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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루이 델랑드 신부의 한국 천주교 사회복지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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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2-08 ㅣ No.953

루이 델랑드 신부의 한국 천주교 사회복지사업

 

 

국문 초록

 

이 글에서는 루이 델랑드 신부를 통해서 한국 천주교 사회복지사를 새로운 각도에서 접근해보고자 한다.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로서, 예수성심시녀회의 창립자였던 루이 델랑드 신부(1895~1972)는 대구교구에서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사회복지사업에 집중적인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그는 한국사회의 현실에 끊임없이 주목하면서 교회의 사회복지사업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를 깊이 고민하였던 인물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가 세상 속의 교회가 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루이 델랑드 신부는 자신의 사회복지사업을 수동적인 자선사업과 능동적인 자선사업으로 구별하였다. 그는 1960년대 이전까지 자신이 실천했던 사회복지사업을 수동적인 사회복지사업으로 평가하였다. 이는 낙오자와 같은 사람들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사회복지사업이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와 같은 사회복지사업은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루이 델랑드 신부는 1960년대에 들어와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따라서 사회복지사업의 방향을 크게 전환했다. 그는 복지시설을 만들어 놓고 앉아서 기다리는 사회복지가 아니라, 그의 표현처럼 사회 속으로, 사회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끊임없이 만나는 사회복지를 새롭게 추구했던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자립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루이 델랑드 신부가 활동한 1960년대는 한국 천주교 사회복지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1. 머리말

 

2016년 2월 필자는 제8차 한국교회사 연구자 모임에서 <루이 델랑드 신부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수용>을 발표한 바가 있다. 글을 쓴 동기에는 필자의 여러 관심사가 작용하였다. 예수성심시녀회와의 개인적인 인연으로 창설자인 루이 델랑드 신부의 삶과 신앙을 알고 싶었고, 그 가운데 루이 델랑드 신부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의 만남에 대해서도 살피고 싶었다. 더 나아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한국 천주교회와의 상호관계에 대한 역사적 접근을 해보기를 바랐고, 그러한 내용을 통해서 오늘 한국 천주교회에서 수도자 혹은 성직자가 마땅히 지향해서 걸어가야 할 길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함께 말해보고자 하였다.

 

그것은 필자의 어리석은 욕심에서 나온 접근이었던 듯하다. 발표 후 윤선자 선생으로부터 루이 델랑드 신부라는 한 개인에 대하여 너무 지나친 강조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로써 필자의 인물 이해 방식에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이 글의 발표를 보류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루이 델랑드 신부의 여러 활동에 대한 주안점을 조금 달리하여 새롭게 수정하여 발표하게 되었다.

 

잘 지적되고 있듯이 한국 천주교회사의 흐름은 사회복지사업에 대해서 깊은 관심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1) 교회의 사회복지사업이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사랑의 계명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웃 사랑이란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에 따라 천주교 신자들은 초창기부터 모진 박해를 당하면서도 개인적으로 때로는 조직적으로 사회복지사업을 펼쳤던 것이다. 이에 한국 천주교회의 사회복지사업은 한국 사회복지사에서 언제나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 천주교 사회복지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그리 만족스럽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야 한국 천주교 사회복지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한국 천주교 최초의 사회복지사 통사라고 할 수 있는 심흥보 신부의 《한국 천주교 사회복지사》(2001)이 나왔으며, 이후 해방 이후 1975년까지의 사회복지사업을 개괄적으로 다룬 박문수, <가톨릭교회와 근대적 사회사업의 도입과 발전 - 해방에서 1975년 주교회의 인성회 출범까지>, 《한국 근 · 현대 100년 속의 가톨릭교회》 중(2005)이 계속해서 나왔다. 그러나 보다 지속적인 관심은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가톨릭대사전》(2006)에서 사회복지와 관련된 여러 항목들을 통해서 신학적 바탕과 한국 천주교 사회복지사의 흐름을 간단하게 서술하였다.2) 역시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작업한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의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30년사》(2006)란 단행본도 들 수 있을 것이다. 서울교구를 중심으로 천주교 사회복지회의 설립과 발전을 다루고 있는데, 그 대부분의 내용은 1970년대 이후를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다. 그리고 대구대교구에서 한국 천주교회 전체가 아닌 대구대교구에 한정시킨 《대구대교구 사회복지 100년사》를 간행하였다. 이후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한국 천주교회사 통사의 한 권으로 발간된 《한국천주교회사》 5(2014)에서도 ‘사회복지 및 의료활동’이란 부분이 설정되고 있지만,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한 내용은 비교적 소략한 실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연구 상황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만을 대상으로 해서 개신교 신자인 이만열에 의해 저술된 《한국기독교의료사》(2003)라는 전문 역사서와 비교할 때 그 차이를 쉽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2000년대 이후 한국 천주교 사회복지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지만, 주제나 연구방법론에 대한 새로운 모색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회복지기관의 활동이나 현상에 대한 소박한 설명을 넘어서 그 시대와 그 사회와 관련해서 누구에 의해서 사회복지가 어떻게 인식되었으며, 어떠한 사상을 바탕으로 어떠한 도전을 하였는가를 다루어보는 역사적인 연구가 더욱 중요시되어야 한다는 점에서이다. 이때 한국 천주교 사회복지사 연구는 한국 천주교회사의 내용을 한층 풍부하게 만들어줄 수 있으며, 한국 천주교회사의 올바른 이해에도 적극적으로 기여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루이 델랑드 신부를 통해서 한국 천주교 사회복지사를 또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보고자 한다.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로서 예수성심시녀회의 창립자였던 루이 델랑드 신부(1895~1972)는 대구교구에서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사회복지사업에 집중적인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그는 한국사회의 현실에 끊임없이 주목하면서 사회복지사업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를 고민하였다. 특히 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따라서 사회복지사업의 방향을 크게 전환시켰던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이전처럼 가난한 사람으로 하여금 찾아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야 하며 그들과 함께 하는 세상 속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실천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루이 델랑드 신부의 사회복지사업에 대한 내용은 예수성심시녀회를 통해서 계속 적으로 강조되어온 것이 사실이다.3) 그러나 일제 강점기 이래 1950년대까지 루이 델랑드 신부가 실천한 사회복지사업에 대한 평가라든가,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그가 보여준 새로운 사회복지사업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의 관련성 등은 제대로 깊이 다루어질 측면이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그가 1960년대에 집중적으로 행한 사회복지사업이 한국 천주교회사의 흐름 속에서, 더 나아가 한국 천주교 사회복지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위치를 올바르게 설정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2. 루이 델랑드 신부의 수동적인 사회복지사업 반성

 

한국 천주교 사회복지사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시대구분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국 천주교 사회복지사》에서도 이미 시대구분을 시도하였지만, 여기에서는 보다 다양한 내용들을 담고 있는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저술들을 중심으로 이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가톨릭 복지 사업>에서는 구한말 신앙의 자유를 획득한 시기를 중심으로 이전과 이후로 구분한다.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면서 한국 천주교회가 근대적 사회복지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는 한국 천주교회가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1945년 해방을 맞은 한국교회는 사회복지사업에서 이후 매 10년 단위로 괄목할만한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왔다고 설명한다. 6·25전쟁 이후를 다룬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로 매 10년마다 사회복지사업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4)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30년사》에서는 해방 이전과 해방 이후로 구분한다. 한국교회의 창설기부터 시작해서 일제강점기의 내용을 한꺼번에 묶어서 “해방 이전 천주교의 사회복지활동(1784~1945)”로 설정한다. 여기에서는 박해시대의 사회복지사업, 한불조약 이후의 사회복지사업, 식민지시대의 사회복지사업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는 <가톨릭 복지 사업>의 그것과 동일하다고 하겠다.

 

해방 이후의 시기에서는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의 출범을 기점으로 다시 구분한다. 이에 “한국 천주교회의 발전과 사회복지활동의 기반구축(1945~1976)”과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의 출범과 성장(1976~1994)”로 나누고 있다. 그리고 이후의 시기는 “지방자치제의 실시와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의 정책 변화(1995~1997)”과 “사회복지사업법 개정과 가톨릭 사회복지기능의 변화(1998~2006)”으로 구분하여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 구분을 <가톨릭 복지 사업>과 비교할 때 매 10년까지는 아니더라도 보다 세분할 필요가 있었을 것 같다.

