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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사목] 북한이탈주민 3만 명 시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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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2-04 ㅣ No.972

[특집] 북한이탈주민 3만 명 시대 열린다 (상) 계속되는 탈북 여정, 실태와 정착 현황


문화 다른 탈북민, 이해와 관심으로 바라봐야

 

 

탈북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국내에 들어온 북한이탈주민이 최근 3만 명을 넘겼다. 1995년 북한에서 큰물 피해와 가뭄으로 탈북이 시작된 지 21년 만이다. 2006년 2월 1만 명을 넘긴 지 불과 9년도 안 됐다. 요즘도 중국과 동남아 등지에 탈북난민만 30만 명이 체류하고 있어 탈북의 발길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에 북한이탈주민의 실태와 과제, 가톨릭 교회의 탈북민 사목 현황을 2회에 걸쳐 살핀다.

 

 

올해 초, 개성에서 혼자 자전거를 타고 출발, 양강도를 거쳐 탈북한 여성 이아무개(예비신자, 27)씨. 

 

최근 통일부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하나원)를 222기로 수료한 그는 한빛종합사회복지관 서울남부하나센터에서 초기집중교육을 받으며 새 삶을 꿈꾼다. 북에서 대학에 다니다 탈북했지만, 모든 걸 새로 시작해야 한다. 법률 상식 공부나 휴대전화 활용, 은행이나 교통 이용, 보건 등 소소한 모든 게 북과 다르기 때문이다.

 

함북 청진 출신인 김 요세피나(58)씨는 2007년 9월 딸과 함께 탈북했다가 나중에 남편을 한국에 데려왔다. 북에서도 알코올 중독이었던 남편은 한국에 와서도 술을 너무 많이 마셔 결국은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아야 했다. 

 

“북에서 밥술 떴다고 잘 사는 게 아니었지요. 탈북하고 나서야 알게 됐어요. 한국에 온 지 10년째인데, 고생도 많았지만, 보람도 많았습니다. 남편은 아직도 병원에 있어요. 이겨내야지요.”

 

 

한국 왔지만 여전히 이방인

 

11월 11일 밤 제3국을 통해 탈북난민 7명이 입국함으로써 ‘탈북민 3만 명 시대’가 열렸다. 

 

주로 중국을 거쳐 들어오는데 최근엔 중국에서 곧바로 한국에 오는 경우는 거의 없고 라오스나 베트남, 태국 등 동남아를 경유하거나 드물게는 러시아나 몽골 등을 거쳐 들어온다. 

 

‘사선’을 넘는 탈북 여정은 인권유린에 인신매매가 비일비재한 고난의 길이다. 때로는 중국 공안에 잡혀 북으로 송환되기도 한다. 1∼2년은 기본이고, 10여 년이 걸리기도 한다. 그 와중에 ‘팔려가’ 중국인이나 조선족과 혼인, 자녀를 낳는 경우도 흔하다. 

 

통일부에 따르면, 2005년 이후 급증했다가 2012년 한풀 꺾였던 북한이탈주민 입국은 올 들어 다시 증가세로 돌아섰다.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18%나 증가했다. 여성 북한이탈주민 수가 전체 입국자의 71%를 차지하고 있고, 20∼30대가 전체의 58%, 경제활동 인구인 30∼40대는 56%다. 

 

국내에 입국한다고 해도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다. 국정원에서 60∼70일, 하나원에서 12주 교육을 거쳐 지역별 하나센터를 통해 초기 집중교육을 거쳐 정착에 들어가지만, 수박 겉핥기나 마찬가지다. 2010년에 지정 설립된 23곳의 하나센터는 북한이탈주민 국내 정착의 최전선에 서 있다. 

 

하지만 북한이탈주민들은 갖가지 어려움에 그대로 노출돼 있다. 우선 경제적 자립이 가장 큰 과제다. 2015년 현재 탈북민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59.4%, 고용률은 54.6%나 되고, 실업률은 4.8%에 그치지만 질이 문제다. 탈북 남성은 서울 외곽이나 수도권 3D업종 생산직, 여성은 식당이나 가사도우미가 대부분이고, 유흥업소의 유혹에 빠지는 경우도 많다. 취업을 3개월 유지하면, 3년간 매달 최대 50만 원씩 ‘미래행복통장’에 적립해 줌으로써 목돈 마련의 기회를 주지만 이용자는 저조하다. 학교나 학원에 적을 걸어놓고 수급을 유지하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게 낫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수급을 끊을 수도 없어 정부는 곤혹스런 처지다. 

 

정신 보건 문제도 심각하다. 탈북 과정에서 당한 고문과 불안 등에 따른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중국에 체류할 당시 아이를 낳은 탈북 여성들은 한국에 들어오면 자녀 교육에도 큰 어려움을 겪는다. 

