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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평양의 순교자들6: 박용옥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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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5-09 ㅣ No.1618

[평양의 순교자들] (6) 박용옥 신부


늘 신자들과 함께한 목자, 양 떼 위해 자진해 체포돼

 

 

- 신의주본당 보좌로 재임할 당시 주일학교 어린이들과 함께 ‘가위바위보’를 하며 즐거워하는 박용옥 신부.

 

 

박용옥(티모테오) 신부는 성모 공경이 뛰어난 사제였다. 또한, 같은 교구의 김필현(루도비코) 신학생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 사상 최초로 로마에 유학한 신학생이었고, 목자로서 모범적 표양을 보여준 사제였으며, 기쁘고 용감하게 죽음의 길을 걸어간 순교자였다.

 

 

투옥과 지병에도 굴하지 않은 사목 정신

 

박용옥 신부는 1913년 10월 8일생이다. 출생지는 평안남도 평원군 공덕면 흥운리(지금의 평남 숙천군 장흥리), ‘어파공소’가 자리 잡고 있던 교우촌이다. 아버지는 박태호(요아킴), 어머니는 김 루치아였다. 박 신부의 어린 시절에 대해 알려진 것은 여기까지다. 그의 가정환경이나 성장 과정은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그가 네 살이 더 많은 김필현 신학생과 함께 서울 동성상업학교 을조(소신학교)를 거쳐 용산 예수성심 대신학교 예과(철학)를 마쳤고, 1933년 9월 로마로 유학을 떠나 교황청립 우르바노대학에서 6년간의 학업을 마무리했으며, 1939년 3월 18일 로마 성 바오로 대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다.

 

1939년 10월 귀국한 박 신부는 신의주본당 보좌로 발령받아 1941년 12월까지 2년간 사목한다. 당시 박 신부는 말수가 적고 온순하며 침착하고 내성적인 성품이었지만, 사목에 관한 한 매사에 철저했던 사제로 기억되고 있다.

 

- 1939년 10월 귀국해 평양 관후리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는 박용옥 신부.

 

 

그러나 이처럼 평탄한 사목활동도 잠시였다. 1941년 12월 초 태평양전쟁이 일어나 메리놀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이 모두 체포되면서 그 또한 신의주경찰서 유치장에 투옥돼 5개월가량 갖은 고통을 겪었다. 유치장 창살 틈으로 보이는 성당 불빛을 보면서 날마다 성체조배를 했던 박 신부였지만, 혹한기에 동상이 걸리고 온몸이 부었다. 지병인 허리통증까지 도져 출옥 뒤 신의주 성모병원에서 지냈다. 

 

한 달간 투병 생활을 마친 박 신부는 임지를 옮겨 1942년 6월부터 1년간 중화본당 주임으로 사목했다. 당시 자전거를 타고 신자들을 집집마다 방문해 신심을 돈독히 해주던 박 신부의 사목활동은 지금도 평양교구 출신 신자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특히 성모 공경이 뛰어났던 박 신부는 많은 신자에게 감화를 줬다. 성모 축일이면 열정적으로 장엄 미사를 봉헌했을 뿐 아니라 매주 토요일이면 성모 신심 미사를 즐겨 봉헌했다. 해마다 5월 성모 성월이면, 성모상을 아름답게 꾸며 성모를 향한 지극한 사랑을 드러냈다. 

 

홍용호 신부가 평양대목구장에 임명된 지 3개월 뒤인 1943년 6월, 박 신부는 대목구장 비서 겸 경리책임자로 임명돼 1년 동안 봉직했고, 1944년 11월에는 평양 대신리본당 주임으로 발령받았다.

 

대신리본당에서의 5년에 걸친 정성 어린 기도 생활과 헌신적인 사목 생활은 오늘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박 신부는 매일 미사 30분 전이면 성당에 나와 성체조배를 했고, 미사를 봉헌한 뒤에는 15분 넘게 감사 기도를 바쳤다. 주일에는 미사를 집전한 뒤 어김없이 성당 마당으로 나와 신자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는 목자였다. 매일 저녁이면 성당에서 신자들과 함께 만과(저녁기도)를 바쳤고, 대축일이면 종일 성당에서 신자들을 기다리며 기도했다. 신자들이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언제든 고해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했고, 청년들(80여 명)에게는 ‘예수 성심회’를 조직해 교리 연구를 하도록 했다. 신학생들은 방학 기간에 본당에 돌아오면 본당 청년들과 신학과 호교론에 대한 세미나를 하도록 해 공산주의 유물론자들의 시비에 대비하게 했다. 이와 함께 40세 이상 부녀로 이뤄진 성부(聖婦) 안나회, 40세 미만 부녀로 이뤄진 소화 데레사회, 여성 청년회인 성모회, 남녀 중학생회인 미사회 등 연령별 신심 단체를 조직해 신자들의 신심을 다졌고 본당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보위부의 무자비한 진입에 체포

 

그러나 1949년 5월 평양대목구장 홍용호 주교를 시작으로 교구 사제들이 체포되면서 대신리본당에도 암운이 드리운다. 교구 성직자들의 잇따른 체포 소식에 대신리본당 공동체도 조를 짜 박 신부와 일상생활을 함께하며 박 신부를 지키려 했지만, 그해 12월 6일 정치보위부원들이 성당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관후리 주교좌성당 문제와 관련된, 평양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명의로 된 출두 통고장을 내보이고 박 신부에게 동행을 요구했다. 이에 박 신부는 대목구장 홍용호 주교와 부감목(지금의 총대리) 김필현 신부 등 대목구 책임자가 없는 상황에서 자신은 그 문제를 상의할 권리가 없고, 밀려드는 신자들의 판공성사 때문에 응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계속해서 동행을 요구했고, 결국은 보위부원들의 무자비한 진입 시도에 많은 신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많은 신자가 다치게 되자 박 신부는 신자들을 헤치고 나가 자진해서 체포됐다.

 

이후 박 신부는 함께 잡혀간 서운석 신부와 함께 2시간가량 시 인민위원회에서 관후리성당 양도 건으로 논쟁을 벌였고, 밤 11시쯤이 돼서야 함께 석방돼 관후리성당 사제관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들은 이튿날인 12월 7일 새벽 3시께 다시 정치보위부원들에게 피랍됐고 생사를 알 수 없게 됐다. 그 뒤 평양 인민교화소 특별 정치범 수용소에 투옥된 박 신부는 10ㆍ20 평양 수복 직전에 총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박용옥 신부는 

 

△ 1913년 10월 8일 평안남도 평원군 공덕면 흥운리 태생 

△ 1930년 동성상업학교 을조(소신학교) 졸업 

△ 1933년 9월 예수성심 대신학교 예과(철학과) 수료 뒤 로마 유학

△ 1939년 3월 18일 로마 성 바오로 대성당에서 사제 수품, 그해 10월 귀국

△ 1949년 12월 7일 관후리성당 사제관에서 북한 정치보위부원들에게 연행돼 행방불명

△ 소임 : 신의주본당 보좌, 중화본당 주임, 평양대목구장 비서 겸 경리책임자, 대신리본당 주임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5월 7일, 오세택 기자, 자료 제공=평양교구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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