 

서술 항목을 살펴보면 <가톨릭 복지 사업>에서는 ‘아동복지사업’, ‘노인복지사업’, ‘나환우복지사업’, ‘무의탁자 복지사업’, ‘장애인복지사업’, ‘전문사회사업’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아동복지사업’은 1854년의 영해회 사업이 보여주듯이 구한말부터, ‘노인복지사업’은 양로원이 만들어지는 1885년부터, ‘나환우복지사업’는 해방 직후부터, ‘장애인 복지사업’ 은 1950년대부터, ‘무의탁자 복지사업’과 ‘전문사회사업’은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의료사업의 경우 <가톨릭 의료 사업>에서 별도로 다루어지고 있다.5) 여기에서는 ‘서양의학의 도입과 진료소 시대(1886~1930)’과 ‘의원중심의 의료사업시대(1930~1950)’으로 구분하고 있다.

 

<가톨릭 복지 사업>의 구분은 《한국천주교회사》 5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사회복지 및 의료활동’이란 제목 아래 서술되고 있다.6) 사회복지에서는 고아원 · 보육원운영, 양로원의 설립운영과, 거기에 1920년대에 만들어진 ‘애긍회의 조직과 활동’을 추가로 설정하고 있다. 의료활동에서는 진료소와 병원의 개원, 성모병원의 설립으로 구분하여 다루고 있다.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30년사》에서는 해방 이전의 경우 시기적으로 구분한 것과는 달리, 해방 이후 1976년까지를 서술할 때 ‘가톨릭구제위원회’, ‘구라사업’, ‘장애인복지사업’, ‘노인복지사업과 아동복지사업’, ‘의료복지사업’으로 그 활동내용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7) 가톨릭구제위원회의 활동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는 <가톨릭 복지 사업>에서도 찾아진다.8) 이 경우 해방 이후 이전의 사회복지사업과 달리 새롭게 나타나는 사회복지사업을 앞에다 설정했다고 하겠다.

 

이러한 서술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가톨릭 복지 사업>이나 《한국천주교회사》 5에서 사회복지와 의료활동을 구분한 것과는 달리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30년사》에서는 이를 함께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올바른 이해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가톨릭 의료 사업>에서 1930년을 기점으로 시기 구분을 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9) 이는 한국천주교 사회복지사의 흐름을 시기적으로 구분하는데 매우 중요한 사실을 시사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병원이 정식 의료기관으로서 오늘날의 의원 규모로 진료활동을 시작한 것이 1930년대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서울교구에서 성모병원을 새롭게 만든 것이었다. 《한국천주교회사》 5에서 1936년 성모병원의 설립을 구분한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1930년대는 한국 천주교 사회복지사에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 시기로 설정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가톨릭 의료 사업>에서는 “서울의 성모병원은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경성교구 청년회연합회에서 ‘제일 필요하고 적절한 사업은 곧 의료기관의 시설’이라는 합의에 따라 5년의 세월을 거쳐 1936년 병원의 개원을 보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10) 이와 달리 《한국천주교회사》 5에서는 그와 같은 내용이 게재된 교회출판물을 더욱 주목하였다.11) 경성교구 청년회연합회가 1928년 5월 10일 자로 출간된 《별》의 ‘사회사업’난에서 이미 민간주도의 병원을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고 언급한다. 그러다가 1931년 6월 경성교구 청년회연합회에서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계획하면서 병원설립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하였다는 것이다. 즉 교구장으로부터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자가 성모병원의 설립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었다고 한다.

 

그러나 《별》지에서 ‘사회사업’이란 독립된 항목을 마련한 것이 아니라, <사설>의 내용을 통해서 밝힌 것이었다. 

 

이 세상사회에는 출생할 때부터 병신이나 천치가 되어 불행한 사람이 있고, 노동 중에 혹은 전쟁 중에 병신이 된 사람도 있으며 이외에도 다른 불행으로 자기의 생활을 어찌 못하는 이가 있다. 한 사람의 생활은 곧 사회의 생활인고로 사회에 이같이 불행한 사람이 있으니 우리들은 자기의 책임으로 이것을 구해주지 아니치 못한지라. 이같이 불행한 사람을 서로 구제함으로써 비로소 사회의 불공평함이 조화되어 도덕적 의의 있는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호상구제함에는 개인이 직접 사회적으로 행함이 좋으니 가령 걸식하는 사람을 보고 측은히 여기는 생각이 나서 곧 금전을 주는 것이 좋은 자선이나 혹 경우에는 폐해가 있을 수도 있는지라. 고로 이보다 일보를 진하야 사회사업으로 해서 널리 이런 사람들을 구제해서 생활을 있게 하며 걸인이 생기지 않도록 사회정돈에 진력함이 참으로 도덕적 행위요. 이와 같이 사회적 설비가 되어 걸인이 생기지 아니하면 사회는 차차 건전으로 진보가 될 것임으로 사회사업발달 여하는 사회의 문화를 되게 하는 일종의 척도로 볼 수가 있다. 그러나 벌써 불행에 빠진 자들을 구해주지 아니하면 안 될 현 사회에서는 양육원, 감화원, 무료숙박소, 직업소개소, 자선병원 등을 설립하여 구해주지 아니하면 안 되게 되었다. 이들은 보통 국가의 할 사업으로 되어 있으나 국가에만 미루는 것은 호상구제의 의의가 적고 따라서 도덕적 가치가 적게 될 것인즉 역시 사회사업으로 하야 다수한 사람의 동정으로 성립되는 것이 좋은 줄로 믿는다. 현재 우리 조선 내에도 사회사업으로 종교가, 기타 도덕유지가에서 이들 방면에 진력하였으나 정돈될 시기가 망연한 즉 각각 책임을 가지고 노력할 것이니 우리 주 예수의 말씀에 “애긍하는 것이 진복자이로다. 다들 애긍함을 받을 것임이오.” 하신 말씀을 생각할 진데.12)

 

교회가 사회사업에 관심을 가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개인의 불행을 개인에게나 국가의 일로만 맡겨둘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회사업을 통해서 사회와 문화의 진보와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에 종교가를 비롯한 여러 형태의 유지들이 관심을 가졌으나 아직 제자리를 잡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상태라고 한다. 때문에 한국 천주교회가 사회사업을 담당할 여러 시설들을 마련하는데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양육원, 감화원, 무료숙박소, 직업소개소, 자선병원 등을 설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192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 한국 천주교회가 당시까지와는 다른 형태로 사회복지사업을 시도하려는 움직임으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해도 좋을 듯하다.

 

여러 사회시설들 가운데에서 성모병원의 설립을 경성교구 청년회연합회에서 주도한 것으로만 이해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경성교구의 보좌주교였던 라리보 주교의 사회복지에 대한 관심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경성교구 청년회연합회의 기관지이지만, 《별》이란 명칭은 라리보 주교의 인장에 표시된 별에서 취한 것이기 때문이다.13) 창간 역시 라리보 주교와 경성교구 청년회연합회 회장이던 박준호 등의 간부진과 함께 논의되었다는 점에서이다. 그리고 1931년 5월 10일 자 47호에서는 4년 동안 라리보 주교의 경비지원이라는 각별한 관심에서 《별》지가 발간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 사설은 편집장인 박준호를 비롯해서 연합회 임원들이 썼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라리보 주교의 견해가 크게 반영되었을 것이다.

 

성모병원의 설립과 라리보 주교와의 관련성은 이미 지적되고 있는 사실이다. 《한국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에서는 “1933년 뮈텔 주교의 뒤를 이어 교구장이 된 라리보 주교는 이전부터 병원 설립에 남다른 열망을 지니고 있었기에 이 사업을 적극 추진하였고 마침내 1936년에는 모든 이의 소원이었던 성모병원이 탄생하게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14)

 

“특히 이 의료사업을 추진하게 된 배경에는 당시 서울교구 부주교로 재임하던 라리보 주교의 희망이 강하게 작용하였는데, 이 점은 훗날 대전의 ‘희망의원’ 설립과도 관련이 있다”고 하면서,15) 대전의 성모병원 역시 당시 교구장이던 그의 사목 방침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점은 라리보 주교가 사회사업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내용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1931년에 있은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을 마무리한 뒤 라리보 주교는 《1931년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는 당시 비신자들의 천주교에 대한 호의가 현저하다는 사실을 지적한 다음, 선교에서도 사회사업과 같은 새로운 방향을 통해서 더 많은 성과를 거두기를 바라고 있다.

