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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관한 조직신학적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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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21 ㅣ No.855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관한 조직신학적 성찰*

 

 

국문 초록

 

오늘날 건전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저해하는 세계적인 문화적 흐름과 운동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과학주의, 세속주의, 그리고 신영성 운동이다. 이 세 가지 흐름들은 기본적으로 각기 분리된 독자적인 흐름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사실상 서로 연결되어 더욱 상승적인 작용을 하며 한국 사회 안에서도 큰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먼저, 현대의 과학기술 만능주의는 그 독자적 세계관과 배타적 진리관을 구축함으로써 종교와 신앙의 영역을 점점 축소시키는 악영향을 미친다. 나아가, 무신론적 과학주의는 근본주의적 관점에서 종교와 신앙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가한다. 한편, 세속주의는 상대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세속주의란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부정적 의미의 상대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세속주의는 하나의 부정적 차원의 사회-문화적 풍조를 의미하며, 이는 자신의 기분에만 맞고 좋으면 뭐든지 합리화될 수 있다고 믿는 태도를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신영성 운동의 대표적 경우인 뉴에이지는 전체론적/전인적 접근을 시도하면서 사람들을 잘못된 영성의 개념과 방향으로 이끈다. 이러한 세 가지 흐름은 그리스도 신앙과 교회에 큰 도전과 위협을 구성하기에, 이들에 대한 신학적 성찰과 사목적 대응이 필요하다. 첫째, 이 흐름과 운동들의 위험성에 대해 잘 알게 함으로써 더 이상 교회의 신자들이 여기에 빠져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둘째, 우리는 왜 사람들이 이러한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빠져 신앙을 저버리고 교회를 등지는지에 관해 듣고 그들을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셋째, 보다 능동적이고 지혜로운 복음 선포와 깊은 사목적 배려를 통해 더욱 역동적인 신앙 체험을 제공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보호해야 한다. 넷째, 우리는 현대 기술 문명의 발전 속에 목마름을 느끼는 사람들이 갖게 되는, 신비 체험을 향한 지적이고 영적인 요구를 깨달아야만 한다. 교회의 전통적인 호교론적 가르침을 단순히 전수하고 반복하는 것을 넘어서, 어떻게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선포하고 증언할 것인가를 찾아야 한다.

 

 

1. 서론

 

2012~2013년에 걸쳐 전 세계의 가톨릭교회 신자들에게 ‘신앙의 해’(Year of Faith)가 선포되었다. 2013년 2월 말 자진 사임한 전임 교황 베네딕도 16세(재위 2005~2013)가 선포한 ‘신앙의 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개최 50주년을 기념하여 2012년 10월 11일에 개막되었고 2013년 11월 24일에 폐막되었다. 이처럼 ‘신앙의 해’ 선포라는 보편 교회적 기획은 현대 세계 안에서 교회가 마주한 전반적인 도전과 위기 상황에 대한 자각과 성찰을 통한 쇄신을 전제하며,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믿음의 이유를 재확인하고 ‘새로운 복음화’(New Evangelization)를 통해 신자들의 신앙적 열정을 북돋아 선교 정신을 고취시키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나아가, 현대 세계 안에서 추진되는 ‘새로운 복음화’란 무의미한 신앙생활을 한다고 느끼는 사람들과 이미 알던 그리스도교 신앙으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복음과 신앙을 축소되고 왜곡된 형태로 아는 사람들이나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 그리고 교회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새로이 복음을 선포하고 사목적 접근을 시도하는 광범위한 작업을 포괄해야 한다.

 

본 논문은 이렇듯 ‘신앙의 해’를 맞아 이루어지는 신앙적 성찰과 점검이라는 맥락에서, 오늘날 건전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저해하는 세계적인 문화적 흐름과 운동은 무엇이며 그것이 특별히 한국 사회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석하는 동시에, 이에 대한 교회적 대응의 사명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밝히는 것을 기본 목적으로 한다. 하나의 동일한 세계 안에서 동일한 시간대에 교차되는 여러 다양한 스펙트럼(spectrum)을 분석하면서 그 가운데 건전한 신앙생활에 특별히 위험 요소로 다가오는 주요 흐름 세 가지를 꼽아본다면, 과학주의(scientism), 세속주의(secularism), 그리고 신영성 운동(new spirituality movement)을 말할 수 있겠다. 이 세 가지 흐름은 기본적으로 각기 분리된 독자적인 흐름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연결되어 더욱 상승적인 작용을 하게 된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세 가지 흐름의 정체와 문제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어떻게 그리스도 신앙과 교회에 위협을 구성하는지, 그리고 이러한 도전에 대응해야 할 교회적 과제는 무엇인지를 신학적 관점에서 고찰할 것이다.

 

 

2. 과학주의(scientism)

 

1) 과학기술 만능주의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주요한 흐름으로 가장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과학주의’(scientism)다. 그런데 ‘과학주의’란 용어는 여기서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로는 ‘기술지상주의’(technocentrism)적 관점의 과학주의, 즉 ‘과학기술 만능주의’를 말할 수 있겠다. 오늘날 우리는 현대 과학기술 문명의 놀라운 발전을 목격한다. 특히, 스마트폰(smart phone)의 일반화 등으로 드러나는 정보통신기술(information technology) 산업의 급성장, 그리고 생명의 신비를 과학적으로 더 깊이 탐구하고자 하는 생명공학(biotechnology) 산업의 발전은 우리의 삶을 매우 편리하고 용이하게 한다는 긍정적 결과를 자아내지만, 다른 한편으로 부정적 영향 또한 드러내게 된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과도 같이 대중화된 최첨단 전자기기들을 통해 전파되는 정보의 홍수에 마비되어, 많은 사람이 삶의 의미에 관해 질문하고 반성할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상실해버린다.

 

나아가, 가장 큰 문제는 과학이 전통적인 불가침의 영역을 넘어서고 대체하면서 모든 것을 가능케 한다는 착각과 환상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베네딕도 16세가 말하듯이, “기술의 우위성은 사람들이 물질로만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을 인식할 수 없게 만드는 경향”1)을 파생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학적 실증주의(scientific positivism)에 대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재위 1978~2005) 역시 다음과 같이 그 위험성을 지적하였다.

 

과학적 탐구의 영역에서는,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을 포기할 뿐만 아니라 특히 형이상학적이거나 윤리적인 전망에 대한 일체의 호소를 배격하는 실증주의적 정신(mens positivistica)이 지배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부 과학자들은 윤리적 가치에는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으면서, 인간 인격과 그 사람의 일생 전체와는 다른 어떤 것을 그들 관심의 중심에 놓은 위험을 무릅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극단적인 일부는 기술적 진보를 위한 기회라 생각하고 시장경제의 논리에 따라 자연과, 심지어 인간 존재자에 대해서까지도 거의 신적인 능력을 행사하려는 유혹에 굴복하는 듯이 보였습니다.2)

 

실제로, 정보통신 산업의 발전으로 어느 장소든 상관없이 네트워크(network)에 접속 가능하다는 ‘유비쿼터스’(ubiquitous computing) 개념의 등장은, 동시에 모든 접속자를 그 해당 지역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의 망 안에서 관찰, 통제가 가능하다는 가공할 현실로의 전이를 가능케 한다.3) 이는 어떤 의미에서, 이제껏 하느님의 능력으로 간주되던 무소부재(無所不在) 혹은 편재(遍在)의 개념이 사실상 기술적 차원에서 현실화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과거에는 불가능한 것이라 여기던 인간 생명체의 복제 가능성 등에 관한 연구가 시도되면서, 이는 사실상 하느님의 창조적 전능(全能, omnipotens) 개념이 과학기술에 의해 침범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생명윤리(bioethics) 분야의 심각한 문제들이 야기되는 것은 물론이다.4)

 

따라서 이러한 과학기술의 발전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 이상 하늘을 바라볼 필요가 없게 만든다.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과학기술의 새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듯 과학기술의 힘에 의해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것 같은 미래에 대한 환상은, 역시 과학기술의 발달에 기초한 매스 미디어(mass media) 산업을 통해 더욱 확산되어 나간다. 이제 종교적 믿음의 의미와 가치가 의문시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즉, 과학기술에 대한 맹신으로 말미암아 과학기술 자체가 절대적 가치로 인정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런 맥락에서, 스위스 출신의 신학자 한스 큉(Hans Kung, 1928~ )은 “모든 건물을 오직 자연과학이라는 토대 위에만 세우려 하는”5) 심각한 오류에 대해 지적한다. 오늘날 자연과학의 역할은 당연히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하지만, 그 자체로 독자적인 세계관을 세우려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나아가, 현 교황 프란치스코(재위 2013~ )는 첫 회칙 《신앙의 빛》(Lumen Fidei, 2013. 6. 29)을 통해서, 과학기술의 맹신에 기초한 배타적 가치관을 진리 개념과 연결하여 비판적으로 지적한다.

 

현대 문화에서는 기술(technology)의 진리만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과학으로 제작하고 측량할 수 있는 것만이 진리로 여겨집니다. 또한 기능적이고, 삶을 좀 더 편하고 쉽게 만드는 것이 진리로 여겨집니다. 오늘날에는 이것이 확실하고, 다른 이들과 공유할 수 있으며, 함께 토론하고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진리로 여겨집니다(25항).6)

 

결론적으로, 굳이 종교와 신앙에 대해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자체적 발전을 통해 독자적 세계관과 배타적 진리관을 구축함으로써 종교와 신앙의 영역을 점점 축소, 퇴화시키는 것이 바로 오늘날 과학기술 만능주의의 도전이며 위협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2) 과학적 무신론(scientific atheism)의 도전7)

 

과학주의의 두 번째 범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형이상학적 영역에 대한 침범을 바탕으로 더욱 공격적인 무신론적 과학주의가 등장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를 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새로운 무신론’(new atheism) 혹은 ‘과학적 무신론’(scientific atheism)이라 부를 수 있고, 만일 이를 종교학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무신론적 근본주의’(atheist fundamentalism)나 ‘반(反)종교적 근본주의’(anti-religious fundamentalism), 혹은 ‘과학적 근본주의’(scientific fundamentalism)라고 부를 수 있겠다.

