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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일치 주간: 교회 분열의 역사와 일치 운동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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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1-13 ㅣ No.473

일치 주간(18~25일) - 교회 분열의 역사와 일치 운동의 발자취


갈라진 형제들, 다름을 인정하고 일치를 꿈꾸다

 

 

- 2014년 창립한 한국 그리스도교 신앙과 직제협의회는 한국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사진은 2017년 1월 한국신앙직제가 개최한 일치 기도회에서 한국 그리스도교 형제 교단 대표들이 참석자들을 축복하는 장면. 가톨릭평화신문 DB.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가 세운 그리스도교는 크게 두 번의 분열을 겪었다. 먼저 1054년에 정교회가 떨어져 나갔고, 500년이 지난 16세기에는 종교개혁으로 개신교가 ‘딴살림’을 차렸다. 그리스도교는 이런 역사를 거쳐 가톨릭과 정교회, 개신교로 크게 삼등분됐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갈라선 이유부터 알아야 한다. ‘일치 주간’을 맞아 교회 분열의 역사와 일치 운동의 발자취를 살펴본다.

 

 

정교회 분리

 

초창기 그리스도교는 로마를 비롯한 콘스탄티노플(터키 이스탄불)ㆍ알렉산드리아(이집트)ㆍ안티오키아(시리아)ㆍ예루살렘(이스라엘) 등 5개 도시 총대주교 중심 체제로 운영됐다. 최고 지위는 로마 주교(교황)가 갖고 있었고, 콘스탄티노플 주교가 그다음이었다. 5명의 총대주교는 주변 교회들을 이끌면서 고유의 전례와 관습들을 발전시켜 나갔다. 느슨한 형태의 지방자치제였다. 

 

로마를 중심으로 나머지 네 지역 교회는 모두 로마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동방 교회라고 불렸다. 7세기 이후 안티오키아ㆍ예루살렘ㆍ알렉산드리아가 이슬람 세계로 편입되면서 로마와 콘스탄티노플만이 그리스도교의 양대 산맥으로 남게 됐다.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교회는 애초부터 이질적인 요소가 많았다. 로마 교회는 라틴어를,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방 교회는 그리스어를 쓰는 등 전례 언어가 달랐고, 제도나 관습도 많이 달라 종종 마찰을 빚었다.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에는 정치적 이유까지 겹쳐 심각한 양상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두 교회의 균열이 가시화한 것은 8세기 성화상 파괴 논쟁에서였다. 콘스탄티노플을 지배하고 있는 비잔티움 황제가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성화상을 파괴하자 로마 교황이 이를 정죄하면서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신학적으로는 필리오퀘(Filioque, ‘아들로부터’) 논쟁이 있었다. 로마 교회는 성령이 성부뿐만 아니라 성자로부터도 나온다고 믿었지만 동방 교회는 오직 성부로부터만 나온다고 주장했다. 성찬례 빵에 누룩을 넣는 문제, 로마 교황의 수위권 인정 등을 둘러싸고도 크고 작은 마찰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교황 레오 9세는 1054년 훔베르트 추기경을 교황 사절로 콘스탄티노플에 파견했으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훔베르트 추기경은 파문 교서를 작성한 후 콘스탄티노플 성 소피아 대성당 제대 위에 놓고 돌아갔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파문 교서를 작성한 훔베르트 추기경을 똑같이 파문한 것이다. 이로써 두 교회는 완전히 돌아서게 됐다. 동방 교회는 자신들이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정통 신앙을 지닌다는 뜻에서 스스로를 정교회(正敎會)라고 부른다.

 

 

종교개혁

 

15세기 유럽 국가들은 중앙집권적인 군주제로 발전하면서 자국의 이익을 중시하고 교회를 예속하려는 경향을 띠었다. 사회적으로는 도시와 지방의 빈부 격차가 심해졌다. 문화적으로는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그리스도교 인문주의 또는 성서적 인문주의로 발전하면서 교회 개혁을 촉구했다. 

 

교회 내부는 한마디로 총체적인 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다. 교황들은 출신 가문의 세력 확장과 자신의 명예를 드러내는 데 열중했다. 비복음적인 부조리가 팽배했고, 사제에 대한 불신이 치솟았다. 

