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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심리로 풀어 보는 세상사: 선생님을 살려 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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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9-17 ㅣ No.419

[심리로 풀어 보는 세상사] 선생님을 살려 내야 하는 이유

 

 

학교 ‘짱’의 추억

 

요즘처럼 ‘일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예전에도 학교마다 잘나가는(?) 아이들이 있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친구 한 명은 또래와는 차원이 다른 골격과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눈빛만으로도 학생들을 바로 주눅 들게 만들었다. 주먹도 눈빛에 못지않아서 개학한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학교를 평정해 버렸다. 누구나 인정하는 학교의 ‘짱’이 된 것이다.

 

그 당시에는 잘 몰랐는데, 지금에 와서야 흥미로운 것은 ‘짱’을 먹었던 그 친구가 선생님들한테는 꼼짝도 못 했다는 것이다. 몸이 너무 왜소해서 살짝 밀치기만 해도 바로 휘청거릴 것만 같던 선생님 앞에서도 그 친구는 다른 학생들과 똑같은 학생일 뿐이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면, 당연히 그 말씀에 따라야 한다는 점에서는 그 친구나 다른 친구들이나 차이가 없었다. 심지어 선생님이 비합리적인 지시나 요구를 하더라도 ‘짱’도 별 수 없이 선생님의 말씀을 따를 뿐이었다.

 

어쩌면 학생들이 선생님을 폭행했다는 뉴스가 심심찮게 나오는 요즘에는 상상하기 쉽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교감 선생님한테 담배를 뺏기고 야단을 맞자, 교감 선생님의 머리와 배 등을 주먹과 발로 폭행한 사건. 방학의 보충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휴대 전화를 뺏었다고 칼을 꺼내 위협한 사건. 이제는 학생들이 선생님께 가하는 폭력은 일상화되었고, 그 강도는 우리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요즘과 비교하여 달랐던 것 가운데 또 하나는 그 당시에는 ‘왕따’라고 불리는 형태의 집단 따돌림이 없었다는 것이다. 특이한 친구들은 꽤 있었다. 말은 청산유수였는데, 중학생인데 글을 제대로 읽지 못했던 친구, 구구단을 외우지 못하던 친구, 뚱뚱한 몸집에 변성기가 지났는데도 여자 목소리를 내면서 땀 냄새를 진하게 풍기던 친구들 말이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집단 따돌림의 피해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친구들이 분명히 존재했지만, 그 당시에는 특정인을 왕따로 삼아서 괴롭히는 일은 없었다. 서로 친한 친구들이 달랐을 뿐이지, 누군가를 반 전체가 괴롭히거나 착취하는 일은 없었다.

 

 

나를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존재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을까?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선생님이 의미하는 바가 크게 달라졌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지난날의 선생님은 단순히 어떤 지식을 가르쳐 주는 사람을 넘어서는 존재였다. 선생님은 인간의 도리가 무엇인지 알고,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을 하나의 통합된 인격체로 만들어주는 스승이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 속에는 자신에게 단순한 지식만을 전달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하나의 완성된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존재에 대한 존경심이 내포되어 있다. 예전에 선생님의 한마디에 학교의 ‘짱’도 고개를 숙였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주먹으로 학교를 주름잡던 친구에게도 자신을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존재에 대한 존중과 존경이 있었던 것이다.

 

학교에서 가장 잘나가는 ‘짱’을 포함해서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이런 생각을 품었던 것은 사회가 선생님을 그런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곧, 학생들의 생각은 당시 우리 사회가 선생님이라는 대상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학부모의 입장에서 선생님은 자신의 아이를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존재였다. 빗나가려는 자신의 자식에게 매를 든 선생님에게 감사한 마음이 먼저 들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선생님은 아이들을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스승이라고 믿고 있었고, 학생들도 자연스럽게 사회 전체가 갖는 믿음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던 시대였다.

 

 

돈 내고 사는 서비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선생님에 대한 존중을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선생님이라는 존재는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으로 한정되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비용을 지불하고 받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서비스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었다. 선생님은 학부모나 학생에게 그저 지식 전달의 기능을 담당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우리 사회가 선생님을 지식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으로 한정하면서부터 선생님은 폭력의 대상이 되었다. 예전에는 선생님의 한마디에 학교의 ‘짱’도 고개를 숙였지만, 요즘은 서비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돈을 지불한 ‘갑’의 위치에서 자신의 돈을 받고 일한다고 생각하는 ‘을’인 선생님께 불만과 폭력을 행사한다.

 

 

존경받는 심판이 필요한 사회

 

선생님에 대한 존중이 사라진 시대의 사회 현상 가운데 하나는 집단 따돌림과 같은 학교 폭력이다. 학교 폭력이 우리 사회의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한 시점은 선생님들에 대한 사회적 존중이 사라진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선생님의 존재감이 약화되자, 학내에서 약자에 대한 폭력이 증가한 것이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선생님은 지식을 전달하지만, 동시에 학생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조율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경기의 심판을 보는 것이 선생님이다. 학교를 축구 경기장이라고 하면 학생은 선수이고, 선생님은 심판이다.

 

심판의 주된 역할은 반칙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기를 진행하고, 선수들이 반칙을 저지르면 주의나 경고, 심지어는 퇴장 조치를 취해서라도 경기 규칙을 지키게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심판, 곧 선생님들에게 권한이 있어야 한다. 권한이 없는 심판의 지시는 선수들이 무시하기 때문이다.

 

학교 폭력에 대한 다양한 대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런데 많은 경우, 대책은 선생님들의 권한보다는 책임에 초점을 맞춘다. 선수들이 더 이상 존경심을 보이지 않는 심판에게 사회가 계속 책임을 묻게 되면, 반칙은 줄어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

 

사회가 심판의 권한과 경기 운영의 자율권은 대폭 제한하면서 책임만 계속 물으면 선수들은 심판을 더 우습게 여기고 그의 지시를 무시하게 된다. 학교 폭력을 포함한 다양한 학교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심판의 권한과 경기 운영의 자율권을 늘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기적으로는 사회적 차원에서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을 살려야 한다. 선수들은 자신들이 존경하는 심판이 나오면, 옐로카드나 레드카드를 꺼내지 않더라도 심판의 지시를 믿고 따르게 된다. 존경하는 심판이 있는 경기장에는 무질서와 폭력이 존재할 수 없다.

 

선생님이 존경받는 사회에서 학생은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고, 그때야 비로소 학교는 하나의 완성된 인격체를 만드는 공간으로 살아나게 된다.

 

선생님이 살아나야 학교가 살아나고, 그래야 학생이 살아난다. 그리고 학생이 살아나야 나라가 살아나는 것이다.

 

* 전우영 - 충남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무료 온라인 공개강좌 서비스인 케이무크(K-MOOC)에서 일반인들을 위해 쉽게 디자인한 ‘심리학 START’를 강의하고 있다. 「나를 움직이는 무의식 프라이밍」, 「내 마음도 몰라주는 당신, 이유는 내 행동에 있다」 등을 펴냈다.

 

[경향잡지, 2017년 9월호, 전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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