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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읽기: 제7권 사랑이 진리를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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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8-18 ㅣ No.339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읽기 - 제7권] 사랑이 진리를 깨닫게 한다

 

 

“찬미하는 사람의 고백이거나 뉘우치는 사람의 고백이거나”

 

아우구스티노는 「고백록」을 왜 썼을까? 그리스 문학가든 로마 정치인이든 자서전을 쓸 때는 설화에 가까운 영웅담들, 지인들과 주고받은 서간들을 싣고서 ‘자기선전’이라는 수사학적 허세를 부리기 마련이었다. 바오로 사도 이후 그리스도교의 가장 위대한 이 교부는 생애 전반부를 담담하게 들려주면서 하느님과 독자들 앞에 자비와 동정을 비는 참회를 써내려 간다.

 

395년에 히포의 주교로 서품된 아우구스티노가 북아프리카 교회를 결딴내다시피 한 도나투스파 이단에 정면으로 맞서자 “저자가 도대체 누구야?”라는 인신공격이 쏟아져 나왔다. 새 주교는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밝힌다. “저의 선업을 두고는 안도의 한숨을, 저의 악업을 두고는 탄식의 한숨을 쉬면 좋겠습니다. 저의 선업은 당신의 업적이자 당신의 선물이며, 저의 악업은 저의 죄악이자 당신의 심판입니다”(10.4.5). “그토록 많은 제 죄의 질병에서 제가 누구 덕분에 빠져나왔는지 보았다면 자기가 그 많은 죄의 질병에 시달리지 않았음이 바로 그분 덕분임을 발견하겠기에 말입니다.”(2.7.15)라는 기대에서였다.

 

「성경의 시편」, 단테의 「신곡」과 더불어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으로 한국 가톨릭 문학에서 가장 아름다운 번역문을 남긴 시인 최민순 신부님이 우리가 읽어 온 이 책에 ‘님 기림’이라는 부제를 단 것은 참으로 멋진 재치였다. 실상 책 전체에 자기를 지성적 오류와 도덕적 죄악에서 해방해 주신 하느님의 자비에 드리는 ‘찬미의 고백’과 ‘지은 죄의 고백’, 그리고 후반부의 창조론에 드러나는 ‘신앙의 고백’ 셋이 촘촘히 엇갈려 있다.

 

헬레니즘 문화의 과장된 ‘자아 성취록’과는 판이하게도 세계 문학사에서 이 책은 자기 죄악의 체험에서 오는 심리적 갈등을 거쳐 한 지성이 하느님께 돌아가는 종교적 서사시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참회자가 회중 앞에서 땅에 엎드려 바치는 시편 51(50)편 ‘미세레레’에 버금가는 공개 보속이다. 또한 신비신학에서는 “하느님의 침묵 앞에서 써 내려가는 짝사랑의 연서”(O’Donnell)이다.

 

 

“어디까지 가야 할지 아는 사람들과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

 

「고백록」의 13권 가운데 딱 중간에 자리 잡은 제7권을 읽는 독자에게는 하느님께서 아우구스티노에게 드디어 손을 쓰시기로 작정하신 기미가 엿보인다. 본인도 “당신의 오른손이 진즉부터 제게 닿아 있었고 진창에서 저를 끄집어내어 씻어 주실 작정임”(6.16.26)을 예감한 참이다.

 

384년 가을, 북아프리카 출신 아우구스티노는 로마 황실 수사학 교수로 출세해서 밀라노에 와 있었다. 모친과 아이엄마와 식솔들도 바다 건너 쫓아왔다. “그러는 동안 못되고 삿된 저의 청춘은 죽어 버렸고 어느새 장년기로 접어들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허영으로 추해졌습니다.”(7.1.1)라고 자백하지만, 진리를 찾아가던 구도의 길에 드디어 세 단계 ‘회심’이 일어난다.

 

첫 번째는 마니교 선악 이원론을 빙자하여 자기가 무슨 못된 짓을 저질러도 우주를 지배하는 악의 원리에서 비롯하지 자기 탓이 아니라는 자기기만이 깨어지는 ‘도덕적 회심’(제6권)이다.

 

두 번째는 세상에는 물체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며 회의론에 휘말리다 신플라톤 철학의 서적들을 접하면서 하느님 같은 영적인 존재도 있음을 수긍하고 그리스도라는 중개자의 필요를 인정하는 ‘철학적 회심’(제7권)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이라는 진리에 평생을 헌신하겠노라 선언하는 ‘종교적 회심’(제8권)이다.

 

서양 사상사에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합류하는 ‘양수리’(兩水里)로, 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가 고대의 플라톤과 근대의 칸트와 더불어 ‘근원적으로 사유한 철학자’로 꼽은 아우구스티노의 ‘철학적 회심’이 제7권에서 ‘진리를 향한 상승의 길’(7.9.13?21.27)이라는 제목으로 치밀하게 묘사된다. 그리고 사변적 득도와 실존적 구원은 구도자의 정신 자세 곧 겸손과 오만으로 좌우된다는 깨달음도 얻는다. 오만한 지성, 그것은 “자기가 만든 우상의 신전, 당신께 가증스러운 신전”(7.14.20)일 따름이다. “당신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신다는 점과, 당신의 말씀께서 사람이 되셔서 사람들 가운데 사실 만큼 겸손의 길을 통해서 당신의 자비가 얼마나 큰지 사람들에게 드러났다는 사실”(7.9.13)이 가슴에 와닿았다.

