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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의 영성: 영성생활에 대한 단상 (6) 영신수련에서 무질서한 애착과 회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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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6-05 ㅣ No.525

[레지오 영성] 영성생활에 대한 단상(斷想) (6) 영신수련에서 무질서한 애착과 회심

 

 

“영신수련은 온갖 무질서한 애착을 없애도록 준비하고 내적 자세를 갖추며 그런 다음에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의 뜻을 찾고 발견하는 데 있다.”(영신 1) “영신수련의 목적은 자기 자신을 이기고 어떤 무질서한 애착에도 이끌림이 없이 생활에 질서를 세우기 위함이다.”(영신 21)

 

로욜라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느님의 뜻을 찾고 발견하는데” 있으며, 이를 위해서 “영혼의 정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 영혼의 정화를 통해 “어떤 무질서한 애착에도 이끌림이 없이 생활에 질서를 세워” 하느님의 은총에 개방된 자세를 갖고 하느님께 대한 ‘관대한 마음’에 도달하는 것이다. ‘관대한 마음’이란 “나의 의향과 행위, 일이 오로지 하느님을 찬미하고 봉사하는 데로 질서 지워진”(영신 46) 마음을 가리키며,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취하게 되는 첫 번째 영적 여정이 바로 정화의 여정이다. 따라서 영신수련은 하느님께로 향한 거대한 ‘회심’의 여정이다. 무질서한 애착으로 인해 깨어졌던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애착’은 더 가까이 하고 싶은 욕구나 집착 정도로 이해하기 쉽지만, 실제 이냐시오가 사용했던 ‘무질서한 애착’의 본래 의미는 사랑하여 더 가지고픈 욕구뿐만 아니라, 미워하여 멀리하고픈 욕구까지 모두 포함하는 단어이다. 곧 좋음과 싫음, 성향, 기호, 집착이나 두려움, 미움과 냉담 등의 의미를 모두 포함하여 지칭하는 표현이다.

 

강도, 살인, 강간과 같은 중대한 범죄의 뿌리가 되는 것은 그 시작이 욕심과 미움과 음탕한 생각에 있다고 한다. 불가에서는 사람의 내면에 담긴 독(毒)한 성질을 ‘탐’(貪-탐하다), ‘진’(瞋-눈을 부릅뜨다, 성내다), ‘치’(痴-어리석다, 미치다)라고 했다. 탐(貪)은 욕심을 부리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강도짓을 하는 데까지 이르고, 진(瞋)은 성내고 미워하는 데서 시작하여 살인하는 데까지 이르기 때문이다. 탐(貪)은 좋아하는 대상에 대한 집착인데, 진(瞋)은 탐(貪)과 반대로 좋아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반감?혐오?불쾌 등의 감정이다.

 

이 둘이 감정적이라면 치(痴)는 지적인 번뇌라고 말할 수 있다. 곧 바른 도리에 대한 무지를 가리킨다. 그래서 치(痴)는 어리석고 얕은 생각으로 한치 앞도 못 보고, 잘 알지 못하여 해아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별하지 못하여 잘못을 저지르거나, 옳고 그름을 제대로 알지 못하여 잘못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회심은 어딘가로 향하는 것과 어딘가로 부터 빠져나오는 것, 두 가지 가리켜

 

회심(μετανοια, conversio)이란 단순히 자신의 몇 가지 죄스런 행위나 윤리적 행위에 대한 뉘우침이 아니다. ‘하느님의 정신세계와 함께 돌아가는 것’, 하느님의 뜻과 함께 이루어지는 전인적인 방향전환을 말한다. 그래서 회심이란 어딘가로 향하는 것과 어딘가로 부터 빠져나오는 것, 이 두 가지 방향을 말한다. 영신수련에서 어딘가로 향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갈구하고 찾는 회심에 있으며, 어디로부터 빠져나온다는 것은 그동안 하느님 사랑에서 벗어나 우리의 본래적인 지향을 어지럽히는 무질서한 충동과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회심의 과정을 말한다. 따라서 어디로부터 빠져나오는 방향만 생각한다면 줄기차게 고해성사를 해도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몰라 지겨운 반복만이 있을 뿐이어서 건강한 회심이라 할 수 없다.

