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 (수)
(백) 부활 제4주간 수요일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레지오ㅣ성모신심

허영엽 신부의 나눔: 인생의 눈을 뜨게 한 영원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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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6-05 ㅣ No.526

[허영엽 신부의 ‘나눔’] 인생의 눈을 뜨게 한 영원한 사랑

 

 

황금찬 시인이 향년 98세의 일기로 지난 4월8일 새벽 별세했다. 생전 시집 40권과 수필집 수십여 권 등 많은 저서를 남긴 황 시인은 동성고등학교에서 30여 년간의 교직생활을 했고, 대학에서도 수년간 후진 양성에 매진했다. 그는 마흔 번째 시집을 내는 게 소원이라며 말년까지 작품 활동을 했다고 한다. 향토적 정서나 기독교 사상에 바탕을 둔 서정시부터 현실에 대한 지적 성찰이 담긴 작품까지 무려 8천 편이 넘는 시를 남겼다.

 

오래 전, 황금찬 시인의 자전적 에세이 ‘人生의 눈 뜨게 한 영원한 사랑’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그 신문기사를 스크랩해서 가지고 있을 만큼 여운이 컸다. 얼마 전 다시 꺼내본 그 신문은 누렇게 바래 있었다. 다시 찬찬히 읽어보니 그때의 그 감동이 다시 밀려왔다.

 

글은 남편을 사별한 어느 부인이 “딸을 잃는 것과 부인을 사별한 것과 어느 편이 더 슬픕니까?”라고 질문하며 시작한다. 시인은 그 질문에 대해 “아내를 사별한 것보다 딸을 잃은 것이 더 슬프지요. 그렇지만 아내와 사별한 것은 더 무섭지요.” 라고 답한다. 그리고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에게 가장 괴로운 일은 굶는 일이고 가장 슬픈 일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괴로움은 자기의 건강을 잃는 일일 것이다. 사람이 한평생을 살면서 이 세 가지를 맛보지 않았다면 그는 우선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나 굶는 일은 일시적인 현상일 수 있고 앓는 것도 나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하는 것은 그 슬픔을 형용할 수조차 없다.”

 

 

마음이 아름답지 않으면 결코 남들을 아름답게 볼 수 없다

 

시인은 애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랑하던 딸을 잃었다. 딸이 대학 졸업이 한 달도 남지 않았던 어느 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딸이 떠난 후 시인은 딸아이가 다니던 학교를 수없이 찾아갔다. 시인은 애끓는 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의 자취가 교정 어디엔가 남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돌계단에도 앉아보고 도서관 빈자리, 썰렁한 식당에도 가보았다. 여름 어느 날 한적한 일요일, 그날도 나는 그 아이의 음성이 교정 어느 구석에 남아있을 것이라는 조바심 때문에 대학교정을 찾아갔었다. 교정은 숲으로 우거져 하늘이 잘 보이지 않는데 이름 모를 새가 슬프게, 아주 슬프게 울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가 저 새가 되었으리라 생각하고 울고 있는 새 앞으로 가 딸아이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애리야, 애리야.’ 새는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피를 토하듯 더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새는 분명 ‘아버지 왜왔어, 아버지 왜왔어’하고 우는 것 같았다. 나는 결국 그날 온종일 교정을 떠나지 못했다.(후략)”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린 딸을 생각하면 시인은 견딜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딸의 죽음으로 인해 아내가 병을 얻었다. 입원비와 약값을 마련하기 위해 박수근 화백이 그려준 그림까지 싼 값으로 팔아야 했다. 결국 시인의 아내도 영영 그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시인은 에세이 끝에 다음과 같이 자신의 고통스런 체험을 전한다.

 

“(전략) 딸의 죽음과 아내의 타계는 나에게 인생의 깨달음을 주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보지 않고는 하느님의 슬픔을 알 수 없는 것 같았다. 가버린 두 사람을 사랑하고 나의 이웃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에게는 적이 없다. 오직 사랑의 대상이 있을 뿐이다, 라는 생각. 내가 젊은 날엔 남을 미워하기도 했고 시기와 질투도 했었다. 나는 금년에 상재한 시집의 제목을 ‘보석의 노래’라고 했다. 그리고 그 서문에 마음이 아름답지 않으면 결코 남들을 아름답게 볼 수 없다고 썼다. 모든 사람들을 보석으로 보고 싶은 것이다. 먼저 간 두 사람이 내게 준 것은 결코 슬픔만은 아니었다. 남을 사랑하는 마음을 유산으로 준 것이다.”

 

 

우리가 실천하는 ‘사랑’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감사의 응답

 

사랑은 강력한 힘을 가진 정서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사랑은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동기로서 작용한다. 사랑은 사람을 행복하게도 하지만 슬프고 외롭게도 만든다. 사랑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고통을 감내하고 희생을 감수하기도 한다. 그만큼 사랑은 인간의 여러 정서 중에 빼놓을 수 없는 핵심이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 대한 추상적인 사랑 대신 가까이 있는 이웃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행위를 요구하였다. “제 눈으로 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눈으로 보지도 못하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20-21) 이처럼 이웃 사랑의 계명은 말로써 완성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써 보일 때에 비로소 완성된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이 말씀이야 말로, 거짓 사랑이 아닌 참사랑에 대한 요구이리라.

 

이웃 사랑의 실천은 결코 말처럼 쉽지 않다. 자칫하면 그 사람을 동정하거나 측은하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나의 벗으로 모시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우리가 실천하는 ‘사랑’은 하느님의 가르침인 동시에, 하느님 사랑에 대한 감사의 응답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년 6월호,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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