 

사실, 지금까지 ‘근본주의’란 용어를 일반적으로 ‘종교적 근본주의’(religious fundamentalism), 즉 기독교 근본주의나 이슬람 근본주의 등을 가리키는 맥락에서 사용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역설적이게도 ‘종교적 근본주의’ 외에 무신론적 맥락의 ‘반종교적 근본주의’라는 용어가 새로이 등장하게 된 것은, 근래의 ‘과학적 무신론’이 ‘종교적 근본주의’에서 발견되는 것과 동일한 특징들, 즉 협소하고 독선적이며 배타적인 세계관과 더불어 적이라고 규정하는 비판 대상에 대한 적대감과 분노, 그리고 매우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성향을 드러내기 때문이다.8)

 

이처럼 현대 세계의 새로운 과학적 무신론이 기존의 ‘종교적 근본주의’와 다를 바 없는 교조주의적 성향을 드러내며 종교와 신앙을 비판하는 새로운 흐름으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를 가리켜 최근의 여러 학자는 ‘과학적 근본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종교적 근본주의나 과학적 근본주의 모두 공통으로 보이는 현상은 실재에 대한 매우 편협하고 배타적인 해석, 그리고 그에 입각한 공격적 성향이며, 이들 모두는 종교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남겨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와 신앙을 등지게끔 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특히 과학적 근본주의는 문화적 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와 연결되어 그 폐해를 가속화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과학적 근본주의가 신봉하는 실재관이다. 인간의 이성으로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진리의 근거와 기준으로 내세우는 것은 바로 자연과학(natural science)뿐이다. 그러므로 현대의 자연과학적 방법론이야말로 참 실재에 대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반면에 다른 모든 종교적 믿음은 근거 없는 미신에 불과한 것이라 간주한다.9)

 

이러한 현대 과학적 무신론을 이끌어가는 대표적 인물로는 영국 옥스퍼드(Oxford) 대학교의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1941~ )를 꼽을 수 있다.10) 그는 미국 하버드(Harvard) 대학교의 생물학 교수였던 에드워드 O. 윌슨(Edward O. Wilson, 1929~ )이 주창한 사회생물학(sociobiology)을 기본 바탕으로,11)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의 진화론적 관점에서 인간의 모든 사회 현상을 설명하고자 시도하였으며, 마침내 종교의 영역에까지 들어와 무신론적 주장을 공격적으로 내세우게 된다. 윌슨의 사회생물학 자체가 이미 많은 논쟁을 일으켰는데,12) 도킨스는 이를 훨씬 더 무신론적이고 반종교적으로 발전시키며 대중적으로 확산시켰다. 이제 다윈의 진화론은 더 이상 하나의 과학 이론이 아니라 우주 전체에 적용 가능한 보편적 원리로 등장하게 된다.

 

도킨스는 1976년의 유명 저서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에서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에는 유사성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복제자(replicator)가 필요하다는 점이라고 주장한다. 생물학적 진화의 복제자가 유전자(gene)라면, 문화적 유전자의 복제자는 바로 ‘밈’(meme)이다. 이 ‘밈’이란 단어는 모방을 의미하는 그리스(Greece)어 어근에서 따와 도킨스가 만든 신조어이다. 마치 그때그때 유행하는 패션(fashion) 감각이 하나의 ‘밈’으로서 사람들 사이에서 모방되고 전해지듯이, 결국 ‘신’이라는 개념도 인간의 뇌와 뇌 사이를 뛰어다니며 전염되는 하나의 ‘밈’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내세운다.13)

 

도킨스는 이후 《눈먼 시계공》(The Blind Watchmaker, 1986),14) 《에덴의 강》(River Out of Eden, 1995),15) 《악마의 사도》(A Devil’s Chaplain, 2003),16) 《지상 최대의 쇼》(The Greatest Show on Earth, 2009)17) 등 여러 책을 계속해서 집필했는데, 그중에서도 2006년에 발간된 저서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18)은 전 세계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19) 여기에서 도킨스는 과학적 주제를 넘어서 종교와 신앙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며, 과학이 전통적인 신학의 영역을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학은 실재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도킨스는 이처럼 종교가 인생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답을 줄 수 없기에 종교적 신앙이란 거짓된 믿음에 근거한 망상에 불과하다고 규정한다. 그는 초자연적 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면서, 종교를 제거하면 세상은 훨씬 더 안전한 장소가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거짓된 종교 현상의 가장 대표적인 경우라고 제시한다.

 

영국 케임브리지(Cambridge) 대학교의 세계적 이론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1942~ )은 리처드 도킨스만큼 전투적이지는 않지만, 2010년의 저서 《위대한 설계》(The Grand Design)를 통해 이전의 작품들에서 드러났던 은유적 방식이 아니라 명시적이고 공격적인 무신론을 전개한다. 그는 이제 철학은 현대 물리학의 놀라운 발전을 결코 따라잡지 못하기에 죽은 것이라고 단언하며, 인생과 우주의 비밀에 관한 물음은 오직 과학만이 대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기에 이제 과학은 우주의 신비가 ‘어떻게’(how) 이루어지는지만 아니라 ‘왜’(why) 그러한지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결론적으로 우주는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자체적인 생성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라 강조한다.20)

 

이제 서구 사회에서뿐 아니라, 급속도로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정보화 사회로 이행된 동북아시아에서도 이러한 무신론적 과학자들의 전투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주장은 이미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더욱이 세계 곳곳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근본주의적 흐름들 간의 충돌과 갈등, 그리고 전쟁 등에 역겨움을 느끼고 지쳐버린 사람들, 특히 젊은 층에게 ‘종교는 그 자체로 악한 것이다’라는 도킨스의 주장이 어느 정도 설득력 있게 전달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종교적 근본주의는 많은 사람에게 종교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인상을 심어주며, 과학적 근본주의는 이러한 탈종교 현상을 돌이킬 수 없이 더욱 가속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3) 과학주의 시대의 신학적 성찰

 

오늘날 새로이 전개되는 과학주의의 도전 앞에서 교회는 과연 어떠한 신학적, 사목적 대응을 해야 하는가?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성찰을 제공할 수 있겠다.

 

첫째, 과학기술 만능주의의 맹점과 환상에 대해 언급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많은 긍정적 결과가 생기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면에서 발생되는 부작용들에 대한 지적이 필요하다. 과학기술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없다는 것은, 그리고 과학기술의 진보 자체가 보편적 인간 사회의 진보로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님은 이미 명백해진 사실이다. 이러한 문제를 신학자 한스 큉은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원자력공학, 유전공학, 집중 의학, ‘녹색 혁명’, 생산 자동화, 경제 · 기술 · 통신의 세계화 등, 거의 모든 주요한 과학 · 기술적 진보는 예기치 않았거나 알아도 감수할 수밖에 없는 부정적 결과를 낳기도 한다. 20세기 말 거품경제가 붕괴되고 난 뒤에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도 이른바 금융시장이 자기 조정 기능을 가지고 이성에 의해 지배된다는 사실을 더는 믿지 않는다. 제3천년기에도 세계열강들은 여전히 가난 · 기아 · 질병 · 문맹과의 싸움이 아니라, 전방위적 군비 확장에 수십억씩 투자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이성을 거역한다.21)

 

이러한 전 세계적 차원의 흐름과 현상이 일으키는 여러 문제에 대한 자각 속에, 한국 교회의 차원에서도 환경 오염으로 인한 생태 문제에 대한 대응이나 생명윤리 분야의 생명 수호 활동이 이미 구체적으로 진행 중이다. 나아가, 정보화 시대의 정신적 폐해에 대한 대책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익명성 뒤에 숨어서 이루어지는 언어적 폭력과 갈등으로 인한 정신적 일탈과 사회적 파괴 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종교의 간접적 과제와 역할이기도 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 생명을 경시하는 문화적 풍조를 가리켜, ‘생명의 문화’와 반대되는 ‘죽음의 문화’라고 호칭하였는데,22) 오늘날 직접적으로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뿐 아니라 이처럼 언어를 통해 간접적으로 인간 삶에 상처와 피해를 주는 경향성 역시 넓은 의미에서 ‘죽음의 문화’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과학적 무신론의 공격적인 도전에 대해 정확한 분석과 진단, 그리고 깊이 있는 성찰을 통해 그 주장의 허구성과 폐해에 대하여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이미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Lumen Gentium, 1965. 12. 7)에서는 “부당하게 실증 과학의 한계를 넘어서 만사를 과학 이론만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은 현대의 극히 중대한 문제로 여겨야 하고 더욱더 치밀한 검토를 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천명하면서, “교회는 무신론자들의 마음속에서 신 부정의 숨은 이유를 찾아내려고 노력하며, 무신론이 일으키는 문제들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21항 참조).

