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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정진석 회고록67: 꿈에도 못 잊을 북한 신자들과 메리놀외방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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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9-23 ㅣ No.478

[추기경 정진석] (67) 꿈에도 못 잊을 북한 신자들과 메리놀외방선교회


평양교구와 운명 같이한 선교사와 양떼가 꿈엔들 잊힐리야

 

 

- 1948년 10월 10일 평양 관후리 주교좌성당 사제관 앞에서 최항준ㆍ서항석 신부의 사제 서품식을 마친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제6대 평양대목구장 홍용호 주교와 사제단.

 

 

2007년은 정진석 추기경이 교구장 서리로 있는 평양교구의 교구 설정 80주년이었다. 정 추기경은 평양교구의 사목 책임을 맡고 있으면서도 정작 평양을 갈 수 없는 분단의 현실이 가슴 아팠다. 그는 교구장 서리를 맡은 이후 아직도 북녘 어딘가에 남아 있을 평양교구 신자들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북한과 평양교구에 대해서는 한국보다 외국에서 더욱 관심이 높았다. 

 

바티칸에서 열린 추기경 서임식에 참석했을 때, 외국 추기경들과 외신들이 가장 관심을 표명한 부분은 북한 교회 문제였다. 교황도 정 추기경이 평양교구장 서리를 맡고 있다는 것을 반기면서 북한 교회를 위해 특별히 기도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럴 때마다 정 추기경은 교류가 막혀 이산가족들이 서로의 생사를 알 수조차 없는 오늘날 한반도의 현실이 안타까웠다. 

 

평안도 지역은 지리적으로도 우리나라 복음화의 대표적인 길목이었다. 그러나 1920년대 이전 평안도 지역의 복음화율은 그렇게 만족할 만한 상태는 아니었다. 당시에는 본격적인 복음화가 이뤄지지 못했다. 반면 개신교는 일찍부터 평양 지역에 진출해 수많은 신도와 교회를 갖고, 교육과 아동 교육, 사회복지 사업 등에 정진함으로써 선교를 거의 독점했다. 개신교에서는 당시 평양을 아시아의 예루살렘이라 부를 정도였다.

 

북녘 본당에 있던 성전들의 모형도.

 

 

천주교는 1927년 3월 17일 서울대목구에서 평양지목구가 분리될 때, 1923년부터 이곳에 진출해 선교 중이던 미국 메리놀외방선교회 신부들에게 평안도 지방 선교 사업을 위임했다. 평안도 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비교적 늦게 선교가 이뤄졌지만, 꾸준히 교세가 늘어나 1927년에는 지목구로 설정됐다. 초대 지목구장에는 번(Byrne, 方) 신부가 취임했고, 2대는 모리스(Morris, 睦) 신부가, 그다음으로 부드(Booth, 夫) 신부가 교구장 서리로 임명됐다. 부드 신부가 재임 중이던 1939년 7월 1일 교황청은 평양지목구를 대목구로 승격시켰다. 이에 따라 오세아(O’Shea, 吳) 주교가 그 해 10월 29일 정식으로 교구장에 임명됐다.

 

그동안 평양교구는 선교는 물론 출판, 문화 사업과 각종 사회복지 사업을 활발히 전개해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했다. 그러나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일제는 적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 국적의 성직자를 감금하고 끝내 국외로 추방했다. 그래서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가 잠시 평양교구장 서리를 맡았다가 1944년 4월 17일 홍용호 주교가 평양교구장에 임명됐다. 홍 주교는 해방 뒤인 1949년 공산당에 납치돼 행방불명됐다. 1950년 유엔 연합군이 평양을 수복한 후, 교황청은 캐롤(George Carroll, 安) 신부를 평양교구장 서리로 임명해 교회 복구 작업에 착수토록 했으나 1ㆍ4 후퇴로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결국 북한은 다시 침묵의 교회로 남게 됐다.

 

이러한 역사를 거쳐 평양교구장 서리를 이어받은 정 추기경이었다. 역사를 되짚어 볼 때마다 그는 늘 메리놀외방선교회가 평양 지역에 정착한 것은 하느님의 섭리라고 생각했다. 1920년대에는 이미 베네딕도회가 함경도 선교를 맡고 있었고, 평안도 지역은 미국 개신교가 크게 성공한 상황이었다. 

