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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19: 권철신의 결별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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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9-21 ㅣ No.1292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19) 권철신의 결별 선언


거침없는 이벽의 기세에 이가환 · 이기양 · 권철신이 차례로 무너지다

 

 

이벽이 이가환과 사흘 간 여러 사람이 입회한 가운데 벌인 토론 장면을 그렸다. 탁희성 화백 그림.

 

 

거침없는 이벽의 기세

 

1784년 봄 이벽은 이승훈이 북경에서 잔뜩 가져온 서학서를 건네받고는 골방 하나를 세내어, 그곳에 틀어박혀 밤낮 천주교 교리 연구에 잠심했다. 이후 그는 이가환과 이기양, 권철신과 차례로 만나 이른바 도장 깨기에 돌입했다. 특히 이가환과의 논쟁은 사흘간이나 계속되었다. 그 자리에는 두 사람의 벗들과 호사가의 무리가 함께 참관한 상태였다.

 

달레는 「조선천주교회사」에서 이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가환은 승리를 확신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하나하나 논적(論敵)에게 지적되고 조목조목 반박되었다. 이벽은 세밀한 점까지 추궁하여 이가환의 논리를 모두 파괴하고 먼지로 만들어 버렸다. 이벽의 말은 분명하고 똑똑해서 사방에 빛을 던져주고 있었다. 그의 논증은 태양같이 빛났고, 바람처럼 휘몰아쳤으며, 칼날처럼 끊어냈다. 이는 순진하고 정직한 사람들을 온통 사로잡았다.”

 

장장 사흘에 걸친 토론은 이벽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 자타가 공인한 당대 최고의 천재 이가환이 이벽에게 깨졌다. 이 대목에서 달레는 ‘조선의 전기에 의하면’이라 하여, 이 대목이 다산의 「조선복음전래사」에 바탕을 둔 인용임을 분명히 했다. 묘사의 세밀도로 보아 다산도 그 토론의 현장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상대였던 이기양도 거침없는 이벽의 논리 앞에 아무 반박을 못 한 채 입을 다물었다. 1784년 9월, 이벽은 세 번째로 양근의 감호를 찾았다. 거기서 만난 권철신 형제는 말문을 닫은 앞의 두 사람과 달리 이벽의 진리를 받아들였다. 이 대목에서 달레는 “50세쯤 되는 맏이 권철신은 중국 경서의 철학과 윤리를 연구하는 데 일생을 보낸지라 처음에는 망설였다. 그는 복음의 광명을 지향하지는 않았지만 자기 명망을 높여 준 거창한 일의 모든 결과를 한순간에 잃을 결심을 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얼마 뒤에야 천주교에 입교하여 암브로시오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즉각 신앙을 받아들인 셋째 권일신과 달리, 맏이인 권철신은 신앙을 바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고 달레는 썼다. 그렇다면 이상하다. 홍유한을 따라가려 했던 1776년의 남행 계획은 무엇이고, 1779년에 주어사 강학회에서 이벽과 함께 서학 교리서를 공부한 것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권철신은 이미 서학의 교리서를 익히 알고 있었다. 달레의 위 진술은 학문적 차원의 서학에 대한 관심이 이 방문을 계기로 신앙적 차원으로 넘어갔다는 뜻이다. 그가 유학의 모든 가르침을 포기한 채 서학의 바다에 풍덩 뛰어드는 것을 처음엔 망설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침묵으로 더 큰 죄에 빠지지 않으렵니다

 

이벽에 의해 이가환, 이기양, 권철신이 차례로 무너졌다는 소식은 좁은 남인들의 관계망 속에서 금세 파다하게 퍼졌다. 가뜩이나 애가 타던 안정복은 마침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에 권철신에게 편지를 썼다. 1784년 11월 22일에 보낸 편지가 「순암집」권 6에 실려 있다. 「답권기명서(答權旣明書)」라 했으니, 권철신의 편지가 있었고, 이에 대해 안정복이 답장한 내용이었다. 편지 앞쪽에 권철신이 보냈다는 글의 한 대목이 실려 있다. 사연이 묘했다.

 

“앞서 경전에 대해 담론하고 예(禮)에 대해 논하신, 구름이 스러지고 안개가 흩어지는 듯한 가르침을 받자옵고, 저도 몰래 마음에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전날의 뒤얽힌 문장의 뜻은 실제로 얻은 바가 없어 큰 죄를 지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침저녁으로 허물을 구하기에도 겨를이 없거늘, 어찌 감히 다시 논하여 설명함이 있겠습니까? 이것으로 이제껏 어지러운 견해를 차록(箚錄)한 것은 한꺼번에 없애 버리고, 죽기 전까지는 다만 침묵으로 스스로를 닦아 큰 악에 빠지지 않는 것이 구경(究竟)의 방법이 될 것 같군요.”