 

사실, 과학적 언어들로 이루어진 현대의 무신론적 주장 이면에 있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이 표출해내는 것과 다르지 않은 분노와 적대감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23) 해석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철저하게 중립적인 전제에서 출발했다기보다는, 이미 그들이 가진 종교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과 반감에서 출발하였다고 분석 가능하다.24) 이미 형성된 무신론적 견해와 주장을 과학적 지식을 통해 보다 더 설득력 있게 합리화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25) 과연 그들의 과학적 양심에 의거하여 순수한 학문적 탐구의 기반에서 출발하였는지를 반드시 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입견에 의거한 그들의 종교적, 신학적 지식은 매우 피상적이고 한계적이며, 그들이 공격하는 대상에 대한 충분한 성찰과 숙지가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임을 또한 지적할 수 있겠다. 과학적 무신론자들의 반종교적 공격 안에서 드러나는 종교적, 신학적 지식 자체나, 그들이 주로 비판과 공격 대상으로 삼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입장 모두 진정한 그리스도교 전통에 입각한 건전한 신학을 반영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26)

 

셋째,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과학은 반드시 필연적으로 무신론적일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문제 제기가 필요하다. 유물론적이고 무신론적인 진화생물학적 입장에서는 ‘새로운 창조’(creatio nova)를 향한 광대한 우주와 심오한 인간 생명의 신비를 모두 다 충분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27) 과학적 무신론자들의 생물학적 결정론이나 환원주의적 입장은 우주와 생명의 신비를 설명하는 데에 반드시 그 명확한 한계가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만 한다. 우주와 인간 생명의 신비는 인간 이성에 의해 어느 정도 탐구될 수 있지만, 그 모두가 파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여전히 인간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신적 영역에 속한다. 인간의 실존은 유전자에 의해 모두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신비를 추구하는 인간의 영적 차원이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과학기술의 시대에도 인간은 여전히 영혼(soul)을 지닌 신비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 교회의 가르침은 진화론을 전적으로 배척하지 않으며, 과학과 신학의 책임 있는 대화를 통해 이에 관한 연구가 진지하게 지속되기를 권고하면서도, 인간 영혼에 관한 영역은 반드시 존중되어야 함을 강조한다.28)

 

따라서 교회가 책임 있게 가르치고 전파해야 할 것은, 신학과 과학이 상호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건설적 비판에 입각한 상호 대화를 통해 함께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이 둘은 모두 우주의 기원과 인간 실존의 신비에 대한 진리 탐구적 열망의 동일한 샘에서 솟아나와, 각자 다른 길에서 그 위대한 신비를 향한 길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이해 가능하다.29) 나아가, 현 교황 프란치스코는 회칙 《신앙의 빛》을 통해서, 과학의 한계를 조정하고 보완해 주는 신앙의 역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과학의 시각은 신앙으로부터 도움을 받습니다. 신앙은 과학자들이 실재의 고갈될 수 없는 모든 부 안에서 실재에 늘 열려 있도록 격려합니다. 신앙은 과학적 연구가 몇 가지 공식으로 만족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비판적인 감각을 일깨워주고, 자연이 언제나 더욱더 큰 실재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창조의 신비 앞에서 경이감을 갖게 함으로써 신앙은 이성의 지평을 더욱 넓혀 줍니다. 이는 과학적 탐구에 개방되어 있는 세상에 더 큰 빛을 비추기 위함입니다(34항).30)

 

넷째, 과학주의에 빠져 교회를 등지고 신앙을 저버리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사목적 배려가 요구된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떠나가게 하는가에 대한 분석과 동시에, 그들에 대한 사목적 배려와 대응이 필요할 것이다. 정말 그들이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공격하는 종교의 비합리적 모습을 우리 교회에서 발견하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그들이 교회의 어떤 측면에 실망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들의 교회에 대한 반론과 요구에 담겨 있는 숨겨진 의미가 무엇인지를 읽고자 노력해야 한다. 즉, 그들의 지적인 요구와 진리 추구에 대한 열망이 무엇인지를 읽을 수 있어야 하겠다. 그러므로 과학주의에 대한 반론은 단순히 전통적인 호교론적 맥락의 방어적 대응을 넘어서야 한다. 중요한 것은 교회 안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진리추구의 열망이 발견되고 체험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과학주의를 진정으로 극복하는 길은, 거룩한 신앙의 유산과 교회의 현재적 삶 안에서, 진리를 찾는 사람들의 열망이 채워지는 역동적 체험과 증언이 가득 샘솟게 하는 것이다.31)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 헌장>(Lumen Gentium)이 무신론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다음 대목(21항)을 주의 깊게 읽을 필요가 있다.

 

무신론의 치유는 한편으로는 교리의 올바른 제시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와 그 구성원들의 완전한 삶에서 기대하여야 한다. 교회가 할 일은 하느님 아버지와 강생하신 하느님의 아들을 마치 눈에 보이듯이 제시하고 성령의 인도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쇄신하고 정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성숙한 신앙의 증거, 곧 어려움을 분명히 알고 이겨낼 수 있도록 훈련받은 신앙의 증거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빛나는 신앙의 증거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보여주었고, 또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신앙이 신자들의 전 생활에, 세속 생활에까지 젖어들어 신자들이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게 함으로써 그 풍요성을 드러내어야 할 것이다. 마침내 한마음 한뜻으로 복음에 대한 믿음을 위하여 함께 분투하며 일치의 표징으로 드러나는 신자들의 형제애는 하느님의 현존을 보여주는 데에 매우 크게 기여한다.

 

한마디로, 무신론에 대한 효과적이고 진정한 대응은 교리적 차원에서뿐 아니라 교회 구성원들의 삶을 통한 신앙의 증거에 의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음을 특히 강조하는 것이다.

 

 

3. 세속주의(secularism)

 

1) 상대주의(relativism)와 세속주의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주요한 흐름의 또 하나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세속주의’(secularism)이다. ‘세속주의’는 ‘세속화’(secularization)와는 구별된다. ‘세속화’란 근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일반적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실재가 종교적, 형이상학적 영역의 독점으로부터 벗어나 분리되어가는 과정을 가리키는 중립적 용어이다. 즉, 종교의 자유와 더불어 세속의 각 분야의 정당한 자율성 역시 인정되며 인간 중심적 세계관이 점차 확산되어가는 과정을 가리킨다. 그리고 ‘세속주의’는 이러한 세속화의 역사적 흐름 속에 생겨나는 하나의 가치관이라고 일반적으로 정의할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는 그리스도 신앙과 대립되는 부정적 가치관과 무신론적 세계관을 가리키는 특징적인 용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32)

 

그런데 ‘세속주의’는 ‘상대주의’(relativism)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부정적 의미의 ‘세속주의’는 ‘상대주의’의 한 변형된 형태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래서 일반적인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상대주의’라 말할 수 있고, 그리스도교 신앙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본다면 ‘세속주의’라 부를 수 있겠다.

 

이러한 맥락에서, 넓은 의미로서의 상대주의를 크게 두 가지 차원으로 구분해 고찰해볼 수 있다. 첫 번째가 상대주의에 대한 일반적이고 고유한 의미의 이론적 개념이라면, 두 번째는 세속주의와 연결된 실천적 맥락의 상대주의 개념이라 할 수 있다.33)

 

첫째, 철학적, 윤리학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상대주의는 더 이상 절대적 가치와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세계관을 의미한다.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것들은 사실상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으로 생성된 지식에 불과하기에 모두 상대적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절대적인 신앙적, 도덕적 가치나 정의 개념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윤리적 가치와 정의 개념은 매우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판단에 종속되는 것으로 전락해버린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하게 언급할 수 있는 것은 과학주의와의 연결성이다. 앞서 다룬 바 있는 과학주의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사회-문화적 현상은 자연법에 기초한 보편적 인간 이성의 활동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부차적이고 종속적인 개념에 속한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무신론적 과학주의는 문화적 상대주의와 연결되며 그 이론적 배경의 하나로 작용한다.

 

둘째, 광범위한 사회 현상을 포괄하는 문화적 풍조(ethos)로서의 실천적 상대주의를 말할 수 있다. 이는 근대를 이끌어온 서구 이성주의와 합리주의의 위기 뒤에 도래한 일종의 허무주의(nihilism)라고 규정할 수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러한 현상을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 허무로 돌리는 이 허무주의는 현대인들에게 특별한 매력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 추종자들은 탐구가 목적 그 자체이지, 진리의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허무주의자들의 해석에 따르면, 인생이란 결코 한시적인 것들이 지배하고 있는 감각과 경험의 기회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찰나적이기 때문에 결정적인 투신이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널리 퍼져 있는 정신 자세의 뿌리에는 허무주의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34)

 

이처럼 사상적이라기보다는 감각적 경험을 추구하는 허무주의적(nihilistic) 풍조로서의 상대주의를 말할 때, 그 구체적 예로 들 수 있는 것은 오늘날의 젊은 층에 만연한 ‘자기만족 추구의 문화’(culture of complacence)이다. 자신의 기분과 느낌(feeling)에 좋은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여기는 풍조가 바로 그것이다. 이 두 번째 관점의 상대주의는 쉽사리 세속주의에 빠져들게 된다. 바로 여기에 상대주의와 세속주의의 깊은 연결 고리가 있는 것이다. 베네딕도 16세는 이러한 의미에서 “아무것도 궁극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최후의 준거로 그저 제 자신과 자기가 바라는 것들만 인정하는 상대주의의 독재”35)에 대해서 지적한다. 자기 생각에 맞고 제 느낌과 기분에 좋은 것이면 그 어떤 것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기에 부정적 가치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져, 세속주의와 물신주의(物神主義), 극단적 이기주의 등 반(反)복음적 흐름과 풍조들이 널리 퍼져 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적 상대주의의 관점에서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어긋나는 세속주의 가치관의 만연을 조장하게 된다.

 

특히 젊은 층에서 발견되는 세속주의 풍조는 바로 이러한 사회문화적 풍조로서의 실천적 상대주의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과거와는 달리, 사회 공동체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고 보다 편안함을 추구하는 삶의 양식 안에서 극단적 개인주의와 소비주의에 빠져드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자신에게 좋고 만족스러우며 안전하게 느끼는가의 문제이다. 사회의 극심한 경쟁 구조 속에 생존하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삶에 대한 진정성 있는 고민과 성찰은 사라지고 순간순간 개인적인 흥미와 감각적 행복을 추구하고자 한다.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공동체 정신은 실종되어가며, 생명을 존중하고 가족적 가치를 중시하는 아시아의 전통문화 역시 점점 약화되어 간다. 이러한 상황 속에, 생명에 대한 경외심과 인간 존엄성에 대한 관심이 점차 감소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최근에 계속 보고되는 높은 자살률과 무책임한 낙태 현상, 극단으로 치닫는 학교 폭력과 청소년 폭력, 그리고 무분별한 생명공학 연구와 개발 등은 이 같은 세속주의 현상을 잘 드러낸다.36)

 

바로 이러한 사회 풍조와 현상이야말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생명의 문화’와 반대되는 ‘죽음의 문화’라는 용어를 통해 지적하고자 했던 생명 파괴 현상과 생명 경시의 문화적 풍조라 할 수 있는 것이다.37)

 

2) 물신주의(Mammonism)의 도전

 

세속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는 바로 황금만능주의, 혹은 물신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재물에 대한 집착이 삶의 최우선적 가치를 차지하게 되는 그릇되고 전도된 가치관을 의미한다. 베네딕도 16세는 일찍이 “돈과 재물이 모든 것의 척도가 되고, 자유시장의 모델이 삶의 모든 면에서 그 냉혹한 법칙을 부과하고 있는 서방과 같은 세계”38)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바 있지만, 이는 더 이상 서구 세계만의 문제는 아니다. 오늘날 급속한 산업화와 서구화 과정을 겪는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도 재물이 최고의 가치라고 여기는 풍조가 만연해 있음이 드러난다. 다음의 인용문은 이러한 현상을 잘 묘사한다.