 

이 무렵 교황청은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 신축 기금을 모금하기 위해 대사부(大赦符)를 발행했다. 대사부는 죄를 용서해 주는 면죄부가 아니라 고해성사 때 사제가 정해주는 보속을 줄여주는 증서였다. 그런데 이를 면죄(免罪)로 과장하고 상품화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독일의 루터는 1517년 이에 항의하는 95개 조 명제를 만들어 동료들에게 보냈다. 종교개혁의 단초가 된 사건이다. 95개 조 명제는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루터는 교회에서 파문됐으나 교회 개혁 저술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전파했다. 

 

종교개혁의 바람은 이웃 스위스로 번졌다. 츠빙글리는 자신의 성서관과 루터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1523년 교회 개혁안을 제시하고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제네바에서는 칼뱅이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 종교개혁에 착수했다. 

 

영국도 종교개혁의 대열에 합류했다. 영국 왕 헨리 8세(1491∼1547)는 관면으로 혼인한 아내(앤 블린)와 이혼하기 위해 관면의 무효성을 주장했는데, 교황청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단독으로 이혼을 추진하면서 영국 왕이 영국 교회에 대한 수위권을 갖도록 했다. 이로써 영국 교회도 가톨릭교회에서 떨어져 나갔다. 성공회(聖公會)의 탄생이다.

 

종교개혁 결과 수많은 개신교 교파가 등장했다. 개신교는 교황의 수위권과 성전(聖傳)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성경만을 신앙의 근거로 삼는다. 성경에 대한 해석이 각기 다르다 보니 새로운 교파가 계속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다. 종교개혁은 이전부터 있었던 가톨릭의 쇄신 운동에 힘을 싣는 긍정적인 결과도 낳았다. 종교개혁은 ‘교회는 항상 개혁돼야 한다’는 큰 교훈을 남겼다.

 

 

교회 일치 운동

 

등을 돌린 형제 교회들은 쉽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지 못한 채 남남처럼 지내왔다. 가톨릭의 교회 일치 움직임이 표면화된 것은 19세기 중반 교황청이 일치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다. 교황 레오 13세(재위 1878~1903)는 동방 교회와 개신교도를 일컫던 ‘열교자’와 ‘이단자’라는 부정적인 표현 대신 ‘갈라진 형제들’이라고 부름으로써 일치 운동의 발판을 마련했다.

 

- 바오로 6세(왼쪽) 교황은 1965년 콘스탄티노플의 아테나고라스 총대주교(오른쪽)와 가톨릭과 동방 교회 간 상호 파문(1054년)을 취소하는 공동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가톨릭과 정교회 일치 운동의 신기원을 이룩했다.

 

 

교황 요한 23세(재위 1958~1963)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에 동방 교회와 개신교회의 대표들을 초청하는 한편 ‘그리스도인 일치 촉진 사무국’을 창설했다. 교황 바오로 6세(재위 1963~1978)는 1965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 가톨릭과 동방 교회 간 상호 파문(1054년)을 취소하는 공동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가톨릭과 동방 교회 일치 운동의 신기원을 이룩했다. 바오로 6세는 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 「일치의 재건」을 통해 교회 일치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원칙과 방향을 제시했다. 

 

이러한 흐름을 좇아 교황청 그리스도인 일치촉진평의회와 개신교의 세계교회협의회 신앙직제위원회는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1월 25일)을 정점으로 1월 18일부터 25일까지 일주일간을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 주간’으로 정하고 1968년부터 매년 일치 기도 행사를 열고 있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재위 1978~2005)는 1998년 루터교와 함께 ‘의화 교리에 관한 공동 선언’을 발표, 450년간 지속된 가톨릭과 루터교 간 논쟁의 종지부를 찍었다. 

 

한국 가톨릭도 1965년 주교회의 산하에 ‘전국 그리스도교 재일치위원회’(현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위원회)를 설립하면서 일치 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형제 교단들과 성경을 공동으로 번역한 것을 비롯해 합동 기도회, 일치 포럼, 그리스도교 종교 지도자 모임 등 일치를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일치 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구체적 연대의 틀이 필요하다는 데 뜻을 함께한 교단 대표들은 2014년 ‘한국 그리스도교 신앙과 직제협의회’(한국신앙직제)를 창립했다. 이전까지의 일치 운동이 일치에 대한 관심을 증진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면 한국신앙직제를 통한 일치 운동은 신학적 대화 등 일치를 위한 본격적 활동에 중점을 두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1월 14일, 남정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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