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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62: 14세기 (3) 저지대 국가 영성가들의 영성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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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2-10 ㅣ No.1111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62) 14세기 ③ 저지대 국가 영성가들의 영성생활


해수면 밑에서 길어 올린 실천적이고 실용적 영성생활

 

 

프랑드르 지역은 오늘날 벨기에와 네덜란드 중심에 자리했다.

 

 

오늘날 벨기에와 네덜란드의 중심에 자리했던 플랑드르(Flandre) 지역에는 13세기에 이미 나자렛의 베아트리스(Beatrice of Nazareth, 1200쯤~1268)나 하데위치(Hadewijch, 13세기 중반)와 같은 여성 신비체험가들이 출현하면서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한편 14세기에 ‘라인랜드(Rheinland)’ 지역에서 활동했던 신비신학자들의 사상이 플랑드르 지역이 위치한 ‘저지대 국가(Low Countries)’에까지 영향을 끼쳤습니다. 따라서 14세기에 ‘로우랜드(Lowland)’ 지역에서 활동했던 영성가들은 두 가지 영향을 재해석하며 새로운 영성 사조가 출현할 수 있는 밑거름을 놓기 시작했습니다.

 

 

엄격한 은수생활을 실천한 얀

 

벨기에 브뤼셀(Bruxelles) 인근 뤼스브룩 출신이었던 얀 반 뤼스브룩(Jan van Ruusbroec, 1293~1381)은 신심이 깊었던 어머니 덕분에 경건한 아이로 성장했으며, 11세에 집을 떠나 브뤼셀에 생 귀뒬(Sainte-Gudule) 주교좌 성당 의전 사제단 소속이었던 삼촌인 얀 힌카르트(Jan Hinckaert, ?~1350)의 지도를 받으며 사제직을 준비했습니다. 1317년 사제품을 받은 얀은 1343년까지 생 귀뒬 성당에서 사목 활동을 하면서 삼촌과 그의 동료였던 프랑시스 반 카우덴베르크(Francis van Coudenberg, ?~1386)와 함께 엄격한 고행의 삶을 실천했습니다. 이 시기에 얀은 이단 운동 가운데 하나였던 ‘자유 정신의 형제회(Brethren of the Free Spirit)’에 속한 평신도 여성 헤일리게 블르마르디네(Heilwige Bloemardinne, 1265?~1335)와 논쟁을 벌였습니다.

 

블르마르디네와 논쟁 때문에 주변의 저항도 있었고, 평소에 관상생활을 원했던 얀은 1343년 삼촌 일행과 함께 브뤼셀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브라반트(Brabant)의 공작이었던 얀 3세(Jan III, 1300~1355)가 양도한 스와녜(Soignes) 숲 인근 그루넨달(Groenendael)에 은수처를 만들어 은수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제자들이 그들과 함께 생활하려고 모여들었습니다. 결국 1349년 얀과 그 일행이 살던 은수처는 의전 수도회 모원으로 발전했으며, 카우덴베르크는 총장으로, 얀은 원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수도자로서 생활하던 시기에 하느님의 일꾼이자 영적 지도자였던 얀의 명성은 유럽 전역에 퍼져 나갔습니다. 또한 얀은 카르투지오회와 클라라회 및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의 하느님의 벗들회와도 교류를 했으며, 1350년대 요한네스 타울러(Johannes Tauler, 1300~1361)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초자연적 주입 덕행인 애덕 실천을 통한 신비체험

 

얀은 저서 「연인들의 왕국(Dat rijcke der ghelieven)」에서 ‘외적인 감각의 길’과 ‘자연적 빛의 길’ 및 ‘초자연적인 신적 길’을 걷는 여정을 통해 하느님과 일치하는 ‘초본질적인 관상의 삶’에 도달한다는 신비신학을 전개했습니다. 얀의 견해에 따르면, ‘외적인 감각의 길’에서 인간 영혼은 피조물 세계에서 하느님의 흔적을 통해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고, ‘초자연적인 신적 길’에서 인간 영혼은 성령 칠은의 은총과 함께 성령의 활동을 통해 하느님과 일치합니다. 그런데 얀은 ‘자연적 빛의 길’에서 인간 영혼이 관상을 통해 자신을 비우려고만 시도한다면 정적주의적인 이단에 떨어질 수 있으므로, 성령의 자극으로 애덕이 활성화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한편 얀은 저서 「최고의 진리(Vander hoechster waerheit)」에서 하느님과 일치에는 ‘매개를 통한 일치’와 ‘매개가 없는 일치’, ‘차별이 없는 일치’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즉, 인간 본성이 하느님의 은총 작용으로 무질서한 욕구를 제거하는 것이 ‘매개를 통한 일치’이고, 하느님 안에서 사랑을 체험하며 사랑의 능력으로 일치하는 것이 ‘매개가 없는 일치’이며, 하느님과 가장 친밀하게 일치하는 것이 ‘차별이 없는 일치’라는 것입니다.

