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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진리를 찾아서: 성체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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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5-17 ㅣ No.1813

[진리를 찾아서] 성체성사 (1)

 

 

삶에서

 

유학 생활 중 해마다 사순 시기와 대림 시기에는 언어도 배울 겸 해서 이탈리아 북쪽 토리노 근처에 있는, 토르토나 교구 소속의 ‘스타차노’라는 작은 시골 본당에서 보낸 적이 있다. 그 본당에는 부임하신 지 30년이 넘은 할아버지 신부님이 혼자 계셨다. 신부님은 고해성사를 보러 언제 올지도 모를 신자들을 기다리라고 하시며 나를 좁은 고해소에 하루 종일 감금 하기(?)도 하셨다.

 

유럽의 많은 성당처럼 스타차노본당도 지은 지 몇 백 년이 넘은 본당이다. 그곳에서 풍기는 세월의 향기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맡을 수 없는 소중한 보물이었다.

 

특히 성물을 비롯한 성당 기물 하나하나가 내 나이보다 열 배는 족히 넘는 것이었다. 향로와 향합, 성작, 촛대, 스테인드글라스…. 그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미사 때 착용하는, 화려한 금실로 수놓은 바이올린 모양의 제의였다.

 

이 제의는 2백 년이 넘은 것으로, 다른 어느 것보다 세월의 향기가 짙게 묻어났다. 여러 가지 문양을 그려 넣은, 화려하고 꽤 무거운 제의였는데, 그 무게 때문인지 제의를 입을 때면 주님 앞에 나아가는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꿋꿋하게 지켜 주는 것만 같았다. 신앙 선조들이 왜 이렇게 제구 하나하나에 정성을 들였는지 미사를 봉헌할 때마다 그들의 깊은 신심이 느껴졌다.

 

 

다가가기

 

교회 생활의 원천이며 정점인 성체성사는 우리 신앙의 요약이고 집약이다. 155년 무렵 순교자 유스티노 성인이 이교도 황제인 안토니누스에게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하는지 설명하고자 쓴 글을 보자(가톨릭교회 교리서, 1345항 참조).

 

“일요일이라고 불리는 날, 도시나 마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한곳에 모입니다.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사도들의 기록과 예언자들의 글을 읽습니다. 독서가 끝나면, 모임을 주재하는 사람이 그 훌륭한 일들을 본받으라고 권하고 격려하는 말을 합니다.

 

그다음에는 모두 함께 일어나 기도를 합니다. … 다음에 형제들의 모임을 주재하는 사람에게 빵과, 물과 포도주를 섞은 잔을 가져다줍니다. 그 사람은 이것을 받아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우주의 아버지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고, 우리가 그 선물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뽑힌 데 대하여 오랫동안 ‘감사’를 드립니다.

 

… 모임을 주재하는 사람이 감사 기도를 드리고 회중이 응답하고 나면, 부제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모든 참석자들에게 ‘축성된’ 빵과 물을 탄 포도주를 나누어주고, 그곳에 오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가져다줍니다”( 「호교론」, 1,65).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성찬례는 오랜 세월 동안 두 가지 기본 구조를 보존해왔다. 곧, 모임과 독서, 강론, 보편 지향 기도로 이루어지는 말씀 전례, 그리고 빵과 포도주의 봉헌, 축성의 감사 기도, 영성체로 이루어지는 성찬 전례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346항 참조).

 

이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에서 신자들이 꼭 알아두어야 할 상식에는 다음 몇 가지가 있다.

 

말씀 전례 중의 복음 낭독 전에 노래하는 ‘알렐루야’는 사순 시기에는 하지 않는다. 교회는 성경 독서를 주일과 축일에는 3년 주기(가, 나, 다)로 나누고, 평일에는 2년 주기(홀수, 짝수)로 나누어 놓았다. 이는 하느님 말씀의 풍부한 식탁을 마련하고자 성경의 주요 부분이 일정한 햇수 안에 회중에게 봉독되도록 한 원칙에 따른 것이다(전례 헌장, 51항 참조).

