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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윤리] 칠죄종 성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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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2-25 ㅣ No.1480

[사순기획] '칠죄종' 성찰합니다 (1) 교만 - ‘나’ 중심 삶 버리고 ‘겸손’의 덕 쌓자

 

 

“얼마나 많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순간의 쾌락, 하찮은 이득, 가상의 존재를 참 행복으로 잘못 알고 그것에 사로잡혀 있는지요!”(프란치스코 교황 2018년 사순 시기 담화 중) 

 

교만, 인색, 질투, 분노, 음욕, 탐욕, 나태는 그 자체가 죄이면서 또 다른 죄와 악습을 만드는 죄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일곱 가지 죄종을 경계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회개하고 죄를 끊어버리겠다고 더욱 노력하는 사순 시기. 특별히 우리 안에 있는 칠죄종을 극복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약자를 무시하고 괴롭히는 크고 작은 ‘갑질’에서부터 전 국민을 기만한 국정농단에 이르기까지 최근 뉴스를 보면 ‘교만’에서 비롯된 사건을 자주 마주할 수 있다. 

 

교회 안에서도 ‘교만’에 뿌리를 둔 행동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본당 사도직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 베드로(가명)씨는 요즘 위화감을 많이 느낀다. 사도직단체 활동이 사도직보다는 회원들의 친목위주로 돌아가고, 새로운 회원은 받아들이려하지 않는 ‘텃세’도 느끼기 때문이다. 서로 파를 가르고 회장 자리를 두고 티격태격하는 모습엔 저절로 한숨이 지어진다. 김씨는 “끼리끼리 모여 대우받으려하고 더 높은 자리에 앉으려 한다면, 그게 정말 하느님을 섬기는 일인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교만’이란 단순히 남을 경멸하고 무시하거나 갖지도 않은 것을 자랑하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성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은 여러 종류의 교만에 관해 설명하면서 먼저 ‘선(善)을 하느님께 돌리지 않고 자신의 공적으로 돌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앙인에게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삼지 않고 자기 자신을 이 세상의, 삶의 주인이라 여기는 것이 가장 큰 교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교만을 이겨낼 수 있을까. 우리 신앙선조들이 심신수양서로 적극 활용했던 「칠극」을 쓴 판토하 신부(예수회)는 ‘겸손으로 교만을 눌러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교만이 깊어질수록 더욱더 자신에게 겸손한 마음이 있다고 착각하게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모욕을 즐거이 여기고 모욕당하길 바라는 것을 겸손의 최상의 경지라고 설명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겸손의 덕을 쌓는 방법으로 “자신을 알면 겸손이 생겨나는데, 이것은 모든 선의 시작”이라 가르쳤다. 자신이 죄인이며 보잘 것 없음을 깨닫고 인정하면 자연히 교만의 반대, 즉 겸손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겸손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보며 걷는 것이 아니라”면서 “모욕과 냉대 없는 참된 겸손은 없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번 사순시기, 겸손으로 교만을 억누르기 위해 자원봉사를 실천해보면 어떨까. 봉사는 자기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뿐 아니라 가장 낮은 이를 섬기며 겸손의 참 뜻을 체득할 수 있는 기회다. [가톨릭신문, 2018년 2월 25일, 이승훈 기자]

 

 

[사순기획] '칠죄종' 성찰합니다 (2) 질투 - 험담만 안 해도 성인 된다던데…

 

 

“지난주에 그 자매가 000 했다면서? 그 자매는 왜 맨날 그러나 몰라.”

 

강로사(가명)씨는 요즘 본당 모임이 불편하다. 기도하고 봉사하는 모임 자체는 좋지만 모임 후에 차라도 한 잔 하는 날에는 어김없이 누군가에 대한 험담이 오간다. 사실 각종 험담들은 실제 있는 문제점이라기보다는 질투, 시기에서 나오는 말이라는 것도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씨 또한 어느새 누군가의 잘잘못을 따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모임에 빠지면 자신이 험담을 당할까 걱정을 한다.

 

험담은 사회적으로도 심각한 죄의 근원이다. 험담 때문에 폭력과 살인이 벌어지고, 유명인이 악성댓글로 인해 자살하는 일까지 생겨나고 있다.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연구센터에 따르면 조사 대상 중 22.9%가 SNS에서 비방, 험담, 사생활을 들추는 내용을 전한 경험이 있었다. 험담하고 또 그 내용을 전하는 일이 얼마나 만연한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판토하 신부는 칠죄종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저술한 「칠극」에서 “남의 나쁜 점을 생각하고, 남의 잘못을 헐뜯고, 남에게 재앙이 생길 것을 바라는 이러한 악은 모두 질투의 갈래”라고 설명했다.

 

다른 사람에게 선이 생기는 것을 마치 자신에게 악이 되는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질투다. 그렇기에 판토하 신부는 질투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시는 것을 시기하는 일과 같다고 설명한다.