 

얀은 「영적 결혼(Die gheestelike brulocht)」에서 자유 정신의 형제회의 이단 사상을 반박하면서 ‘활동생활’과 ‘내적생활’ 및 ‘관상생활’을 언급했습니다. ‘활동생활’은 초자연적인 주입덕의 도움으로 죄를 끊어버리고 덕행을 발전시키는 것이고, ‘내적생활’은 은총을 받으며 그리스도의 도움을 통해 외적, 내적 감각을 정화하여 하느님과 일치하는 신비체험으로 불리게 되는 것입니다. ‘관상생활’은 인간 영혼의 중심에서 하느님과 일치가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얀은 초월해 계시는 하느님보다 영혼 안에 내재하시는 하느님과 일치한다고 언급함으로써, 몇몇 신학자들에게 범신론으로 오해받기도 했습니다.

 

 

가난한 사도적 삶을 실천한 흐로테

 

한편, 저지대 국가 데벤테르(Deventer) 출신이었던 헤이르트 흐로테(Geert Groote, 1340~1384)는 15세에 파리 대학에서 스콜라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1358년 교회법 석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1362년 흐로테는 데벤테르에 의전 사제단 학교에서 교사로 임명되었으며, 1366년 이후에 쾰른(Kln)에 정착해서 철학과 신학을 가르쳤습니다. 이즈음에 흐로테는 위트레흐트(Utrecht)와 아헨(Aachen)의 주교좌성당에서 성직자 녹(祿)을 받게 되면서 호화롭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1374년 흐로테는 자신의 소유물과 성직자 녹을 포기하고 아른헴(Arnhem) 근처 모니크하우젠(Monnikhuizen)에 위치한 카르투지오회 수도원에 머물면서 허영심이 많았던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회개했습니다. 이후 데벤테르로 돌아온 흐로테는 1379년 부제품을 받고 위트레흐트 교구 내에서 설교 허가를 받아 1380년부터 순회 설교를 다녔습니다. 1381년쯤 흐로테는 뤼스브룩과 만남을 통해 아우구스티누스 의전 수도회의 규칙에 매력을 느끼고 그러한 수도회를 설립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즈볼러(Zwolle)에서 지인들과 함께 ‘공동생활 형제회(Fratres Vitae Communis)’를 설립했습니다.

 

흐로테가 추구한 영성은 자기 자신을 부정할 때 생겨나며 열정과 침묵으로 완성하는 내적 평화를 찾는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이 평화를 얻기 위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구원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죽음과 최후 심판 및 천국과 지옥을 묵상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흐로테가 추구한 영성의 특성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흐로테의 영성은 훗날 ‘새 신심 운동(Devotio Moderna)’의 핵심이 되면서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흐로테의 강론을 듣고 회심하게 된 레르담(Leerdam) 출신의 플로랑스 라드벵스(Florens Radewijns, 1350~1400)는 위트레흐트에 성 베드로 성당 의전 사제단을 사임하고 흐로테의 지도 아래에서 가난한 사제로 살아가기로 했습니다. 또한 라드벵스는 흐로테가 준비하던 공동생활 형제회 설립에 동참했으며, 1386년 몇몇 형제들과 흐로테가 생전에 원했던 아우구스티누스 의전 수도회인 ‘빈데스하임 수도회(Congregatie van Windesheim)’를 설립했습니다. 한편 라드벵스는 1393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Kempis, 1380~1471)를 지도했는데, 이 시기에 토마스는 흐로테의 영성을 접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14세기 로우랜드에서 얀은 에크하르트 방식의 주지주의적인 본질 신비신학을 극복하고자 초자연적인 주입 덕행을 중심으로 윤리를 강조하는 주의주의적인 신비신학과 대중적이고 실용적인 영성생활을 언급했습니다. 흐로테는 그리스도에 집중하며 내면을 성찰하는 실천적인 영성생활을 제시했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교 영성생활은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2월 11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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