 

미사 때 사용되는 신앙 고백은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과 ‘사도 신경’이다. 교회는 특별히 주일과 대축일, 지역의 성대한 축제 때에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고백할 것을 권고한다. 또한 ‘사도 신경’도 필요에 따라 미사 전례 안에서 사용할 수 있다. 보편 지향 기도에서 그 지향은 간단명료해야 하며, 기도문도 자유롭고 짤막하게 공동체 전체의 청원을 표현해야 한다( 「미사 경본 총지침」, 71항 참조).

 

성찬 전례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될 예물을 제대에 가져가는 예물 봉헌으로 시작된다. 성찬을 위한 예물 봉헌 때 빵과 포도주뿐 아니라 예물(헌금)을 바침으로써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가난하게 되신 그리스도를 본받게 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351항 참조).

 

성찬례 때 사용하는 빵은 순수한 밀가루로 빚고 새로 구워 부패의 위험이 전혀 없어야 하며, 또한 포도주도 포도로 빚은 천연의 것으로 부패하지 않아야 한다(교회법 제924조 참조).

 

그리스도교의 다른 몇몇 교파도 우리의 성찬례와 비슷한 예식을 거행한다. 하지만 성체에 관한 교리는 사뭇 다르다. 개신교 교파들은 대부분 성체성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또 빵과 포도주의 ‘실체 변화’도 믿지 않으며, 성찬식의 제사 성격보다 공동체적 성격을 중시하여 주로 부활과 성탄, 세례 예식 등과 같은 중요한 때에만 지낸다.

 

성공회는 미사 형식과 용어가 천주교와 매우 비슷하지만 성체의 실체 변화를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오직 동방 정교회만이 실체 변화를 믿으며 사제로 서품된 사람만이 성체성사를 유효하게 거행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누룩을 넣지 않은 밀떡을 사용하는 반면, 동방 정교회는 누룩을 넣은 빵을 사용한다는 점이 차이점 가운데 하나이다.

 

 

살펴보기

 

신앙의 모든 영적 보화가 담겨 있는 성체성사에 대한 교회의 지극한 관심은 여러 가르침에서 잘 드러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회칙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에서 성찬례에 관한 몇 가지 매우 중요한 요소를 우리 시대의 상황에 비추어 설명하셨다.

 

교황청 경신성사성은 훈령 「구원의 성사」에서, 교회 구성원들이 각자 고유한 책임과 가능한 수단에 따라 성체성사를 거행하도록 권고하였다. 특별히 교회는 전례의 남용, 곧 일부 지역에서 행해지는 전례와 성사의 본질에 어긋나는 행동을 우려하며, 성찬례의 신비는 “너무나 위대한 것이어서 어느 누구도 그것을 가볍게 다루거나 그 거룩함과 보편성을 무시할 수 없다.”(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52항)고 강조한다.

 

하느님 말씀을 담고 있는 독서와 화답 시편을 성경이 아닌 다른 본문으로 대신한다든지, 평신도에게 미사 강론을 맡긴다든지, 신자들 스스로 축성된 빵과 거룩한 잔을 모시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구원의 성사」, 62.64.94항 참조).

 

이 모든 것은 교회의 전통과 권위로 결정되고 지켜져야 할 규범이다. 사목적 배려라거나 공동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리스도께서 직접 세우신, 변경할 수 없는 전례 요소들을 무시하거나 자기 마음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결심하기

 

교회의 규범을 준수할 때는 무엇보다도 생각과 말과 외적 행위, 마음가짐이 일치하여야 한다. 교회가 오랜 역사를 통해 지켜 왔던 신앙의 표현을 겉으로만 따르는 것은 전례의 본질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지도 않는 것이다. 주님께서 제정하시고 교회가 거행하는 감사와 기념, 현존의 성사적인 희생 제사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이 세상 순례 길에서 늘 힘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바라며 살아갈 수 있다.

 

주님께서는 전례를 통해 우리와 한마음 한 몸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늘 주어진 곳에서 주어진 시간에 참석하는 것만으로 그치는 수동적인 신앙생활은 스스로 가만히 있으면서 복을 달라고 보채는 어린이와 같다.

