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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련옥략셜(연옥약설)의 형성 과정에 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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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9-15 ㅣ No.922

《련옥략셜》의 형성 과정에 대한 연구*

 

 

국문 초록

한국교회사연구소 자료실에는 《련옥략셜》이라는 한글 필사본 하나가 소장되어 있다. 그 서지사항을 보면 저자 불명으로 나와 있다. 누가 그리고 언제 이 필사본을 만들었는지 추정할 수 있는 정보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자료실에는 《련옥략셜》과 함께 한문본 《연옥약설》(煉獄略說)이 소장되어 있다. 이것을 보면 《련옥략셜》은 한문본의 번역임을 알 수 있다. 본고는 한글 필사본 《련옥략셜》의 정체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한문본 《연옥약설》에 대한 해명을 시도하였다. 1871년에 처음 간행된 한문본 《연옥약설》에는 중국인 예수회원 이문어(李問漁, 1840~1911) 신부가 저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1862년 5월 29일 예수회에 입회하여, 1872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따라서 한문본 《연옥약설》은 그가 사제로 서품되기 직전에 집필 간행되었다. 《연옥약설》은 총 8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8편의 제목과 세부 장절을 보면, 연옥 교리에 관한 모든 가르침을 집대성하여 주제별로 배치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각 편의 세부 장절 아래에 연옥 관련 예화들을 고적(故迹)이라는 제명으로 한두 편을 실어 놓았다. 그 예화들은 대부분 서양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들인데, 단 두 편만이 중국의 예화들이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자료실에 소장된 《련옥략셜》에 대한 기록은 모리스 쿠랑의 저서 《한국서지》에 처음 등장한다. 쿠랑이 제시한 서지 사항이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러므로 현재까지는 쿠랑의 저서가 《련옥략셜》의 존재가 처음 기록된 자료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쿠랑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1892년 이전에 《련옥략셜》이 주교관의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는 적어도 한문을 잘 아는 조선인 신자가 프랑스인 사제나 주교의 감독 아래에 교회의 공적인 목적을 위하여 번역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말하자면 한문본 《연옥약설》이 조선인 교우들의 신앙생활에 유익한 점이 많다고 판단하여 조선에서도 이를 번역 간행할 의향을 갖고 준비하는 중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된 연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련옥략셜》의 인쇄 간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 문제의식

로마 제국 후기에서 중세 초기에 이르는 시기의 유럽 종교사를 주된 연구 분야로 삼고 있는 역사가 피터 브라운(Peter Brown)은 사후세계에 대한 그리스도교 관념에서 중대한 변화가 발생한 것이 기원후 7세기의 일이라고 말한다. 7세기 이전에는 현세와는 다른 세계,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저승을 상상할 때 설혹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곧 임재하게 될 근접한 영역으로 여겼다. 그러나 7세기를 경과하면서 저승을 사람이 죽어서 만나게 되는 어떤 곳, 그래서 살아 있는 사람은 접근할 수 없는 곳으로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1) 초기 교회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임박한 사실로 여기던 시기에는 죽은 자들이 가는 별도의 영역을 설정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재림이 미래의 일로 늦추어지면서 현세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다가 세상을 떠난 이들이 머무는 장소에 대한 사유가 시작되었다. 피터 브라운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유럽 천주교회에서 연옥에 대한 교리적 인식이 싹튼 것은 7세기 이후가 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연옥이라는 이름으로 죽은 자들이 가서 정화의 단련을 받는 장소가 정해지고, 살아 있는 자들이 죽은 자들을 위하여 기도함으로써 정화의 기간이 단축될 수 있다는 사유가 탄생한 시기에 관해서는 학자들마다 논의가 분분하다. 그 가운데에서 연옥이 3세기부터 12세기말까지에 이르는 장기간에 걸쳐서 하나의 시공간으로 점진적으로 형성되었으며, 12세기와 13세기 사이에 실체적으로 탄생했다는 자크 르 고프(Jacques Le Goff)의 주장이 대체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2) 연옥이 실체적으로 탄생했다는 말은 천주교회가 공식적으로 연옥에 관하여 정의를 내리고 교리로서 선포한 것을 말한다. 르 고프에 따르면 1254년 이노센트 4세 교황이 연옥에 관하여 최초로 정의를 내렸으며, 그레고리우스 10세 교황이 1274년에 소집한 제2차 리용 공의회에서 연옥 교리가 정식으로 채택되었다고 한다.3) 그 이후 연옥에 대한 교리적 인식과 의례적 실천들은 중세 후기와 근대 초기를 거치면서 유럽 천주교인들의 심성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특히 연옥 관련 예화집들의 유포는 연옥 교리를 생생한 현실로 느끼게 해주었으며, 죽은 이들과 살아 있는 이들로 구성된 상상의 공동체는 이승과 저승을 하나로 묶는 거대한 유기체 구조를 형성하였다.

동아시아의 한자문화권으로 천주교가 전파되었을 때 연옥 교리 역시 소개되었다. 일본의 경우에는 기리시탄 시대에 교리서를 번역할 때 원음 주의를 표방했기 때문에 연옥을 가리키는 라틴어 푸르가토리움(purgatorium)을 발음 그대로 옮겨서 ‘뿌루가또우리요’(プルガトウリヨ)로 불렀다. 그러나 중국에 진출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어 학습을 거치면서 한자어의 정교한 쓰임새를 감안하여 라틴어 교리 용어를 한자로 번역하였다. 그래서 연옥(煉獄)이라는 명칭 자체는 중국에서 처음 쓰이기 시작하였다. 물론 처음부터 연옥으로 정착한 것은 아니었다. 중국어 발음으로 그대로 옮겨서 포혁다략(布革多略)이라 부른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점차 번역 주의로 전환하여 연죄자거지(煉罪者居之), 연죄지지옥(煉罪之地獄), 연죄옥(煉罪獄) 등으로 번역되었으며, 최종적으로는 1630년대에서 1670년대 사이의 어느 시점에 가서 연옥이라는 명칭으로 정립된 것이었다.4)

그런데 연옥 교리의 번역 과정을 밝힌다고 해서 동아시아 천주교회사에서 연옥의 존재가 완전히 해명되는 것은 아니다. 특정한 교리 지식이 신자들의 신앙생활 속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 몇 가지 종교적 장치가 필요하다. 먼저 연옥 교리는 의례의 실천으로 강화된다. 각종 전례와 성사 및 준성사 등 천주교의 고유한 의례 실천들을 주기적으로 반복함으로써 연옥 관념은 신자들의 발화와 몸짓을 통해서 물질성을 획득할 뿐만 아니라 내면세계에 확고하게 각인된다. 연옥 관념을 강화하는 의례적 기제라고 할 만한 것으로는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식사 기도, 하루의 시간을 세분하여 진행하는 성무일도, 일 년 단위의 전례력 속에 들어 있는 위령의 날 기도, 그리고 초상이 났을 때 행하는 상장예절 등이 있다.5)

연옥에 대한 교리적 지식을 신자들의 의식 속에 내면화하는 두 번째 장치는 연옥 예화(exemplum), 다른 말로 하면 연옥 서사(煉獄 敍事, purgatory narrative)라고 할 수 있다. 연옥 서사는 연옥 교리에 입각한 의례 실천이 실제로 현세에서의 삶과 죽음 이후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확인시켜주고, 또 교리적 가르침을 생생한 현실로 형상화하는 예화들을 말한다. 이는 종교적 주장에 사실성의 후광(aura of factuality)6)을 씌워 연옥에 관한 이야기가 관념이 아니라 실제로 현실에서 그렇게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을 갖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연옥에 관한 천주교의 가르침은 연옥 서사의 탄생을 통해서 비로소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구성하는 중요한 영역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박해시대 조선 천주교회의 역사 속에서 연옥에 관한 서사들이 담긴 자료들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7) 박해시대의 기록들을 면밀히 검토하는 작업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특히 조선인 교우들이 남긴 글들이 많지 않은 관계로 프랑스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들 속에서 연옥에 관한 서사들이 등장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또한 최양업 신부가 남긴 라틴어 서한들도 주요한 분석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박해시대의 연옥 관련 서사들을 수집하여 본격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은 또 다른 과제가 될 것이다.