 

밀라노 지성인들을 사로잡던, 플로티노스의 「엔네아데스」를 읽고 난 감회를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회고한다. “당신께서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머리를 안아주시고 저의 눈을 감겨 주셔서 더 이상 헛것을 보지 않게 하신 다음에는 저도 깜빡 제게서 놓여났고 그러다 깨어나 당신 품에서 눈을 떴습니다”(7.14.20).

 

“또 놀랍게도 어느덧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하느님을 향유하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당신의 아름다우심으로 말미암아 당신께 사로잡혀 가고 있으면서도 머지않아 저의 중력에 눌려 당신께로부터 떨어져 나가곤 하였으며 … 저 중력이란 곧 육욕의 습관이었습니다”(7.17.23).

 

이어서 교부는 철학과 종교의 차이, 사변적 추정과 신앙적 고백의 거리에 눈뜬다. “어디까지 가야 할지 아는 사람들과 그것을 알아도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 사이가 얼마나 거리가 먼지, 행복을 주는 고향으로 데려가는 길을 감지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곳에서 살기에 이르는 것 사이에 얼마나 거리가 먼지를 분간하게 만드셨습니다”(7.20.26).

 

그리스 철학자들의 책에는 “경건심의 얼굴도, 고백의 눈물도, 당신께 드리는 희생 제사도, 괴로워하는 영도, 부서지고 꺾인 마음도 없었습니다”(7.21.27). 역사상 최초의 실존주의자에게 참된 철학이란 여생을 오롯이 바칠 만한 ‘참된 종교’여야 했다.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니다”

 

그럼 철학자들과 종교인들의 안광은 어떤 점에서 다른가? 사람이 어떻게 진리를 알까?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훈계대로 인간 내면에 들어가 의식과 기억을 분석하면서 진리를 찾아가는 사다리를 그가 찾아낸 것도 밀라노에서였다. 진리를 찾아서 “밖으로 나가지 말라. 그대에게로 돌아가라. 인간의 내면에 진리께서 거하신다. 그리고 그대의 본성이 가변적임을 발견하거든 그대 자신도 초월하라. 하지만 기억하라, 그대가 자신을 초월할 때 그대가 초월하는 바는 추론하는 영혼임을! 그러니 이성을 비춰 주는 원초적 광명이 빛나고 있는 그곳을 향하여 나아가라”( 「참된 종교」 39.72, 성염 역주, 분도출판사, 1988년).

 

들에 핀 무수한 화초를 보면서 사람은 ‘꽃’이 무엇인지 뽑아내서 알아 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추상설’(抽象說)이다. 그런가 하면 플라톤의 ‘상기설’(想起說)도 있다. 곧 손에 들고 코로 냄새 맡는 꽃이든 사진이나 기억으로 떠올리는 꽃이든 색색의 식물을 ‘꽃’이라고 알아보는 까닭은, 우리 영혼이 육체로 귀양 오기 전에 전생에서 ‘꽃’이라는 이념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노는 한걸음 나아가 ‘꽃은 아름답다.’라는 진선미의 판단이 어디서 올지 궁금했다.

 

“천상 물체든 지상 물체든 물체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면서, 대체 무엇이 제 앞에 현전(現前)하기에, 제가 가변적인 사물들을 두고서 ‘이것은 이래야 되고, 저것은 저래야 된다.’고 판단하거나 말하는지, 그 근거가 무엇인지를 따지게 되었습니다. … 저는 가변적인 저의 지성 위에 진리의 영원, 불변하고 참된 영원을 발견했습니다”(7.17.23). “당신 빛으로 저희는 빛을 봅니다.”는 시편(36,10)의 말씀대로, 인간이 사물에서 선하고 아름답고 참되고 확실함을 알아보는 빛은 위에서 쏟아져 내리며, 그 빛 자체가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이시라는 깨달음이 아우구스티노의 인식론인 ‘조명설’(照明說)이다.

 

“저는 제 자신에게 돌아가라는 권유를 받았고 당신의 이끄심으로 저의 내면 깊숙이 들어갔는데 … 제 영혼의 어떤 눈으로 보았습니다, 제 영혼의 눈 바로 그 위에, 저의 지성 위에 불변하는 빛을. … 그 빛이 저를 만들었으므로 제 위였고 그 빛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므로 제가 그 아래였습니다. 진리를 아는 이는 그를 알고 그를 아는 이는 영원을 압니다. 사랑이 그를 압니다. 오, 영원한 진리여, 참된 사랑이여, 사랑스러운 영원이여! 당신께서 저의 하느님이시니 밤낮으로 당신을 향해 한숨짓습니다”(7.10.16).

 

그리스인들은 ‘알면 사랑한다.’고 했다. 아우구스티노는 그 말을 뒤집어 ‘사랑하면 안다.’고 한다. 사랑하면 진리를 알고 하느님을 알고 사람을, 특히 한숨에 젖고 눈물 흘리고 굶주리는 사람들을 알아본다! 19세기에 이르면 이는 마르크스의 입에서 그런 사람들과 ‘함께하면’ 진실을 안다는, ‘사회적 사랑’으로 바뀔 한마디였다.

 

* 성염 요한 보스코 - 「신국론」과 「삼위일체론」을 번역하고, 최근 「고백록」을 펴냈으며, 지금도 지리산 자락에서 아우구스티노의 원전 번역에 몰두하고 있다. 1986년 교황청립 살레시오 대학교에서 라틴 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와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 주교황청 한국대사(2003-2007년)를 지냈다. 

 

[경향잡지, 2017년 8월호, 성염 요한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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