 

교회가 사회에 줄 것은 영적인 것 외에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외교인이 교회에 관해 고찰한 것에 비추어 볼 때 희망의 큰 동기가 됩니다. 모든 것을 사회적 유용성에서만 고찰하는 오늘날에는 특히 외적인 사업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데, 이 면에서는 우리는 오래전부터 늦게 온 다른 종교단체들보다 뒤떨어지고 있습니다. 100주년 기념식 날 교구 본부를 방문했던 서울의 어느 한 신문사 사장은, 한 연설에서 교회가 사회에 유익한 단체라고 말했는데, 왜냐하면 잘 살도록 가르치는 종교는 사회 전체에 매우 유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 종교의 영적인 면을 올바르게 이해한 것일까요? 어쨌든 교회는 일반적인 이해와 관련되는 어떤 문제에도 무관심하지 않다는 것을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보다 큰 규모로 사회사업을 할 수 있기를 더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럴 수 있기를 기다리면서 우리는 마침내 전 한국에 하느님의 날이 오도록 기도하면서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가지고 일을 완수할 것입니다.16)

 

라리보 주교는 당시 한국 천주교회의 사회복지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촉구하고 있다. 교회가 추구할 본연의 사명이 영적인 부분인 것은 분명하지만, 비신자들은 그와 같이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때문에 교회가 어떠한 문제에도 무관심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서 한국 천주교회가 보다 큰 규모의 사회사업을 펼쳐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천주교가 한국 사회 전체에 유익한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한국 천주교회가 그렇게 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따라서 1920년대 후반부터 라리보 주교는 한국 천주교회에 사회사업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일어나기를 바랐던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 이것은 당시 세계 천주교회의 흐름과도 일치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한국가톨릭대사전》의 <봉사> 항목에서는 1931년 교황 비오 11세 교황의 회칙 <사십 주년>을 통해서 사회정의와 사회자선의 조화와 공존을 강조하였던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17) 이로 말미암아 사회복지사업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일어났음을 시사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라리보 주교의 언급은 이전까지 한국 천주교회가 추구한 사회복지사업에 대한 반성과 함께 새로운 모색을 시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에 그 하나의 결실이 성모병원의 설립으로 나타났다고 하겠다.

 

그러나 라리보 주교의 사회복지사업에 대한 새로운 바람은 의도처럼 진행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가톨릭 복지 사업>에서도 잘 지적되고 있지만,18) 성모병원의 설립을 제외하고서는 구한말 활발한 사회복지사업을 시작한 한국 천주교회는 일제의 한국강점, 그리고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서양 교회의 지원을 받기가 어려워졌고, 국내에서도 일제와 교회 사이의 어려운 여건으로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고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 천주교 사회복지사에서 크게 주목해야 할 인물은 루이 델랑드 신부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함께 활동한 다른 파리 외방전교회의 성직자와는 달리,19) 그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중반부터 사회복지사업에 전념했던 인물이다. 그는 1923년 6월 5일에 부산에 도착하였다. 1924년 9월 이후 부산진 성당(현 범일 성당)에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와 가족들을 위한 노동자의 집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이는 그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사회복지사업을 벌였음을 알려주며, 그의 이러한 활동은 당시로서는 진보적이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20)

 

루이 델랑드 신부의 사회복지사업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1년 동안 프랑스에 갔다가 다시 돌아온 1934년 이후의 일이었다. 이때 그는 라리보 주교가 주도했던 것처럼 도시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대구교구의 용평, 영천, 그리고 포항이라는 열악한 농촌지역에 자리를 잡으면서 사회복지사업을 실천하였다. 그의 많은 활동을 간단히 정리한 <약사>를 중심으로 이를 살펴보자.

 

1933년 한 해 동안 몸조리를 하기 위해서 프랑스에 갔다 와서, 1934년에 새로 어느 시골 본당의 주임 사제가 되었다. 그가 자신의 전 여생을 바치게 될 사업들을 창설하기 시작했던 곳이 바로 그곳이며 그 시기이다. 그는 먼저 그리스도의 희생정신을 부여받은 몇 명의 가난한 동정녀들을 모아서 1935년부터 삼덕당이란 명칭으로 첫 출발을 했다. 그것은 나중에, 그의 중심사업, 즉 사회의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세워진 ‘예수성심시녀회’의 모태가 되었다. 그는 이 젊은 정녀들의 도움으로, 불행한 아동들과 부양하는 가족이 없는 노인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조금씩 세워서 ‘성모자애원’이란 이름 아래 포함시켰던 수많은 자선사업의 시초였다.

 

그는 1940년에 영천 본당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가족’과 함께 그곳으로 옮겨갔다 그의 모든 활동이 이미 오래전에 한국을 점령했던 일본인들의 마음에 결코 들지 않았다. 그 때문에 델랑드 신부는 12명의 정녀와 함께 4개월 동안 투옥되기도 했다. 감옥에서 나온 이후로도 교회 울타리 내에서 거주하도록 명해졌으며, 전쟁이 끝나고 한국이 독립될 때까지 그곳을 벗어날 수 없었다.

 

1948년에 외방전교회는 서울과 대구교구를 떠나서 한국의 중서부에 있는 대전지역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델랑드 신부는 움직이지 않았으며, ‘자신의 사람들’과 함께 그 자리에 남았다. 한 한국인 사제가 그가 있었던 본당에 임명되었다. 따라서 델랑드 신부는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자신의 사업들을 세울 수 있는, 외진 곳에 있는 땅을 찾기 시작했다. 1950년 초 마침내 그것이 이루어졌다. 해변에 맞닿아 있으며, 포항시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자리한 넓은 대지(확장시켜 나가기만 하면 되는)를 매입해서 마침내 그의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6·25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는 한 달 반 동안 100명 이상의 가족들과 함께 전선에서 극심한 불안 속에 있었다. 그의 소유지 끝에 있는 작은 강가까지 공산군들의 돌격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1953년에 전쟁이 끝난 후, 수녀회와 그 부속사업들은 빨리 성장했다. 고아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장애자와 직업이 없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는 이 모든 불행한 이들을 도와주었으며 몇 명의 실업자들에게 일거리를 주기 위해서 성냥 공장 하나를 세웠다. 게다가 나환자들의 사업을 시작했던 것도 바로 그 당시였다.21)

 

위의 기록에서는 1950년대까지 루이 델랑드 신부의 사회복지사업을 모두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 대체적인 흐름은 파악할 수 있게 해주고 있는데, 그의 사회복지사업이 해방 이전과 이후로 크게 구분됨을 알려주고 있다. 1940년대에 이르러 그의 사회복지사업은 일제의 방해로 한동안 멈추어졌다는 사실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이때 루이 델랑드 신부가 한국의 가난하고 버림받은 불행한 사람들에 대해서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가 부산진 본당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가난한 여성들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삼덕당에서 여섯 명의 처녀들과 함께 그러한 사회복지사업을 담당할 수녀회의 설립을 추진해갔다. 그렇지만 그의 주된 사회복지사업은 역시 천주교회가 일반적으로 관심을 가졌던 고아와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루이 델랑드 신부의 사회복지사업은 해방 이후부터 다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가톨릭 복지 사업>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그 역시 해방 공간에서 매우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그는 1946년 1월에 “별십자구호회”를 만들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자 하였다.22) 그러나 1950년대 포항에 정착한 이후 그의 사회복지사업은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났다. 장애인과 무직자, 나환자 등이 새롭게 언급되고 있다. 현재 이 시기의 사업으로 영아원, 고아원, 시각 장애인과 지체장애인 · 노인 · 피난민이 들어있는 남녀 혼성 양로원, 일반과 나환자를 위한 무료진료소, 성냥공장, 그리고 제재소 등이 운영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23) 이러한 사실은 일제강점기라는 근대의 시기에서는 물론, 현대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루이 델랑드 신부가 가장 활발히 사회복지사업을 실천한 인물임을 구체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루이 델랑드 신부가 일제강점기 이래 1950년대까지 행하였던 자신의 사회복지사업을 평가한 사실에 크게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한국 천주교 사회복지사의 시대구분을 위한 매우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발이 뒤진 마을들 한가운데인 바로 이곳에서 필요한 것은 우리가 ‘사회’의 낙오자들, 즉 고아들, 불구자들, 노인들, 버림받은 사람들을 ‘받아들기만 하는’ ‘수동적인’ 자선사업이 아니라 바로 그 ‘사회’ 속으로 들어가서 활동하는 ‘능동적인’ 사회사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24)