여기서는 연옥 서사를 연구하는 첫 작업으로서 연옥 서사가 집중적으로 수집되어 있는 텍스트 하나를 선정하여 이를 분석하고자 한다. 그것은 개항 이후에 등장한 것으로 보이는 한글 필사본 《련옥략셜》이다.8) 한글 필사본 《련옥략셜》은 조선 신자들이 지은 책이 아니라 당시 중국에서 간행된 한문본을 번역한 것이다.9) 이에 따라 이하에서는 한글 필사본 《련옥략셜》과 한문본 《연옥약설》(煉獄略說)을 비교하여 문헌상으로 그 상관관계를 해명하는 작업을 우선적으로 진행할 것이다. 물론 본고의 문제의식을 충분히 실현하려면 궁극적으로 한글 필사본 《련옥략셜》에 담긴 교리적 설명의 내용과 각각의 교리 설명 뒤에 첨부된 연옥 서사들을 분석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아직 교리 설명과 연옥 서사의 내용 분석이 완료되지 않았기에 본고의 서술은 《련옥략셜》을 둘러싼 각종 문헌들을 검토하는 작업에 한정할 것이다.


2. 한문본 《연옥약설》

1) 저자와 관련 인물들


1871년에 처음 간행된 한문본 《연옥약설》에는 중국인 예수회원 이문어(李問漁, 1840~1911) 신부가 저자로 기록되어 있다. 《한국가톨릭대사전》에는 그의 이름이 이체(李?)로 나와 있다.10) 즉 그는 강소성 출신으로서 원래 이름은 호연(浩然)이고, 세례명은 라우렌시오이며, 문어는 자(字)라고 한다. 이문어는 12세에 상해 서회공학(徐匯公學)에 입학하여 1862년에 졸업하였다. 그리고 졸업한 직후로 보이는데, 1862년 5월 29일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당시 그와 함께 예수회에 입회한 중국인은 10명이었으며,11) 이들 11명은 19세기에 예수회에 입회한 최초의 인물들이었다고 한다.12)

1872년에 사제로 서품된 이문어 신부는 6년 정도 선교 업무에 종사하다가 1878년부터는 상해 동가도(董家渡) 소수도원(小修道院)의 라틴어 교수로 일하면서 출판 활동과 저술 활동에 종사하였다. 1879년 3월 16일 가톨릭 회보인 《익문록》(益聞錄)을 창간하였다가 1898년 8월 17일 《격치신보》(格致新報)와 합병하여 《격치익문회보》(格致益聞?報)를 간행하였다. 나중에 《회보》라고만 불렸던 이 간행물은 이문어 신부가 1911년 6월 8일 72세로 선종하자 8월 12일 자로 정간되었다. 이외에도 이문어 신부는 1887년 6월 1일 《성심보》(聖心報)라는 월간지도 간행하였다.

이문어 신부가 남긴 저술과 번역은 총 60종에 달하는데, 《이굴》(理窟), 《철학제강》(哲學提綱), 《신경역의》(信經譯義), 《객문록존》(客問錄存), 《천연론박의》(天演論駁義), 《경자교난기》(庚子敎難記), 《권화기》(拳禍記) 등이 유명하다.13) 또한 이문어 신부는 서광계(徐光啓)의 글을 모아서 1896년에 《서문정공집》(徐文定公集)을 편찬하기도 하였다.14) 이런 연유로 이문어 신부는 “성직자로서 평생을 저술, 번역, 교육 사업에 바쳤고, 특히 출판물을 통하여 그리스도교를 널리 선교하며 대중 계몽운동을 펼친 중국의 개화 선각자”라는 평을 받고 있다.15) 또한 그가 지녔던 문필가로서의 자질에 대해서는 “청대 후기에 가장 많은 저작을 남긴 중국인 그리스도교 저술가이자, 근대 중국의 신생 출판 중심지 상해에서 중국어로 된 신문을 간행한 최초의 중국인 출판인”이라는 평가가 있다.16)

《연옥약설》은 이문어 신부가 쓴 저술들 가운데 최초의 것이다. 이문어 신부가 책을 쓰게 된 경위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연옥약설》의 서문을 쓴 동료 예수회원 허빈(許彬, 요한, 1840~?17))이 기록한 바에 따르면 이문어 신부는 신미년(1871년) 여름에 피서차 와 있으면서 이 책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허빈18)이 서문을 쓴 것은 1871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이었으며,19) 장소는 성 이냐시오[依納爵] 학관이라고 되어 있다.20) 이문어 신학생이 사제로 서품된 것은 1872년이었다. 그러므로 이문어 부제는 신학교를 다니면서 틈틈이 적어 두었던 원고를 1871년 여름에 상해 서가회에서 피정을 하면서 완성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동갑내기 친한 벗이었던 허빈에게 원고를 보여주고 서문을 지어 달라고 청했을 것이다.

한문본 《연옥약설》에는 저자 이문어 신부, 서문을 지은 허빈과 더불어 몇 명의 중국인 예수회원들이 더 등장한다. 책의 속표지를 보면 예수회원 고조림(顧照林)이 점검[閱]하였고, 심예문(沈禮門)이 바로잡아 고쳤다[校]고 되어 있다. 고조림에 대해서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서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이문어와 함께 서회공학을 나와서 예수회에 입회한 중국인으로 추정된다. 한편 심예문에 대해서는 약간의 정보가 남아 있다. 그의 다른 이름은 심칙공(沈則恭)인데, 이문어와 서회공학에서 함께 공부하고 예수회에 입회하였으며, 중국인 사제로 활동하였다. 1871년 상해의 자모당에서 일본 순교 역사를 역편한 《관광일본》(觀光日本)이라는 책이 심칙공을 저자로 하여 간행된 바 있고, 1879년에는 《복녀마리아납전》(福女瑪璃亞納傳, 마드리드 태생의 복녀 마리안나 전기)이 심예문을 역자로, 1885년에는 《성의납작전》(聖依納爵傳, 이냐시오 로욜라 전기)이 심칙공을 역자로 간행되었다. 그리고 심칙공 신부의 동생은 심칙관(沈則寬) 신부인데,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를 발췌 번역하여 1900년 자모당에서 《고려치명사적》이라는 이름으로 간행한 인물이었다.

한문본 《연옥약설》과 관련된 마지막 인물은 이 책을 정식 교회 서적으로 출판하도록 인가한 주교이다. 《연옥약설》의 속표지에는 “주교 랑아제앙(郞亞弟?) 준(准)”으로 나와 있다. 이 인물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당시 상해 지역의 교계 제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상해 지역은 강남 대목구 관할이었다. 남경 주교좌는 1856년 1월 21일 포교성성 교령에 의해서 폐지되었고, 이를 대신하여 강남 대목구가 설치되었다. 1871년 당시 강남 대목구를 관할하던 대목구장은 프랑스 출신의 예수회원 아드리앵-이폴리트 랑기아(Adrien-Hippolyte Languillat, 1801~1878) 주교였다. 1831년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1841년 예수회에 입회한 랑기아 신부는 1844년 상해에 도착하여 강소성과 산동성 지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1856년 시리아에 있던 옛 지명 세르지오폴리스 명의의 주교로 임명되었고, 직예 동남 대목구의 첫 대목구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1857년 3월 22일 프랑스 라자리스트이자 몽골 대목구장이었던 조셉 마르시알 물리(Joseph-Martial Mouly, 1807~1868) 주교에 의해서 안가장(安家庄, Ngan-kia-tchoang)에서 주교로 성성되었다. 그리고 1864년 9월 9일의 칙서에 의해서 강남 대목구장으로 전임되었다. 랑기아 주교의 중국식 이름은 낭회인(郞懷仁) 또는 후보(厚甫)로 나온다.21) 이 이름은 한문본 《연옥약설》에 나오는 랑아제앙(郞亞弟?)이라는 이름과 유사하다. 랑기아 주교와 랑아제앙 주교가 동일 인물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도 존재한다. 프랑스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샤바냑(Chavagnac)이 1718년에 간행한 《진도자증》(眞道自證)은 1868년 상해 자모당에서 중간되었는데, 이때 발간을 인준한 주교의 이름도 랑아제앙으로 나와 있다. 이것을 보면 한문본 《연옥약설》의 출판을 인가한 주교는 당시 강남 대목구장이었던 랑기아 주교였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2) 판본들

