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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5: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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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1-16 ㅣ No.797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5)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가 되다


젊은 프랑스인 사제 이역만리 조선의 선교사를 꿈꾸다

 

 

- 브뤼기에르 주교가 서만자에서 조선으로 출발하기 전 1835년 9월 28일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쓴 편지.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 편지를 쓰고 22일 후 중국 마가자에서 급사했다.

 

 

“사랑하는 부모님께,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제까지 지상에서 아낌없이 사랑해온 모든 것과 

이별해야 할 시간이 되었기에 

부모님께 이 서한을 올립니다. … 

은혜롭게도 하느님 친히 

제게 선교사가 되라는 열망을 심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

 

사랑하는 부모님,

불신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무수한 백성의 영적 필요를 헤아리시고, 

우리가 애덕으로 도와주길 기도하는 

저들의 울부짖음을 살펴주십시오. … 

이제 작별 인사를 드립니다. 

저희가 이 세상에서 잠시 헤어지지만,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하기를 주님께 기도합니다.”

 

프랑스 남부 카르카손교구 대신학교 교수이며 주교좌본당 명예 참사위원인 브뤼기에르 신부가 1825년 9월 8일 역마차를 타고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로 떠나는 날 부모에게 쓴 작별 편지의 내용이다.

 

그는 이 편지를 쓰기 얼마 전 부모를 찾아갔다. 하지만 그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가 될 것이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 채 되돌아왔다. 그래서 교구를 떠나던 날 편지로 다시는 못 뵐 부모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 시절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대부분은 현지에서 순교하거나 병사했다. 그래서 브뤼기에르 신부는 부모에게 신앙의 힘으로 이별의 슬픔을 이겨낼 것을 기도했다.

 

- 브뤼기에르 주교는 프랑스 남부 카르카손교구 레삭도드 마을에서 태어났다. 사진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어린 시절 다녔던 성 바르텔레미 성당.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 주교는 1792년 2월 12일 프랑스 남부 카르카손교구 레삭도드(Raissac d‘Aude)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 프랑수아와 어머니 테레즈 사이의 열한 번째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와인용 포도를 경작하는 자작농이었다. 

 

브뤼기에르가 태어날 당시 프랑스 가톨릭교회는 1789년 일어난 대혁명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성직자들은 왕정체제 때 누리던 권리와 특권을 포기해야만 했다. 교회의 모든 재산은 혁명 정부에 몰수됐다. 주교와 사제들은 1790년 4월 14일 공포된 ‘성직자 민사 기본법’(la Constitution civile du clerge)에 선서해야만 했다. 이 법의 골자는 조건 없이 신정부에 연합하겠다는 항복 선언이었다. 선서를 거부한 성직자들은 유배를 떠나거나 살해됐다.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신부 모두가 이 선서를 거부하자 혁명 정부는 1792년 신학교를 폐교해 버렸다. 나폴레옹과 정교 협약을 맺고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가 다시 문을 여는 데까지 15년이 걸렸다. 

 

프랑스 대혁명은 교회 안에 교리와 전통을 약화시키는 근대주의(modernism)의 바람을 불어넣었다. 이 여파로 프랑스 대부분 도시에서는 종교적 전통과 열성이 급속히 약화됐다. 하지만 농촌에서는 근대주의에 대항해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이 늘어났다. 특히 북부 노르드와 피카르디, 서부 브르타뉴와 노르망디, 남부 미디-피레네, 동부 알자스 로렌ㆍ프랑슈콩테 지역에서 전통 신앙을 고수하는 가톨릭 회복 운동이 일어났다. 조선에 파견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모두는 농촌 지역 출신으로 브뤼기에르 주교도 그중 한 명이었다.

 

브뤼기에르는 카르카손 소ㆍ대신학교에서 공부했다. 브뤼기에르는 노란 머리에 키가 작고 말랐으나 성품은 대담하고 솔직했다. 그는 신심이 깊고 성적이 우수해 학생들 가운데 가장 뛰어났다. 그는 스물세 살 때 대신학교 공부를 모두 마쳐 교회법상 사제품을 받을 나이(24세)가 될 때까지 부제로서 소신학교 3학년 교사로 생활했다. 또 1815년 12월 23일 사제품을 받은 다음 날 대신학교 교수로 임명될 만큼 교구와 스승들에게 인정받았다. 카르카손 대신학교에서 4년간 철학과 신학을 가르친 그는 이후 주교좌본당 명예 참사위원으로 사목했다.

 

그가 언제 조선 교회를 알게 됐고 해외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는지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의 여행기에 “조선 선교지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나는 아직 프랑스에 있었고 아주 젊은 나이였다. 이 가엾은 신입 교우들이 버림받은 상태에 있음을 알자, 이들을 구하러 가겠다는 강렬한 열망이 생겼다”(「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29쪽)는 고백으로 보아 카르카손교구 신부 시절 때부터 조선 선교를 희망하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 브뤼기에르 주교는 사제품을 받은지 만 10년이 되던 해인 1825년 서른 세살의 나이로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했다. 사진은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브뤼기에르 신부는 사제품을 받은 지 만 10년 되던 1825년 9월 17일 33세의 나이로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했다. 그의 조선 선교 열망이 현실이 된 것이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사목 경험을 인정받아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서 4개월간 선교사 기본 교육을 받고 아시아로 파견됐다.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는 매년 9월 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낸 다음 월요일에 개학했다. 사제품을 받고 입회한 선교사들은 파리외방전교회 회칙과 선교방침지도서를 숙지하는 교육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또 신학과 철학 외에도 물리학, 자연사, 천문학, 지질학, 지리학, 광물학 등을 배웠다. 파리외방전교회 모든 선교사는 “우선 성인(聖人)이 돼야 하고, 그 다음에는 학자가 돼야 했다.”(베트남에서 순교한 테오판 베나르 신부 글)

 

브뤼기에르 신부는 1826년 2월 5일 아시아 선교를 위해 배를 타고 프랑스 보르도 항구를 출항했다. 프랑스를 떠나기 전 그는 어머니에게 짧은 편지를 썼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시듯이, 저는 어머니의 자녀들 가운데서 열한 번째, 가장 사랑받는 아들입니다. 저 바르텔레미에 대한 어머니의 각별한 사랑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제가 야곱 성조의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을 온전히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머니께서 한평생 어느 날이고 기도하실 때마다 이런 지향으로 기도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1825년 11월 6일 파리에서 보낸 편지)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1월 15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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