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 평신도 교회사: 조선교회 주역이 되었던 중인 출신 신자들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4-14 ㅣ No.963

한국 평신도 교회사 (3) 조선교회 주역이 되었던 중인 출신 신자들

 

 

한국천주교 창설기에 양반들이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적인 일은 중인들의 도움이 컸다. 왼쪽부터 중인 출신 신자인 최인길 마티아, 최창현 요한, 지황 사바.(사진출처 CBCK)

 

 

주문모 신부는 조선에 들어온 첫 선교사제로서 6년간의 사목생활에서 4,000명이던 신자를 10,000명으로 증가시켰다. 그는 1794년 12월 24일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입국했다. 계동의 최인길 마티아 집에서 조선말을 배우면서, 부활절을 맞이하여 세례와 보례(평신도에 의해 약식으로 받은 예식을 보충하여 주는 예식)를 주었고, 한문으로 글을 써가며 고해성사도 주었고 부활성야미사를 봉헌하였다. 이로써 이 땅에 처음으로 정식 성사와 미사가 집전되기에 이르렀다.

 

그해 6월까지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적응되어 갔는데, 신입교우였지만 신앙이 굳지 못한 진사進士 한영익(韓永益)이라는 인물이 중국인 신부가 입국한 것을 고발하였다. 6월 27일 좌포도대장 조규진(趙奎鎭)이 주 신부를 체포하러 최인길의 집으로 왔다. 신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재빨리 알아채고, 집주인 최인길만 남겨두고 신부를 피신시켰다. “중국인은 어디 있는가?” “나요.” 역관 출신인 최인길은 침착하게 대답하였고, 얼마 후 들통이 났다. 그는 그날 성직자를 모셔들인 두 사람, 윤유일·지황과 함께 좌포도청에 붙들렸다. 심문이 이어졌고, 다음 날 6월 28일 매를 맞다가 세 사람 모두 순교하였고, 시신은 강에 던져졌다. 천주교회사에서는 이를 을묘포청실포사건 혹은 북산사건이라고 부른다. 전자는 ‘을묘년인 1795년 포도청이 체포에 실패한 사건’이라는 뜻에서 붙여졌고, 후자는 ‘북산의 최인길의 집’에서 체포가 이루어졌다는 장소적 개념에서 붙여졌다.

 

윤유일의 밀사 활동은 이미 앞서 언급하였다. 지황은 단양(丹陽) 고을 출신으로 아버지의 뒤를 따라 악사로 활동하였으며, 한양에 살고 있었다. 천주교를 알고 나서 이를 즉시 실천하기를 원했으며 1794년 북경 여행길에 윤유일과 동행하였고, 주 신부를 무사히 입국시키는 데 동참했다. 최인길은 역관으로 한양에 살고 있었으며, 주 신부의 거처를 준비하는 일이 맡겨지자 가족과 함께 한양 북쪽인 계동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윤지충, 권상연과 더불어 초기 순교자 다섯 분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후 주문모 신부는 주로 강완숙 골롬바의 집에 숨어 살았다. 조선의 관습 가운데 양반 여인이 사는 집에는 함부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피신처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이 시기 총회장으로 불렸던 중인 최창현 요한을 꼭 만나야 한다.

 

중인中人은 말 그대로 양반兩班에는 미치지 못하고 양인良人보다는 우위에 있는 중간 신분층을 말한다. 좁은 의미의 중인은 서울 중심가에 살던 역관譯官, 의관醫官, 산관算官, 율관律官, 음양관陰陽官, 사자관寫字官, 화원畵員, 역관歷官 등의 기술관을 통칭한다. 오늘날로 말하면 가장 좋은 직업, 엘리트 그룹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신분사회인 조선에서는 양반보다는 밑에 있었다. 넓은 의미의 중인은 기술관뿐 아니라 서울 밖 행정실무자인 향리鄕吏, 서리胥吏, 서얼庶孼, 토관土官, 장교將校, 역리驛吏, 우리郵吏, 목자牧子 등을 통칭하기도 한다. 한국천주교 창설기에 양반들이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적인 일은 중인들의 도움이 컸다. 성직자 영입운동에서 드러났듯 북경에 오가는 비용, 밀사의 역할, 조선에서의 생활 등 실무적인 일은 오히려 중인들이 해냈다.