① 《연옥약설》

이문어 신부가 쓴 연옥 관련 서적으로는 한문본 《연옥약설》이 가장 먼저 나온 것이다. 처음 간행된 것은 1871년이며, 목판본(木版本)이다.22) 간행한 곳은 상해 자모당(慈母堂)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상해 자모당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개항 이후 조선에 들어온 천주교 관련 한문 서적과 각종 성물들은 바로 이 상해 자모당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모당의 실체에 대해서 아직 자세한 사정이 밝혀지지 않아 연구자들에게 혼란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1840년 중국의 문호가 개방되자, 1841년부터 1846년 사이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상해로 진출하였다. 이들은 1847년에 서광계의 무덤이 있던 서가회(徐家匯, Zi-Ka-Wei) 및 인근의 토산만(土山灣, T’ou-Se-We)으로 이주하여 천주당을 짓고, 수도원, 서회공학, 장서루, 박물관, 천문대 등을 세웠다. 1864년에는 채가만(蔡家灣)에 있던 고아원을 토산만으로 옮겨왔다. 이 고아원 내에는 공예실과 인쇄소 등이 갖추어져 있어 고아들의 자립을 위한 기술 전수가 이루어졌다. 또한 각종 성물도 제작하고 서적도 출판하였다. 이 고아원 내에 있던 경당의 이름이 자모당이었다.23) 그래서 이 고아원 인쇄소에서 간행하는 서적의 출판지는 처음에 상해 자모당으로 찍혔다. 그러다가 나중에 가서 토산만 인서관(印書館)이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따라서 상해 자모당과 토산만 인서관은 동일한 인쇄소를 가리킨다.24)

자모당에서 간행한 《연옥약설》은 동료 예수회원 허빈의 서, 이문어의 자서, 그리고 총 8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8편의 제목과 세부 장절을 보면, 연옥 교리에 관한 모든 가르침을 집대성하여 주제별로 배치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연옥에 대한 교리적 설명들을 모두 모았다는 점과 더불어, 각 편의 세부 장절 아래에 연옥 관련 예화들을 고적(故迹)이라는 제명으로 한두 편 실어 놓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1871년 자모당 판본 《연옥약설》에는 도합 58편의 연옥 관련 예화들이 실려 있다. 그 예화들은 대부분 서양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들인데, 단 두 편만이 중국의 예화들이다. 하나는 앞서 언급한 서광계 관련 예화이며, 다른 하나는 《연옥약설》 마지막에 첨부되어 있는 천주고적(泉州故迹)이다. 《연옥약설》의 각 편목과 장절의 구분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표 1. 한문본 《연옥약설》의 편목 구성

 



그런데 1871년 상해 자모당에서 간행한 《연옥약설》과 관련하여 두 가지 상이한 판본이 발견되었다. 첫째 판본은 현재 상해 복단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것이고, 둘째 판본은 현재 한국교회사연구소 자료실에 소장된 것이다. 복단대학교 도서관 소장본 《연옥약설》의 제1편 <論煉獄有無>[연옥의 유무를 논함]의 다섯째 장인 <煉獄何在何時受造>[연옥은 어디에 있으며 언제 만들어졌나]에 딸린 예화는 2편이다. ① ‘성 마저락(瑪低諾)이 기록한 일다달(日多達) 수녀의 이야기’, ② ‘주교 대요포록(戴凹抱祿)이 겪은 기이한 치병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사연구소 자료실 소장본 《연옥약설》에는 해당 부분에 3편의 예화가 실려 있다. ①은 복단대학교 도서관 소장본과 동일하고, ②는 복단대학교 도서관 소장본과 달리, ‘가포제(加布濟) 회의 어떤 수사가 최근 죽은 벗을 성당에서 만난 이야기’이며, ③ ‘제사덕(濟斯德) 회의 기록한 글에 나오는 이야기’가 추가되어 있다. 복단대학교 도서관 소장본 《연옥약설》에만 들어 있는 ‘주교 대요포록이 겪은 기이한 치병 이야기’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주교 대요포록은 발에 병이 난지 오래되었는데 통증이 아주 심하였다. 의사는 차가운 얼음을 찾아서 발밑에 놓으라고 하였다. 하지만 마침 가을이라 얼음을 구할 수가 없었다. 성에 사는 어느 어부가 하루는 물고기를 잡다가 우연히 큰 얼음덩어리를 얻어서 바치자 주교는 매우 기뻐하였다. 그런데 뜻밖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는데 얼음덩어리 안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교가 이상하여 물었다. “너는 누구냐?” 그러자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는 연옥 영혼인데 연옥 형벌을 대신하여 여기서 추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만일 주교께서 미사 30대를 연이어 거행하신다면 형벌을 면하고 구함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주교는 매일 미사를 거행하여 십여 일을 거듭하였다. 그러자 마귀가 주위 사람들을 선동하고 유혹하여 서로 다투어 화목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주교가 분쟁을 가라앉히느라 하루는 미사를 거행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부터 다시 미사를 거행하여 30대를 연속으로 할 작정이었다. 미사를 거행한지 얼마 안 되어 사악한 마귀의 질투가 심해졌다. 갑자기 수많은 병사와 말의 모습이 성 아래에 나타났다. 크게 놀란 주교가 적을 물리칠 계략을 모의하느라고 또 미사를 드리지 못하였다. 잠시 후에 자세히 살펴보니 비로소 병사와 말의 모습이 허상(虛像)임을 알게 되었다. 사실 적군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튿날부터 주교는 또 미사를 거행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29회에 이르렀다. 그러자 마귀가 또 흉계를 꾸몄다. 주교로 하여금 갑자기 성 전체가 모두 화염에 휩싸인 모습을 보이게 하였다. 주교가 말하였다. “비록 성 전체가 모두 다 타버려도 오늘은 꼭 미사를 드릴 것이다.” 미사를 마치자 얼음덩어리가 모두 없어져버리고 연옥 영혼은 추운 고통에서 벗어났다. 자세히 보니 성에는 아무런 화재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로써 마귀가 인간이 천당으로 올라가는 것을 얼마나 질투하는지, 사람이 연옥 영혼을 구하는 것을 얼마나 증오하는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실제 있었던 일이다.25)

위의 예화는 연옥 영혼이 형벌을 면하고 승천하는 일을 마귀가 온갖 수단을 써서 방해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적군의 병마가 허상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성 전체가 불타는 환영을 보기도 하는 등 매우 기이한 일들이 소개되고 있다. 이문어 신부가 《연옥약설》을 지을 때에 유럽에서 널리 읽히던 연옥 관련 예화집을 활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예화 역시 이문어 신부의 창작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읽고 옮긴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그 내용에 지나치게 환상적인 이야기가 들어 있어서 오히려 예화로는 적절하지 못하다는 자평 혹은 주변의 지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좀 더 교훈적인 예화로 바꾼 것이 아닐까 한다.

복단대학교 도서관 소장본과 한국교회사연구소 자료실 소장본의 두 판본을 자세하게 비교한 결과, 간행 연도는 모두 1871년으로 되어 있고 글자체도 모두 동일하다. 다만 각기 다른 예화가 실린 부분의 목판만 교체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두 판본 중 하나는 기존 목판을 갈아 끼운 수정보판(修訂補板)인 셈이다. 그러면 두 판본의 선후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아래에서 다시 논하겠지만 이문어 신부는 《연옥약설》을 개정하여 1886년에 《연옥고》(煉獄考)라는 제명으로 다시 간행하였다. 이 1886년판 《연옥고》에는 한국교회사연구소 자료실 소장본의 예화들이 그대로 실려 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서 복단대학교 도서관 소장본이 처음 나온 것이고, 한국교회사연구소 자료실 소장본이 나중에 나온 것이라고 하겠다.

