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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살레시오회 티투스 제만 신부, 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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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1-16 ㅣ No.1747

살레시오회 티투스 제만 신부, 시복

 

 

지난 9월 30일,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Bratislava)에서 교황청 시성성 장관 안젤로 아마토 추기경 주례로 공산주의자들의 박해 시절에 순교한 살레시오회 티투스 제만(Titus Zeman) 신부(1915~1969)의 시복 미사가 봉헌되었다.

 

 

티투스 제만 신부 약전

 

티투스 제만 신부는 1915년 1월 4일, 아버지 얀 제만(Jan Zeman)과 어머니 아녜사 니 그레베치오바(Agnesa nee Grebeciova)의 열 자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어린 티투스 제만은 신심 깊은 가톨릭 신앙의 분위기 속에서 성장을 했다. 그는 열 살이 되던 해 사제가 되겠다고 결심을 했는데, 아무도 그의 결심을 말릴 수 없었다.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던 티투스의 부모는 보콜 신부에게 자신의 아들을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보콜 신부는 티투스에게 이야기했다. “너는 이 학교에 들어오기엔 너무 어리다. 엄마가 네 곁에 계실 수 없는 데다 그리움 때문에 우는 것도 안 돼.” 그러자 어린 티투스가 보콜 신부에게 대답했다. “왜 신부님은 어머니가 이곳에 함께 계시지 못할 거라고 말씀하시죠? 저를 낳으신 어머니는 제 곁에 계시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도움이신 마리아께서 여기 계시잖아요. 성모님께서 저를 돌봐 주실 거예요. 저는 울지 않을 겁니다. 천상 어머니께서 저와 함께 계시니까요.” 그 순간 할 말을 잃은 보콜 신부는 부모에게 이야기했다. “티투스는 살레시오 학교에서의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건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뜻과 힘겨루기를 할 수 없습니다.”

 

살레시오회원으로 살려고 결심한 티투스는 1932년 8월 6일 첫 서원, 1938년 3월 7일 종신서원을 하였다.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신학 공부를 한 그는 1940년 6월 23일, 토리노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 이후 고국 슬로바키아로 돌아와서 젊은이들을 위한 사목을 펼쳤다.

 

젊은이들을 위해 열정적으로 사목 활동을 하던 그에게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1950년 4월에 체코슬로바키아에 들어선 공산주의 정권은 수도자들을 억압하는 정책을 펼쳤고 그들의 상당수를 강제수용소로 보내기 시작했다. 젊은 수도자들이 공부를 마치려면 비밀리에 토리노로 그들을 이동시킬 필요가 있었다. 티투스 신부는 이 일이 위험한 행동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토리노로 이동할 60명 이상의 젊은 살레시안들을 두 팀으로 조직했다. 이 과정에서 망명자들과 함께 가는 동안 체포되었다. 그는 조국의 배신자요 바티칸의 스파이로 고발당하여 사형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1952년 2월 22일에 재판부는 티투스 신부의 상황을 감안하여 징역 25년으로 감형했다.

 

티투스 제만 신부는 1964년 3월 10일, 감옥에 들어간 지 12년 만에 석방되었다. 오랫동안 감옥에서 겪은 시련의 고통 때문에 그는 석방된 지 5년 후인 1969년 1월 8일에 선종했다. 선종 후, 그의 거룩하고 순교적인 삶은 날이 갈수록 세상 속으로 퍼져 나갔다. 2010년에 교구 차원에서 티투스 제만 신부에 대한 시복 조사가 시작되었고, 2017년 2월엔 프란치스코 교황이 순교자의 삶을 살았던 그의 성덕을 인정했다. 그리고 7개월 후인 지난 9월 그는 복자품에 올랐다.

 

[살레시오 가족, 2017년 11월호(1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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