 

복자 최창현 요한은 뛰어난 중국어 실력으로 <성경직해> 등 많은 한문서적을 한글로 번역했다.(그가 번역한 <성경직해>는 활판본으로 간행되기까지 100여 년 동안 필사본으로 신자들 손에 전해지며 신앙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가운데 최창현은 이벽을 통해 천주교를 배워 세례공동체에 합류하였는데, 그의 중국어 실력으로 <성경직해>등 많은 한문서적을 한글로 번역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베껴 쓰는 솜씨가 뛰어나서 천주교 서적을 구하려면 최창현에게 말만 하면 되었다고 교회의 기록은 전하고 있다. 순교자 최인길, 최필공과 친척이고 기해박해(1839) 순교자 최창흡 성인의 이복형이 된다. 주문모 신부는 그의 신앙과 덕행을 보고 조선교회의 총회장으로 임명한 듯하다.

 

이 시기 교회의 평신도 회장의 역할은 오늘날보다 폭이 넓었다. 신자 공동체 지도자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교우와 사제 사이의 중계를 맡았으며, 사제가 없을 때는 그를 대신하여 교회의 일을 담당하였다. 예비신자 교육, 유아세례, 혼인 예식 등 오늘날 부제의 역할 이상을 해야 했다. 여기에 재산 관리 및 판공 준비, 대세, 병자 돌봄 및 장례까지 신자들의 신앙생활 전체를 돌보아야 했다. 본래 회장을 지칭하는 “카테키스타(Catechista)”는 교리교사를 뜻하였는데, 선교지에서 그 역할이 확대되어 ‘회장會長’으로 불리었다. 조선 전 지역에 사제가 주문모 신부 한 명만 있었으니 회장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겠는가? 따라서 주 신부는 명도회장에 정약종, 여성회장에 강완숙, 총회장에 최창현을 임명하였던 것이다.

 

황사영 <백서>가 전하는 최창현의 모습을 들어보자.

 

“총회장 최 요한은 중인입니다. 을묘년(1795)에 순교한 최 마티아의 집안 조카로, 집안 대대로 참된 가르침이 전해져왔는데, 성교(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자 남보다 먼저 입교하여 몸가짐을 편안히 삼가고 언행을 공정히 닦으며 20년을 한결같이 하였습니다. … 마음이 몹시 근심스럽고 답답할 때에는 그의 얼굴을 한 번만 보아도 자기가 당면하고 있는 일이 그다지 큰일이 아니요 어려운 일도 아님을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다시 몇 마디 말을 더 들으면 가슴이 시원하게 활짝 열렸으며, 도리 강론도 자세하고 분명하여 깊은 맛이 있었습니다. …순명 겸손함은 자연스럽게 나왔으며, 남보다 뛰어나거나 다른 점도 없었지만 흠잡을 행동도 없었습니다. 덕망이 교우들 가운데 제일 높았으므로 그를 사랑하고 신뢰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최창현은 1801년 신유박해가 발발하자 일단 몸을 피했다가, 밀고자 김여삼(金汝三)으로 인하여 체포되었다. 문초 과정에서 나약한 면을 보일 때도 있었지만, 주문모 신부 및 신자들을 밀고하지 않고 사형판결을 받기에 이르렀다. 1801년 4월 8일 서소문 밖 네거리 사형터에서 신유박해의 공식적인 첫 참수형이 집행되었는데, 이승훈 베드로, 최필공 토마스, 최창현 요한,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홍낙민 루카, 정약종 아우구스티노가 그 대상이었다.

 

지금까지 소개한 주요 평신도의 이름을 다시 한 번 새겨본다. 이승훈 베드로와 함께 첫 세례공동체를 이루도록 그 여명을 밝혀주었던 이벽 세례자 요한, 중인 신분과 자신의 재력으로 기꺼이 명례방의 넓은 방을 집회 장소로 내어주었던 김범우 토마스, 공식적인 첫 순교자 그룹으로 천주교의 가르침에 따라 제사의 허례허식을 거부했던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주문모 신부를 모셔오고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였던 윤유일 바오로, 지황 사바, 최인길 마티아 그리고 총회장으로서 몸소 실천하는 신앙인이요 덕행을 보여주었던 최창현 요한. 이들은 양반, 중인, 상인, 천민의 신분을 극복하고 부족한 이들을 한글로 깨우치려 각종 서적을 번역하고, 어려운 이들을 도우려는 신앙의 공동체를 꿈꾸었다. 다음 시간에는 주문모 신부 시대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살펴보고자 한다.

 

 

 

* 조한건 - 서울교구 소속 사제, 한국교회사연구소 부소장으로 한국천주교회사를 연구하고 있다.

 

[월간 생활성서, 2018년 4월호, 조한건 신부]



1,734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