 

프랑스에서도 흔히 사회의 희생자들이며, 때로는 본인 자신의 희생자들인 가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 사회 속에서, 바로 그 ‘자연’의 희생물이 된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그곳에서는 짐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 자신은 30년 이상 ‘앉아서’하는 수동적인 자선사업을 해 왔습니다. 자선사업을 위해서 세워진 수녀회의 도움으로, 사회에서 ‘버림받은’ 수천 명의 불행한 이들, 즉 고아들, 불구자들, 나환자들, 버림받은 노인들 등(예전에 쌩띨레르의 많은 이들이 저의 어머니에게 ‘델랑드 엄마’라고 불렀던 것처럼 2,000명 이상의 크고 작은 아이들이 저를 ‘아버지’라고 부릅니다)을 받아들였습니다.25)

 

루이 델랑드 신부가 1966년과 1969년에 지나간 30여 년 동안에 있은 자신의 사회복지사업을 성찰하고 있다. 사회복지사업을 수동적인 자선사업과 능동적인 자선사업으로 구별하고 있다. 이때 당시까지 자신이 실천했던 사회복지사업은 수동적인 사회복지사업이었다고 평가하였다. 수동적인 자선사업이란 낙오자와 같은 사람들이 앉아서 하는, 받아들이기만 하는 사회복지사업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그것은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한국 천주교의 사회복지사도 이러한 기준에서 새롭게 시대 구분해서 파악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3. 루이 델랑드 신부의 능동적인 사회복지사업 시도

 

1960년대는 한국 천주교 사회복지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시기이다. 루이 델랑드 신부가 새로이 추구한 사회복지사업으로 인하여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른바 능동적인 사회복지사업이 전개된 것이다. 그는 이를 사회복지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그 ‘사회’의 속으로 직접 들어가서 활동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것이 사회복지사업에서 지향해야 할 올바른 방향이라는 것이다.

 

루이 델랑드 신부의 사회복지사업에 대한 인식전환은 당시에 시작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사실 현대 세계천주교회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하나의 사건을 손꼽으라고 한다면 어느 누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를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지향한 정신은 현대의 세계 사상사만이 아니라, 세계 현대사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인류는 종교 내부로나, 그 외부와의 관계에 대해서 깊이 고민한 천주교의 움직임에 발맞추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해 나갔던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1960년대 후반 이후 한국 천주교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었다는 점에서도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당시 교계제도를 확립한 한국 천주교회는 하나의 지역교회로서 독립적으로 활동하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현실참여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추구한 정신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 교회는 내부의 변화뿐만 아니라, 이전과 달리 사회와 관계를 맺고 활동하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현재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와 관련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직접적으로 다루어진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기존의 연구에서 되풀이되는 방식인 신학적이거나26) 사회학적인 측면에서의27) 접근만이 아니라 역사학적 접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다는 점에서이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지고 있듯이 현대 한국 천주교회사와 관련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크게 부각된 것은 김수환 추기경과의 활동을 통해서이다.28) 그러나 이러한 언급만을 학문적인 접근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는 한국 천주교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어떠한 관련성을 맺고 있는가를 살피는데 새로운 노력이 요구됨을 말해준다.29)

 

때문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한국 천주교 사회복지사의 상호관련성에 대해서도 별다른 관심이 기울여지지 못하였다. <봉사> 항목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나온 <사목 헌장>(Gaudium et spes)에서 가난하고 고통 중에 신음하는 이들에 대한 교회의 관심과 의무를 재천명하였다고 말한다.30) 그 결과 오늘날의 천주교회의 사회 사목의 중요성을 재강조하면서 시설 위주, 치료 위주의 자선활동과 대사회적인 접근방법을 통한 사회변혁과 개선에 모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가톨릭복지 사업>에서는 1960년대에 국민생활의 급박한 상황이 진정되어 긴급구호사업에서 국민생활의 근본적인 안정을 위해 사회개발 및 인간개발사업에 눈을 돌렸다고 한다. 이에 농촌개발 사업을 위해 농로개설, 관개시설 확충 및 보수사업, 간척사업, 축산업 장려 등의 사업을 교회가 선도하였다고 설명되고 있을 뿐이다.31)

 

루이 델랑드 신부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기존의 연구에서 이미 언급된 바가 있다.32) 그러나 그것은 그의 삶 전체를 조명하는 과정, 특히 현대 세계 천주교회사와 관련해서 이러한 내용을 언급하다 보니 조금은 덜 분석적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그가 창립한 예수성심시녀회의 활동을 근대 한국 천주교회사의 서술 속에서 처음으로 다룬 《한국 천주교회사》 5에서도 이러한 측면이 전혀 검토되고 있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33) 따라서 루이 델랑드 신부의 삶과 활동을 통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현대 한국 천주교회사 속에서 어떻게 수용되었으며, 그것이 그의 사회복지사업에서 어떠한 모습을 드러내었는가를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의 만남

 

루이 델랑드 신부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해서 주목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다름 아니라 루이 델랑드 신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될 때 그 현장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성심시녀회의 회헌을 승인받기 위해서 1962년 10월 11일 프랑스에서 로마로 갔는데, 그때가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그는 거기에서 1963년 4월 13일 귀국할 때까지 있었다.

 

루이 델랑드 신부는 바티칸에서 새롭게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를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더욱이 그가 제출한 수녀회의 회헌은 몇 달 뒤 약간의 부분이 수정되고 삭제되어 받아들여졌는데, 그 이유는 그 내용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부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34) 따라서 루이 델랑드 신부는 자신이 창립한 예수성심시녀회를 통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어떻게 수용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였을 것이다.

 

그는 현대 세계 천주교회의 흐름에 늘 민감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조국인 프랑스에서 멀리 떨어진 한국이라는 선교지에서 살더라도 그러한 관심을 가지는 것이 선교사의 중요한 임무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서재를 보면 다양한 서적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선교사로서 그가 얼마나 많은 것을 스스로 연구하면서 터득하려고 노력하였는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다고 한다.35)

 

그는 1955년 2월 22일 자 편지에서 이러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잘 말해주고 있다.36) 파리 외방전교회 총장에게 자신의 지적인 기근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선교지인 한국에는 현대 천주교회의 돌아가는 추세를 알려주는 읽을거리가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이다. 특히 6·25전쟁 이후의 혼란스러운 한국에서는 더욱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는 교회에서의 이념이나 활동의 동향들, 수도회의 의식에 관한 회복 동향들, 사회활동과 자선활동의 동향, 교황의 회칙과 사목의 지도 방향 등을 제대로 알 수 없다고 말한다. 때문에 그는 그러한 악조건을 극복하기 위해서 소속 전교회만이 아니라,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먼 곳인 프랑스에 있는 은인들이나 친구들과의 끊임없는 서신교환을 통하여 현대 천주교회의 여러 가지 변화를 파악하고자 노력하였다.37)

 

루이 델랑드 신부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관심은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계속되었다. 그는 귀국한 직후인 1963년 6월에 교황 요한 23세가 서거하고, 새로운 교황인 바오로 6세를 선출하게 되자 수녀들에게 두 분을 위해서 정성껏 기도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무엇보다 요한 23세가 시작해놓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헛되이 중단되지 않고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함께 설명하였다.38)

 

1963년 11월에 이르면 그는 <기구와 성덕으로 교부들 회의에 참여>라는 글을 통해서 “지금은 다 아는 바와 같이 로마에서 우리의 교부들이 회의를 하고 계시다. 우리들을 위하여, 전 세상을 위하여 얼마나 관계있는 시간이냐. 우리들도 이 시간에 회의에 참여해야 되며, 전 세상을 위하여 관계있는 일을 할 수가 있다. 기구와 성덕으로 도와줄 수가 있는 것이다. 아니 우리들은 반드시 이 회의에 천주님의 빛을 끌어내려야만 한다. 성의가 온 땅에 이루어지도록 빌자”고 말한다. 교부들이 회의를 하고 있지만, 사제인 자신이나 수녀들도 기도와 성덕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함께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역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그의 각별한 관심을 드러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65년 11월 25일 자 편지에서 루이 델랑드 신부는 현실세계를 바라보는 인간의 시야가 너무나 좁다고 말하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력이 아직도 지도자들에게까지 미치지 못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39) 때문에 그는 “교회 내부의 개혁이 높은 곳에 있는 많은 이들, 즉 지도자들에게서 보다 충실하게 일어난다면, 더 잘 받아들여지고 더 효과적일 텐데요. 바오로 6세가 반대를 무릅쓰고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본보기인가요. 그분의 태도는 뛰어난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40) 지도자들의 변화를 기대하기도 하였다.