 

질투로 인해 생기는 죄를 막는 방법은, 남의 나쁜 행실을 생각하는 것과 헐뜯는 말을 하고 듣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험담은 처음엔 달콤하지만 결국 독이 된다”며 “험담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 성인이 될 수 있다”고까지 강조했다. 특히 성인들은 험담하는 것보다도 듣는 것이 더 큰 죄라고 가르쳐왔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헐뜯는 말을 들었을 때, 엄숙한 얼굴빛이나 곧은 말로 그치게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그것을 듣고 마음에 담으며 자세히 묻는다면 헐뜯는 말을 하는 죄보다도 무겁다”고 경고했다.

 

내 안에 이미 자라난 질투를 치유하는 법은 바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1코린 13,4) 사랑은 질투라는 병을 치료하는 약과 같다. 이번 사순 시기에는 남을 험담하기보다 가족과 이웃들에게 한마디라도 사랑어린 칭찬을 건네보면 어떨까. [가톨릭신문, 2018년 3월 4일, 이승훈 기자]

 

 

[사순기획] '칠죄종' 성찰합니다 (3) 분노 - 작은 일에도 ‘버럭’… 참아봐요

 

 

“아이x! 뭐야?”

 

하루에도 몇 번씩 ‘욱’한다. 크게 화 낼 일도 아닌데…. 찾는 물건이 없거나 휴대전화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조차 ‘버럭’, ‘버럭’. 버릇이 될 지경이다. 더구나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 쉽게 가라앉히질 못한다. 아예 분노가 생기지 않도록 하고 싶지만 조절이 잘 안 된다. 이른바 ‘분노 사회’라는 말을 유행처럼 옮겨가며 정당화하는 경우도 많다.

 

교회 안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내 탓’을 하기보다 ‘남 탓’을 하며 삼삼오오 모여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분노하기 바쁜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교회는 언성을 높이는 행동은 물론 불평불만, 모욕, 욕설, 폭행 등을 초래하는 분노를 악(惡)이자 죄라고 가르친다. 또한 분노를 타인을 벌하고자 하는 무질서로 정의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욕구와 함께 싫어하는 감정을 무절제하게 터뜨리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쉽게 말해 분노는 ‘원수를 갚으려는 것’으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분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판토하 신부는 저서 「칠극」을 통해 “성냄을 쌓으면 사람을 죄에 빠뜨린다”고 경고하고 “분노는 타오르는 불과 같으니 이 불을 참음으로 꺼야 한다”고 조언했다. 성이 나는 것 자체는 인간의 감정이지만, 이 감정이 더 큰 분노를 불러 죄를 짓기 전에 빨리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바오로 성인도 분노를 없애는 방법으로 원수를 사랑하라고 강조, “악함으로써 악함을 갚지 말고 원수가 굶주리고 있으면 오히려 그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당부했다.

 

한 가지 눈여겨볼 점은 모든 분노가 악은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는 분노가 정의의 실천을 위한 강렬한 감정일 경우, 악이 아니라 중립적이라고 말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정의와 인간 존엄성을 위해 적극 투신하고 특히 가장 가난한 사람을 위해 싸우라”고 촉구했다.

 

사순 시기,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언제 분노해야 하는지 또한 분노를 참아야 할 때는 언제인지 돌아볼 수 있는 좋은 때다. 남의 허물이 아니라 나의 허물을 돌아보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다. [가톨릭신문, 2018년 3월 11일, 성슬기 기자]

 

 

[사순기획] '칠죄종' 성찰합니다 (4) 음욕 · 탐욕 - 자기 욕구에 탐닉하면 하느님과 멀어져

 

 

‘화끈하게 모시겠습니다 010-XXXX-XXXX OO안마’ 

 

유흥가 바닥에 널브러진 전단지가 휘청거리며 길을 걷는 취객들을 유혹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산업 중 하나인 매춘은 음욕에 사로잡힌 취객들을 일탈에 빠뜨린다. 유흥업소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난립한 모텔들에 음욕을 채우려는 남녀의 발길이 이어지는 문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사회적 문제로 대두돼왔다.

 

음욕과 더불어 현대사회는 인간의 3대 욕구 중 하나인 식욕도 무분별하게 자극한다. 이른바 ‘푸드 포르노’라고 불리는 TV 음식 방송 프로그램이 난무하고, SNS는 온갖 음식 사진으로 도배돼 음식에 대한 탐욕을 불러일으킨다.

 

교회는 음욕은 ‘성적 쾌락에 대한 무질서한 욕구’이며, ‘합법적인 혼인 외에서 성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무엇보다 음욕은 사랑과 생명의 신비를 더럽히고, 영적인 사랑에 불감증을 일으키며, 참사랑의 능력을 잃게 한다.

 

‘음식이나 술에 대한 인간의 무질서한 욕구’인 탐욕도 이성적 판단이나 윤리적 자유를 상실하게 해 인간 품위를 떨어뜨린다. 먹고 마시는 본능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인간의 본능이지만, 이성에 의해서 조절되고 때론 절제돼야 한다. 하지만 절제나 조절을 하지 않고 무질서하게 탐닉할 때, 결국 영혼과 육체에 해를 가져온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라는 속담처럼 호기심으로 음욕과 탐욕을 채운 사람들은 더 큰 자극을 찾아 나서기 때문이다. 자신의 욕구를 무절제하게 추구하게 되면, 교회의 가르침도 거부하며 결국 하느님을 떠나게 된다.