《연옥약설》은 1877년에 가서 북경 근방의 직예성(直?省) 하간부(河間府) 헌현(獻縣)에 있던 승세당(勝世堂)에서 중간본(重刊本)으로 간행되었다. 1871년 상해에서 나온 판본 가운데 복단대학교 도서관 소장본과 완전히 동일한 형태로 되어 있고, 내용 구성도 동일하다.26) 다만 속표지에 첫 쪽을 삽입하여 1877년 하간 승세당에서 중간하였으며 예수회원 액도아두(厄都亞杜) 주교가 승인하였다는 내용을 실어 놓았다. 간행을 인준한 액도아두 주교는 에두아르 뒤바(Edouard Dubar, 1826~1878) 주교를 말한다.27) 앞에서 보았듯이 1871년 《연옥약설》 초간본을 인가한 랑기아 주교는 강남 대목구장으로 전임되기 이전에 1856년부터 1865년까지 직예 동남 대목구장으로 재직하였다. 그리고 뒤바 주교는 랑기아 주교의 뒤를 이어서 제2대 직예 동남 대목구장에 착좌한 인물이었다. 또한 1865년 2월 19일 하간부 헌현 장가장에서 열린 뒤바 주교의 성성식을 집전한 이도 랑기아 주교였다. 이처럼 랑기아 주교와 뒤바 주교는 같은 예수회원으로서 긴밀한 연결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각각 자모당과 승세당이라는 출판 인쇄 기구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런 연유로 1871년 자모당 초간본 《연옥약설》이 1877년에 헌현 승세당에서 중간본으로 나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당시 하간부 헌현은 교계 제도상으로는 직예 동남 대목구에 소속되어 있었다. 비오 9세 교황이 1856년 1월 21일 칙서를 반포하여 북경 교구를 폐지하고 관할 구역을 직예 북부 대목구, 직예 동남 대목구, 직예서부 대목구로 나누었기 때문이다. 헌현 승세당은 헌현 천주당 인서관, 장장총당(張庄總堂) 인서관, 헌현 인서방(印書房) 등으로도 불렸는데, 당시 중국 천주교의 주요 출판 인쇄 기구 중의 하나였다. 헌현 승세당은 1874년에 만들어졌고, 헌현 장장 천주당 내에 설치되었다가 1944년에 문을 닫았다. 그러니까 약 70년 동안 천주교 교회 서적과 서양 문물 소개의 창구 역할을 하면서 다양한 서적들을 대량으로 간행하였다. 특히 헌현 승세당에서 출판한 신학과 기타 교회 서적들은 학술적으로도 높은 수준이었고, 상해 서가회 토산만 인서관과 북경 라자리스트 인서관과 함께 중국 천주교의 대표적인 출판기관이었다. 통계에 따르면 승세당이 1941년 이전에 출판한 각종 도서의 숫자는 모두 211,233종이었다고 한다.28) 하지만 문화대혁명 당시에 모두 불타서 현재 헌현에는 승세당 관련 자료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② 《연옥고》

이문어 신부는 1885년에 가서 《연옥약설》의 개정판을 내기로 결심하였다. 이전에 냈던 책의 문장이 누추[淺陋]하고 16년이 흐르면서 판각한 글자가 알아보기 어려워서 이제 새로 활판을 사용하여 간행하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사무를 보는 중에 여가를 내어 간단히 수정을 가하고 옛이야기들 가운데에서 지나치게 기이한 것들은 삭제하고 고쳐서 《연옥고》(煉獄考)를 낸다고 하였다. 이 개정판은 1886년 상해 자모당에서 나왔다. 그리고 1905년에 다시 재판이 간행되었다. 중인본(重印本)으로 되어 있는 이 재판본의 간행은 강남 주교 요(姚)가 인준하였다. 이 이름은 프랑스 출신의 예수회원이면서 1900년에 강남 대목구장에 임명되었던 프로스페르 파리(Prosper Paris, 1846~1931) 주교를 가리킨다. 그는 요종리(姚宗李) 또는 사백(思白)이라고도 불렸다.29)

저자 이문어 신부가 1911년에 선종한 이후에도 《연옥고》의 간행은 계속 이루어졌다. 아마 중국 천주교회에서는 신자들의 영적 유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1921년에는 자모당에서 이름을 바꾼 토산만 인서관에서 제3판이 간행되었고, 1927년에 제4판이, 그리고 1936년에는 제5판이 발행되었다, 제5판의 간행을 인준한 것은 상해의 혜(惠) 주교였다. 그는 예수회원으로서 1936년 당시 상해 대목구장이었던 오귀스트 아위세(Auguste Haouisee, 1877~1948) 주교를 가리킨다.30) 한편 상해에서 《연옥고》의 제4판이 간행되던 1927년에 하간부 헌현 승세당에서도 동일한 제목으로 《연옥고》가 간행되었다고 한다.31)

1905년에 나온 중간(重刊) 활판본(活板本) 《연옥고》의 목차를 살펴보면 1871년 장판본(藏板本) 《연옥약설》과 큰 차이는 없다. 모두 8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연옥의 유무를 논하는 제1편, 연옥에 받게 되는 형벌을 논하는 제2편, 연옥에서 영혼들이 겪게 되는 상황을 논하는 제3편, 연옥에서 영혼들이 얻을 수 있는 희망과 기쁨을 논하는 제4편, 연옥 영혼을 구하는 일의 유익함을 논하는 제5편, 살아 있는 자들이 이미 죽은 이를 위하여 대신 보속하는 일을 논하는 제6편, 영혼 영혼을 구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논하는 제7편, 연령구제회인 증망회(拯亡會)의 규칙과 기타 기도문을 소개하는 제8편은 《연옥약설》과 동일하다. 다만 편명과 세부 장절의 제목을 조금씩 바꾸어 그 뜻이 더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하였다.

더 중요한 변화는 각 장절 아래에 소개된 예화들 가운데 일부 변경된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즉 이문어 신부가 《연옥고》의 서문[弁言]에서 밝힌 것처럼 옛이야기 가운데에서 지나치게 기이하다 싶은 것들은 삭제하고 다른 이야기들로 바꾸었던 것이다. 가령 《연옥약설》에 들어 있던 단 두 편의 중국 예화 가운데 하나인 천주고적(泉州故迹)이 《연옥고》에서는 삭제되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복단대학교 도서관 소장본에 실려 있던 예화들 가운데 일부를 변경한 한국교회사연구소 자료실 소장본 《연옥약설》의 내용 구성은 《연옥고》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또한 《연옥약설》과 《연옥고》 사이에 예화들의 변천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추적하는 작업이 이루어진다면 연옥에 대한 당대 중국인 신자들의 사유방식을 연구하는 데 요긴할 것으로 생각된다. 일단 중국에서 간행된 한문본 《연옥약설》과 기타 관련 문헌들에 대한 소개는 여기서 마무리하고, 이의 번역으로 간주되는 한글 필사본 《련옥략셜》에 대한 문헌 검토로 넘어가도록 하겠다.