 

이제부터라도 미사에 참석할 때마다 사제가 읽는 미사 경문 한 구절 한 구절에 귀를 기울여 보자. 비록 작은 노력이지만 그 순간 우리는 교회가 오랜 역사를 통해 거행해 온 성찬례에서 그리스도의 진한 향기를 맡을 것이고, 이미 주님의 큰 은총 속에 머물러 있음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 박종주 베드로 - 부산교구 신부. 부산가톨릭대학교 평생교육원장으로 일하며 차별화된 가톨릭 평생 교육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오랫동안 신학교에서 교리교육을 가르쳤다. [경향잡지, 2017년 5월호, 박종주 베드로]

 

 

[진리를 찾아서] 성체성사 (2)



삶에서

지난해 9월부터 부산가톨릭대학교 평생교육원 원장을 맡으면서 내 삶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12년 동안 몸담았던 신학교와는 다르게 이곳에서는 적절한 긴장감과 적당한 일거리가 나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개강에 대해 대부분 반신반의했던 과정을 열심히 홍보하여 수강생을 많이 확보하기도 했고, 무료 강좌를 개설하면서도 수강료 수입을 제법 올렸다. 상업적인 냄새가 많이 나는 다른 대학의 평생교육원과는 다르다는 말을 들을 때면 뿌듯함을 느끼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곳 교육원의 일이 마냥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신자들이 ‘고객’(?)으로 보이기 시작하면서 강좌를 개설했을 경우 계산해야 하는 손익분기점에 민감해졌다.

한번은 평생 교육과 관련한 박람회에 초대되어 테이프 자르기에 참석했다가, 창피를 무릅쓰고 무대를 내려온 일도 있다. 초청 인사가 너무 많이 와 자리가 좁으니 나보고 양보해 달라는 집행부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대학 평생교육원장들의 모임에 가면 ‘신부가 뭐 하러 왔지?’ 하는 의아한 눈초리도 체험한다. 그럼에도 내가 이 일을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 교회가 지향해야 할 문화 복음화의 사명을 가톨릭 대학의 평생 교육이 실천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느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일상과 문화를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이 잘 스며들 수 있는 자리가 바로 여기이다.


다가가기

교회사를 보면 성찬례는 문화, 특히 예술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건축, 조각, 회화, 음악 등은 직간접으로 성찬례를 위대한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다. 종교의 자유를 획득하고 난 뒤, 성찬례는 장엄한 대성전들과 중세의 위풍당당한 주교좌성당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은 지역에 하나둘씩 세워진 크고 작은 성당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회 건축에 영감을 주었다.

또 중세의 유명 작곡가들은 모두 교회 음악가들이다. 성찬례는 그레고리오 성가의 아름다운 선율들을 만들고 미사 전례서들을 올바로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위대한 작곡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었다. 그 외에도 조각, 회화 등과 같은 많은 예술품에도 성찬례는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성찬례가 인간 문화와 적극적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은 바로 빵과 포도주라는 성체성사의 재료이다.

성체성사의 본질적인 표지는 빵과 포도주이다. 어쩌면 흔하디흔하다고 볼 수 있는 빵과 포도주가 가장 소중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 것이다. 사제의 ‘성찬 제정 축성문’을 통해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곧 ‘실체변화’가 이루어진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353항 참조). 성체성사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과 천주성과 하나 된 몸과 피가 ‘참으로’, ‘실재적’으로, 그리고 ‘실체적’으로 담겨 계신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374항 참조).

바오로 6세 교황님의 말씀처럼, 여기서 ‘실재적’이라는 말은 다른 현존 방식이 ‘실재적’이 아니라는 배타적 의미가 아니라, 그것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의심 없이 총체적으로 또 온전하게 하느님이시며 인간으로서 현존하시게 되는, 곧 본체적인 현존 방식이다(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15항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성체가 축성되는 순간부터, 성체의 형상이 존속하는 동안 계속 그 안에 현존하신다. 따라서 성체의 형상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빵을 나누어도 결코 당신께서 나뉘지 않으신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377항 참조).