 

「칠극」을 쓴 판토하 신부(예수회)는 “음욕은 마치 물이 넘치는 것과 같으니 정결로써 이를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음식을 탐하는 것은 마치 구렁이 (무엇이거나)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데, 절제로써 이를 막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2014년 10월 30일 산타 마르타의 집 미사 강론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투적인 삶이며 악마의 유혹을 견뎌내고 진리를 선포할 힘과 용기를 필요로 한다”고 강조했다. 영적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죄에 대항하는 ‘영적 투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 교황은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을 무상으로 주었지만 유혹을 견뎌내지 않아도 되고 악마와 전투를 치르지 않아도 되는 영적 삶, 그런 그리스도인의 삶은 있을 수 없다”면서 “의로움이라는 갑옷을 입고 믿음의 방패라는 하느님의 무기로 맞서 싸워야 한다”고 권고했다.

 

얼마 남지 않은 사순 시기, 음욕과 탐욕에 대항하는 ‘영적 투쟁’을 위해 정결과 절제로 무장할 때다. 음욕과 탐욕에 물들었던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의로움과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키우는 고해성사가 답이 되지 않을까? [가톨릭신문, 2018년 3월 18일, 최용택 기자]

 

 

[사순기획] '칠죄종' 성찰합니다 (5 · 끝) 나태 - 하느님 따르는 데 소극적이니 교만과 탐욕 등 빠지기 쉬워

 

 

“성당까지 10분이면 가는데 뭘…. 조금만 더 누워있자. 입당성가 부를 때만 들어가도 괜찮지 않을까?”

 

주일 아침 미사 전, 시계를 보며 얼마나 더 늦게 나갈 지 계산하는 모습. 혹시 내 모습은 아닐까? 조금만 더 쉬고 싶다는 이유로 미루는 일, 비단 미사참례만은 아니다. 우리는 일상의 일 안에서,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그리고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쉽게 게을러지곤 한다.

 

칠죄종의 하나인 나태, 남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주지 않으니 얼핏 작은 죄로 여기기 쉽다. 그러나 교부와 성인들은 나태의 죄가 그 무엇보다 무겁다고 가르친다. 칠죄종의 다른 6가지 죄의 시작이자 종점이 바로 나태이기 때문이다.

 

판토하 신부는 저서 「칠극」을 통해 “음란한 욕망, 먹고 마심에 절제가 없는 것, 도둑질 하는 것, 남을 시기하는 것, 농담을 하는 것, 쓸데없이 웃는 것, 나쁜 일을 꾀하는 것, 남을 헐뜯는 것 등의 여러 가지 일들이 게으름에서 나온다”고 설명했다.

 

베르나르도 성인도 “시간이란 한 번 지나가 버리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하느님은 시간으로 선을 행하고 공을 세우게 했다”면서 “그러니 그것을 헛되이 써 버린다면 하느님은 반드시 엄히 죄를 물어 벌을 내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나태를 물리치는 방법은 바로 ‘근면’이다. 이 근면은 몸을 바삐 움직이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바로 하느님을 찾는데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말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느님께 “당신은 저의 마음을 당신을 따르도록 만드셨으니 당신을 따르지 않고서는 편안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기도하며 신앙인에게 있어 근면의 중요성을 보여줬다.

 

나태를 이기는 방법이 근면이듯, 칠죄종을 성찰하는데 있어서도 ‘죄’보다 ‘덕’을 살피는데 힘써야 한다. 판토하 신부는 교만에는 겸손을, 인색에는 나눔과 베풂을, 질투에는 사랑과 용서를, 분노에는 배려와 수용을, 음욕에는 하느님의 마음을 찾는 정결을, 탐욕에는 절제를 더해 올바른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조언했다.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지만 거기서 멈춰선 안 되며, 그 죄를 통해 성찰할 수 있는 덕을 쌓아 선(善)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김귀분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원관구)는 “우리 마음은 다중적이기에 아무리 사악한 사람이라도 그 안에는 하느님이 주신 맑은 마음이 있다”면서 “「칠극」은 바로 그런 죄 이면에 있는 ‘빛’ 바라보게 해주고 밀알 하나 만큼이라도 더 덕을 쌓을 수 있도록 강조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김 수녀는 “‘죄’라고 하는 나의 약점을 강점으로 만들면 우리가 어둠 속에 있으면서도 빛으로 나아갈 능력이 생긴다”고 덧붙였다.

 

교회가 칠죄종을 가르치는 것은 죄를 성찰하는데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죄 이면에 숨어있는 빛의 삶, 즉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알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영원한 생명의 삶으로 나아가도록 이끌기 위해서다. 이번 사순 시기 칠죄종을 성찰한데 이어 구체적인 덕을 실천하는데 더욱 힘쓴다면 보다 의미 있는 주님 부활 대축일을 맞을 수 있지 않을까. [가톨릭신문, 2018년 3월 25일,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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