3. 한글 필사본 《련옥략셜》

1) 소장처


이제 본고의 주인공인 한글 필사본 《련옥략셜》에 관하여 살펴보겠다. 현재 《련옥략셜》의 원본은 한국교회사연구소 자료실에 소장되어 있다. 이와 더불어 1871년 초간 한문본 《연옥약설》과 또 다른 한글 필사본인 《련옥고남》도 함께 소장되어 있다. 하지만 《련옥고남》은 《련옥략셜》에 비해서 그 내용이 훨씬 소략하며 필사한 종이도 한지가 아니라 외국에서 수입된 펄프 용지여서 외형상으로도 《련옥략셜》보다 후대에 필사된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련옥략셜》이 필사된 이후에 그것을 모본으로 하되 다시 축약하여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련옥략셜》과 《련옥고남》의 상호 관계는 내용 분석을 통해서 더 논의되어야 할 여지가 있다. 그러므로 한문본 《연옥약설》과의 문헌 비교를 통하여 《련옥략셜》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하는 본고의 논의에서는 《련옥고남》을 제외하고자 한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자료실의 서지사항을 보면 저자 불명으로 나와 있다. 누가 이 필사본을 만들었는지 추정할 수 있는 자료가 전무한 형편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한문본 《연옥약설》의 번역본이라는 사실만 알 수 있지, 그 밖의 사항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러면 한국교회사연구소 자료실이 소장하기 이전에 《련옥략셜》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련옥략셜》을 최초로 언급한 자료, 그러니까 그 실물이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흔적은 어디에 남아 있을까? 말하자면 《련옥략셜》은 언제 태어나서 어디서 살다가 지금의 그 장소까지 오게 된 것일까? 이 대목에서 우리는 모리스 쿠랑의 저서 《한국서지》에 주목하게 된다. 쿠랑은 자신의 저서에서 분명하게 《련옥략셜》이라는 필사본 문헌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32)

2756. 련옥략셜
        煉獄略說
Ryen ok ryak syel (Lien yu lio choe).
PETIT TRAITE SUR LE PURGATOIRE.
2책, 12절판, 한글 필사본, 1871년
Miss. Etr. Seoul
로랑 리(Laurent Li), 이문어 신부의 《연옥약설》을 번역함
(Changhai, 1871, 1책, 12절판, 84장)
Cf. Catalogus, No 60.33)

위에서 인용한 서지 사항은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소장하고 있는 한글 필사본 《련옥략셜》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러므로 현재까지는 쿠랑의 저서가 《련옥략셜》의 존재가 처음 기록된 자료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런데 위의 “Miss. Etr. Seoul”은 소장처를 가리킨다. 쿠랑 저서의 약어표에 따르면 이것은 서울에 있던 외방전교회 건물 도서관(Bibliotheque de la maison des Missions Etrangeres, a Seoul)을 말한다.34) 그러므로 쿠랑이 《한국서지》에 실린 자료들을 수집하고 또 집필하던 시기에 《련옥략셜》이 조선 대목구 주교관의 도서관에 있었다고 해석해도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언제일까? 쿠랑이 서울에 체류한 것은 1890년 5월부터 1892년 3월이며, 2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리고 《한국서지》 자체는 쿠랑의 개인적인 계획에서 나온 책이 아니다. 그 편찬 계획은 쿠랑의 상관이었던 초대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 1853~1922)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쿠랑이 한국의 서적들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뮈텔 주교가 큰 도움을 주었던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심지어 뮈텔 주교는 쿠랑이 조선을 떠난 이후에도 계속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쿠랑이 자신의 저서를 완성할 수 있도록 각종 정보를 제공하였다.35)

그러므로 쿠랑이 《련옥략셜》을 소개할 수 있었던 가능성은 두 가지일 것이다. 쿠랑이 뮈텔 주교를 방문하여 주교관의 도서관에서 실물을 직접 보았거나, 쿠랑이 떠난 뒤에 뮈텔 주교가 쿠랑을 위해서 한국의 문헌 자료들에 대한 목록을 작성하여 보내줄 때 천주교 문헌 목록도 함께 만들어 보내주었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1892년 이전에 《련옥략셜》이 주교관의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었다는 말이 된다. 뮈텔 주교가 조선 대목구장이 되어 서울에 부임한 것은 1891년 2월 23일이었다. 그러므로 쿠랑과 뮈텔 주교가 직접 대면하고 교분을 나눌 수 있었던 기간은 1891년 2월부터 1892년 2월까지로 약 1년 정도였다. 이런 상황이라면 블랑 주교의 재임기간에 누군가에 의해서 필사본 《련옥략셜》이 제작되었거나, 뮈텔 주교 부임 이후 1년 사이에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쿠랑이 나중에 뮈텔 주교로부터 천주교 문헌 목록을 받았을 것이라는 후자의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둔다면 《련옥략셜》의 성립시기를 모리스 쿠랑이 일본에서 《한국서지》 제3권의 색인 작업을 하던36) 1896년 4월 이전의 어느 시기까지로 내려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37)

한편 쿠랑의 《한국서지》에 실린 내용은 한글 필사본 《련옥략셜》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즉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관할하던 건물의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문 해독 능력을 지닌 어느 조선인 신자가 개인적인 관심으로 한문본 《연옥약설》을 구득하여 이를 번역하여 《련옥략셜》을 만들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적어도 한문을 잘 아는 조선인 신자가 프랑스인 사제나 주교의 감독 아래에 교회의 공적인 목적을 위하여 번역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말하자면 한문본 《연옥약설》이 조선인 교우들의 신앙생활에 유익한 점이 많다고 판단하여 조선에서도 이를 번역 간행할 의향을 갖고 준비하는 중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할 때에라야 《련옥략셜》이 서울의 주교관 도서실에 보관되어 있었던 이유가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된 연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필사본만 남아 있을 뿐이고 《련옥략셜》의 인쇄 간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2) 번역 원본에 대한 추적

쿠랑의 《한국서지》에도 한글 필사본 《련옥략셜》이 1871년 상해에서 나온 이문어 신부의 저서 《연옥약설》을 번역한 것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간행한 영인본의 해제에서도 “《련옥략셜》은 중국인 예수회 신부인 이체가 저술한 책으로서 1871년 상해 자모당에서 간행되었다”고 하였다.38) 이런 추정에 따른다면 한글 필사본 《련옥략셜》은 1871년 상해 자모당 간행 한문본 《연옥약설》의 번역이라고 하겠다. 양자의 편목을 비교하기 위하여 《련옥략셜》의 목차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표 2. 한글 필사본 《련옥략셜》의 편목 구성

 

 


한글 필사본 《련옥략셜》의 목차를 앞에 나온 1871년 상해 자모당 간행 한문본 《연옥약설》과 대조하면 거의 직역에 가깝게 번역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굳이 그 내용을 상세히 비교하지 않더라도 《련옥략셜》이 《연옥약설》을 모본으로 하여 탄생한 것으로서, 두 문헌의 상호관계가 모녀지간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련옥략설》은 복단대학교 도서관 소장본과 한국교회사연구소 자료실 소장본 가운데 어느 것을 모본으로 하여 번역한 것일까? 앞서 소개했던 두 가지 《연옥약설》 판본의 예화들을 《련옥략설》과 비교하면 한국교회사연구소 자료실 소장본 《연옥약설》이 한글 필사본 《련옥략설》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사연구소 자료실에 소장된 한문본과 한글 필사본은 직접적으로 인과관계를 지닌 문헌들로 확인되는 셈이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자료실 측은 한문본 《연옥약설》과 한글 필사본 《련옥략설》의 소장 경위를 밝히고 있지 않으나, 두 문헌은 모두 모리스 쿠랑이 방문하였던 파리 외방전교회 서울 선교지 건물 또는 조선 대목구 주교관의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가 나중에 한국교회사연구소 측으로 이관되었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한글 필사본 《련옥략셜》은 1871년 이후의 어느 시점에 수정보판의 형태로 다시 간행된 《연옥약설》이 조선 천주교에 들어온 이후부터 시작하여, 쿠랑이 뮈텔 주교의 도움을 받아 《한국서지》 제3권을 완성한 1896년까지, 대략 25년 정도의 기간에 만들어졌다고 추정할 수 있다. 하간부 헌현 승세당 판본이 들어오지 않은 것으로 보자면 북경을 거쳐 조선으로 반입되는 경로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상해에서 해로로 반입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리고 블랑 주교나 뮈텔 주교, 또는 지도적인 위치에 있던 프랑스 선교사의 명령으로 한문을 잘 아는 조선인 신자가 번역하기 시작하였고, 쿠랑이 뮈텔 주교의 도움을 받아 《한국서지》 제3권을 완성한 1896년 이전에 완성하였을 것이다.

《련옥략셜》의 원소장처, 편목 구성, 성립 시기에 대한 문헌 검토는 여기서 마무리하기로 한다. 그런데 문헌 검토를 끝내기에 앞서서 《련옥략셜》과 문헌상으로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현재 한국 천주교에 널리 알려진 연옥 관련 문헌의 출처를 밝힘으로써 《련옥략셜》의 후일담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를 설명하려면 일본 천주교에서 간행된 연옥 관련 서적을 다루어야 한다. 아래의 장은 《련옥략셜》과 현대 한국 천주교 사이의 가교가 될 부분을 검토하기 위하여 마련된 것이다.