 

이제 서구화와 산업화의 길을 걸어가며 급속도로 정보화 사회로의 이행을 겪고 있는 아시아에서 젊은이들 사이에 돈이 전부라는 암묵적 사고방식이 팽배해 있음이 여러 통계조사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어, 오늘날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은 외모에 너무 집착하여 성형수술, 명품 가방, 보석과 패션(fashion) 의류 등에 지나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표피적인 외적 아름다움은 이제 한국 사회에서 부와 힘을 상징하는 아이콘(icon)이 되었다. 한 가정에서 하나의 아이만을 낳는 것이 일상화된 한국과 중국 등 동북아시아에서 이렇듯 개인의 아름다움과 부를 추구하는 극단적 개인주의는 더욱 드세어지고 물질만능주의의 형태로 왜곡되어 나타난다. 반면에 사회적 공존과 공동선에 대한 관심과 추구는 더욱 약화되어가고 있다.39)

 

이러한 세속주의 흐름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어긋나는 잘못된 경향이기 때문에, 교회적이며 신앙적 차원의 대응이 필요하다. 복음서에서는 이처럼 재물과도 같은 세속적 부귀영화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전도된 가치관을 단호히 배격한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μαμωναs)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여기에 나온 ‘재물’을 가리키는 그리스어 단어 ‘마모나스’(μαμωναs)는 예수님께서 직접 사용하시던 아람어에서 나온 말이며, 오직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발견된다(마태 6,24 ; 루카 16,9. 11. 13 참조). 마태오 복음서 6장 24절의 문맥에서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이 단어는, ‘재물 자체’라는 가치중립적인 일차적 의미가 아니라 ‘재물의 마력’이라는 이차적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동일한 맥락에서, 라틴어와 영어에는 의인화된 표현으로 ‘재물의 신(神)’을 가리키는 ‘맘몬’(Mammon)이란 단어가 있는데, 이는 인간을 재물에 대한 집착과 탐욕으로 이끌어 파멸시키는 유혹과 죄악의 실체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배금사상’(拜金思想) 혹은 ‘황금만능주의’를 의미하는 ‘맘몬주의’(Mammonism)를 의인화시켜 번역한다면 ‘물신주의’라는 단어가 가장 적당하다고 할 수 있겠다.40) 이러한 물신주의는 가장 극단화된 세속주의 흐름으로써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여 악영향을 계속 미친다.

 

3) 세속주의 시대의 신학적 성찰

 

베네딕도 16세는 과거 요제프 라칭거(Joseph Ratzinger, 1927~ )라는 이름의 신학자로 활동하던 시절에 펴낸 유명 저서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1968)에서 시작하여 신앙교리성(Congregation for the Doctrine of the Faith) 장관직을 거쳐 사도좌의 직무를 수행할 때까지 발표한 많은 문헌을 통해 현대의 문화 속에 만연해 있는 상대주의에 대해 일관되게 비판해왔으며, 최근에는 이를 ‘상대주의의 독재’(dictatorship of relativism)라는 용어를 통해 표현하였다.41) 사실, 베네딕도 16세는 주로 신학적이고 이론적 차원의 상대주의에 대해 대응해 왔다고 평가되지만, 현대 세계의 세속주의와 물신주의에 대해서도 그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42)

 

그리고 현 교황 프란치스코는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차원 모두에서 적극적으로 이에 대한 비판적 대응과 예언자적 고발을 계속해 나간다. 먼저 이론적 차원에서 본다면, 첫 회칙 《신앙의 빛》을 통해서 상대주의의 심각한 문제를 진리 개념과 연결하여 비판적으로 언급한다. “오늘날 진리는 개인의 삶을 위해서만 그 타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개인의 주관적 확실성으로 축소되고는 합니다. 하나의 공통된 진리는 전체주의의 완고한 통제와 동일시되기 때문에 위협적인 것으로 간주됩니다”(34항).43) 이렇듯 자신만의 확신에 의거한 개인의 주관적 진리 개념은 끝내 그 개인에게만 유효한 것이 되며, 공동선을 위한 노력 속에 다른 사람들을 향해 제시,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결국 우리에게 남겨지는 것은 ‘상대주의’뿐이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궁극적으로 하느님에 관한 질문을 의미하게 되는, ‘보편적 진리’(universal truth)에 관한 질문은 더 이상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만다(25항 참조).44)

 

그리고 실천적 측면에서 본다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3년 5월 25일 바티칸에서 열린 국제회의를 통해 현대 세계의 빈곤 문제와 재정적 위기가 경제적 차원 자체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인간의 가치보다 돈과 권력을 숭배하는 분위기”에 그 근본적 원인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인간 존엄성과 공동선을 추구해야 할 의무에 대해 강조하였다.45) 또한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거행된 제28차 세계청년대회(World Youth Day) 기간 중 2013년 7월 24일 거행된 미사에서 교황 프란치스코는 참석자들에게 “돈과 권력, 쾌락과 같은 우상에 집착하지 말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살아가기를 당부”하였다.46)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교회는 세상의 상대주의 및 세속주의, 그리고 물신주의에 맞서 비판적 대응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교회 공동체 역시 그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교회도 세상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의 신자들 역시 이러한 상대주의와 세속주의적 풍조에 감염되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상대주의적 세계관과 세속주의적 가치관의 도전이라는 심각한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순교성인들이 남긴 삶의 자취와 죽음의 결단 안에서 하나의 훌륭한 모범을 배울 수 있다. 사실, ‘순교’라는 단어의 어원적 의미 자체가 바로 ‘증언’(μαρτυριον)이라는 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47)

 

한국 순교성인들의 경우, 그리스도 신앙인이 되겠다는 선택은 그 당시 사회의 모든 구성원으로부터, 특히 가족과 친지들로부터도 몰이해와 버림받는 것을 각오한 결과였으며, 나아가 죽음까지도 받아들이겠다는 결단이었다. 당대의 지배적인 유교 질서 안에 태어나 성장하고 살아가면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가장 ‘절대적’(absolute) 가치로 받아들였고 생명을 바쳐 이를 증언한 순교자들의 신앙 안에서 우리는 오늘의 모든 상대주의적 흐름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모범적 길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와 같은 명시적 박해와 물리적 탄압은 없지만 세속주의 가치관이 만연해 신앙과 교회를 위협하는 현실 속에, 어떻게 신앙선조들의 정신을 재발견하고 ‘순교적 증언’을 통해 오늘의 도전에 대응할 것인가는 한국 교회 구성원 모두의 과제라 할 수 있겠다.48)

 

구체적으로 본다면, 특히 사회문화적 풍조로서의 상대주의와 세속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자들이 삶과 신앙을 통합하는 길을 찾을 수 있게끔 도와주어야 한다. 사실, 현재 한국 교회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있어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삶 따로 신앙 따로’ 즉, 삶과 신앙의 분리라고 지적하는 경우가 많다. 신앙적 가치가 세상 안의 일상적 생활에서 잘 구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을 신앙의 차원에서, 그리고 신앙을 삶의 차원에서’(Bring our life to faith and faith into our life)49) 통합해 살아갈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찾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교회 안의 신앙생활을 통해 삶과 신앙의 역동적인 통합적 관계를 체험케 하는 그 무엇인가가 신자들에게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교회가 세상의 상대주의 및 세속주의 흐름에 대처하는 가장 근원적이고도 효과적인 길은 교회 공동체 스스로의 자성과 쇄신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성찰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시한 ‘시대의 표징’(signa temporum)에 대한 해석과 연결된다.50) 즉, 세속주의 흐름이 만연한 현대 사회가 드러내는 온갖 부정적 소외 현상들에 대한 관심과 대응은, 시대의 표징에 대한 해석과 자각 속에 이루어지는 교회의 자기 성찰과 쇄신 작업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다.51)

 

사실, ‘교회의 지속적 쇄신’이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주제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Lumen Gentium) 8항에서는 “자기 품에 죄인들을 안고 있어 거룩하면서도 언제나 정화되어야 하는 교회(Ecclesia sancta simul et semper purificanda)는 끊임없이 참회(poenitentia)와 쇄신(renovatio)을 추구한다”고 천명한다. 한편, 교황청 신앙교리성 산하의 국제신학위원회(International Theological Commission)는 1999년 12월 대희년을 앞두고 발표한 <기억과 화해 교회와 과거의 잘못>(Memory and Reconciliation : The Church and the Faults of the Past)이라는 문헌에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5~1274) 성인의 말씀을 인용하여 “아직 순례의 여정에 있는 교회는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을 기만하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52)

 

이러한 교회 공동체적 쇄신의 맥락에서, 2013년 발표된 다음의 글은 세속주의에 대처하는 교회의 당면 과제가 무엇인지를 잘 설명한다.