예루살렘의 치릴로 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빵과 포도주를 단지 자연적인 요소로만 보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그것들은 당신의 몸과 피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의식이 다르게 받아들이더라도, 신앙이 그것을 여러분에게 확신시켜 줍니다.” 이러한 신비스러운 성변화(聖變化)가 이루어지는 성체성사는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주신 여러 선물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그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탁월한 선물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시고자 하는 우리는 은총 상태에 있어야 한다. 만일 대죄를 지었다면 먼저 고해성사로 죄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 사소한 잘못, 곧 소죄가 있는 경우에는 미사에서 참회하고 자비송을 바치며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는 가운데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고 결심하며 영성체하면 죄를 용서받는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394항 참조).


살펴보기

성체와 성혈을 모두 모시는 양형 영성체는 가장 완전한 영성체의 형태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390항 참조). 왜냐하면 이를 통해 성찬 잔치의 표지가 한층 더 완전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양형 영성체는 세례 · 견진 · 혼인 · 서품 · 수도 서원 · 피정 · 각종 회합 미사 때 그 해당자들에게, 그리고 병자의 집에서 미사를 집전할 때 거기 참석한 신자들에게 해 줄 수 있다(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 제80조 참조).

이 양형 영성체는 올바른 방식으로 분배되어야 한다. 양형 영성체에는 성체를 받아 모신 뒤 성혈을 성작에서 직접 마시는 방법과 성체를 성혈에 적셔 모시는 방법이 있다.

먼저 성혈을 성작에서 직접 마시는 경우에는 보통 부제가 성작을 들며, 부제가 없을 때는 사제 자신이나 정식으로 직무를 받은 시종 또는 영성체의 다른 비정규 봉사자가 성작을 든다. 필요한 경우 이 임무를 그때에만 한 신자에게 맡길 수 있다.

영성체할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신 다음에 성작 봉사자 앞에 서면, 봉사자는 “그리스도의 피.” 하고 말하고, 영성체하는 사람은 “아멘.” 하고 응답한다. 이어 봉사자가 성작을 건네주면 영성체하는 사람은 두 손으로 성작을 들고 입에 대어 조금 마신다.

그다음 성작을 봉사자에게 돌려주고 물러나면 봉사자는 성작 수건으로 입을 댄 곳을 닦는다. 만일 성혈이 남으면 사제나 부제, 또는 성작을 든 봉사자가 제대에서 모셔야 한다( 「미사 경본 총지침」, 286항 참조).

성체를 성혈에 적셔서 모실 경우에는 사제가 성합을 들고, 그 옆에 봉사자가 성작을 들고 선다. 사제는 성체를 집어 한 부분을 성작의 성혈에 적신 다음 그것을 보이면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고 말하면, 영성체하는 사람은 “아멘.” 하며 응답하고 입으로 모신 다음 물러난다( 「미사 경본 총지침」, 287항 참조). 어떤 경우든지 성직자만이 스스로 성체를 영할 수 있다. 평신도가 스스로 성체를 영하거나 다른 이에게 건네주어서는 안 된다.


결심하기

성체성사는 많은 이름으로 불린다. 곧, 성찬례, 주님의 만찬, 빵 나눔, 성찬 모임, 미사성제, 친교, 거룩한 미사 등이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이름은 ‘거룩한 희생 제사’이다.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면서 그저 “이는 내 몸이다.”거나 “이는 내 피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루카 22,19-20). 당신께서 제자들에게 먹고 마시라고 주시는 것이 단순히 당신의 몸과 피라고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닌 희생 제사의 의미를 분명히 하셨던 것이다.

주님의 희생 제사에 참여하는 우리도 이웃을 위하여 희생 제물이 되어야 한다.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투신할 수 있어야 하고,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서도 노력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치욕을 당하셨는데, 복음을 전하다가 겪는 창피쯤이야 뭐가 그리 중요하겠는가?

그래서 이곳 평생교육원은 나에게 주님의 희생 제사를 실천할 수 있는 좋은 자리인 것 같다.

* 박종주 베드로 - 부산교구 신부. 부산가톨릭대학교 평생교육원장으로 일하며 차별화된 가톨릭 평생 교육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오랫동안 신학교에서 교리 교육을 가르쳤다. [경향잡지, 2017년 6월호, 박종주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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