4. 일본 천주교의 연옥 관련 문헌

1) 프티장 주교의 《연옥설략》(煉獄說略)


교회법적으로 볼 때 일본 지역은 19세기 전반기까지 조선 대목구장의 재치권 아래에 있었다. 하지만 아직 어떤 선교회에서도 일본에 다시 선교사를 파견하려는 시도를 감행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844년에 파리 외방전교회 테오도르 포르카드(Theodore Forcade, 1816~1885) 신부가 류큐, 즉 오키나와에 상륙하였다. 2년 뒤인 1846년에는 포교성성에 의해서 정식으로 일본 대목구가 신설되었다.

물론 일본 본토에서는 아직 천주교 신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1854년 3월 31일 미국의 페리 제독이 에도 막부와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마침내 일본은 서구 열강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그리고 1858년에는 프랑스와 일불수호조약이 조인되었다. 이로써 파리 외방전교회의 일본 진출이 시작되었다. 1863년에는 루이 퓌레(Louis Furet, 1816~1900) 신부와 더불어 베르나르 프티장(Bernard Petitjean, 1829~1884) 신부가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성당을 건립하였다.39)

1866년 일본 대목구장에 임명된 프티장 주교는 그로부터 9년 뒤인 1875년에 일본 대목구가 분할되어 일본 북부 대목구장이 될 때까지 전 일본 지역의 천주교회를 관할하는 재치권자로서 일본 선교를 총괄하였다. 프티장 주교와 그의 동료들이 벌인 선교 활동에 힘입어 일본 천주교는 1873년부터 본격적으로 재건되기 시작하였다. 1873년에 기록된 통계에 의하면 일본 천주교 신자는 약 1만 5천 명가량이었다고 한다.40)

프티장 주교가 남긴 자료 가운데에는 1872년에 석판 인쇄로 간행한 얇은 책자가 있었다. 책의 제목은 《연옥설략》이었다.41) 간혹 이 책이 이문어 신부의 《연옥약설》을 옮긴 것이라고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원문을 확인해보니 총 15쪽의 소책자에 불과하였다.42) 게다가 세부 목차도 없이 간략히 연옥 교리를 기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프티장 주교의 《연옥설략》이 이문어 신부의 《연옥약설》을 읽고 정리하거나 번역하여 일본 천주교 신자들에게 소개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 한말 조선에서 《연옥약설》의 번역 필사본이 출현한 것과는 달리 일본 천주교회에 《연옥약설》이 전해졌다는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연옥설략》은 프티장 주교가 독자적으로 일본 천주교 신자들을 위하여 연옥 교리를 정리하여 일본말로 소개한 책자라고 보아야 옳을 것 같다. 그리고 아직 《연옥설략》에는 본고가 주목하는 것과 같은 연옥 관련 예화들이 소개되어 있지도 않았다.

2) 막심 퓌상 신부의 《연옥과 지옥》[煉獄と地獄]

연옥 교리를 체계적으로 해설하면서 연옥 예화들을 풍부하게 소개하는 책자가 일본 천주교회에서 간행된 것은 막심 퓌상(Maxime Puissant, 1874~1932) 신부에게 와서 비로소 실현되었다. 퓌상 신부 역시 프티장 주교와 마찬가지로 파리 외방전교회 회원이면서 일본 선교사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1898년 9월 26일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서 사제로 서품되었고, 같은 해에 오사카 선교지로 발령을 받고 일본으로 출발하였다. 1899년 1월에 오사카에 도착한 퓌상 신부는 오카야마로 가서 일본어를 배우면서 사목 활동을 개시하였다. 1903년에는 오사카로 돌아와서 고아원 운영을 맡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던 1914년부터 1918년 사이에 퓌상 신부가 근무하던 지역(오사카 부근의 타마츠쿠리)의 선교 책임자가 징집되었기 때문에, 퓌상 신부가 대리 자격으로 관리를 맡았다. 그러면서 퓌상 신부는 교구의 가톨릭 월간지 편집자 역할까지 떠안았다. 이 시기에 퓌상 신부는 여러 권의 소책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으로는 《행동하는 윤리》(La Morale en Action), 《파스퇴르의 생애》(Biographie de Pasteur), 《주님의 빛나는 생애》(La Vie Illustree de Notre Seigneur), 《연옥, 지옥》(Le Purgatoire, L’Enfer) 등이 있다.43) 퓌상 신부가 파스퇴르의 전기를 간행한 것은 신앙과 과학이 충돌하지 않는다는 취지에서 근대의 유명한 과학자들을 일본 사회에 소개하려는 의도로 보인다.44)

퓌상 신부의 저작 가운데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마지막 소책자이다. 퓌상 신부가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타마츠쿠리 지역의 임시 선교 책임자로 근무하면서 지었다고 했으므로 일본어로 된 책일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래서 같은 제목의 프랑스어 책은 일본 내에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에 《연옥과 지옥》[煉獄と地獄]이라는 제목을 단 일본어 서적을 찾을 수 있었다. 총 64쪽으로 이루어진 연옥 편의 서문 끝에는 1923년 9월 24일이라는 날짜가 붙어 있고, 연옥 편 다음에는 52쪽으로 구성된 지옥 편이 이어지는데 끝에 대정 8년(1919) 8월 3일이라는 날짜가 붙어 있다.45) 아마 전쟁 기간에 집필을 구상하였고 종전 직후에 지옥편을 완성하였고, 나중에 연옥 편을 추가하여 1923년에 책자로 간행하였던 것 같다.

퓌상 신부의 저서 제목은 《연옥과 지옥》이지만, 연옥 편과 지옥 편은 각기 다른 시기에 집필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두 편이 별도의 소책자로 나왔을 가능성도 있다. 그중에서 연옥 편은 한국순교복자수녀원에서 번역하여 1964년 가톨릭출판사에서 간행한 《연옥실화》와 모종의 연관관계가 있음이 분명하다. 실제로 《연옥실화》의 서지사항에는 막심 퓌상 신부가 저자로 나와 있다. 그리고 일본어판 《연옥과 지옥》의 연옥 편은 《연옥실화》와 그 목차가 동일하다.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면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서론의 내용도 상당히 차이가 나며, 《연옥실화》에는 일본어판에 들어 있는 예화가 생략된 곳도 많고, 설사 유사한 예화가 들어 있더라도 상당히 윤색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연옥실화》의 번역자에 의해서 생긴 것인지, 퓌상 신부가 프랑스어로 쓴 원저작이 따로 있고, 그로부터 일본어판과 한국어판이 갈라져 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다.46)

현대 한국 천주교 신자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는 《연옥실화》의 번역 경위를 밝혀낼 수는 없었지만, 퓌상 신부가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에서 집필하고 1923년에 간행한 일본어판 《연옥과 지옥》의 연옥 편과 연관되어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아가서 《연옥실화》에는 본고의 주인공인 《련옥략셜》에 실려 있던 예화가 발견된다. 즉 제1편의 둘째 장 ‘연옥 있음을 성경으로써 증거함이라’에는 ‘옛적 회납이(晦拉爾) 성(城)에서 있었던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이것은 퓌상 신부의 《연옥실화》에도 그대로 들어 있다.47)

이러한 사실을 보면 이문어 신부의 《연옥약설》과 《연옥고》에서 시작하여 한글 필사본 《련옥략셜》을 거쳐서 퓌상 신부의 《연옥실화》에까지 이르는 긴 역사 속에 문헌상으로 확인되는 모종의 계보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이문어 신부와 퓌상 신부가 공유하고 있던 연옥 교리 및 관련 예화들에 대한 지식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닐까 한다. 어쩌면 19세기 유럽 천주교회에서 널리 읽히던 연옥 예화 모음집이 있었는데, 아직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련옥략셜》을 비롯한 각종 문헌들에 나오는 연옥 예화들의 유럽어 원천 사료를 밝히는 작업도 앞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5. 남은 문제들