 

1967년 11월 22일 자 편지를 보면 그는 “주교들의 공의회에 대한 자료를 구하도록 해보세요. 아주 흥미로울 것입니다”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다.41) 당시 그가 70세가 넘는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폐막된 이후의 변화까지를 주시하면서 시대적 상황과 필요에 따라 적응해왔다는 사실은 매우 놀랄만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그는 현대 천주교회의 흐름을 따라 교회의 진보를 추구한 선교사로 평가를 받고 있으며,42) 개별 시기마다 세계 천주교회가 지향했던 중요한 내용들을 찾아볼 수 있다고 이해되고 있다.43)

 

한편 루이 델랑드 신부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졌던 데에는 그동안 자신이 한국에서 선교사로서 추구했던 사목 정신과 그것이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1923년 한국에 선교사로서 파견되었던 루이 델랑드 신부의 선교 정신은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을 향하는 것이었다.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 역시 이를 지향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1965년 11월 25일 자 편지에서 그는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중요한 정신임을 언급하고 있다. 끊임없는 인플레이션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힘없는 이들에 대한 원조가 줄어들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력이 세상에 제대로 영향을 주고 있지 못하다고 비판하고 있다.44)

 

1966년 12월 28일 자 편지에서 그는 교황청의 정신을 따를 때 낙후된 지역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이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의 진정한 실현이라고 하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설명하고 있다.45)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추구하는 정신이란 현대 세계 속에서 바로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를 실현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루이 델랑드 신부가 <수호성인들>이라는 글 속에서 당시를 공의회 시대라고 규정한 다음 형제적 보상과 속죄를 요구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성교회에서는 한 가지 더 특별히 다른 것을 또 가르칩니다. 불쌍한 사람들을 생각할 때, 사회에서 소외되고 내버린 사람들뿐 아니라, 사회 속에 사는 불쌍한 사람들도 생각하도록 합니다. (중략)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런 일을 우리에게 부탁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교황께서 말씀하신 것을 보면, 요즈음 젊은 사람들은 대체로 욕심이 많고 바쁩니다. 속히 받으려는 마음이 있고, 또 쉬운 방법으로 얻으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이 오늘날에 더욱 요구된다는 것이다.46)

 

그는 1970년 2월 24일 자 편지에서 “그러나 로마 교황께서 한탄하시는 ‘임시 해결책’들은 악을 고치기 위해서는 도움이 안 되는데, 한 가지 치료책이 될 수 있나요? 그러나 제 소견으로는, 가장 큰 악은 말로만 다하고, ‘그에 따른 행동’은 부족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악은 그 근본에서 고쳐져야 할 것입니다. 평상시에는 행동 규범으로 족하지만, 위기 때는 실천이 중요합니다”라고 말하면서,47) 사람들에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를 바랐다. 그는 개개인의 사제, 각각의 본당에서 그와 같이 시작하고, 고행 정신을 가진 수녀원에서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힘써 그렇게 한다면 그러한 일은 널리 퍼져서 주위의 모든 곳, 모든 계층에서 행해질 것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루이 델랑드 신부는 그가 세상을 떠나는 해인 1972년 1월 30일 편지에서도 한국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실천하고자 한 자신의 노력이 결실을 거두는 것과 달리 프랑스에서는 그렇지 않음을 아쉬워하였다. “여기 교회는 사고방식의 급격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점점 발전해갑니다. 그런데 왜 프랑스에서는 권위가 점점 작아지는 ‘교회’의 ‘지시’들만 마냥 기다리고 있나요? 왜 소공동체로(비안네 성인식으로, 장 외드 성인식으로, 빈첸시오 드 바오로 방식으로) 활동하지 않나요? 자발성(프랑스 군인의 미덕 중의 하나인)이 프랑스에서 사라졌습니까. 언제나 섭리와 로마 교황의 뜻에 따라서 과감하게 행해야만 합니다”라는 것이다.48) 따라서 루이 델랑드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천주교회 역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2) 사회복지사업의 새로운 지평 개척

 

평생에 걸친 루이 델랑드 신부의 사회복지사업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폐막하고, 그가 은퇴하는 1965년을 기점으로 두 시기로 나누어진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그의 선교 방향을 크게 전환시켜 준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루이 델랑드 신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천주교회에 한 가지 더 특별히 다른 것을 가르쳤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불쌍한 사람들을 생각할 때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내버린 사람들뿐 아니라, 사회 속에 사는 불쌍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도록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그가 “수녀회를 세울 때 처음에는 아무 목적 없이 사실상 아무 뜻 없이 시작했지만, 그 후에 천주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알게 하셨기에 우리가 깨”달은49) 사실이 바로 이것이라고 말한다. 이제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이 가르치는 대로, 원하는대로, 명하시는 대로 새로운 형태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선교활동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루이 델랑드 신부가 처음 실천한 사회복지사업의 유형과는 전혀 다르다.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시기에 “처음에 우리는 아무 목적 없이 천주께서 보내시는 대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나와 같이 처음부터 일한 나이 많은 수녀들에게 물어보면 잘 알겠지만, 아이들을 하나씩 받게 되고, 노인들, 불쌍한 사람들, 병자들을 하나씩 받게 되었는데, 실상 그들은 사회에서 떨어진 사람들, 소외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노력하였고, 힘껏 돌보았습니다”라고50)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제 대상과 방식이 크게 달라져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유형에 대해서도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 유형의 사회사업에도 불구하고 사회 안에는 또 다른 형태로 뒤떨어진 사람들이 여전히 계속해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첫 번째 유형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있어야 하지만, 거기에다가 새로운 노력이 요구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아주 깊은 시골에 가면 농사지을 땅도 없고, 혹 땅은 조금 있어도 농사할 물이 없고, 재산이나 돈도 없고, 또 가진 것이 없는 힘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사회 속에 있으므로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아닙니다만 노력하고 수고해도 그들의 아이들 중 몇 명은 학교에 가지 못하게 됩니다. 장애인도 아니고 부모도 있고 재능도 있으나 궁핍하여 학교에 가지 못합니다. 이들 역시 불쌍한 아이들입니다. 깊은 산골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집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시골에서는 약도 살 수 없고 병이 있어도 의사에게 보일 수 없고, 누구에게 도와달라고 전화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런 사람들이 우리 사회 속에 있습니다. 사회 속에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런 사람들을 하느님 안에서 마땅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교회에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일하라고 맡겨주신 추수 밭은 바로 그곳입니다. 천주를 위해서 성부를 위해서 예수 성심을 위해서 예수 성심과 함께 농사할 자리는 바로 그곳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런 일을 우리에게 부탁합니다. 신문이나 잡지를 보면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부당하게 적은 돈을 받으므로, 자신의 가족을 부양하기에 부족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수고를 많이 해도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못하고, 병이 나도 의사를 만나지 못하고 약도 살 수 없는 사람들이므로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51)

 

이때 루이 델랑드 신부가 매우 즐겨 사용하는, 매우 의미 있는 용어가 등장한다. ‘사회 속에’라는 말이다. 선교사들이 사회 속으로 직접 뛰어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그는 “바로 이곳에서 필요한 것은 우리가 ‘사회’의 낙오자들, 즉 고아들, 장애인들, 노인들, 버림받은 사람들을 앉아서만 ‘받아들기만 하는’ ‘수동적인 자선사업’이 아니라 바로 그 ‘사회’ 속으로 들어가서 활동하는 ‘능동적인’ 사회사업”이라고 구별해서 표현하고 있다.52)

