19) Maryknoll Mission Letters – China -, p. 23.

 

20) 메리놀회의 세 명의 창설자에 관해서는 Jean-Paul Wiest, Maryknoll in China : A History, 1918~1955, Orbis Books, Maryknoll NY, 1988, pp. 11~14의 <3명의 창립자>와 메리놀 외방전교회 홈페이지의 “Maryknoll Mission Archives”의 ‘창립자 전기’ 참조.

 

21) <프라이스(Thomas F, Price) 신부의 서신>, Ibid., 1918년 10월 27일, pp. 29~30.

 

22) 《회장직분》에 대해서는 일찍이 김승주 신부가 석사 논문에 이어 여러 편의 논문을 통해 상세히 분석하였다. 김승주, <한국교회지도서들을 통하여 본 공소회장의 위치와 역할>, 광주가톨릭대학교(대건신학대) 석사학위논문, 1979. 여기에서 김승주 신부는 《장주교 윤시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부터 《회장직분》에 이르는 10개의 지도서를 다루었으며, 회장의 역할을 공소관리 · 교리교육 · 성사집행의 세 가지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이어 김승주, <한국 천주교회 공소회장의 위치와 역할> (1), (2), (終), 《신학전망》 46, 47, 48, 광주 가톨릭대학교 신학연구소, 1979, 1979, 1980을 연이어 발표하였다. 공소회장에 주목한 것이지만 전교회장과 관련해서도 크게 참고 된다.

 

23) 《회장직분》의 본문은 《경향잡지》에 연재된 것과 이영춘 신부가 번역한 것을 참고하였다. 《경향잡지》 제12권 제5호, 통권 397호, 5월호, 1918. 특히 <제삼편 전교회장>(뎨삼편 젼교회쟝) ; 르 장드르 저, 이영춘 역, 《회장직분》, 가톨릭 출판사, 1999. 9. 14.

 

24) 《경향잡지》 제12권 제5호, 통권 397호, 5월호, 1918. 특히 <제삼편 전교회장>(뎨삼편 젼교회쟝), 203쪽.

 

25) 번, 제임스 패트릭(Bishop Byrne, Patrick J., 방일은, 方溢恩, 1888~1950) 주교는 1927년 11월 평양에 부임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1937년 3월에 동경으로 부임, 태평양 전쟁 발발로 가택에 연금되었다가 종전 뒤 풀려났다. 1947년 4월 7일 주한 교황사절로 임명되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전쟁에서 공산당에게 체포되어 ‘죽음의 행진’ 도중에 선종하였다(《한국가톨릭대사전》 5, 2005, 3239~3242쪽)

 

26) 이정순 엮음, 《목요안 신부》,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1994, 173~178쪽, 1926년 12월 14일.

27) 평양교구사편찬위원회 편, 《천주교평양교구사》, 1981, 348쪽.

 

28) 모리스 신부는 ‘후원금으로 교사 한 명의 1년간 봉급을 마련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정순 엮음, 앞의 책, 101쪽, 1924년 9월 6일.

 

29) 리길재, <덕원의 순교자들(37) 그레고르 칼 슈테거 신부>, 《가톨릭평화신문》, 2014년 6월 15일 자, 10면.

30) 《가톨릭조선》, 1937년 4월호, 평양교구설정기념특집, 575쪽에 게재된 내용을 필요한 항목을 선정하여 작성한 것임.

31) <평양교구 소사>, 《가톨릭조선》 제4권 제4호, 1937년 4월, 574~575쪽.

 

32) <(朝鮮가톨릭史的展望) 朝鮮敎區의 沿革과 現勢―평양교구현세>, 《가톨릭조선》 제2권 제9 · 10합병호, 1935년 10월, 100~105쪽.

 

33) ※ 표 일러두기 1. 본당회장으로 이름이 오른 회장 가운데에는 공소회장인 경우도 있음. 2. 전교회장이라고 하였지만 교리교사, 전교사, 전교회장 등으로 칭해짐. 3. 유급 전교회장은 능력에 따른 보수를 원칙으로 둠. 4. 본당 소속 여러 단체의 회장은 제외함.

 

34) 김정숙,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에 평신도] - 교회사 연구에 여생을 바친 교육자 김구정 이냐시오(1898~1984)>, 《가톨릭평화신문》 2016년 8월부터 10월까지 연재된 상세한 연구 참조.