본고는 한글 필사본 《련옥략셜》의 정체를 밝히기 위하여 관련 문헌들을 검토하였다. 본론에서 전개한 논의를 대략적으로 간추리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련옥략셜》의 모본이 된 것은 한문본 《연옥약설》인데, 한문본은 중국 상해의 서가회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이 운영한 고아원의 인쇄소에서 1871년에 처음 간행되었다. 저자는 이문어 신부이고, 초간본의 간행을 승인한 것은 예수회 선교사 랑기아 주교였다. 그러나 이문어 신부는 곧이어 초간본에서 특정 예화를 교체한 수정보판 형태의 《연옥약설》을 내놓았다. 수정보판은 전체 목판을 새로 제작한 것이 아니어서 1871년 간행본으로 그대로 유통되었다. 한편 1877년부터는 북경 동남쪽에 위치한 하간부 헌현의 천주교 인쇄소 승세당에서 수정보판 이전의 원래 판본을 가지고 《연옥약설》을 간행하였다. 그러므로 당시 중국 천주교에서는 두 개의 상이한 판본이 《연옥약설》이라는 동일한 제명을 달고 보급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5년 뒤인 1886년에 가서 이문어 신부는 《연옥약설》의 문제점을 수정 보완하기 위하여 개정판 《연옥고》를 펴냈다.

조선에서 만들어진 《련옥략셜》은 이문어 신부가 1871년 상해에서 간행한 《연옥약설》의 번역본이다. 본고에서는 두 문헌에 실려 있는 예화들을 대조한 결과 《련옥략셜》은 《연옥약설》의 수정보판을 번역한 것임을 밝혔다. 그러므로 《련옥략셜》의 필사 시기는 《연옥약설》의 수정보판이 나온 이후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모리스 쿠랑이 《한국서지》 제3권에서 《련옥략셜》의 존재를 보고한 것으로 보자면 1896년 이전에 서울의 주교관 도서실에 소장되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한글 필사본 《련옥략셜》은 아직 번역자 또는 필사자가 누구였는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1871년부터 1896년 사이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아가서 《련옥략셜》의 인쇄 간행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유사한 형태의 연옥 관련 예화집인 《연옥실화》가 일본에서 퓌상 신부가 간행한 일본어판을 참고하여 1960년대 한국에서 간행되면서 추상적인 연옥 교리를 생생한 현실로 경험할 수 있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상의 내용이 본고의 핵심적인 주장이다.

앞으로 해결해야 할 남은 문제들을 두 가지만 거론하면서 본고를 마무리하겠다. 첫째,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한중 천주교의 교류사를 해명하는 문제가 아직 남아 있다. 이문어 신부를 비롯하여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원들은 상해의 서가회를 거점으로 하여 다양한 출판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중국 북부에서는 하간부 헌현을 중심으로 막대한 서적들이 간행되었다. 그 가운데에는 각종 교리서, 신심 서적, 전례서 등등 교회 문헌들이 대부분을 차지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당시 유럽에서 발신하던 각종 근대 지식들을 소개하는 책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런데 왜 조선 천주교에서는 유독 《연옥약설》만을 선택하여 번역하고 필사본 형태로 남겨 놓았을까? 다른 서적들의 유입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 것일까? 이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천주교회를 교차점으로 하여 형성되었던 지식의 네트워크를 이해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조금 더 시야를 넓혀서 일본 천주교의 경우는 사고의 판도 속에 넣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프티장 주교를 위시하여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새롭게 건설하던 일본 천주교회에서는 상해 지역의 근대 서학에 해당하는 서적들을 도입한 흔적이 없을까? 도대체 아시아 지역에서 근대성은 천주교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을까? 《련옥략셜》의 계보를 추적하면서 도달한 지점은, 예기치 못한 점이지만, 이처럼 근대 동아시아 3국 사이의 지식 흐름에 끼친 천주교의 영향이라는 새로운 주제의 발견이었다.

둘째, 《련옥략셜》에 대한 내용 분석이 앞으로의 과제이다. 이문어 신부 본인은 서문에서 간략하게 언급만 하고 지나갔기 때문에 연옥 교리에 대한 해설과 연옥 예화들을 가져온 문헌적 전거들이 불명확한 만큼 이를 찾아내는 일이 시급하다. 그리하여 유럽 문헌과 기타 한문 문헌들을 교차 검토한 뒤에 상세한 주석을 붙인 《련옥략셜》 역주본이 마련된다면 본격적으로 《련옥략셜》에 대한 분석적인 연구가 가능할 것이다. 연옥 예화들에 담긴 서사 양식의 특성이 무엇인지, 저승의 지리학이라 일컬을 만한 사후세계관은 어떠한지, 죄와 벌의 대차대조표로 이루어진 연옥의 회계학은 또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 등등이 관련 주제가 될 것이다. 최종적으로는 연옥 예화 속에서 등장하는 핵심적인 주제가 고통인 만큼, 순교 행적 또는 순교 서사와 연옥 서사 사이의 상호 관계를 해명할 수 있다면, 영광스러운 순교자들의 이야기로 점철된 한국 천주교 역사를 새로운 각도에서 다시 서술하는 일도 가능하리라고 본다.

* 이 논문은 2015년 한국교회사연구소의 학술연구비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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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eter Brown, “The End of the Ancient Other World : Death and Afterlife between Late Antiquity and the Early Middle Ages,” The Tanner Lectures on Human Values, Yale University, October 23~24, 1996(Diana Walsh Pasulka, Heaven Can Wait : Purgatory in Catholic Devotional and Popular Culture, New York : Oxford University Press, 2015, p. 24에서 재인용).

2) 유희수, 《사제와 광대 : 중세 교회문화와 민중문화》, 문학과지성사, 2010, 243~245쪽 참조.
3) 자크 르 고프, 최애리 옮김, 《연옥의 탄생》, 문학과지성사, 1995, 542~547쪽 참조.

4) 연옥이라는 한자어의 출현 경위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고할 것. 조현범, <한국 천주교와 조상의례 : 연옥 교리의 번역과 도입을 중심으로>, 《종교연구》 69, 한국종교학회, 2012.

5)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이 행하던 연옥 관련 의례 실천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할 것. 조현범,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의 연옥 관념과 의례 실천>, 《한국사상사학》 47, 한국사상사학회, 2014.

6) 사실성의 후광이라는 표현은 미국의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가 종교를 정의내릴 때 사용한 표현이다. Clifford Geertz, The Interpretation of Cultures, New York : Basic Books, 1973, p. 90.

7) 신유박해 순교자 윤점혜와 관련한 예화 하나가 전할 뿐이다. 즉 윤점혜는 꿈에 어머니가 나타나자 이 일을 주문모 신부에게 상의하였고, 주문모 신부는 윤점혜에게 연도를 바치라고 권장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1811년 조선 교우들이 북경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 실려 있다. 윤민구 역주, 《윤유일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시복 자료집》 5, 천주교 수원교구 시복 시성 추진위원회, 2000, 247쪽.

8) 한글 필사본 《련옥략셜》은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으며, 1986년에 《사후묵상》, 《사말일언》, 《련옥고남》 등과 함께 한국교회사연구자료 제17집으로 영인 간행되었다.

9) 한글 필사본 《련옥략셜》에 대한 기존 연구로는 다음의 것이 있다. 김유리, <조선 후기 천주교의 연옥관념과 조상의례>, 《종교학연구》 32, 한국종교학연구회, 2014.

10) 장정란, <이체>, 《한국가톨릭대사전》 9,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7066~7067쪽 참조.

11) 이문어 수사가 예수회에 입회한 날짜 및 동료 입회자에 대한 설명은 예수회 김민 신부가 중국관구 문서고 담당자에게 문의한 결과를 알려준 것이다. 김민 신부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12) 마상백(馬相伯)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13) 이문어 신부가 펴낸 서적들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Joachim Kurtz, “The Works of Li Wenyu(1840~1911) : Bibliography of a Chinese-Jesuit Publicist,” 《或問(Wakumon)》 11, 關西大學 近代東西言語文化接觸硏究會, 2006, pp. 149~158.