 

물론 루이 델랑드 신부는 기존의 사회사업 방식에 만족할 수 있고, 쉽게 달리 할 일들이 언제든지 있다고 말한다. 그는 그러한 유형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무시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는 이교도 사회가 거부하거나 무시한 ‘불필요한 사회구성원들’을 위하여 자선사업을 행하였는데, 그것이 당시로서는 사회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가장 효과적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더 이상 그러한 사회복지방식에 안주하지 말고 크게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낙후된 지역의 생활수준을 향상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자립하도록 만드는 것 또한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를 진정으로 실현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53)

 

여기에는 루이 델랑드 신부의 한국사회 현실에 대한 인식도 크게 작용하였다. 그는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주목하였다. 당시 한국은 가난한 저개발 국가라는 것이다.54)

 

산업화, 고속도로, 관광, 교육 등 가속화되는 현대화로 인해 발생하는 심각한 문제들 중 그 어느 것도 역동적인 우리 정부를 멈추게 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소비, 부채, 과잉생산, 과도한 수출, 또한 지나친 세금 등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물론 든든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유리하고 득을 보는 반면에, 아직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 빚진 사람들, 낙후된 사람들은 세금과 인플레이션에 짓눌려서 절망 속으로 깊이 빠져들고 있습니다. 초등학생들도 타격을 받으며 어떤 이들은 아예 이미 포기하기도 합니다. 가난한 이들은 언제나 더 가난해집니다.55)

 

흔히 사회의 희생자들이며 때로는 본인 자신의 희생자들인 가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 사회 속에서 바로 그 자연의 희생물이 된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그곳에서는 짐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중략) 그러나 그 자체로 낙후되고 시설이 부족하여 버림받은 사회의 불행이 어떠한 것인가를 실감하기 위해서 그리고 경작할 수 있는 땅이 1㎡도 없고, 12년 동안의 통상적인 공부를 하고 난 뒤에 일자리를 구할 수 없고, 경작하기 위한 작업도구들도 없으며, 종자들과 비료를 살 돈도 없고, 의사, 약사, 학교 등에 가기 위한 돈 한 푼도 없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저는 이곳의 낙후된 시골로 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상황이 보다 가난한 몇몇 가정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제가 있던 골짜기의 네 마을 전체가 다 그렇습니다. 저개발은 국부적인 자선행위에 의해서 부분적으로 보충될 수 있는 개별적인 문제가 아니라 식량, 교육, 일거리, 건강유지 등에 있어서 전반적으로 결핍되고 결여된 상태이므로 외부의 대대적인 원조에 의해서만 그 고통이 덜어지고 치유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저는 이 버림받은 가난한 사람들 속에 머물고 있습니다.56)

 

이와 같이 루이 델랑드 신부는 한국 사회가 구조적으로 가지고 있는 빈곤의 악순환이 커다란 문제임을 지적하고 있다. 빈곤의 악순환이 벌어지는 지역에서의 저개발 또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국정부가 이러한 현실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한다고 언급한다.57)

 

이에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따라 자신의 선교방식을 새롭게 바꿈으로써 한국 사회의 현실을 조금이라도 개선하는데 도움을 주려고 한다는 것이다.58) 다시 말해서 그는 장애인, 병자, 고아 등과 같은 ‘부스러기들’을 위한 애덕의 실천이라는 고전적인 선교방법에서 더 나아가 ‘발전’의 요소를 가진 새로운 선교방법을 선택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59)

 

1965년에 은퇴한 루이 델랑드 신부의 능동적 사회복지사업은 그가 예수성심시녀회를 위한 쉼터로 만들었던 갈평으로 들어가 살면서 시도되었다. 1970년 9월 23일 자 편지에서 그는 “1963년 로마를 통해서 회헌을 취득하고, 1965년 3월에 최초의 총회선거가 있은 후에 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과 규정에 의거해서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를 가장 이름 없는 시골, 즉 동해안에 있으며 포항의 본원과 몇 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이곳 갈평에 정착했습니다”라고60) 말하고 있다.

 

사실 갈평은 그의 43년 동안 선교사업에서도 전혀 발견되지 않은 불모지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그는 이곳은 자신으로 하여금 완전한 불모지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해주었다고 말한다. 거기에는 천주교 신자도 한 명이 없는 1,000명의 가난한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즉 그는 마을조차 형성되지 않은 전혀 이름 없는 곳이었으며, 이렇게 완전히 낙후된 지역을 처음 보았다고 말한다.61)

 

그는 1968년 1월 9일 자 편지에서도 갈평에서의 활동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연결해서 언급하고 있다.

 

정확히 말해서, 하느님에게 받고 교회에서 인정한 회헌에 정해진 그의 소명에 충실한 착한 어머니의 사업은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그의 두 번째 가지에서 ”가장 불우한 사람들“에게 봉사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바로 사회 안에서 그러려고 합니다. 매우 가난하고 시설이 부족한 메마른 외교인 사회, 자격 있는 사람들의 협력 거부, 몰이해에서 오는 경멸, 겁 많은 사람들의 반대와 기대, 이런 것들이 처음 출발할 때의 사업의 처지였고, 아마도 인간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계속적인 성공의 이유일 것입니다. 올 1년 동안에 이룩된 것이 이것을 확인하는데, 여기에 그것을 대강 적어놓고자 합니다.62)

 

즉 그는 1965년 은퇴한 후 갈평에서 보낸 자신의 삶이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과 규정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에 그는 바로 갈평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사회복지사업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시도해보고자 하였다.

 

한국의 가련하고 불쌍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사회적 발전과 진보를 이룩하려는 우리 사업에 당신의 관심에 대해서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첫 번째 사업은 자선사업을 위해서 창설된 수녀회의 수녀들이 3년 전부터 맡아서 하고 있으며, 사회의 낙오자들, 사회의 외면당한 사람들(고아들, 불구자들, 불리한 조건에 놓인 사람들, 나환자들, 버림받은 노인들 등)을 돌보는 것입니다. 반면에 순수한 의도로 2년 전부터 실행 중인 제2의 사업은(예컨대 아이들은 돈이 없어서 학교에 갈 수 없음, 농부들은 땅도 논에 댈 물이 없어 생계수단이 없음, 마을에는 교통수단도 통신수단도 위생시설도 그 밖의 어떤 시설도 없음) 사람들을 위한 사업입니다.63)

 

그는 사회의 낙오자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개발에 뒤처져 버림받았으며 재정적 능력이나 당장 생존해나갈 사회적 기반이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서 사회적 발전과 진보를 이룩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루이 델랑드 신부는 “몇 주일 쉬러 오는 것으로 생각했다가 섭리의 명백한 표적으로 3년 전부터 남아 있어야겠다고 믿었던 한국의 깊은 잡목림인 이곳에서도 사업의 제2의 형태, 또는 둘째 지부가 이번에는 바로 ‘사회 안에’, 현재 한국에서 가장 가난한 사회, 발전과 장비가 뒤떨어지고, 시설, 돈, 조직, 구조, 상호부조의 정신 따위가 모두가 없는 사회 안에 자리 잡는 중입니다”64)라고 말한다.

 

이러한 사실은 선교사로서 그가 사회 안, 즉 사회 속에 비로소 자리를 잡고 있음을 알려준다. 가난한 사람들이 고아원이나 병원 등을 찾아오는 방식이 아니라, 그 자신이 직접 가난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로 하여금 실질적인 자립을 할 수 있도록 해주고자 하였다. 그는 보잘 것 없는 이들을 치료하고 보살펴주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그보다는 그들에게 삶의 맛과 공동체 안에서 스스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고자 하였던 것이다.