 

35) 《가톨릭조선》 제4권 제6호, 1937년 6월, 874쪽에는 ‘현상환’ 이름이 있는데, 《평양천주교회사》에는 보이지 않는다.

36) 메리놀문서 No8-R2 F3 2 182~188에 전교회장 문만복의 활동이 기록되어 있다.

37) <평양교구설정십주년기념 각교회소개판>, 《가톨릭조선》 제4권 제7호, 1937년, 7월호, 평남숙천교회, 991쪽.

38) 위의 글. 김용도 이하 4명은 공소회장.

 

39) <평북의주교회>, 《가톨릭조선》 제4권 제5호, 1937년 5월, 735쪽에는 박봉서(요안) 이하 유급 전도사 3명이 있었다고 되어있다.

 

40) 《천주교평양교구사》 483쪽. 의주 본당에는 1937년 현재 유급 전교회장이 4명이라고 되어 있다. 신부 1명, 수녀 3명, 총 교우 수는 474명, 공소 5개소 등이다.

 

41) 《가톨릭조선》 1937년 8월호, 1168쪽.

 

42) 서울교구 소속인 김성학 신부는 1922년 평양 관후리 본당에 부임하였는데 평양교구 설정 이후에도 남아 교구의 성장을 위해 크게 기여하다가 1936년 7월 서울교구로 복귀하였다. 평양교구사편찬위원회 편, 《천주교평양교구사》, 1981, 100쪽.

 

43) 김성학 신부의 적극적 관심과 격려로 전개된 평양교구 전교회장 김구정 이냐시오의 활동에 관해서는 김정숙, 위의 글, 2016년 8월부터 10월까지 연재된 연구가 크게 참고된다. 평양은 신설 교구로서 신자 공동체를 돌보고 선교에 헌신할 보다 전문적인 역량을 갖춘 평신도의 활동이 매우 필요했었기에 김성학 신부는 유급 전교사의 활동을 적극 장려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에 김구정 이냐시오는 평양교구 전교사 6명 가운데 한 명으로 활동하였는데, 평양교구 전교회장으로서의 활동은 8월 28일 자 17면의 <평양교구의 평신도 전도사> 참고.

 

44) 《가톨릭조선》 1937년 8월호, 1169쪽.

45) <各地敎會消息> 중 ‘서포 祝賀素人劇’, 《가톨릭조선》 1936년 2월호, 160쪽.

 

46) 《가톨릭조선》 1936년 5월호, 476쪽. 순천교회 전도사 강 요셉 유선과 함께 강사로 활동한 강창희 야고버는 평양 지목구 재단사무 담당이었는데 공산치하 평양교구의 첫 순교자이다. 평양교구가 발행하던 월간 《가톨릭연구》(가톨릭조선)에서 출판을 김구정(표의 1)이 전담하고 강창희는 교구 재단 업무를 담당하였다. 강창희에 대해서는 오세택 기자의 <평양의 순교자들 (4) 강창희 야고보>,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4월 23일 자 13면 참고.

 

47) 《가톨릭조선》 1936년 5월호, 481쪽.

48) 《가톨릭조선》 1936년 12월호, 1358~1359쪽.

49) <各地敎會消息> 중 ‘批峴교회 각공소교리강습회’, 《가톨릭조선》 1936년 2월호, 162~163쪽.

50) <평양교구설정 십주년 기념특집―평북 의주교회>, 《가톨릭조선》 1937년 5월호, 735~739쪽.

51) 메리놀문서 No8-R2 F3 2 182~188. 1941년 5월 5일 기고된 글.

 

52) 메리놀문서 No8-R2 F3 213~216. 이 문서는 캐롤 신부가 The Field Afar에 보낸 기고문인데 접수일은 1949년 4월 7일이며, 발행일은 그 해 9월이라고 적혀있다.

 

