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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죽음에 관한 성찰: 오늘 우리 사회는 살아야 할 이유를 말해 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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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0-30 ㅣ No.404

[죽음에 관한 성찰] 오늘 우리 사회는 살아야 할 이유를 말해 줄 수 있는가?

 

 

잊을 만하면 반복되는 유명인의 자살 소식이 우릴 황망케 하고 당혹감에 빠뜨립니다. 때로 애통해하고, 때로 비분강개하며, 때로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우리는 타인의 죽음과 소통합니다.

 

 

자살 사건이 우리 모두에게 남기는 상처

 

자살이라는 사건은 그 파장의 반경 안에 있는 사람 모두에게 크고 작은 내상을 남기며, 우리 삶이 지속되어야 하는 이유에 대한 해묵은 질문을 수면 위로 끌어 올리기도 합니다. 도대체 왜 사는지/죽는지. 무엇이 우리를 살게/죽게 하는지.

 

‘언제 어떻게’는 미지수지만, 어차피 맞이하게 될 죽음입니다. 그런데 삶의 마감 시간을 앞당기려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삶의 모습이 다양하듯 죽음의 이유도 그러하여 모든 자살을 한마디로 뭉뚱그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크게 보자면 이유는 하나 아닐까요. ‘더 살아야 하는 이유를 발견하지 못함.’ 빈곤, 실직, 질병, 배신, 명예 실추…, 그 이유의 직간접적 배경이 무엇이든 간에 말입니다.

 

 

질문되지 않는 질문 : ‘왜 사는가’

 

누구라도 왜 더 살아야 하는지 답할 수 없다면 자살 충동에 시달리게 되지 않을까요? 당신은 왜 사시나요?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대부분의 시간에 이런 질문 자체를 하지 않을 겁니다.

 

인간도 동물이고 강력한 생존 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살률 증가는 사회의 큰 걱정거리이지만, 역사상 어떤 사회에서도 자살률이 무한정 올라갔던 적은 없었습니다. 다만 그렇게 강력한 생존 본능을 거슬러 스스로 의식적으로 자신의 끝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이 또한 인간이라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무엇이길래 본능까지 이기는 것일까요? ‘의미’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어느 순간이라도 삶이 ‘의미 없음’이라는 결론에 이른다면 인간에게 이는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살아야 할 이유

 

그렇다면 자살률을 줄이는 방법은 원론적으로는 간단합니다. 사람들이 살아야 할 이유를 알게 해 주면 됩니다. 근대 이전의 사회에선 굳이 알려 줄 필요가 없었을지도요. 가족, 가문, 전통, 국가, 종교 이데올로기 등의 집단적 의미 체계가 상대적으로 경고했기 때문입니다. 살아야 할 이유를 개인 스스로 찾아야 할 이유 자체가 희박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집단적 상징과 의미 체계, 사회적 이상이나 이데올로기에 대한 절대지 복종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보이는 오늘, 우리는 이제 어디로부터, 누구로부터 삶의 유의미성을 보장받을 수 있을까요?

 

 

내가 찾아야 하는 삶의 이유

 

오늘날 모든 의미와 가치는 각자의 삶 안에서 개별적 승인을 받아야만 하고, 개인은 이러한 과정을 자신의 존재 의미와 당위성을 스스로 증명하고 삶의 목적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니체적 관점에서 보면 이것이야말로 근대인의 탄생 조건입니다.

 

그런데 이 임무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과중’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상대화되어 어떠한 절대적 기준에도 우리를 내어 맡길 수 없는 세상에서, 여러 기준 사이에 어떤 위험한 줄타기가 가능할까요? ‘살아야만 하는 까닭’의 정답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 사회의 자살 대책은 적절하고 충분한가

 

이런 구조적 조건 아래서 사회가 그 구성원들에게 살아야 하는 충분한 이유를 납득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마치 특정 질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를 찾아내서 그 바이러스를 없애거나 예방주사를 맞으면 되는 것처럼, 자살의 이유 발견(?)과 유형화, 그에 기초한 대책 마련에 많은 예산이 사용되지만, 해야만 또는 할 수밖에 없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일지도요.

 

조금 냉소적으로 보자면 자기변명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동시에, 그 책임을 사회에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 싶기도 합니다. 이것은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운명의 주인을 자처한 근대인이 공동으로 나눠 지고 가야 할 짐입니다.

 

 

‘뻔한 일상’을 의미롭게 삶아내는 일의 어려움과 중요함

 

이런 조건에서 ‘뻔한 일상을 의미롭게 살아내는 일’의 중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커졌습니다. 살아야 할 만한 의미가 더는 형이상학적인 차원이나 집단적인 차원에서 지지되기 어렵다면, 각 개인이 일상 안에서 얼마나 성공적으로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가 점점 더 중요한 과제가 되리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삶의 의미가 내가 특정 지위에 도달했을 때, 빛나는 명예를 가지게 되었을 때, 남들이 인정하는 부자가 되었을 때… 주어지는 것이라 그런 삶의 의미는 평생 몇 번이나 느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아니, 영 느낄 수 없을 수도요. 우리가 매일매일 살아야 한다면, 의미도 매일매일 느껴야 살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그 의미는 ‘뻔한 것’에서 찾는 것이 논리적입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 충만함

 

그러니 오늘 우리의 관건은 ‘뻔한 것’에서 의미를 찾는 데 성공할 수 있느냐일 겁니다. 뻔한 일을 뻔하게 하면서 살 만하다, 재미있다 느끼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능력입니다. 이 부분에서 한국 사회는 특히 취약해 보입니다. 이 사회에서는 무엇이 되려고 노력하는 데서 삶의 의미를 구해 온, 궁극적으로는 타인이 인정하는 무엇이 되어야만 의미가 있다고 믿고 인생을 살았을 가능성이 커 보이기 때문입니다. ‘명함’이 자신인 삶 말입니다.

 

이런 가치관을 가진 이들에게 타인의 인정이 따라오지 않고, 가시적 성과물이 없는 일이란 그야말로 ‘무(無)’입니다. 또한 계속해서 무언가를 이뤄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롭지 못할 겁니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삶을 살았던 우리, 늘 무엇이 되어야, 어딘가에 도달해야 했던 우리, 이제 전혀 다른 과제 앞에 서 있네요. 무엇이 되지 않아도, 어떤가에 도달하지 않아도, 오늘 지금 여기서 삶이 충만할 수 있음을 배우는 과제. 살려면 말입니다. ‘무의미의 바다’에 집단으로 무방비 노출되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혼자 만들어 낼 수 있는 의미는 없다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방식의 지지와 연대가 필요해 보입니다. 일차적으로는 개인이 각자 지고 가야 하는 삶의 무게이지만, 개인들이 이 과제를 잘 살아 내느냐는 우리 모두의 관심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 삶의 의미 또한 거기에 걸려 있기도 하니까요.

 

의미는 관계와 소통의 산물. 삶은 각자 살아 내야 하지만, 의미를 혼자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 천선영 율리아나 - 경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20년 10월호, 글 천선영 율리아나, 그림 이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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