 

루이 델랑드 신부는 갈평만이 아니라 인접한 지역인 오천으로까지 그러한 새로운 사회복지사업이 확대되고 있음을 또한 알려주고 있다. 1971년 6월 자 편지에서도 “우리들이 오천에서 보다 대규모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실상 이 사도직 활동은 아주 새롭고 미래지향적이며, 제가 보기에는 공의회의 정신과도 일치하고, ‘가난한 자들의 교회’ 정신과도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라고65) 그는 갈평에 이어 오천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도 같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리고 갈평에 이어 오천에서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루이 델랑드 신부는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가난한 이들로 하여금 최소한의 지적 · 물질적 자립을 이룩할 수 있도록 해주는 데에서 더욱 나아가고자 하였다. 그가 사회복지사업에서 더욱 중요하고 본질적인 방향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다름 아니라 그것은 사람을 기르는 문제였다. “자력(資力)이 허용한다면 가난한 사회에서 나와서 이번에는 자기들이 가난한 젊은이들 쪽으로 눈을 돌려 이 사업을 영속시키고 확장하도록 육성된 정수분자들을 만들어 내기를 꾀해야 할 것이다”66)라고 한 그의 유언에서 잘 드러내고 있다.

 

이번 여름에 건립된 이곳의 중앙건물이 모든 시설을 갖춤에 따라서 그 기능을 하기 시작합니다. 즉 주일미사, 교육, 여가 선용, 의료봉사 등을 하는 장소로 말입니다. 이번 겨울부터는 공민교육과 사회교육을 위해서 자신들의 가정과 사회문제를 연구하고, 특히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의 활동을 체계화하는 것을 결코 배워본 적이 없는 어른들의 집회들을 그곳에서 열 생각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지도할 수 있는 사람의 교육과정을 미리 생각해두어야 할 것입니다. (중략)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깨우치니까요. 매 주일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들에게 나눠지는 우리 건물의 커다란 방에 차츰차츰 사람들이 들어찹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아마도 성탄절부터 세례를 통해서 받는 은총의 생활이··· 차근차근 올라가는 정상적인 전진이며 확고한 발전입니다. 자연스러운 행복, 육체적으로 한결 편안한 상태, 지적인 기쁨, 높은 곳에 대한 동경··· 그들은 우리와 함께 발전합니다.67)

 

사실상 이 사도직 활동은 아주 새롭고 미래지향적이며, 제가 보기에는 공의회의 정신과도 일치하고, ‘가난한 자들의 교회’ 정신과도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일로 인해서 저도 해야 할 일들이 많아집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건전하나 가난한 서민들, 유능한 노동자들, 심지어 간부들조차도 노동계층으로, 노련한 교육자들을 지적인 계층으로, 경험 많은 지도자들을 자유주의 계층, 요컨대 사회의 한 엘리트로 상승시키려고 생각하는 것(사회의 여러 계층 중에 자신의 출신계층을 잊어버리지 않고)이, 몽상(유토피아)이나 공허한 상상이 아니라 현재의 사회발전에 있어서 빈민계층의 현실에 대한 해결책이며, 섭리의 지시에 따르는 것입니다.68)

 

루이 델랑드 신부는 자기가 만나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새로운 형태의 사회지도자로 형성시키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사람들을 잘 길러낼 때에 다른 지역에서도 그와 마찬가지의 변화를 계속적으로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때 자기가 새롭게 시도하고 있는 사회복지사업의 미래를 확신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사실 역시 루이 델랑드 신부가 그의 사회복지사업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는 교회 내에서의 평신도의 역할을 강조하였기 때문이다.69) 누구나 알고 있듯이 그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추구한 정신이었다. 평신도가 더 이상 “교계의 도우미”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고유의 독특한 사명을 지니고 활동해야 한다는 것이다.70) 평신도가 성직자 및 수도자와 함께 세상의 복음화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 시야와 활동 범위를 크게 넓혀주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는 평신도들의 수동성이 아니라 능동성을 강조하였다.

 

루이 델랑드 신부는 앞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향방은 이러한 평신도의 역할에 달려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에 그는 이러한 정신을 그의 사회복지사업에도 반영시키고자 하였다. 따라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그의 사회복지사업은 “사회 안에서 시골의 가난한 이들을 돕는 평신도 여자 또는 남자들로 구성된 새로운 공동체”를 창설하려는 것으로까지 나아갔던 것으로 이해된다.71)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그는 한국 천주교회에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를 세우기를 바랐으며, 새롭고 미래지향적인 한국 천주교회를 열 수 있다고 보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기존의 사회복지사업을 변화시키고자 한 루이 델랑드 신부의 새로운 시도는 예수성심시녀회와의 갈등으로 커다란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수녀들에게 새로운 성소에 대해서 이해시키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수녀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수녀들은 루이 델랑드 신부가 하는 일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사업, 즉시 볼 수 있는 결과에 더욱 신경을 썼던 것이다.72)

 

그 결과 그는 버림받은 창설자 혹은 선교사로 불리는 처지가 되기도 하였다. 때문에 그는 홀로 사회복지사업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해야 나가야만 했다. 그러나 1967년에 이르러서야 예수성심시녀회의 수녀들이 갈평에 파견됨으로써 루이 델랑드 신부는 이들 수녀와 함께 새로운 사회복지사업을 전개해나갈 수 있었다.

 

 

4. 맺음말

 

지금까지 한국 천주교 사회복지사의 새로운 이해를 위해서 1960년대를 중심으로 루이 델랑드 신부의 사회복지사업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알아보았다. 일제강점기 이래로 자신의 선교방식인 사회복지사업을 통해서 세상 속의 교회를 지향하고 실천한 루이 델랑드 신부의 삶과 신앙은 이제 근 · 현대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주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현재처럼 사회복지라는 말이 쉽게, 자주 사용되는 현실을 고려할 때에도 그러하다. 루이 델랑드 신부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어느 사회이든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들에게 어떠한 사회복지 방식으로 다가가야 하는가를 깊이 고민한 인물이었다. 그는 시설을 만들어 놓고 앉아서 기다리는 사회복지가 아니라, 그의 표현처럼 사회 속으로, 사회 안에서 그들을 끊임없이 만나는 사회복지를 새롭게 추구했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의 한국사회나 한국 천주교회가 깊이 고민하고 있는, 이미 김수환 추기경이 강조하였던 ‘사회의 인간화 추구’라는 과제의 해결에도 커다란 도움을 준다고 하겠다. 오늘의 사회복지사업이 개별 종교에서는 국가기관의 활동과는 어떻게 달라야 하며, 어떠한 비전을 바탕으로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계속적으로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접근을 통해서 앞으로 한국 천주교 사회복지사 연구에 대한 역사적 접근이 더욱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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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지숙, 《루이 델랑드와 아버지 하느님》, 예수성심시녀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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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조 리베 저, 박은희 역, 《착한 목자 조셉 뷜토 신부》, 내포교회사연구소, 2017.

 

……………………………………………………………

 

1) 박석돈, <가톨릭 복지 사업>, 《한국가톨릭대사전》 1, 2003, 148쪽.

 

2) 이원규, <봉사>, 《한국가톨릭대사전》 6, 2004 ; 박석돈, <사회 복지>, 《한국가톨릭대사전》 6, 2004 ; 박석돈, 위의 글 ; 맹광호, <가톨릭 의료 사업>, 《한국가톨릭대사전》 1, 2003 등의 항목들을 들 수 있다.

 

3) 루이 델랑드 신부의 사회복지사업을 전반적으로 다루거나 소개한 연구로는 예수성심시녀회 편, 《주님 손 안의 연장》, 1996 및 시브로 올리비에, 김효정 역, 《사랑의 선교사 루이 델랑드(1895~1972)》, 예수성심시녀회, 2002가 있다.

 

4) 박석돈, <가톨릭 복지 사업>, 148쪽.

5) 맹광호가 이를 서술하였다.

 

6) 백병근, <제6장 천주교의 교육 · 사회 · 문화활동>, 《한국천주교회사》 5, 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410~426쪽에서 서술되고 있다.

 

7) 이 부분에 대한 서술은 이장우가 담당하였다.

8) 박석돈, <가톨릭 복지 사업>, 140~141쪽.

9) 맹광호, 앞의 글, 188~191쪽.

10) 맹광호, 위의 글, 190쪽.

11) 백병근, 앞의 글, 422쪽.

12) 한국교회사연구소, 영인본 《별》 10호, 1986, 41쪽. 

13) 이하의 내용은 한홍균, <해제>, 《별》, 1986, 3~9쪽을 참고할 것.