 

정민희(레지나, 38) 서울남부하나센터 팀장은 “처음엔 북한이탈주민들을 같은 핏줄, 같은 언어를 쓰는 민족으로 봤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실상은 외국인”이라며 “오랫동안 이념과 사상, 문화가 다른 이주 배경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북한이탈주민에 더 많은 이해와 관심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이어 “북한이탈주민들을 사회적 약자로 보기보다는 중국 수만㎞를 걸어서 올 만큼 강하고, 자기 문제를 스스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보는 관점에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며 “북한이탈주민들의 남북 통합은 지역사회 주거지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6년 12월 4일, 오세택 기자]

 

 

[특집] 북한이탈주민 3만 명 시대 열린다 (하) 가톨릭 교회 탈북민 사목, 어디까지 왔나

 

북한이탈주민 시범본당 운영하며 선교에 박차

 

 

서울 복자 여명의 집. 탈북한 무연고 10~20대 초반 여성들의 생활 공동체(그룹홈)다.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도자들이 밥도 해 주고 정착도 도우며 ‘엄마’ 역할을 한다. 

 

그런데 최근 복자 여명의 집에 ‘기쁜 일’이 생겼다. 네 가족 중 둘이 대입 수시 특별전형에 합격, 내년부터 대학에서 디자인과 중국어를 전공하게 됐다. 대학에 들어가 6개월이 지나면, 정부에서 주택을 배정받아 새 보금자리로 떠나야 하지만 정착의 꿈을 키워 온 복자 여명의 집을 잊지는 못할 터다. 

 

김영년(데레사,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녀는 “북한이탈주민 가운데서도 특히 10ㆍ20대 여성들이 사각지대에 놓여 있어 이들을 위한 생활 공동체를 꾸리고 있다”며 “아이들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 마음이 통하는 진정한 이웃이 돼 달라는 것”이라고 귀띔한다.

 

북한이탈주민 3만 명 시대, 가톨릭 교회는 어디쯤 와 있을까? 

 

2010년 5ㆍ24 조치로 대북 지원이 사실상 중단되다시피 하면서 기존 화해 기도, 화해 교육과 함께 북한이탈주민 사도직이 점차 활성화하고 있다.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위원장 김운회 주교)를 중심으로 교구 민족화해위원회와 수도회, 교구별 북한이탈주민 지원센터나 일부 종합사회복지관, 생활 공동체나 쉼터 등이 함께하는 양상을 보인다. 

 

입국 당시 탈북 난민 대부분이 거치는 기관은 대성공사와 통일부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하나원). 이 중 70∼80%나 되는 여성들은 안성 하나원에, 나머지 남성들은 화천 하나원에서 정착 교육을 받는 데 이들에 대한 사목은 현재 수원교구 민족화해위원회와 춘천교구 한삶위원회에서 도맡고 있다. 

 

이어 이들이 지역별 배정을 받으면, 교구 민화위나 수도회에서 맡아 사목하는데, 이때 중요한 건 하나원 퇴소자와 주소지를 관할하는 본당과의 연계다. 그중에서도 특히 ‘정착 도우미’ 역할까지 소화해야 하는 대부모 역할이 결정적이다. 이게 되지 않으면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선교는 사실상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 북한이탈주민 중 가톨릭 신자는 얼마나 될까? 

 

2014년 주교회의 민화위가 연구 과제로 진행한 ‘신자 북한이탈주민 신앙생활 실태 조사’ 연구에 따르면, 북한이탈주민 중 가톨릭 신자는 333명, 복음화율은 1.11%에 그친다. 

 

물론 실제 가톨릭 신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교구나 수도회, 하나센터 등에서 파악한 북한이탈주민은 이 정도다. 그마저도 80%는 ‘생계 활동으로 인한 시간 부족’(19.4%) 등의 이유로 신앙생활을 힘들어하고 아예 포기하고 있다. 

 

주교회의 민화위 사무국장 오혜정(스바니아) 수녀는 “북한이탈주민은 냉담 비율이 아주 높은데 그 이유는 일반 신자들보다 훨씬 더 많은 기도와 관심이 필요하고 정착까지 도와야 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래도 올해로 21년째를 맞는 북한이탈주민 사목은 점차 체계를 갖춰가고 있다. 주교회의 민화위와 교구 민화위, 본당별 민족화해분과, 남녀 수도회 장상연합회 민족화해분과가 힘을 모으고 있다. 특히 대구대교구 구미 옥계본당과 대전교구 대전 판암동ㆍ천안 쌍용동본당, 의정부교구 파주 금촌2동ㆍ의정부 녹양동ㆍ양주2동본당, 인천교구 논현동본당 등이 속속 북한이탈주민 시범 본당으로 지정돼 북한이탈주민들을 위한 특화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가속도가 붙고 있다. 또한, 교구 민화위나 수도회도 무연고 10∼20대 탈북 여성 생활공동체 꿈사리공동체(살레시오회), 남녀 탈북 아동 생활 공동체 알퐁소 푸스코의 집(세례자 성 요한 수녀회) 등 생활 공동체 12곳을,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의 지원을 받아 주택 미배정자를 위한 쉼터도 3곳을 운영하며 북한이탈주민 사목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하지만 북한이탈주민 정착에 가장 필요한 건 역시 선입견이나 편견을 버리고 ‘착한 이웃’이 돼 주는 것이라는 게 민족 화해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주교회의 민화위 북한이탈주민지원분과 대표 조성하(도미니코 수도회) 신부는 “가톨릭 교회의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선교는 대체로 어려움에 봉착해 있는데, 그 이유는 ‘알아서’ 찾아오게 하는 구태의연한 선교 방식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사목적 관심을 바탕으로 이들에 대한 신학적, 학문적 성찰이 정립돼야 하고, 교구의 벽을 넘어서는 통합적하고 유기적인 사도직 활동도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6년 12월 11일, 오세택 기자]