 

교회 역시 세속주의 문화 속에 존재하고 있다. 사실 대상으로서의 세속주의(문화)가 아니라 교회 안의 세속주의가 더 문제인지도 모른다. 신앙이 세속주의 문화 안에서 어떻게 고백되고 재현되는지, 신앙이 세속주의 문화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실천되고 있는지에 대한 분석과 성찰이 없다면 아마도 세속주의에 대한 교회의 비판은 공허하거나 위선일 위험이 있다. 하느님에 대한 부정(공격적 무신론자들)보다 하느님에 대한 왜곡(자본주의와 욕망 문화에 의해 변질된 종교와 신앙)이 더 문제적이지 않을까? …세상의 문화(세속주의 문화)를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교회가 먼저 자신을 쇄신함으로써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세속주의에 대한 비판이 먼저가 아니라(세속주의 문화 안에 서 있는) 교회의 쇄신이 먼저다.53)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쇄신이라는 차원에서, 현 교황 프란치스코가 세속주의적 가치관에 오염되어 명예와 성공을 추구하는 교회적 삶에 대해 반성을 촉구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3년 5월 21일 바티칸 미사 강론을 통해 “출세주의와 교회 내에서의 권력 추구욕은 교회 자체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죄악”이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살면서 너무나 쉽게 세속적인 방식으로 말하고 생각한다”고 지적하였다.54) 또한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거행된 제28차 세계청년대회 기간(2013년 7월 23~28일) 중 브라질 주교단 및 남미 주교단과 만난 자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행정주의를 비판하며 “교회가 효율성과 사업성을 따지기 시작하면 NGO 기구와 다를 게 무엇이냐”고 반문했다.55)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러한 실천적 가르침, 그리고 거기에 매우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전 세계 많은 사람의 공감과 지지는 오늘날 상대주의와 세속주의에 대처하는 교회의 자세와 그 지향점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잘 시사한다.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필리 2, 6-11 참조)에 기초한 복음적 가치의 창출과 체험적 증언이야말로 물질적 가치만을 추구하는 현대의 세속주의 흐름을 이겨낼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라 할 수 있겠다.

 

 

4. 신영성 운동(new spirituality movement) - 뉴에이지(New Age)를 중심으로

 

1) 신앙과 이성의 관계

 

건전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저해하는 흐름 중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서 현대의 ‘신영성 운동’(new spirituality movement)을 꼽을 수 있다. ‘신흥 종교 운동’(new religious movements)은 현대 세계에서 기성 종교들과 대립하며, 혹은 그 내부나 가장자리로부터 새로이 출몰하는 광범위한 종교적 분파들을 가리키기 위해 세계적으로 사용되는 일반적인 용어이다.56) 그런데 ‘종파들’(sects 혹은 cults)이라고도 불리는 신흥 종교 운동의 조직적 성격과는 달리, ‘뉴에이지’(New Age) 운동처럼 육체적 건강과 정신적 평화를 추구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영적 체험을 통해 자기완성에 이르고자 시도하는 흐름의 비조직적인 네트워크를 가리켜 ‘신영성 운동’(new spirituality movement)이라 부른다. 일본에서 등장한 ‘정신세계 운동’과 한국을 중심으로 전개된 ‘기(氣)수련 운동’도 이러한 범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57)

 

신영성 운동의 가장 대표적인 흐름은 이른바 ‘자기 안의 영성’을 추구하는 뉴에이지 운동이다. 이는 현대 세계 안에서 서구 문화에 대한 근원적 회의와 반발로부터 비롯되어 명백히 반(反)그리스도교적 성격을 지니며 여러 다양한 동양 종교적 요소들을 많이 수용하여 혼합주의(syncretism) 형태를 보이는 다양한 흐름의 네트워크라고 정의 가능하다. 뉴에이지 운동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종교적 대안으로 자처하며 등장한 동시에 음악, 영화, 출판, 학회, 회의, 기타 활동이나 행사 등의 대중문화 안으로 파고들어 확산되면서 더욱 깊은 생존 기반을 모색해왔다. 뉴에이지는 하나의 조직체나 통일된 운동이라기보다는, ‘세계적으로 생각하며 지역적으로 활동하는’(think globally but act locally) 느슨한 네트워크라고 할 수 있다.58)

 

이미 뉴에이지를 포함한 신영성 운동의 일반적 특징들에 대해 고찰하는 여러 연구물이 나왔기에, 본 논문에서는 뉴에이지를 중심으로 그 도전으로 인해 발생하는 신학적 쟁점들에 주된 초점을 맞추어 논하기로 하겠다. 먼저 왜 많은 현대인이 신영성 운동에 이끌리는가를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서구 사회의 경우, 20세기 후반부터 뉴에이지 운동이 기승을 부리게 된 것은 그동안 서구 문화를 지배해오던 이성주의적 흐름과 경향이 이제 어느 정도 한계에 부딪힌 까닭이라고 분석 가능하다. 사실, 근대에 접어들며 많은 사상가는 인간의 합리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과장하면서 신앙으로부터 분리된 거대한 이성적 체계를 구축하고자 시도하였다.59) 이후 끊임없이 계속되는 과학기술 문명의 발전 속에 인간 소외 현상은 심화되어 갔으며, 이제 근대를 지나 이른바 ‘탈(脫)근대적’(post-modern) 시대에 접어들며 해체주의적 경향과 더불어 이성주의에 대한 염증이 찾아온 것이라 진단할 수 있겠다. ‘탈근대’란 ‘근대성’(modernity)에 대한 대응으로 등장한 문화적 특성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본래 미학적 혹은 기술적 현상과 관련해 사용되다가 점차 철학을 비롯한 문화 전반의 영역으로 그 개념이 확장되었다. ‘근대성’이 현세적, 물질적, 합리적 성격을 지닌다면, ‘탈근대’는 합리성으로부터의 탈피와 더불어 개별화, 소비화, 문화화 등의 특성을 드러낸다. 따라서 과학화, 조직화, 체계화를 강조하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보다 정서적이고 정신적이며 영적인 차원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와 전환이 사람들을 그리스도교로 다시 이끌기보다는 개인적 차원의 자유롭고 임의적인 영적 관심으로 인도한다.60)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신영성주의적 흐름의 원인은 보다 복합적인 차원에서 분석 가능하다. 근대적 관점에서 지나치게 합리적 이성의 눈으로만 사물을 보던 서구에서는 점차 이성에 대한 염증을 느끼기 시작하여 탈이성적, 신비적 세계관에 대한 도취 현상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서구 사회의 탈근대적 상황에 대한 분석이 한국 상황에도 상당 부분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이미 산업화와 서구화 과정을 겪은 한국 사회에서도 서구의 경우처럼 탈(脫)이성주의적 경향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교로부터의 이탈 현상이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 더 추가적으로 언급할 수 있는 것은 정반대 측면의 해석이다. 한국은 서구화된 사회이긴 하지만 본래부터의 서구 사회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인의 종교 심성에 오랫동안 깊게 자리한 비(非)이성적 신비주의 경향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겠다.

 

스리랑카(Sri Lanka) 출신의 예수회 신학자 알로이시어스 피어리스(Aloysius Pieris, 1934~ )는 아시아 상황에서 발생하는 ‘우주적 종교’(cosmic religion)와 ‘초우주적 종교’(metacosmic religion) 간의 갈등과 통합에 대해서 말한다. ‘우주적 종교’란 애니미즘(animism), 토테미즘(totemism), 샤머니즘(shamanism) 등 원시 부족 사회 때부터 사람들의 삶과 문화 안에 정착한 일차적 종교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초우주적 종교’란 역사의 어느 시기에 정립된 거대한 몇몇 세계 종교 전통들을 가리킨다. 피어리스가 주장하는 바는, ‘초우주적 종교’가 어느 사회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그 지역의 일차적인 ‘우주적 종교성’과 조화로운 긴장의 상호관계 속에 이루어지는 통합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우주적 종교’가 ‘초우주적 종교’에 의해 종속되고 정화되는 일이 발생한다. 그리고 한번 이러한 통합 과정이 발생한 후에는, 강압에 의하지 않고서는 이미 정착한 초우주적 종교가 또 다른 초우주적 종교에 의해 대체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미 거대한 세계 종교들이 자리한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교의 선교가 어려운 점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피어리스는 설명한다.61)

 

이러한 피어리스의 견해에 입각하여, 한국인들의 종교 심성에 자리한 일종의 불안정성과 비이성적 신비주의 경향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한국의 지역적인 ‘우주적 종교성’은 내륙 아시아에 중심을 둔 샤머니즘인데,62) 이와 처음 결합된 ‘초우주적 종교’는 바로 불교이다. 불교 전통은 서구 그리스도교와는 달리 이성적 기반을 그리 중시하지 않으며 직관적인 성향을 드러낸다. 그리고 조선 시대를 거치며 억불숭유 정책을 통해 불교로부터 유교로의 강압적인 대체 과정을 거쳤고, 그러면서도 불교는 여전히 생존해왔다. 그리스도교가 철저한 주도권을 지녔던 서구에서 발생한 우주적, 초우주적 종교성의 결합 과정과는 달리, 한국의 샤머니즘은 불교나 유교와의 결합 과정 속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해왔다. 근대에 이르러 그리스도교가 도래하여 또다시 일정 부분 결합되는 과정을 거친 후에도 샤머니즘의 영향력은 충분히 정화되지 않았다고 보인다. 그러므로 종교학적으로 볼 때,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는 샤머니즘의 토대 위에 불교와 유교, 그리고 단기간에 급성장한 그리스도교가 불안정한 공존을 이루는 매우 독특한 종교 상황이 발견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랜 기간 철학적 신학에 근거한 그리스도교 문화의 지속적이고도 안정적인 영향 속에 있어 왔던 서구 문화와는 달리, 한국인의 종교 심성 안에서는 그 어떤 불안정성(instability)이 발견된다 할 수 있으며, 이성적 합리성(rationality)의 기반 또한 그리 충분치 않다고 분석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은 쉽사리 비이성적인 신비주의적 세계관에 빠져들 수 있다. 신비 추구는 인간의 기본적인 종교적 갈망이기에 그 자체로 문제가 될 수는 없지만, 이러한 신비 추구 과정이 쉽사리 잘못된 방향으로 오도될 수 있다는 데에 함정이 있다. 안정성이 결여되고 이성적 합리성이 간과된 신비 추구적 신앙은 미신이나 광신의 경향으로 흐르기 쉽다. 바로 여기에 신영성 운동의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뉴에이지 운동의 한국적 수용에 있어 유리했던 점은 뉴에이지의 ‘전체론적/전인주의적’(holistic)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성적 합리성에 기초하여 주체와 객체를 엄격히 구분하는 서구의 이분법적(dualistic) 구도와는 달리, 뉴에이지가 내세우는 전체론적/전인주의적 접근은 정서적 동일성과 신비감을 중시하는 한국인의 종교-문화적 심성에 별 부담감 없이 다가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미 존재하는 기성 종교들을 대체하고자 하는 시도 이전에, 문화적 전달을 통한 정서적 접근이 더 많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특히, 1980~1990년대에 걸쳐 한국 사회에서 뉴에이지 계열의 많은 서적이 출간되면서 뉴에이지 운동의 전파에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평가된다.63) 이처럼 뉴에이지 운동은 정보 매체와 대중문화를 통해 계속 확산되어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문화적 현상으로 인정받으며, 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기다리는 상태라 하겠다.