 

본래 교황청은 메리놀외방선교회를 중국에서 선교하도록 준비하고 있었는데, 중국에 들어가는 것이 시기적으로 이르다고 판단해 1923년 중국의 이웃인 북한의 평양으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메리놀외방선교회 선발대가 평양에 도착해서 보니 개신교가 거의 독점적으로 활동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메리놀외방선교회는 북쪽인 신의주로 가기로 결정했다. 신의주에서 선교를 시작해 점차 안정이 되면 남쪽 평양으로 내려와 자리를 잡겠다는 계획이었다. 다행히도 이 전략이 성공해 메리놀외방선교회가 평양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은 미국 국적의 메리놀회 선교사와 수녀들을 추방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함경도에서 활동하던 독일 베네딕도회는 독일이 일본과 동맹국이어서 추방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추방된 미국 선교사들은 해방 후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6ㆍ25 전쟁 때 군종 신부로 자원해 몇 달간만 북한 땅에 돌아올 수 있을 뿐이었다.

 

2007년 3월 18일 서울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봉헌된 평양교구 설정 80주년 기념 행사에서 정진석 추기경이 메리놀외방선교회 사제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이처럼 2007년에 설립 80년을 맞는 평양교구의 역사는 메리놀외방선교회 역사의 일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리놀외방선교회는 정 추기경과도 인연이 깊은 수도회다. 그동안 메리놀회는 평양ㆍ청주ㆍ인천교구의 설립을 통해 한국 교회가 오늘날의 모습을 갖출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해 줬기 때문이다. 정 추기경은 메리놀외방선교회가 한국 교회의 자립을 위해 무엇보다 한국인 사제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던 점을 깊이 감사하고 있었다. 메리놀외방선교회는 평양 지역의 실질적인 문화 중심 역할을 했으며, 특히 일본 식민 통치하의 암흑 시기에도 우리 민족의 민족적 자존심과 독립에의 희망을 잃지 않도록 많은 이들에게 빛을 줬다. 

 

평양교구는 1945년 해방 당시 관후리(館後里)본당을 비롯한 본당 19곳, 공소 106곳, 교육기관 22개, 복지기관 17곳을 운영했으며, 신자 수는 1만 6400여 명이었다. 그러나 공산 정권의 납치로 많은 한국인 사제가 행방불명됐으며, 다행스럽게 살아남은 이들은 월남했다. 특히 6ㆍ25 전쟁 중 죽음의 행진 끝에 순교한 번 주교는 메리놀외방선교회의 첫 선교사이자 초대 평양교구장으로서 순교의 모범을 보여 줬다. 

 

정 추기경은 이처럼 우리 민족과 동고동락했던 메리놀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의 희생과 노력이 점차 잊혀 가는 것이 안타까웠다. 현재 북한 교회는 모두 폐쇄됐고, 단 한 명의 성직자나 수도자도 없는 상태다. 정 추기경은 평양 지역과 가까운 경기도 파주에 민족화해센터와 참회와 속죄의 성당을 건립하려 했다. 이는 선교사들의 노고와 희생, 그리고 평양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신자들을 잊지 말자는 취지에서였다. 

 

정 추기경은 남북한의 화해는 남북이 서로 참회함으로써 하느님의 정의인 용서와 관용의 길로 이뤄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성당 건립의 아이디어를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에 있는 ‘예수성심대성당’에서 가져왔다. 이 성당은 100여 년 전 프랑스와 프러시아 사이에 벌어진 전쟁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건립된 것이다. 전쟁으로 인한 서로의 잘못을 참회하기 위해 프랑스 전 국민의 헌금으로 건립된 성당이었다. 참회와 속죄의 성당도 파리 몽마르트르의 예수성심대성당과 같은 목적을 가진 성전이 되기를 기대한 것이다. 정 추기경은 또 분단의 현장을 찾는 많은 사람들, 특히 외국인들이 이 성전에 찾아와 남북한의 화해와 일치, 세계 평화를 기도하고 돌아가길 기대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9월 24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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