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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성미술 보물을 찾아서9: 김세중의 복녀 김 골롬바와 아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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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2-24 ㅣ No.611

[숨은 성미술 보물을 찾아서] (9) 김세중의 ‘복녀 김 골롬바와 아녜스’


화려한 묘사보다 단순 명료한 상징으로 종교적 의미 강조

 

 

- 1954년 성미술 전람회에 출품한 ‘복녀 김 골롬바와 아녜스’ 옆에 선 김세중 작가.

 

 

작가와 작품이 함께 찍힌 유일한 사진

 

1954년 성미술 전람회 당시 사진 중 작가가 작품과 함께 찍은 사진이 유일하게 한 장 남아 있다. 사진 속 인물은 줄무늬 더블 정장 차림에 과감한 문양의 넥타이로 멋을 냈다. 절도 있는 자세에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이 멋진 젊은이는 바로 조각가 김세중(프란치스코, 1928~1986)이다.

 

성미술 전람회 출품작 ‘복녀 김 골롬바와 아녜스’ 옆에서 포즈를 취한 이 사진은 26세 때 모습으로 그는 당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이번에 소개할 ‘복녀 김 골롬바와 아녜스’는 김세중의 가장 대표적인 종교 조각 작품으로 현재 원작은 김세중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1954년 성미술 전람회에는 김종영의 ‘마돈나’와 김세중의 ‘복녀 김 골롬바와 아녜스’, 장기은의 ‘성모상’ 등 조각 작품 3점이 출품됐다. 김세중의 작품은 부조, 김종영과 장기은의 작품은 환조로, 세 작품 모두 석고로 제작됐는데 사실적인 세부 묘사에 치중하기보다는 추상적 표현으로 완성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3점뿐인 조각 출품작 중 아쉽게도 원작의 실물이 남아 있는 것은 김세중의 작품뿐이다.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한 김세중은 고등학교 재학 시절 일본어로 번역된 릴케의 「로댕 어록」을 읽고 조각에 매료돼 1946년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조소과에 1회로 입학했다. 김세중은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청년’으로 특선 입상하며 학생 시절 화려하게 미술계에 데뷔했다. 1950년 대학을 졸업하고 종교미술을 연구하기 위해 프랑스 유학을 준비했지만, 6ㆍ25 전쟁 발발로 꿈을 접었다. 이후 1952년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2년 뒤 26세의 나이로 모교의 전임강사가 됐다. 이듬해에는 피난 중 마산 성지여고 미술교사로 재직하던 때에 만난 시인 김남조(마리아 막달레나)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김세중의 작품에서 주요 부분을 차지하는 분야는 종교 작품이다. 그는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후반까지 기념비상 제작 시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기간을 종교 작품을 제작하는 데 쏟았다. 이렇게 일생에 걸쳐 종교 조각을 탐구한 데는 장발의 영향의 컸다. 그는 김종영과 윤승욱에게 조각을 배웠지만, 그의 종교미술에 대한 관심은 스승 장발에게서 비롯됐다.

 

김세중은 대학 재학시절 동양화를 전공했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안혜택 수녀와 장발을 통해 가톨릭과 인연을 맺게 됐다. 부모가 불교 신자였던 그에게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이는 일이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장발의 깊은 신앙심에 감화돼 그를 대부로 모시고 가톨릭에 입교했다.

 

한국 가톨릭 미술에서 김세중의 역할은 지대했다. 그는 서울 혜화동성당의 ‘최후의 심판도’(1960), 절두산순교성지  성당의 ‘순교자상’(1960)을 비롯해 많은 종교 조각 작품을 제작했다. 1984년에는 바티칸 미술관, 프랑스 외무부와 문화부, 독일 쾰른대교구의 협조를 받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국제종교미술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 가톨릭 미술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9년 제4회 가톨릭 미술상 특별상을 받았다.

 

김세중은 종교 조각뿐 아니라 서울 광화문 광장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과 국회의사당 앞의 ‘애국상’을 비롯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기념비 조각들을 남겼다. 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학장과 사단법인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등을 역임하면서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2세대 조각가로 활약했다.

 

김세중의 ‘복녀 김 골롬바와 아녜스’. 그는 작품 주제를 명료하게 전달하기 위해 세부 묘사를 생략하고 최소한의 상징만을 사용해 종교적 의미를 강조했다.

 

 

작가 해석에 따라 표현된 두 자매

 

순교한 두 자매를 주제로 한 ‘복녀 김 골롬바와 아녜스’는 사실적인 표현에서 과감히 탈피해 작가의 해석에 따라 완성된 작품이다. 당시 작업에 함께했던 조각가 최의순의 증언으로는 이 작품은 본디 환조로 계획됐다가 장발의 권유에 따라 부조로 제작됐다고 한다.

 

한복 치마저고리 차림의 김효임(골룸바)과 김효주(아녜스) 자매의 모습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주제 면에서 장발의 1925년 작품 ‘김 골롬바 아녜스 자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표현에서는 매우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사실적이고 정적인 표현으로 이루어진 장발의 작품과 달리 김세중은 작품의 주제를 보다 명료하게 전달하기 위해 세부 묘사는 과감하게 생략하고 최소한의 상징만을 사용해 작품의 종교적 의미를 강조하고자 했다.

 

김효임과 김효주 자매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 후 복자품에 오른 뒤 1984년  시성됐다. 김세중의 이 작품이 제작된 1954년은 시성식 이전으로 자매가 복자였기 때문에 당시 제목을 ‘복녀 김골롬바와 아녜스’라고 했다. 현재는 ‘김 골롬바ㆍ아녜스 자매’로 정정된 상태다.

 

작품 속 자매의 몸은 정면을 향하고 있지만, 얼굴은 옆모습을 보이며 각각 하늘과 땅을 응시하고 있다. 두 인물 중 누가 김효임이고 김효주인지는 알기 어려우나 십자가와 빨마 가지로 신앙의 승리를 상징하고 있다.

 

김세중의 ‘복녀 김골롬바와 아녜스’는 인체를 마치 하나의 기둥과 같이 단순하게 처리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극도로 단순화된 이목구비와 선 몇 개만으로 나타낸 옷 주름 등에서 과감한 생략을 도입한 작가의 추상적 표현 방식을 살펴볼 수 있다. 이는 종교적 주제를 형상 자체로 표현하기보다는 구조화된 상징으로 제시하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성상(聖像)에서의 이와 같은 표현은 그리스도교 미술의 역사가 짧은 당시 우리나라 상황에 비추어보았을 때 매우 새로운 시도로 평가될 수 있다.

 

석고로 제작된 이 작품의 원형은 2017년 등록문화재 제690호로 지정돼 김세중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김세중의 ‘복녀 김 골롬바와 아녜스’는 1983년 ‘두 여인’ 이라는 작품으로 재해석돼 제작됐다. 작품 속 두 여인은 1954년 작에서와 같이 십자가와 빨마 가지를 들고 있지만, 인체의 비례가 훨씬 길어지고 간략화됐다.

 

김세중은 1986년 58세의 이른 나이에 선종했지만, 그가 남긴 작품은 1000여 점에 이른다. 이는 그가 얼마나 쉼 없이 작업에 매진했던 작가였는지 알게 해준다. 안타까운 것은 그가 조각가로서의 공적인 소임을 다하고 개인 작업에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생전에 개인전을 한 번도 열지 못한 작가의 이력에서 이러한 아쉬움이 더욱 깊게 전해져 온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2월 24일, 정수경 가타리나(인천가톨릭대학교 대학원 그리스도교미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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