 

이런 한국적 현상에 대한 우선적인 대안으로서, 신앙생활에 있어서의 안정성(stability)과 이성적 합리성의 기반을 다시금 공고히 하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신앙과 이성의 올바른 관계 정립이라 할 수 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의 <가톨릭 신앙에 관한 교의 헌장>(Dei Filius, 1870. 4. 24)에서는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서로 대립적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 규정하면서, “실로 올바른 이성은 신앙의 기초를 드러낸다”고 강조한다(DH 3019 참조).64) 한편, 국제신학위원회 역시 2012년 문헌 《오늘의 신학 : 전망, 원칙, 기준》(Theology Today : Perspectives, Principles, and Criteria)을 통해 이성과 신앙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이성을 거부하거나 멸시하는 신앙은 미신이나 광신에 빠질 수 있고, 의도적으로 신앙에 자신을 닫아놓는 이성은 크게 진보할 수 있다 해도 인식될 수 있는 것의 절정에는 이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화는 진리가 다양한 측면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단일성을 이루기 때문에 가능하다. 신앙으로 받아들인 진리와 이성에 의해 발견된 진리는 동일한 원천에서, 곧 이성을 창조하시고 신앙을 주신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것으로서 궁극적으로 서로 모순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서로를 지탱해 주고 비추어 준다(64항).65)

 

위의 인용문이 지적한 대로, 한국적 상황에서는 일반적인 종교 심성이나 신앙생활에 있어 이성적 토대와 합리적 기반이 그리 튼튼하다고 볼 수 없기에 쉽사리 신영성 운동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는 측면의 분석이 가능하다. 그래서 요한 바오로 2세가 말한 대로, “신앙과 이성은 인간 정신이 진리를 바라보려고 날아오르는 두 날개와도 같다”는 점을 일깨우는 것과 “신앙과 철학이 각각의 자율성을 훼손당하지 않은 채로 자기 본성과 조화를 이룰 수 있게 해 주는 깊은 일치의 회복”66)이야말로 한국 교회가 당면한 쇄신과 새 복음화의 과제를 위해 생각해야 할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신자 개인의 차원에서 이러한 접근이 어렵다면, 교회 공동체적 차원의 배려가 요구된다. 신앙생활을 위한 건전한 합리성을 담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미 오랜 시간에 걸쳐 정화되고 검증된 공동체적 전통의 지지와 도움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본에 충실하게 살며 교회 공동체의 축적된 전통으로부터 배우는 것이야말로 건전하고 효과적인 신앙생활을 위한 지름길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2012~2013년 ‘신앙의 해’를 맞아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신자들의 신앙적 기초를 든든히 다지기 위해서 내건 다섯 가지 기본 지침(“말씀으로 시작되는 신앙”, “기도로 자라나는 신앙”, “교회 가르침으로 다져지는 신앙”, “미사로 하나 되는 신앙”, “사랑으로 열매 맺는 신앙”)은 압축적이면서도 효과적인 시도로 평가된다.

 

2) 전체론적/전인주의적(holistic) 접근

 

그리스도교 신앙과 문화에 등을 돌리고서 ‘물고기자리’로부터 ‘물병자리’로의 이동이라는 점성술적 전망에 기초하여 새로운 영적 추구와 신비 탐구를 표방하며 사람들을 현혹시켜 끌어모으는 뉴에이지 운동이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를 이제 신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가장 먼저 말할 수 있는 것은, 뉴에이지와 같은 신영성 운동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전체론적/전인주의적’ 접근을 하면서 효과적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은다는 점이다. 여기에서는 기본적으로 몸과 마음과 영혼이 하나라는 전인주의적 인간관을 내세우는데, 이는 종국적으로 모든 것이 우주적 일원론(一元論)으로 환원된다는 관점의 ‘전체론’(holism)으로 귀결된다. 즉, 단일하고 전인적인 인간은 언젠가 우주의 영적 에너지(spiritual energy)와 결합하여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에너지란 우주 안에 모든 것을 존재케 하는 생명력을 의미하는데, 이 우주적 에너지가 바로 기(氣)이고 또한 보편적 그리스도이며 신(神)이라고 해석된다. 이처럼 모든 것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은 바로 우주에 충만한 신적 본성이다. 비인격적 실재로서 우주적 의식의 탁월한 표현인 신적 본성이 만물 안에 내재하며 하나의 참된 실재를 구성한다고 주장하기에 범재신론(汎在神論, panentheism)적 입장이 그 근저에서 발견되며, 이러한 일원론적 관점은 뉴에이지 운동의 신지학(神智學, theosophy)적 배경에서 나온 것으로 분석된다.67)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쟁점이 되는 것은 이처럼 전인주의를 표방하는 뉴에이지와 최근 전인적 관점에서 새로운 대체의학적 접근을 시도하는 흐름과의 관계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란이 있을 수 있다.68) 지금 한국 사회에 유행 중인 다양한 웰빙(well-being) 추구와 힐링(healing) 지향적 문화에는 어느 정도의 뉴에이지 운동적 요소들이 섞여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현재 세계적 차원에서 하나의 새로운 흐름으로 부상 중인 전인의학(holistic medicine) 자체가 모두 뉴에이지 계열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된다. 전인적 관점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의 인간관 역시 기본적으로 단일하고 통합적인 인간관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69) 뉴에이지의 전체적이고 전인주의적인 시각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것이 성경에 근거한 그리스도교 신앙적 관점과는 달리 혼합주의적(syncretistic) 성향을 지닌 일원론에 근거한다는 것이다.70) 사실, 전인의학의 세계적 흐름에는 뉴에이지 운동의 혼합주의적 요소를 지닌 것에서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적 관점의 건전한 접근까지 여러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기에 이를 한 가지 관점에서 단순하게 규정할 수는 없다.71) 그러므로 결국 중요한 것은 관찰과 식별이라 하겠다.

 

인간학적 관점에서 말하는 전인적 인간관이란, 그 어느 한 특정 측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단일한 인간을 통합적으로 보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구분(distinction) 가능하지만 분리(separation)할 수 없는 인간의 다섯 가지 차원, 즉 인간의 신체적(physical), 논리-지성적(logico-intellectual), 심리-정서적(psycho-emotional), 사회적(social), 그리고 영적인(spiritual) 측면의 다섯 가지 차원을 통합적으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전인적 인간을 말한다는 것은 인간의 이 다섯 가지 차원 중 어느 한 가지도 배제하거나 경시하지 않으면서도, 균형(balance)과 조화(harmony)를 이루어 전체를 모두 포괄하는 통찰을 의미한다.72)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동일하게 전인적이고 통합적인 인간관에 대해 말한다 하더라도 뉴에이지 운동의 전인주의와 분명히 구별되는 것은, 그 혼합주의적 관점을 배척한다는 점과 더불어 그리스도교 전통이 지니는 고유한 신학적 인간학에 있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인간이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며,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유비적 관계가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는 ‘존재(存在)의 유비(類比)’(analogia entis)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되어야 한다. ‘존재의 유비’란 실재들 사이의 유사성(類似性)과 비유사성(非類似性), 즉 유사성과 상이성(相異性)을 동시에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반드시 유사성과 비유사성이 동시에 존재한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존재(창세 1,26-27 참조)라는 사실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사성을 가리킨다. 그런데 1215년의 제4차 라테란 공의회(Concilium Lateranense IV)에서는, 창조주 하느님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의 유사성에 관해 말할 때에는 반드시 그보다 더 큰 비유사성(상이성)이 전제되어야 함을 규정하였다(DH 806 참조).73)

 

그러므로 인간은 한편으로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어 그분을 향해 성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세상과 우주의 창조주이자 주권자이신 하느님의 초월성에 온전히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처럼 하느님과의 비유사성을 체험한다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됨을 뜻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 자신의 본래적 정체성을 발견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지상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자연적, 역사적 존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하느님을 향한 초월을 지향하며 살아간다. 따라서 역사성과 초월지향성이라는 두 측면의 조화롭고 균형 잡힌 통합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역설적 실존이며 본래적 사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74)

 

반면에, 신영성 운동의 대표적 흐름인 뉴에이지 운동에서는 인간이 종국적으로 우주의 에너지와 결합되어 마침내 신성(神性)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 신앙관과의 결정적 차이점을 드러낸다. 물론, 그리스도교 신학의 은총론에서도 ‘신화 은총’(神化恩寵, gratia deificans)이란 용어를 사용하지만, 이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이다. 한마디로, 이는 인간이 그리스도의 구원 은총을 통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4) 된다는 의미를 드러낸다.75) 초대 교회의 여러 교부가 천명했던 다음의 신학적 명제는 이러한 구원관과 은총관을 잘 요약한다. “인간이 하느님이 되도록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Deus homo factus est ut homo fieret Deus). 즉, 하느님의 구원 역사(history of salvation)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지만 죄악으로 인해 훼손된 인간에게 다가와, 하느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응답이라는 상호 관계성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을 통해 인간을 성장시키는 하나의 신비적 교육 과정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적 구원 과정의 목표로서 인간의 ‘신화’(神化, deificatio) 개념이 제시된다. 이러한 은총으로서의 ‘신화’ 개념은 인간이 글자 그대로 하느님과 똑같게 된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을 닮아감으로써 마침내 자신의 참된 본질과 정체성을 발견하고 회복하게 된다는 차원에서 이해 가능하다.76)

