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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협ㅣ사목회

지금 여기 평신도: 50년 역사로 보는 한국평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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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3-23 ㅣ No.64

[지금 여기 평신도] 50년 역사로 보는 한국평협

 

 

창립의 발자취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이하 한국평협) 창립의 직접적 계기는 1967년 2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구현하고자 설립된 교황청 평신도평의회의 차관 로즈마리 골디(Rosemary Goldie) 여사의 한국 교회 방문이었다. 그때 평신도 단체 대표들이 모여 전국평신도사도직단체결성준비위원회를 구성한다. 거기서 마련된 설립 준비안이 주교회의 1968년 5월 31일 임시 총회에서 승인된다.

 

마침내 1968년 7월 23일 담당 주교(황민성 주교)가 있는 대전교구 주교좌 대흥동성당 강당에서 ‘한국가톨릭평신도사도직중앙협의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평신도 참석자는 당시 전국 열두 개 교구 중 열한 개 교구(원주교구 불참)와 여덟 개 단체의 대표들이었다. 이들 단체는 노동청년회(JOC), 언론인회, 여성단체협의회, 레지오마리애(광주), 의사회(서울 · 대구), 지성인회(부산), 교리연구회였다.

 

주교회의는 1968년 추계 정기 총회에서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단체전국협의회’(이하 전국평협)로 명칭을 바꾸어 창립을 인준하고 교황청 평신도평의회에 보고한다. 이로써 한국평협의 전신인 전국평협의 창립은 마무리된다.

 

 

구조적 난관과 명칭 변경

 

‘전국평협’은 구조적으로 협의체이다. 그런데 그 지체들(교구평협)은 없고 머리(전국평협)만 있는 ‘기형’이라는 난관에 부딪친다. 창립 당시 교구평협은 대전평협(1966년 설립)뿐이었고 1975년까지도 서울평협(1968년 설립), 마산평협과 수원평협(각 1969년 설립)에 그쳤다. 그 외 교구들은 사목회, 신자회 등 구조와 명칭이 제각각이었다.

 

그리하여 1975년 9월 ‘전국평협’은 주교회의에 평협의 구조와 명칭의 통일을 건의한다. 주교회의 승인으로 명칭은 ‘평신도사도직협의회’(평협)로 통일되고 전국평협 명칭에서 ‘단체’도 삭제된다. 그러다 1978년 주교회의 상임위원회가 전국 단체의 명칭과 운영 방법을 폐지함에 따라 명칭에서 ‘전국’이 삭제되어 약칭 ‘전국평협’은 ‘한국평협’으로 바뀐다.

 

1977년에 청주평협과 안동평협, 1979년에 인천평협과 제주평협, 1982년에 대구평단협, 1990년에 군종평협이 출범하여 구조적 ‘기형’의 문제는 점차 해결되었으나 명칭의 통일은 여전히 미완이었다. 2010년 주교회의 상임위원회는 모든 평협의 명칭을 최초 인준대로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평단협)로 통일하도록 했다. 그러나 현재 다섯 개 교구만 그에 따르고 한국평협은 2011년 정기 총회에서 회칙 개정으로 명칭에 ‘단체’를 넣었지만 약칭은 종전대로 ‘평협’으로 규정하고 있다.

 

 

초기 10여 년의 활동

 

전국평협의 첫 활동은 1968년 10월 3일부터 열흘간의 병인년 순교자 24위 시복 경축 행사였다. 1971년 9월부터 벌인 김대건 신부 시성 촉진 서명 운동은 1972년 서울평협의 활동 정지로 중단되었다가 1975년 9월 활동 재개로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시성 운동으로 재점화되었다.

 

세상을 향한 첫 활동은 1970년 9월 6일 ‘주교단의 모자 보건법안 반대 성명 지지’란 제목의 성명서 발표였다. 이어 사회의 부정부패와 도덕 윤리의 타락을 없애는 데 앞장설 것을 다짐하는 건의문을 주교회의에 제출한다. 1976년 삼일절 서울 명동성당 ‘민주 구국 선언’의 서명 인사들과 성직자들의 구속 사태로 1977년 정기 총회에서 시국 선언 4개항을 결의한다. 1978-1979년에는 농민을 살리고 교회의 탄압 중지를 촉구하는 대정부 건의문 발표로 유신 독재 체제와 맞선다.

 


1980-1990년대 활동

 

1980년대에도 사회 정의 실현 활동은 이어졌다. 1982년에 ‘신뢰 회복 운동’을 펴면서 ‘가톨릭 대상’을 제정하여 해마다 사랑, 정의, 문화 분야별로 시상하고 있다. 1987년에는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야기된 불의와 부정, 인간 존엄성 말살에 항거하는 성명서 발표와 특별 기도회 개최로 신군부 독재에 맞섰다.