53)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두 개의 본당인 ‘the Golden Village’ 본당과 ‘the Mercy Village’ 본당, 두 분의 신부님인 바오로 신부님과 베드로 신부님, 그리고 전교회장 박 요한에 관한 더 이상의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캐롤 신부의 글에 따르면 박 요한과 베드로 신부는 ‘the Golden Village’ 본당을 거쳐 ‘the Mercy Village’ 본당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이 문서가 접수된 1949년 4월은 구라 사업도 체계적으로 자리를 잡기 이전이라 문서에 나오는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있던 곳도 어느 지역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54) 문서가 작성된 시기인 1949년은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여 막 구라 사업을 시작하였지만, 아직 제대로 진행되지는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1949년 6월에 보건부가 설치되어 <정부 나병대책 기본정책 및 사업연차계획>을 수립하여 나환자이상촌 건설과 국립 나기관 확충계획을 비로소 세웠다. 하지만 곧 한국전쟁이 일어나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가, 1951년 9월 이후에 갱생원, 성혜원, 신생원 등등의 나환자 요양소를 국립화하였다. 이 무렵 메리놀회도 캐롤 신부가 발 벗고 나서 구라사업에 착수하였다. 이에 1950년 6월 2일 경기도 시흥군 서면 광명리에 한국 최초로, 그리고 유일하게 설립된 가톨릭 나환자 마을인 ‘성 라자로 마을’을 설립했다. 이와 더불어 천주교 각 교구에서도 구라 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해 나갔다. 한국가톨릭 나사업연합회, 《천주교구라사》, 2002.

 

55) 이에 대해 “제가 생각하기에 믿음에 대한 저의 이야기는 아주 작은 것이었지만, 이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의 삶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진실로 성경에서 ‘네 빵을 물 위에 다 놓아 보내라. 많은 날이 지난 뒤에도 그것을 찾을 수 있으리라.’(코헬 11, 1)라고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40)라고 하신 은혜를 다시 한번 보여주셨습니다”라는 박 회장의 고백을 보도하였다.

 

56) 메리놀문서 No.8 R2 F4 238~240. 1950년 7월 작성된 글. 비슷하지만 보다 짧은 내용으로 The Field Afar의 편집자인 콘시다인 신부에게 보낸 문서도 있다. 여기에서는 비교적 자세하게 친필로 작성하여 마크 켄트 신부 앞으로 보낸 문서를 소개하였다.

 

57) 메리놀문서 No.9-R2 F5 2 373.

 

58) 《가톨릭조선》(당시는 《가톨릭연구》) 창간호인 1934년 제1권 제1호, 39쪽. 어린이 교리교육의 중요성에 관한 내용은 오기선 신부[公敎司祭 吳基先]가 《가톨릭연구》 창간호부터 <주교교재>(主敎敎材), <주일학교교재강의>(主日學校敎材講義) 등의 제목으로 연재한 일련의 글에 잘 드러난다.

 

59) 《가톨릭연구》 1934년 제1권 제2호, 37쪽.

 

60) 《가톨릭연구》 1934년 제1권 제1호, 39쪽, 41~42쪽. 1935년 제2권 제2호, 19쪽. 1935년 제2권 제3호, 19-20쪽. 1935년 제2권 제4호, 29~36쪽 등.

 

61) 평안남도 마산에 어린 소녀가 가장 먼저 세례를 받은 뒤 그 소녀는 가정의 사도가 되어 부모님을 개종하게 하고, 나중에 남편과 시할머니, 시부모, 시누이를 포함한 시댁까지 천주교인이 되게 한 이야기(메리놀 문서 No8-R2 F4 2 269~271)가 소개되는 등 남성(아들, 남편 등)보다는 오히려 여성(딸, 아내 등)이 전교자가 된 실화가 자주 소개되었다.

 

62) 한국 사회에 ‘어린이’라는 말은 1910년대에 등장하여, 1930년대에 이르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개념이 세워졌다고 지적되었다. 유럽에서 ‘어린이’의 성립은 가족의 근대적 변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며, 한국도 식민지 시대 근대 가족이 형성되면서 어린이 개념이 등장하였다고 연구되었다. 근대의 가족은 배타적인 공간이 되었고 그 공간의 가족에서 권력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구성원은 ‘남성 가장’이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필립 아리에스 저, 문지영 옮김, 《아동의 탄생》, 새물결, 2003, 345~356쪽. ; 김혜경, 《식민지하 근대 가족의 형성과 젠더》, 창비, 2006, 65~68쪽. ; 국성하, <“어린이” 개념의 변화에 관한 연구 - 1920년대 신문 잡지 기사를 중심으로 ->, 《한국교육사학》, 32권 1호, 2010 등 참조. 어린이 개념의 등장은 교회만이 아니라 이 시기 한국 사회에도 등장하였다. 그런데 한국 천주교회에서 목격되는 어린이 개념은 당시 사회에서 나타난 ‘남성 가장의 보호 아래 어린이’, ‘보호자로 어머니와 함께 존재하는 어린이’ 등의 방식과는 차이가 있었다.

 

[교회사 연구 제51집, 2017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최선혜(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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