 

토론을 계속해 보았자 생각이 다르니 만날 지점이 없다. 자꾸 토를 다는 것은 어른에 대해 죄를 짓는 것이라, 이제 다시는 경학과 예설로는 토론하지 않겠다. 지금까지 공부하며 메모했던 것을 다 없애 버리고, 이제 다만 침묵하겠다. 그것이 더 큰 죄를 짓지 않는 마지막 방법일 것 같다. 말은 온건했지만, 결별 통보와 다름이 없었다. 이제 더 이상의 학문적 대화는 의미가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안정복은 권철신의 편지에서 섬뜩함을 느꼈다.

 

놀란 안정복은 답장에서 “그대의 편지를 받고 보니, 전날의 규모와 크게 달라져서 자못 이포새(伊蒲塞)의 기미마저 띄고 있더군. 공은 어찌하여 이 같은 말을 하는 겐가?”

 

편지 속의 이포새는 우파새(優婆塞)로 계율을 받은 재가 불자를 일컫는 불교 용어다. 나아가 편지 끝에는 “이것이 어찌 소림사에서 면벽하며 아침저녁으로 아미타불을 염송하면서 전날의 허물을 참회하고, 부처님 앞에서 간절히 천당에서 태어나고 지옥에 떨어짐을 면하기를 비는 뜻과 다르겠는가? 그대가 이런 말을 하는 연유를 모르겠네.” 안정복은 ‘이제 그대가 대놓고 천주학을 믿겠다고 말하는 것인가?’라는 추궁을 이렇게 돌려서 말했다.

 

 

이같은 작태를 참을 수 없네

 

마음이 급해진 안정복은 권철신의 답장을 기다리지 못하고, 11일 뒤인 12월 3일에 편지 한 통을 더 썼다. 이 편지에서는 돌려 말하는 대신 대놓고 속마음을 꺼냈다. 얼마 전 영남 유생이 전하는 말을 듣고, 또 이기양이 자신에게 와서 「칠극」을 빌려 가길래 의아했던 이야기를 한 뒤, “그 뒤로 돌아돌아 듣자니 양학(洋學)이 크게 일어나, 아무개와 아무개가 우두머리가 되고 아무개와 아무개는 그다음이며, 그 나머지 이를 따라 교화된 자가 얼마인지도 모른다고 하더군”이라 하고, 이어서 천주학이 어째서 이단이며, 불교와 별 차이가 없는가에 대해 길게 설명했다.

 

편지 끝의 한 단락은 이렇다. “이제 들으니 이벽이 많은 책을 싸들고 그대에게 가자, 그대가 이렇게 말했다지. ‘틀림없이 볼만한 것이 있을 텐데, 천주께서 세상을 구원하신 마음을 어찌 혼자만 비밀스레 보고 홀로 행하려 하는 겐가? 옛사람은 저 혼자만 군자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했으니, 빌려 보여주기를 바라네.’ 이벽은 내가 평생 아끼고 무겁게 여겼는데, 지금은 이곳을 지나가면서도 얼굴조차 비치지 않으니 그 연유를 모르겠군. 어찌 그 도가 같지 않아서 서로 꾀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천주가 사람을 이끌어 선하게 하려는 뜻이 반드시 이같지는 않을 것일세.”

 

하지만 권철신에게서는 끝내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 참지 못한 안정복은 1784년 12월 14일에 다시 세 번째로 장문의 편지를 썼다. 이 편지는 몹시 간추린 상태로 「벽위편」에 실려있다. 「순암집」에 실린 원본은 이것의 몇 배 분량이다. 이 글에서 안정복은 서학이 본질적으로 불교와 다르지 않다는 점을 되풀이해 말하고, “이제 들으니 아무개와 아무개의 무리가 서로 약속을 맺어 신학(新學)의 주장을 익혀 공부하며 오가는 말들이 낭자하다 하더군. 지난번 또 들으니, 문의(文義)에서 온 한글 편지 가운데 그 집안의 두 소년이 모두 이 공부를 한다며 칭찬해 마지않았다고 하니 이 어찌 크게 놀랄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 글의 초고에는 ‘아무개 아무개’의 자리에 이가환, 정약전, 이승훈, 이벽 등 네 사람의 자(字)가 실명으로 적혀 있었다고 「벽위편」은 적고 있다.

 

 

 

편지 속에 나오는 권진은 불행히도 2년 뒤인 1786년에 2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순암집」권 23에 안정복이 그를 위해 써준 묘지명이 실려 있다. 그 가운데, “수년 이래로 이른바 천주학이란 것이 나와 세상에서 물결에 쏠리듯 많이들 따랐다. 군은 처음에는 의심하다가 끝내 그것이 그른 줄을 깨달아, 그의 벗 김원성 군과 더불어 힘껏 정론을 붙들어 조금도 굽히지 않아, 일찍이 물들어 더럽혀지지 않았다”고 쓴 대목이 있다.

 

김원성은 권철신의 조카사위였고, 앞서 본 「감호창수첩」에도 그의 시가 실려 있는데, 이 시점에는 이미 반서학의 노선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남인 내부의 분화와 갈등은 어느덧 최고조로 치닫고 있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9월 20일,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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