 

 

[시사진단] 북한이탈주민 3만 명과 사회 통합

 

 

- 윤여상(요한 사도, 북한인권기록보존소 소장).

 

 

북한에서 태어나 생활하다가 탈북하여 남한에 살고 있는 분들에 대한 명칭이 다양하다. 전쟁 시기에 내려온 분들은 실향민, 이산가족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전쟁 이후 탈북한 분들은 월남 귀순용사, 귀순 북한동포, 새터민, 탈북자, 북한이탈주민 등으로 불리어 왔다. 현재 법률, 행정적 공식 명칭은 북한이탈주민이다.

 

정부는 지난 11월 기준 국내 입국 북한이탈주민이 3만 명을 넘었다고 밝혔다. 1990년 이전까지 연간 10여 명이 입국했으나, 1990년대 중반 이후 급속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1999년 연간 입국자 100명을 넘은 3년 뒤 2002년 1000명을 돌파했다. 2006년에는 2000명을 넘어섰다. 전체 입국자 규모도 1990년까지 600여 명 수준이었으나, 2002년 1만 명을 넘고, 2006년 2만 명을 넘은 후 올해 3만 명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북한 주민의 탈북과 입국자의 급속한 증가는 북한사회 변화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1990년 중반 북한 주민 수백 만 명이 굶어 죽은 ‘고난의 행군’ 시기에 생존을 위해서 탈북을 감행했고, 이들이 국내로 들어온 것이다. 2000년 이후 북한의 식량난과 경제 사정이 호전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이탈주민 입국자는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이들은 더 이상 배고픔만을 이유로 제시하지 않는다. 먼저 온 가족이 북한에 남은 가족을 입국시켜 가족의 재결합을 이루는 것이 중요한 탈북 동기가 되고 있다. 자녀에게 더 좋은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더 많은 돈을 벌어 풍족한 삶을 영위하거나 북한 가족에 대한 지원을 목적으로 탈북하기도 한다.

 

탈북 시기와 탈북 동기가 다른 다양한 북한이탈주민 3만 명이 우리 주위에서 살고 있다. 국내 편의점 점포 수가 3만을 넘었다는 보도가 비슷한 시기에 나왔다.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하는 편의점 수와 비슷한 규모의 북한이탈주민이 생활하고 있지만 일반 주민들은 이들과 대화를 나눴거나 접해본 경험이 많지 않을 것이다. 북한이탈주민은 전국 광역시도에 분포되어 있지만, 대부분 임대아파트 단지에 밀집 거주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3개월의 사회 정착 교육 이후 주거 지원 정책에 의하여 임대아파트를 제공하고 있다. 또 북한이탈주민들은 스스로 북한에서 왔음을 자신 있게 밝히는 데 주저하는 경향이 있다. 남북한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경계인의 정체성을 갖는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남한 주민들의 차별과 편견에 대한 두려움과 상처 때문이다. 북한에서 왔다고 하면, 직장과 학교의 동료, 이웃들은 따뜻하게 환대하거나 수용적 태도를 보이기보다는 경계심을 보이고 무시하거나 배타적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함께 생활하는 주변인들의 이러한 태도와 자세는 북한이탈주민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게 되고 자신을 밝히는 데 주저하도록 만든다.

 

북한이탈주민의 한국 사회에 대한 만족도와 삶의 질은 1만 명 시대, 2만 명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정책으로 취업률이 오르고, 탈북 청소년의 학업 중도 탈락률은 낮아지고 있지만 지역 주민들과 동료들과의 관계가 호전되었다는 조사 결과는 찾아보기 어렵다. 굶주림과 아사의 위기는 없어졌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고통스러울 수 있는 사회적 차별과 배제의 고통 속에 피눈물을 흘리는 북한이탈주민이 우리의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다. 정부는 북한이탈주민 지원 정책의 기조를 자활과 자립 지원 중심에서 사회 통합형으로 전환하고, 지원 수준과 범위를 확대하는 정책 내용을 최근 발표하였다. 하지만 북한이탈주민의 사회 통합은 정부의 지원 확대로 성취되기보다는 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직장과 학교 동료, 지역의 이웃들이 이들을 동등한 대한민국 시민으로 받아들일 때 가능한 것이다. 북녘 동포는 물론이고 먼저 온 통일로 불리는 북한이탈주민과의 통합과 소통, 배려와 화합은 우리 시민들, 시민사회의 몫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16년 1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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