14) 이문어 신부가 지은 한문본 《연옥약설》에는 서광계에 얽힌 연옥 이야기가 한 편 들어 있다. 부인 오씨가 병에 걸렸을 때 서광계가 하늘에서 내려와 부인을 위로하면서 죽은 아들 아무개가 지금 연옥에 있으니 산 사람들이 함께 기도하여 아들을 옥에서 나오게 하라고 했다는 이야기이다. 이문어 신부는 서광계에 관한 글들을 정리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15) 장정란, 앞의 글.

16) Joachim Kurtz, “Messenger of the Sacred Heart : Li Wenyu and the Jesuit Periodical Press in Late Qing Shanghai,” Cynthia Brokaw and Christopher Reed, eds., From Woodblocks to the Internet : Chinese Publishing and Print Culture in Transition, Circa 1800 to 2008, Leiden : Brill, 2010, p. 81.

17) 허빈은 나중에 예수회를 떠났기 때문에 사망 연도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예수회 입회 연도가 1862년 5월 29일로 이문어 신부의 입회 연도와 동일한 것으로 보건대, 19세기에 최초로 예수회에 입회한 11명의 중국인 가운데 한 명이었다.

18)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상해에서 간행된 천주교 관련 서적들에서 허빈은 허채백(許采白)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등장한다.
19) 현재 바르톨로메오 축일은 8월 24일이다.

20) 위에서 이문어 신부가 12살(1852년)에 입학하여 1862년에 졸업하였다고 말한 서회공학은 1850년에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 클로드 고틀랑(Claude Gotteland, 1803~1856) 신부가 세운 아동 교육기관이었는데, 그 별칭이 성 이냐시오 공학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허빈이 《연옥약설》의 서문을 쓴 성 이냐시오 학관은 서회공학을 가리키는 것 같다. 따라서 이문어 부제가 1871년 여름 피정을 하면서 책을 완성한 곳 역시 모교였던 서회공학이었을 것이다.

21) Joseph de Moidrey, La Hierarchie Catholique en Chine, en Coree et au Japon(1307~1914), Zi-Ka-Wei(pres de Chang-Hai) : Imprimerie de l’Orphelinat de T’ou-Se-We, 1914, p. 98.

22) 1871년에 간행된 한문본 《연옥약설》이 목판본인 것은 그 형태를 보면 알 수 있다. 비록 글자체는 활자처럼 보이지만, 어미(語尾)와 판심(版心)의 좌우 계선(界線)이 붙어 있고, 광곽(匡郭)의 사주(四周, 테두리)도 붙어 있다. 일반적으로 고문헌 서지학에서는 이런 특성을 보이는 판본을 목판본으로 본다. 이것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옥영정 교수께서 지적해 주셨다. 지면을 빌어 감사의 뜻을 전한다.

23) 張偉, 張曉依, 《土山灣 : 中國近代文明的搖籃》, 台北 : 秀威資訊科技, 2012, 42쪽.
24) 위의 각주에 나오는 인쇄소(Imprimerie de l’Orphelinat de T’ou-Se-We)도 동일한 곳이다.
25) 《煉獄略說》, 上海 慈母堂 藏板, 天主降生 一千八百七十一年, 12~13쪽.

26) 헌현 승세당에서 중간본으로 간행한 《연옥약설》의 형태와 내용 구성은 중국 북경시에 소재한 국가도서관 고적관(古籍館)에 소장되어 있는 판본을 가지고 확인하였다.

27) Joseph de Moidrey, op. cit., p. 143.
28) 常莉俊, , 《?台世界》 16, 2011, 72쪽.
29) Joseph de Moidrey, op. cit., p. 98.
30) http://www.catholic-hierarchy.org/bishop/bhaou.html (2016년 6월 6일 18시 47분 검색)

31) 하간부 헌현 승세당에서 1927년에 간행하였다는 《연옥고》는 현재 북경대학교 도서관에 있는 연경대학 기독교서목(基督敎書目)에 들어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 실물을 확인하지는 못하였다.

32) Maurice Courant, Bibliographie Coreenne, Tome Troisieme, pp. 356~357(《근세 동아세아 서양어 자료총서》 3, 경인문화사, 2000) ; 모리스 꾸랑, 이희재 옮김, 《한국서지 - 수정번역판 -》, 일조각, 1994, 693~694쪽.

33) 위의 참고 서지는 1889년 상해 서가회 토산만 고아원에서 판매용으로 간행한 도서 목록(Catalogus Librorum Venalium in Orphanotrophio Tou Sai Wai)을 말한다. 아마 이문어 신부의 《연옥약설》에 대한 소개가 실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34) Maurice Courant, Bibliographie Coreenne, Tome Premier, p. 217(《근세 동아세아 서양어 자료총서》 1, 경인문화사, 2000).
35) 다니엘 부셰, <모리스 꾸랑과 뮈뗄 主敎>, 《최석우 신부 화갑기념 한국교회사 논총》,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341~345쪽 참조.

36) 쿠랑이 1896년 4월 경 일본 동경에서 《한국서지》의 색인 작업을 하였다는 것은 뮈텔 주교의 일기에 근거한 말이다. 《뮈텔 주교 일기 (1896~1900)》 II, 한국교회사연구소, 1993, 60쪽 참조.

37) 쿠랑이 《한국서지》 집필을 언제부터 언제까지 했는지, 각 분야 문헌 목록을 언제 어디서 입수했는지, 특히 천주교와 개신교 관련 문헌 목록을 누구로부터 얻었는지에 대한 연구는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김봉희의 연구에서도 천주교 문헌 출처에 대해서는 답을 하지 않는다. 김봉희, <모리스 꾸랑의 《韓國書誌》 중 <天主敎類> 硏究>, 《서지학연구》 6, 1990. 쿠랑의 저서에 뮈텔 주교가 기여한 바에 관한 자세한 사정은 뮈텔 문서 속에 들어 있는 쿠랑과의 왕복 서신을 분석해야만 알 수 있을 것 같다.

38) 안홍균, <해제>, 《한국교회사연구자료》 제17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6, 25쪽.
39) 고노이 다카시, 이원순 옮김, 《일본 그리스도교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385~388쪽 참조.
40) 조셉 제네스, 홍성언 옮김, 《일본의 천주교 수용사》, 경희대학교 출판문화원, 2013, 303쪽.

41) 현재 프티장 주교의 《연옥설략》 원본은 일본 상지대학 기리시탄 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프티장 주교의 문헌 자료 전체가 영인 간행되었다. 《本邦キリシタン布敎關係資料 プティジャン版 集成》, 雄松堂書店, 2011.

42) 나가사키 교구청의 미야자키 요시노부[宮崎善信] 선생께서 프티장 주교의 《연옥설략》 복사본을 필자에게 보내주셨다. 그리고 일본 천주교의 연옥에 관한 문헌들에 대한 정보도 정리해주셨다. 지면을 빌어 감사의 뜻을 전한다.

43) http://archives.mepasie.org/notices/notices-biographiques/puissant (2016년 6월 9일 13시 23분 검색)

44) 사실 중국 상해에서 활동한 이문어 신부가 간행한 잡지들도 서양의 과학 지식을 중국 사회에 소개하는 역할을 하였다는 연구가 있다. 徐華博, 《李問漁與近代西學傳播》, 杭州師範大學 碩士學位論文, 2011 참조.

45) マキシム プィサン 神父, 《煉獄と地獄》, 岸和田天主公敎會, 大正 8年(1919).

46) 한국순교복자수녀회에 문의하여 얻은 답변에 따르면 《연옥실화》의 번역자는 수녀회의 공동 설립자였던 쁘로마뗄(pro-mater) 홍은순 라우렌시오 수녀였다. 일본어판을 가지고 번역하였으며, 번역 원본은 수녀회의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47) 막심 퓌상, 한국 순교복자수녀원 옮김, 《연옥실화》, 가톨릭출판사, 2008, 146쪽에 나오는 이탈리아 페라라 시에서 벌어진 유령 소동이 그것이다.

[교회사 연구 제50집, 2017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조현범(한국학중앙연구원 종교학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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