14) 내포교회사연구소 편, 《라리보 주교 자료집》 1, 2014, 456쪽.

15) 위의 책, 457쪽.

16) 위의 책, 382~383쪽.

17) 이원규, 앞의 글, 3564쪽.

18) 박석돈, 앞의 글, 148쪽.

 

19) 미조 리베 저, 박은희 역, 《착한 목자 조셉 뷜토 신부》, 내포교회사연구소, 2017을 살펴보면 그 역시 루이 델랑드 신부가 머문 부산지역의 부산진 본당에서 사목했지만, 그 방향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0) 올리비에, 앞의 책, 71~74쪽.

21) 예수성심시녀회 편, 《맨 끝자리에 앉으시오》 Ⅱ, 2000, 7~8쪽.

22) 올리비에, 앞의 책, 129쪽.

23) 예수성심시녀회 편, 《맨 끝자리에 앉으시오》, 1995, 497쪽.

24) 예수성심시녀회 편, 《맨 끝자리에 앉으시오》 Ⅱ, 202쪽 및 2, 243쪽.

25) 위의 책, 243쪽.

 

26)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폐막 50주년을 기념하여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에서 개최한 학술회의인 ‘기억과 희망’, 2015이 바로 그러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전에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다룬 연구들은 신학연구소의 학술지인 《신학과 철학》에 실려 있다.

 

27) 박문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한국 천주교회>, 《민족사와 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과 강인철, <한국교회의 사회참여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종교권력과 한국 천주교회》, 한신대학교출판부, 2008을 대표적인 연구로 들 수 있다.

 

28) 그가 대구에서 가톨릭 신문사 사장으로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자료를 적극적으로 소개

했다는 점과, 그것을 추기경이 된 이후 그의 사목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이다.

 

29) 이 밖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릴 때에 참석했던 윤공희 대주교의 간단한 구술 증언을 찾아볼 수 있는 정도이다(《기쁨과 희망》 15, 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원, 2015에 실린 윤공희 대주교와의 대담인 <숨 가쁜 시대를 살아온 ‘빛 고을의 대부’>를 참고할 것). 이러한 사실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복음의 기쁨》이 나온 이래 《가톨릭신문》 2954호, 2015에서는 <교황 문헌, 얼마나 알고 있나>라는 기사가 지적하고 있듯이 교황 문헌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30) 이원규, 앞의 글, 3564쪽.

31) 박석돈, <가톨릭 복지 사업>, 148쪽.

 

32) 올리비에, 앞의 책이 대표적인 연구로 들 수 있다. 이 밖에 곽지숙, 《루이 델랑드와 아버지 하느님》, 예수성심시녀회, 2013, 146~147쪽에서도 지적되고 있는데, 매우 간단한 언급이다.

 

33) 방상근, <선교회 · 수도회의 정착과 활동>, 《한국천주교회사》 5, 한국교회사연구소, 267~270쪽. 그것은 김정환, <파리 외방전교회와 한국, 그리고 남대영>, 《영성과 자애의 거인 루이 델랑드》, 예수성심시녀회, 2016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34) 예수성심시녀회 편, 《주님 손 안의 연장》, 133~136쪽.

35) 올리비에, 앞의 책, 98쪽.

36) 예수성심시녀회 편, 《맨 끝자리에 앉으시오》 Ⅱ, 94~95쪽.

37) 루이 델랑드 신부는 프랑스에 머물러 있던 떼레즈-마리 수녀의 도움으로 규칙적으로 자료들을 받아보았다.

38) 예수성심시녀회 편, 위의 책, 445쪽.

39) 예수성심시녀회 편, 위의 책, 193쪽.

40) 예수성심시녀회 편, 위의 책, 232쪽.

41) 예수성심시녀회 편, 위의 책, 220쪽.

42) 올리비에, 앞의 책, 31쪽 및 89쪽, 167쪽.

 

43) 올리비에, 위의 책, 29~31쪽을 보면 레오 13세의 회칙인 <노동헌장>이나, 비오 11세의 가톨릭 운동, 비오 12세의 신비체 신학, 요한 23세의 회칙인 <어머니와 교사> 그리고 바오로 6세의 회칙인 <민족들의 발전>도 시기별로 영향을 주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보다 자세한 검토가 필요하다.

한편 요한 23세가 추기경이었을 시절 보좌관이었던 랑베르티니 주교는 1959년 루이 델랑드 신부의 한국 선교지를 직접 방문하였는데(올리비에, 위의 책, 136~137쪽), 이를 통해서 요한 23세의 활동을 파악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44) 예수성심시녀회 편, 《맨 끝자리에 앉으시오》 Ⅱ, 193쪽.

45) 예수성심시녀회 편, 위의 책, 213쪽.

 

46) 예수성심시녀회 편, 《맨 끝자리에 앉으시오》 Ⅲ, 2000, 204쪽과 212~213쪽 및 216쪽. 또한 예수성심시녀회 편, 《맨 끝자리에 앉으시오》, 328쪽에 실린 <우리의 영성(3)>에서도 같은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47) 예수성심시녀회 편, 《맨 끝자리에 앉으시오》 Ⅱ, 255~256쪽.

48) 예수성심시녀회 편, 위의 책, 313쪽.

49) 예수성심시녀회 편, 《맨 끝자리에 앉으시오》 Ⅲ, 214쪽.

50) 예수성심시녀회 편, 위의 책, 213쪽.

51) 예수성심시녀회 편, 위의 책, 212~213쪽.

52) 예수성심시녀회 편, 《맨 끝자리에 앉으시오》 Ⅱ, 202쪽 및 243쪽.

53) 예수성심시녀회 편, 위의 책, 213쪽.

54) 예수성심시녀회 편, 《맨 끝자리에 앉으시오》, 175쪽.

55) 예수성심시녀회 편, 《맨 끝자리에 앉으시오》 Ⅱ, 248~249쪽.

56) 예수성심시녀회 편, 《맨 끝자리에 앉으시오》 Ⅱ, 243쪽.

57) 예수성심시녀회 편, 위의 책, 83쪽.

 

58) 루이 델랑드 신부는 이러한 상황에는 외국으로부터의 원조도 제한되어 가는 요인도 작용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위의 책, 179쪽 및 202, 259쪽 등). 특히 미국 등의 원조가 줄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그는 미국의 원조는 재정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예수성심시녀회 편, 위의 책, 81쪽).

 

59) 올리비에, 앞의 책, 165쪽.

60) 예수성심시녀회 편, 앞의 책, 272쪽.

61) 예수성심시녀회 편, 《맨 끝자리에 앉으시오》 Ⅱ, 211쪽.

62) 예수성심시녀회 편, 《맨 끝자리에 앉으시오》, 157쪽.

63) 예수성심시녀회 편, 《맨 끝자리에 앉으시오》 Ⅱ, 303~304쪽.

64) 예수성심시녀회 편, 《맨 끝자리에 앉으시오》, 165쪽.

65) 예수성심시녀회 편, 《맨 끝자리에 앉으시오》 Ⅱ, 295쪽.

66) 예수성심시녀회 편, 위의 책, 181쪽.

67) 예수성심시녀회 편, 위의 책, 222~223쪽.

68) 예수성심시녀회 편, 위의 책, 295쪽.

 

69) 김수태, <루이 델랑드 신부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수용>, 2016, 119~121쪽. 그는 선교지역의 언어로 성가를 부르는 등 전례 개선에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이 역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사람들 편에 서서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에 참여하고 함께 일을 하고자 하였다. 여기에서도 수동적인 참여가 아니라, 능동적인 참여를 요구하였다. 또한 이를 통해서 지역교회와 문화의 만남도 추구하였다.

 

70) 모린 설리반, 이창훈 역,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가는 길−미래로 나아가는 과거》, 성바오로수도회, 2012, 212쪽.

 

71) 예수성심시녀회 편, 《맨 끝자리에 앉으시오》 Ⅱ, 222~223쪽 및 올리비에, 앞의 책, 163쪽에서 재인용.

 

72) 예수성심시녀회 편, 《맨 끝자리에 앉으시오》 Ⅱ, 218쪽.

 

[교회사 연구 제51집, 2017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김수태(충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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