 

사람이 죄에 빠지게 되면 그의 가치 체계는 완전히 뒤집힌다.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그것이 악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오히려 거짓 환상을 제시하며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을 그럴 듯하게 포장한다. 그리고 이에 잉여와 부산물로 떨어지는 떡고물에 눈이 먼 이들은 이를 고집스러울 정도로 옹호하게 된다. 이 단계에 이르게 되면 정말이지 회개하기가 어렵다. 좋지 않은 것을 자꾸 고집하다 보면 나중에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조차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심을 통한 새로운 가치와 질서란 것도 하느님과의 관련성 안에 정향되어 있을 때만이 올바르고 자유로움을 줄 수 있다. 더러는 그 질서란 것이 하느님과의 관련이 없이 오직 자신이 생각하는 질서(Ego에서 만들어진 질서)만을 추구하고 있을 때 편안하고 자유로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짓 자아에서 나온 비틀어지고 왜곡된 보상심리에서 나온 열매들이다.

 

 

삶의 변화나 회심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

 

옛날 어렸을 적에 국정 교과서를 받으면 별책으로 함께 받았던 지리도감이라는 책이 있었다. “어디어디를 찾아라!”고 하면, 얼굴을 지도책에 점점 더 밀착시키며 깨알 같은 작은 글씨까지도 척척 찾아내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 놀이의 가장 큰 함정은 아무래도 작은 글씨보다는 큰 글씨로 쓰인 지명에 있었다. 한쪽 귀퉁이에 아주 작은 글씨로 쓰인 곳은 기를 쓰고 찾아내면서 사실 눈앞에 길쭉하게 쓰인 큰 글씨를 찾는 데는 의외로 시간이 많이 걸리곤 했다.

 

그런데 지금도 자신에 대한 성찰을 하다보면 문득 그 지도 속 지명 찾기 놀이가 떠오른다. 우리의 여러 가지 구체적인 잘못이나 버릇들은 곰곰이 따져보면 아주 시시콜콜한 것까지 금방 떠오른다. 특히 남의 잘못들은 더 쉽게 보인다. 그렇지만 우리의 삶에서 그 전체적인 모양새에 어느 부분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찾아내기란 참으로 어렵다. 설령 내가 그것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정직하게 들여다보기를 두려워하며 애써 외면하려 해왔던 시간들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부담스러운 작업이다.

 

오히려 그런 것 말고도 당장 해결해야 할 강박된 방향으로 자신을 숨기며 기억 속에 매몰되어 버린 자신의 불편한 모습이다. 설령 누군가 그것들에 접근해 올라치면 기겁을 하며 즉각적인 방어기제를 사용한다. 무지하게 자존심 상하고 두려울 정도로 기분 나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깊숙이 감추어 두었던 상처받은 내 모습이며, 그 상처로 인해 냉혹하고 각박한 세상에 대응하며 만들어진 비틀어지고 왜곡되어 버린 내 자아상이자 인격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변화하고 바뀌기를 바랄 때 보통 외형적인 것을 먼저 떠올린다. 외형적인 변화에 대해서는 모두가 민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변하지 못한 탓은 외적인 조건이 변하지 못한 탓, 제도나 규칙이 잘못되고, 시스템이 잘못된 탓, 지도자가 바뀌지 않은 탓으로 돌릴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변화, 바로 우리 자신들의 변화에 대해서는 둔감하다. 삶의 변화나 회심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어떤 이는 내가 하고 싶은 짓 다 하며 멋대로 살다가 죽기 직전에만 회개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종말이란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호락호락하게 읽어낼 수 없다는 것이고, 진정한 회개란 그처럼 내가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영신전쟁’에서 회심은 절묘한 한 수이다. 그러나 평소에 바둑도 많이 두어본 사람이 묘수를 생각해내지 하수가 묘수를 생각해내는 법은 없다. 온 영혼을 바쳐 진정으로 하는 회개 또한 평소에 늘 하느님을 갈망하며 살았던 사람이 아니면 거의 불가능하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년 6월호, 이동훈 시몬 신부(서울대교구 상설고해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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