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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여정, 성모병원 80년 (상) 성모병원 개원과 명동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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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9-24 ㅣ No.63

사랑의 여정, 성모병원 80년 (상) 성모병원 개원과 명동 시절


가톨릭 정신으로 사랑의 인술 펼치며 의료계 선도

 

 

- 1936년 개원 당시 성모병원 전경.

 

 

“…우리 천주교회의 가장 큰 목적은 물론 사람의 영혼을 구해줌에 있습니다만, 또한 육신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도 큰 사업의 하나입니다. …의료기관의 존재가 외교인에게 진교(眞敎)를 전하는 데 얼마나 큰 효과가 있는지는 여러 말을 할 필요도 없이 여러분이 다 잘 아시는 바입니다.”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병원 설립을 추진하던 경성교구 청년연합회가 발표한 취지문의 일부다. 의료와 선교를 결합함으로써 육체와 영혼 모두를 구원하겠다는 성모병원의 설립 이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병든 이를 고쳐주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실천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임을 일깨운 것이다.

 

한국 교회의 의료 활동은 박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극심한 흉년으로 고아가 되거나 버려지는 아이들을 구제하고자 1854년부터 고아원을 운영했고, 아이들의 건강과 생명을 보살피기 위해 서양 의술에 기반을 둔 시약소를 설치했다. 박해 시대 자선 차원에서 이뤄진 의료 활동은 이후 시약소에서 무료 진료소로, 무료 진료소에서 의원으로 점차 시설과 규모를 키워 나갔다. 

 

성모병원 초창기, 명동본당 신부가 병원에서 환자에게 성사를 집전하는 모습.

 

 

이러한 전통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성모병원(초대 원장 박병래)이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1936년 5월 11일 서울 중구 저동 1가 39번지(현 가톨릭회관 자리)에서 개원함으로써 한국 교회 의료 사업은 본격적인 첫발을 내디뎠다. 경성교구장 라리보 주교가 중심이 돼 모은 기금으로 일본인이 운영하던 무라가미병원을 매입한 병원이다. 대지 1780㎡에 전체 면적 1110㎡(24병상) 규모였다. 

 

개원 초기부터 자선 진료에 힘썼던 성모병원은 해방 후 1946년 성모병원 길 건너에 있던 사또병원(현 평화방송ㆍ평화신문 자리)을 인수해 가난한 환자들을 위한 자선 진료를 확대했다. 1950년 6ㆍ25 전쟁 발발로 일시 혼란기를 맞은 성모병원은 전쟁 중에도 가톨릭 의료봉사단을 꾸려 활발한 의료 활동을 펼쳤다. 1953년 7월 전쟁이 끝나자 성모병원은 의료진을 정비하고 전쟁 후유증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무료 진료하는 데 앞장섰다. 이를 위해 1954년 3월 1일 서울 중림동약현성당 구내 가명초등학교에 성요셉자선병원을 세워 빈곤층 환자들을 치료했다. 

 

1954년 4월 성신대학(현 가톨릭대) 의학부가 명동성당 구내에 설립되면서 성모병원은 의대 부속병원으로 승격했다. 성신대학 의학부는 엄격한 학사 관리로 단기간에 명문 의대로 자리를 잡았고, 가톨릭 이념에 충실한 의료진을 배출하는 산실이 됐다. 

 

1961년에 완공된 성모병원(현 가톨릭회관)과 오른편의 명동성당.

 

 

1950년대 성모병원이 역점을 둔 사업은 신관(현재 명동 가톨릭회관) 건축이다. 미국 스펠만 추기경이 기탁한 2만 달러로 1957년 12월 기공식을 한 성모병원은 의대생들이 직접 벽돌을 나르는 등 모두 힘을 모아 공사한 끝에 1961년 12월 준공식을 가졌다. 지하 2층, 지상 7층, 300병상 규모의 당시 최신식 종합병원으로, 명동성당과 함께 명동의 상징으로 자리를 잡았다. 

 

1962년 가톨릭계 병원을 총괄하는 가톨릭중앙의료원 체제가 출범하면서 자선 진료를 체계적으로 담당하고 관리할 기구의 필요성이 대두했다. 1964년 성모병원에 무료 진료소를 개설하고 이를 가톨릭중앙의료원 산하 기구로 편입하면서 자선 진료 사업도 공식 체제를 갖췄다. 기존 활동과 함께 다양한 자선 진료를 총괄하게 된 무료 진료소는 1964년부터 국내 유일의 민간 병원선 ‘바다의 별’ 운영을 맡아 의사가 없는 섬 주민들을 대상으로 순회 진료 활동을 펼쳤다. 

 

1966년 가톨릭중앙의료원에 사회의학처가 생기자 무료 진료소는 자살예방센터ㆍ만성병연구소(현 한센병연구소)ㆍ기생충병연구소ㆍ성요셉병원 무료진료부 등과 함께 그 산하에 편입됐다. 사회의학처를 중심으로 사회 의료에 관한 모든 사업이 통괄되면서 더욱 안정된 체계를 갖추고 활동의 폭을 넓혀 갔다. 

 

무료 진료소의 자선 진료 사업이 활발해짐에 따라 어려운 환자들에게 더 폭넓은 진료를 제공하기 위한 독립 건물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에 1974년 자선 환자들만을 위한 새 병동을 신축(평화방송ㆍ평화신문 자리)함과 동시에 무료 진료소 이름을 자선 진료소로 바꾸고 독립된 기관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했다. 1954년부터 20년간 자선 의료 활동을 펼쳤던 성요셉자선병원은 문을 닫고 그 기능을 자선 진료소로 합쳤다.

 

성모병원은 1969년 국내 최초로 신장이식 수술에 성공하는 쾌거를 이뤘다. 사진은 당시 수술 장면.

 

 

교직원들은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의 진료비와 긴급한 경제 문제 해결을 돕기 위해 1976년 자선 진료소 후원회를 만들고 자발적인 모금에 나섰다. 이후 교직원들의 열띤 호응과 참여 속에 성모 자선회로 이름을 바꾼 후원회는 다른 병원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의료봉사단체로 현재까지 성모병원의 이념을 구현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명동 시절 성모병원의 가장 큰 의학적 성과로는 1966년 국내 최초로 각막이식 수술을 성공한 데 이어 1969년에는 국내 최초로 신장이식에 성공하는 등 이식 분야에 새로운 금자탑을 쌓은 것을 꼽을 수 있다. 두 수술 모두 한국 의료사를 새로 쓰게 만든 획기적 사건이었다. 

 

1967에는 국제 안재단의 지원을 받아 국내 최초로 안구은행인 안(眼) 은행을 개설하고 안구를 기증받아 시력을 잃은 환자들에게 각막이식 수술을 시행했다. 이식 수술의 잇따른 성공으로 성모병원은 국내 장기이식 분야를 이끄는 선구자로 떠올랐다.

 

[평화신문, 2016년 9월 25일, 남정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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