 

그리스도교 신학적 관점의 건전한 영적 추구와 참된 신비적 탐구는 전인적 인간관을 바탕으로 하여, 하느님과의 밀접한 관계에 대한 유사성의 체험을 거치는 동시에, 하느님의 무한한 신비 앞에서 자신의 인간적 한계를 깨닫는 비유사성의 체험을 통해 비로소 그 진정한 출발이 이루어진다. 반면에, 인간이 신과 결합되어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다고 믿는 뉴에이지의 전인적 인간관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이러한 비유사성 차원을 간과한다. 그리스도교 신학적 관점에서는 전인적 인간이 초월지향성을 가지고 살며 설혹 초자연적 체험을 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자연적이고 역사적 존재로 남아 있다고 보기에 하느님의 초월성이 계속 보전된다. 반면에, 뉴에이지 운동에서는 역사적 인간이 우주내적(宇宙內的) 체험을 통해 신성(神性)으로 직접 전환될 수 있다는 관점의 전인주의를 표방한다.77)

 

이러한 인간관의 차이는 신론(神論)과 그리스도론적 차원의 결정적 차이점으로 연결된다. 뉴에이지 운동은 전인주의적 접근에 기초하여 단일한 우주적 통합을 추구한다. 따라서 뉴에이지는 모든 종교의 기원적 동일성과 무차별적 화해를 제시하며, 마침내 하나의 ‘우주적 정신’으로서의 ‘보편적 그리스도’로 모든 것을 수렴하는 완전하고 새로운 대체 종교(alternative religion)임을 스스로 표방한다. 따라서 우주적 정신에 기초한 새로운 세계 공동체적 소속감과 평화 정신, 그리고 보편적 믿음과 가치에 대한 공동 추구는 뉴에이지 운동의 정서적 특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처럼 상대주의와 혼합주의, 그리고 범재신론에 기초한 뉴에이지 운동의 전체적(holistic) 전망이 인류의 보편적 형제애를 내세우며 무차별적으로 확산될 때, 그리스도교 신앙이 선포하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초월-역사적 구원 신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사건의 유일성(unicity)과 보편성(universality)에 관한 교의적(敎義的) 메시지는 심각한 도전에 마주하게 된다.78)

 

3) ‘자기만족 추구의 영성’

 

탈근대 시대의 문화적 흐름은 종교를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와 입장에도 변화를 주게 되어 다양한 종교 변용(transformation of religion)을 일으키게 된다. 많은 사람이 이제 더 이상 기성의 종교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임의적이고 자유로운 영적 추구를 하며 살게 된다. 일종의 ‘개인주의 영성’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기존의 종교적 의무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다시 말해, 개인의 삶 안에서 대면하게 되는 여러 상황과 체험들을 전통적인 종교의 가르침과 의식이나 제도 안에서가 아니라 개인의 자율적 각성과 나름의 의미 부여를 통해 해석하고자 하는 경향이 발생하는 것이다.79)

 

실제로 최근의 사회학적 조사에서 이러한 현상이 분명히 보고된다. 특히 서구의 젊은 층을 중심으로 ‘특정 종교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not particularly religious) 스스로 ‘영적인 삶을 산다고’(but spiritual) 자부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80) 예를 들어, 이들은 자신의 개인적 필요와 영적 요구에 따라 프랑스 테제 공동체(The Taize Community)의 초교파적 기도 모임, 가톨릭의 세계청년대회(World Youth Day), 달라이 라마(Dalai Lama)의 뉴욕 시(New York City) 강연, 한국 불교 사찰에서 이루어지는 템플스테이(temple stay) 등에 자유로이 참석하며 자신의 영적 추구를 지속해 나간다. 그러나 어떤 특정 종교의 조직에 속하지도 않고 그 가르침이나 계율, 윤리적 의무 등에 얽매이지도 않는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필연적으로 어느 정도의 혼합주의적 경향이 발생하게 된다.

 

물론 이는 앞서 언급한 세속주의에 물든 젊은이들에 비교해볼 때 상대적으로 더 건전한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으나, 종교적-신앙적 차원에서는 보다 더 올바른 방향으로 계도와 교정이 요구된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러한 ‘개인주의 영성’은 이미 앞서 언급한 상대주의 차원의 ‘자기만족 추구의 문화’(culture of complacence)가 영적 차원으로 업그레이드(upgrade)된 버전(version), 즉 ‘자기만족 추구의 영성’ 혹은 ‘자기도취적 영성’이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주관주의적, 상대주의적 영적 추구 경향과 ‘이중 소속’ 현상, 그리고 혼합주의적 성격은 전형적인 뉴에이지의 특징이다.81) 그러므로 이러한 성향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은 신영성 운동의 위험에 매우 쉽게 노출된다고 할 수 있겠다. 사실, 뉴에이지 운동은 이러한 개인주의적 영성 지향의 사람들을 겨냥해 이미 오래전부터 ‘영성의 상품화’를 진행해 왔다.82)

 

여기에서 신학적으로 중요하게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영적 추구는 하나의 취미나 상품이 될 수 없으며 기술적 차원을 넘어선다는 점이다. 특히 그리스도교적 영적 추구를 말할 때, ‘신앙의 신비’(mysterium fidei)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빼놓을 수는 없다. 뉴에이지 운동에서도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지만, 이는 다른 개념과 의미에서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 사람이 되신 참된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그리스도교 신앙과는 달리, “뉴에이지 문학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흔히 수많은 현자나 전수자, 또는 화신(化身) 가운데 한 명으로 제시”83)될 뿐이다. 뉴에이지에 따르면, 역사의 예수님은 유일한 그리스도가 아니라, 영원하고 보편적인 비인격적 속성의 ‘우주적 그리스도’(Cosmic Christ)의 여러 지상 발현 중 하나이다. 진정한 그리스도는 하나의 역사적 인물의 범주로 제한할 수 없는 하나의 ‘이상’(理想)이며 ‘우주적 정신’이라는 것이다.84)

 

이러한 뉴에이지의 그리스도론적 주장과 그리스도교의 신앙교리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 차이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역사적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죽음이 드러내는 구원론적 의미와 가치에 대한 평가이다. 그리스도교 복음에 따른 하느님의 육화(incarnation)는 하느님께서 단순히 사람의 외적 형상만을 취하셨다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는 하느님께서 바로 지극한 사랑 때문에, 인간의 삶뿐만 아니라 그 죽을 운명의 나약하고 비참한 조건과 마침내 죽음 자체까지도 모두 수용하셨음을 의미한다.85) 반면에, 뉴에이지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고통받을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배제하고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부인하거나 재해석”86)하려고 시도한다. 이처럼 신영지주의(新靈知主義, Neo-Gnosticismus)87) 노선에서 결코 고통받을 수 없는 ‘우주적 그리스도’를 주장하는 뉴에이지의 견해는 필연적으로 역사적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그리고 죽음과 부활의 신비가 드러내는 유일무이한 구원론적 의미를 축소하고 은폐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뉴에이지 운동은 고통을 어리석고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기에 현대인들에게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달콤한 약속을 제공한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이 세상을 구원하셨다는 그리스도 신앙의 근본 진리는 ‘안락한 구원’을 추구하는 뉴에이지 운동의 추종자들에게 이해와 수용이 불가능한 주장이다. 그러나 현대의 과학기술 문명이 제공하는 편안함과 안락함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뉴에이지가 제공하는 ‘십자가 없는 우주적 그리스도론’과 고통 없는 편안한 구원관이 큰 매력과 유혹으로 다가갈 수 있다.88)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교황청 신앙교리성은 1989년 서한 《그리스도교 명상》(Orationis Formas)을 통해, “교의적 관점에서 볼 때, 사람이 되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당신 성자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자기 양도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에 도달할 수 없다”89)고 분명히 천명한다. 영적 호기심에서 여러 명상의 기술을 탐색하며 자신의 내적 평안함을 추구하는 것은 영적 여정의 단초와 시작은 될 수 있어도 그 자체로 진정한 영적 추구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진정한 영성적 추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신비를 따르는 전적인 헌신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스도교적 관상의 유일한 대상인 하느님의 사랑은 어떤 유형이든 상관없이 방법이나 기교에 의해 ‘얻어질’ 수 없는 실재이다. 기술에 의존하기보다는 오히려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위한 십자가에까지 이르렀으며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처지까지 겪으셨기(마르 15,34 참조) 때문이다.90)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언급해야 할 것은, 나자렛 예수님의 십자가상 수난과 죽음을 통한 구원의 신비를 거부하는 뉴에이지의 ‘우주적 그리스도론’은 필연적으로 역사적 예수님과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의 필연적 연속성과 동일성이라는 근본 원리를 부정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교 신앙고백의 핵심에 자리한, 참 하느님이시요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단일한 위격 개념’91)이 거부되고 왜곡되는 것이다. 뉴에이지의 그리스도론은 나자렛 예수님을 그저 신적 원리로서의 우주적 그리스도의 발현을 실현한 여러 위대한 역사적 인물 중 하나라고 보기에, 그리스도교 신학의 핵심 원리로 제시되는 역사의 예수님과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의 연속성과 동일성은 거부되기에 이른다. “예수님은 주님이심”(로마 10,9 ; 필립 2,11)이라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고백이야말로 뉴에이지의 그리스도론적 주장을 배척하는 결정적 기준점이 된다. 그러므로 뉴에이지가 말하는 것과 달리,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개진하는 진정한 ‘우주적 그리스도론’이란 ‘신앙의 그리스도’를 모든 우주적 차원에서 재조명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반드시 역사적 예수님과의 연속성과 동일성이라는 공리(公理) 위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92)

 

 

5. 결론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해치는 문화적 흐름으로 지금껏 고찰해온 과학주의, 세속주의, 그리고 신영성 운동의 세 가지는 각기 독자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사실상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과학만능주의에 기초하여 편안함과 안락함만을 추구하며 절대적 진리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여 세속주의와 극단적 개인주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뉴에이지와도 같은 신영성 운동의 상대주의적, 혼합주의적 접근은 매력적인 호소로 다가올 것이다. 즉, 과학주의와 세속주의가 만들어내는 소외 상황이 정신적 위기 속의 사람들을 그릇된 종교적 운동과 왜곡된 영성적 흐름으로 오도(誤導)하는 것이다. 사실, 신영성 운동의 대중적 성공은 현대 과학기술 문명의 정신적 위기와 세속주의 사회의 방향 감각 상실을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흐름들의 확산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향한 하나의 커다란 도전이며 심각한 위협을 구성하기에, 교회는 책임감을 가지고서 이 문제를 진지하게 대면해야 한다. 이처럼 건전한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을 저해하는 현대의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관한 지금까지의 모든 성찰을 바탕으로, 신학적-사목적 차원의 네 가지 전망을 결론적으로 제시할 수 있겠다.

