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7일 (수)
(백)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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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성 아우구스티노의 행복으로 가는 길: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마태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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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04 ㅣ No.489

[성 아우구스티노의 행복으로 가는 길]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마태 5,4)

 

 

우리는 슬플 때 눈물을 흘립니다. 기쁨의 눈물도 있지만, 보통 눈물은 슬픔을 드러냅니다. 왜 슬퍼할까요? 회심의 첫 단계에서 내가 누구인지 알았는데도, 곧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하느님은 영원한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도,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는 나를 보기에 슬퍼합니다.

 

 

슬퍼하는 이들은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방황하던 젊은 시절에 “주님, 제게 정결을 주소서. 그러나 지금 당장은 주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께 가야 함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그 일이 오늘 나에게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현세의 사물에 대한 사랑에 매여 있으면서 천상 고향을 잊은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성경이 가르치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사랑하기에 그 사람 안에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슬퍼합니다. 이렇게 현재 자기 모습을 다시 한 번 깨닫고 인정하며, 천상 고향을 잊은 것을 슬퍼하는 이들에게는 성령의 위로가 주어집니다.

 

이 단계에서는 ‘지식(scientia)’의 은사가 주어집니다. 이 은사는 하느님의 뜻을 더 잘 알게 하여 성경의 권위를 믿고 승복하면서 자신을 통탄케 합니다. 일반적 지식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알고 있다는 사실로 교만하게 만들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주시는 지식은 인간을 교만하게 만들기는커녕 자신에 대해 탄식하게 합니다. 그렇기에 지식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간곡한 기도로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여 위로를 받고 절망으로 무너지지 않게 됩니다. 그 위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주어집니다.

 

 

향유해야 할 하느님과 사용해야 할 세상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우리가 이 세상 사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말하며, ‘향유’와 ‘사용’의 개념을 준수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향유는 대상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고, 사용은 대상을 어떤 용도로 쓰는 것입니다. 때문에 향유의 대상은 하느님뿐이며, 다른 것은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나그네여서 고향이 아니고는 행복하게 살 수 없다면, 또 나그네살이 때문에 가련한 신세요 그 비참을 끝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절원(切願)한다면, 우리가 사용하기로 되어 있는 지상이나 바다의 탈 것은 우리가 향유하기로 되어 있는 고향에 도달하기 위해서 이용할 필요가 있다. 만일이라도 행로의 아름다운 경치라든가 탈것의 움직임이 우리를 유쾌하게 한다 하여 우리가 사용해야 하는 것을 향유하기로 변심한다면, 여행을 빨리 끝내기도 싫어지고 그릇된 감미에 빠져 고향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 그러므로 이 사멸할 인생에서 주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는 우리가 행복한 고향으로 돌아가기 원하면, 이 세상을 사용해야지 향유하면 안 된다.”

 

이 세상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곳은 내가 돌아가야 할 집보다 아름답지 않습니다. 집에 가려고 버스를 탔는데, 좌석이 편안하다고 끝까지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을까요? 집에 가까워지면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에서 내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 좌석의 안락함과 편안함을 더 사랑한다면 끝까지 내릴 수가 없지요. 이것을 혼돈해서는 안 됩니다. 집에 돌아가는 것이 향유해야 할 목적이고, 버스는 목적지인 집에 가기 위해 사용되는 도구일 뿐인데, 버스를 향유한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잊어버리게 됩니다. 결국 천상 고향을 향해 걸어가는 그리스도인은, 하느님만이 자신의 고향이요 안식처이기에 세상의 것에 매여 있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세상의 행복을 모두 피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 세상이 주는 행복과 하느님을 소유하는 참된 행복을 혼돈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유한한 재화에 굴복하여 참된 행복, 최고의 선(善)을 잃어버린다면 ‘지식’은 그것에 대해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곧 자신이 어떠한 악행에 휘말려 있는지 깨달아 그 불행에 대해 슬퍼하게 합니다. 지금껏 그러한 악행을 선하고 필요한 것이라고 원한 것에 대해, 그리고 다시 우리가 사멸할 조건에 있는 사람임을 깨달아 흘리는 눈물입니다. 뉘우쳐서 눈물을 흘리지만 용서로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눈물은 우리 죄를 더욱 슬퍼하게 하고, 세상의 죄에 대해 자비를 가지게 하면서 우리를 치유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막 교부들은 눈물을 은총이라고 강조하면서, 이 은총을 위해 꾸준히 기도하라고 권고하였습니다. 바로 여기에 탄식의 기도가 자리합니다. 사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에게 기도는 영적 상승의 한 단계에만 유보된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 삶의 영혼입니다.

 

슬퍼하는 이들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고 청원합니다. 이는 땅에 속하는 육신과 하늘에 속하는 영이 조화를 이루어 더는 울지 않게 되는, 종국의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로마 7,23-24)

 

그러므로 이 청원은 하늘에서 하느님께 온전히 일치되고, 하느님 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천사들에게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뜻이, 땅 위에 있는 성인들에게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또 의로운 이들과 거룩한 이들뿐 아니라 죄인들에게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 그들이 회심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 변종찬 신부는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교부학과 고대 · 중세 교회사를 가르치면서 학생들과 함께 하늘을 바라보며 산다. 이 글은 ‘하느님께 오르는 사다리 - 진복팔단’이라는 제목의 강의 내용을 편집부에서 재구성한 것이다.

 

[성서와 함께, 2014년 7월호(통권 460호), 변종찬 마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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