 

1990년 9월부터 ‘내 탓이오’ 운동을 펼치고, 1992년 8월 제3차 동아시아 평신도 회의와 1994년 9월 제1차 아시아 평신도 회의를 한국에 유치하여 개최한다. 국민 경제 위기에도 침묵하지 않았다. 1992년 6월부터 ‘우리 상품 쓰기 운동’과 ‘자원 재활용 운동’ 전개, 1993년 12월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에 따른 쌀 시장 개방 반대 특별 기도회와 성명서 발표, 1994년 4월부터 주교회의 결정에 따른 ‘우리 농촌 살리기 운동’이 이어졌다. 1997년 외환 위기 때는 경제 살리기 특별 기도회, 경제 난국 극복 평신도 선언문 발표, 실직자를 위한 사랑 나누기 운동 등을 전개했다.

 

1999년 9-10월에는 ‘2000년 대희년 맞이’ 여러 행사를 개최했다. 특히 10월 21일 서울 올림픽 공원에서 열린 평신도 대회는 전국 교구의 3500여 신자들이 참석한 최대 규모의 행사였다.

 

 

2000년 이후 활동

 

사회 정화 운동과 가정 · 생명에 활동의 초점을 맞춰 2001-2003년 ‘똑바로 운동, 2004-2005년 아름다운 가정, 아름다운 세상을 위한 ‘아가 운동’을 펼친다. 반생명적 ‘생명윤리법’에 대한 항의도 이어졌다. 이 법이 통과되자 2005년 12월 국회 의원들과 관계 부처에 생명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고, 2008년 8월에는 이 법의 개악에 따른 재개정 촉구 서한을 국회의 천주교 신자 의원들에게 보냈다.

 

2010년부터 한국평협의 활동은 교회 안으로 집중된다. 2010년 6월 26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한국 가톨릭 평신도 대회’를 열고 이 땅의 복음화에 앞장설 것을 다짐하는 대회 선언문을 발표한다. 이 대회는 같은 해 8월 31일부터 9월 5일까지 교황청 평신도평의회 주최로 서울에서 열리는 ‘아시아 평신도 대회’를 앞둔 사전 행사였다.

 

2011년에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증거자 최양업 신부의 시복 시성 기도 운동에 힘을 모았다. 2011년 12월 23일에는 한국평협 대표단이 교황청 시성성을 방문하여 기도 운동 내용을 전달하고 교구평협과 기도 운동을 이어갔다.

 

2012-2014년에는 보편 교회와의 일치 활동이 돋보였다. 2012년 10월 11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50주년 심포지엄, 11월 10일 ‘신앙의 해’ 평신도 대회, 2013년 11월 8일 주교회의 평신도사도직위원회와 함께한 ‘신앙의 해 결산 심포지엄’ 등이 있었다. 2014년 8월 16일 음성 꽃동네 영성원 성당에서 한국평협과 교구평협 임원, 회원 단체장들은 프란치스코 교황과 만나 그분의 가르침을 들었다.

 

2014년 한국평협은 국민 화합을 위한 ‘답게 살겠습니다’ 운동을 발의하고 11월 13일 이에 동참한 7대 종단 간담회를 주관한다. 그 뒤 2018년 현재까지 한국평협의 활동은 ‘그리스도인답게 살겠습니다’ 운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은 한국평협은 주교회의에 ‘평신도 희년’ 선포를 건의하여 2017년 11월 19일 평신도 주일부터 2018년 11월 18일 평신도 주일까지 한국 교회의 온 평신도들을 ‘평신도 희년’의 삶으로 초대하고 있다.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 한국평협 50년의 역사에서도 명암은 엇갈린다. 한국평협의 창립을 계기로 지내게 된 ‘평신도 주일’은 가장 밝은 역사적 결실이다. 1970년 이전에 ‘평신도 사도직의 날’로 불렸던 이날의 특징은 평신도 강론과 평신도 사도직 활동을 위한 특별 헌금이 있다. 이는 한국 교회가 한국평협 50년 역사를 통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정립된 평신도의 위상과 그 사도직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보여 주는 살아 있는 역사의 상징이다.

 

그런 반면에 한국평협의 몇몇 역대 회장들이 교계 제도와 갈등을 겪었고 활동이 갈수록 위축된 것은 어두운 역사이다. 그 역사를 대변하는 것이 여러 번 바뀌고도 여전히 논란 중인 한국평협이나 교구평협의 통일되지 못한 명칭이다.

 

한국평협 50년을 기념하는 ‘평신도 희년’의 성구는 “사랑의 교회를 이루게 하소서.”이다. 희년의 풍성한 은사를 입은 한국평협이 신앙 성조들의 전통을 계승하여 한국 교회의 발전에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사도직 수행의 보루로서 100년의 역사를 일구어 나가기를 기대한다.

 

* 오용석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 주교회의 평신도사도직위원회 위원과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사회사도직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고, 경성대학교 명예 교수이다.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사무총장을 지냈으며, 세주교대의원회의 제13차 정기 총회 참관인으로 초청되어 발표와 토론에 참가했다.

 

[경향잡지, 2018년 3월호, 오용석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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