 

첫째, 이러한 흐름과 운동들에 대한 알림과 교육을 통해 더 이상 교회의 신자들이 여기에 빠져들지 않도록 잘 인도하고 돌보는 일이 필요하다.93) 특히, 신영성 운동이 이른바 ‘영성’이라고 내세우는 바가 얼마나 허구적이고 잘못된 것인지를 알려야 한다. 이는 역사 안에서 온갖 그릇된 영적 유혹의 기만을 밝혀내며 진정한 신앙적 체험을 보호하고 가르쳐온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신자들의 지식 증대 자체가 교육의 최종 목표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올바른 판단과 대응을 위해 필요한 식별(discernment)로 인도하는 일이다.94) 식별이란 성령의 현존과 인도 아래 성경 말씀의 빛에 비추어 선함과 악함, 참과 거짓을 구별하며, ‘지금 여기에서’(hic et nunc) 역사(役事)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밝혀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하느님 뜻에 관한 식별은 반드시 그에 따른 변화와 성장을 수반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식별이란, 성령을 따르는 교회적 삶의 개인적 혹은 공동체적 차원에서 매 순간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여 그에 따라 살고자 하는 역동적인 노력과 그로 인한 쇄신 및 성장을 가리킨다.95) 이러한 식별에 기초해 이루어지는, 문화적 흐름의 오류와 영적 기만에 대한 예언자적 고발은 현대 세계 안에서 추진되는 ‘새로운 복음화’를 위해 매우 중요한 요소를 구성한다.

 

둘째, 이러한 문화적 흐름과 종교적 운동에 빠져 교회를 등지고 신앙을 저버리는 사람들에 대한 인간학적-신학적 이해와 성찰, 그리고 사목적 배려와 접근이 요구된다. 아마도 그들은 어렵고 힘든 상황을 겪으며 방황할 때, 신앙생활을 통해 그들 삶의 심각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했으며, 또한 교회 안에서 기대거나 의지할 만한 위로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느낄 수도 있다. 사실, 뉴에이지나 신흥 종교 운동의 대중적 성공은 사람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겪는 갈등과 문제들, 혹은 사회생활을 통해 겪게 되는 어려움과 소외 상황 등을 잘 파고들어 접근하는 것 때문이라 할 수도 있다. 서구에서 상대적으로 사회적 소외감을 더 많이 느끼는 이주민 계층에서 그 추종자들이 많이 나타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96) 과학만능주의와 물질주의, 상대주의와 세속주의, 그리고 물신주의와 극단적 이기주의 등에 사로잡혀 방황하다가 마침내 교회를 등지고 뉴에이지 같은 신영성 운동에 빠져드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느끼는 정신적 황폐함과 내적인 좌절, 그리고 절망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교 신앙공동체는 역동적인 복음 선포와 지혜로운 사목적 배려를 통해 더욱 생동감 있는 신앙 체험을 제공함으로써, 잘못된 문화적 흐름이나 신영성 운동의 교회 내 침투 및 사회적 확산을 예방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전례, 교리 교육이나 신자 재교육, 공동체적 친교와 나눔, 그리고 토착화 등의 차원에서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더욱 활력을 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나아가, “신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하느님께 사랑받는 유일한 인격적 존재임을 자각하게끔 도와주는 손길”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신앙 안의 인격적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인도하는 사목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하겠다.97) 자신의 구체적 삶 안에서 진정성 있게 신앙을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의 모범이야말로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교육 방법이기 때문이다. 현재 전 세계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희망을 선사하는 교황 프란치스코의 예언자적이며 봉사자적인 리더십(leadership)을 통해서 우리는 이러한 실제적 모범을 발견하게 된다.

 

넷째, 우리는 오늘날 영적 탐구와 신비적 추구를 향한 많은 사람의 열망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현대 과학기술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인간의 정신적 소외는 심해지고 더욱 심각한 영적 빈곤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뉴에이지 같은 신영성 운동의 흐름에 빠지긴 하였지만, 그들의 영혼 안에 담긴 영적 목마름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즉, 현대 세계 안에서 확산되는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의 울부짖음을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98) 만일 우리가 현대 세계의 과학주의와 세속주의, 그리고 신영지주의적 흐름의 확산 안에서 영적 빈곤함과 소외 속에 방황하고 목말라 하는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발견할 수 있다면, 교회는 여기에 대해 모든 거짓과 기만을 넘어서 참된 영성적, 신앙적 체험을 증거하고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다. 혹시 사람들의 열망에 방향적 오류가 있다면 이를 교정하고 정화하면서, 그들 모두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참다운 구원 체험으로 인도해야 할 예언자적 사명과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신앙의 수호자인 교회는 이러한 울부짖음과 열망이 오직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요한 14, 6 참조)에 대한 진정한 체험을 통해서만 응답되고 채워질 수 있는 것임을 증언해야 한다.99)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교회는 특히 뉴에이지 같은 신영성 운동의 도전과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전통적 차원의 호교론적 방어에만 머물지 않고, 이 시대를 살며 영적으로 목말라하고 우주적 관심 속에 신비적 추구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과 신비를 호소력 있게 선포하고 증언할 것인가를 찾아야 한다. 결국, 이러한 교회적 성찰과 대응 작업에 관한 모색은,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신비사상(mystical thought)의 재발견, 그리고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초세기 ‘부정신학’(否定神學, apophatic theology)100)에 대한 새로운 성찰이란 향후 과제로 우리를 인도한다.

 

* 이 글은 2013학년도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비연구비’의 지원을 받아 연구 작성된 논문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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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베네딕도 16세), 페터 제발트(Peter Seewald) 대담 및 정리, 정종휴 옮김(유경촌 감수), 《세상의 빛》, 가톨릭출판사, 2012, [원문 : Licht der Welt, Vatican City : Libreria Editrice Vaticana,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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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문 기사

 

<도미니코 수도회 아스피로스 총장 신부 : 늘 영성적 시각으로 보고 판단해야>, 《평화신문》 2003년 7월 20일자 8면.

<경제 이익보다 인간 존엄성이 먼저 : 교황 베네딕토 16세, 연대와 인간 우선하는 경제 문화 촉구>, 《평화신문》 2009년 6월 21일자 7면.

<돈, 권력 아닌 인간과 공동선이 ‘먼저’ : 교황 프란치스코 백주년 재단 설립 20돌 국제회의에서 강조>, 《평화신문》 2013년 6월 2일자 7면.

<교황 ‘교회 내 출세주의 · 권력추구 오래된 죄악 : 진정한 권력은 주님의 희생 따르는 것’>, 《가톨릭신문》 2013년 6월 2일자 10면.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 돌보는 데 앞장서라 : 프란치스코 교황, 브라질 사목방문 및 리우세계청년대회에서 강조>, 《평화신문》 2013년 8월 4일자 7면.

 

---------------------------------------------

1) 베네딕도 16세, 《진리 안의 사랑 : 사랑과 진리 안에서 이루는 온전한 인간 발전에 관한 회칙》(2009. 6. 29),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9, 113쪽(7항), [원문 : “Litterae encyclicae Caritas in Veritate de humana integra progressione in caritate veritateque”, Acta Apostolicae Sedis 101, 2009, pp. 641~709].

 

2) 요한 바오로 2세, 이재룡 옮김, 《신앙과 이성 :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관한 회칙》(1998. 9. 14),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9, 59~60쪽(46항), [원문 : “Litterae encyclicae Fides et Ratio de necessitudinis natura inter utramque”, in Enchiridion Vaticanum : Documenti ufficiali della Santa Sede, vol. 17(1998), Bologna : EDB, 2000, pp. 898~1091(nn. 1175~1399)].

 

3) 심광현, 《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생산과 문화정치 : 예술-학문-사회의 수평적 통섭을 위하여》, 문학과학사, 2009, 50~55쪽 참조.

 

4) 오늘날 생명윤리 분야의 여러 문제들에 관하여 Francis S. Collins, 이창신 옮김, 《신의 언어》, 김영사, 2009, 237~274쪽, [원문 : The Language of God : A Scientist Presents Evidence for Belief, New York : Free Press, 2006] 참조.

 

5) Hans Kung, 서명옥 옮김, 《한스 큉, 과학을 말하다 : 만물의 시초를 둘러싼 갈등과 소통의 드라마》, 왜관 : 분도출판사, 2011, 63쪽, [원문 : Der Anfang aller Dinge : Naturwissenschaft und Religion, Munchen : Piper Verlag GmbH, 2005].

 

6) 프란치스코, 김영선 옮김, 《신앙의 빛 : 신앙에 관한 회칙》(2013. 6. 29),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3, 36~37쪽, [원문 : “Litterae encyclicae Lumen Fidei de fide”, Acta Apostolicae Sedis 105, 2013, pp. 555~596].

 

7) 이 단락은 다음의 글들 내용을 발췌, 요약 및 수정, 보완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PARK, Junyang(박준양), “Fundamentalism and Relativism : Why Young People Are Leaving the Church”, 《가톨릭 신학과 사상》 69, 신학과사상학회, 2012, pp. 162~177 ; 박준양, <근본주의와 상대주의 - 젊은이들은 왜 교회를 떠나는가?(초록)>, 《새천년복음화연구소 논문집》 3, 새천년복음화연구소, 2012, 35~39쪽.

 

8) 근본주의의 특징에 관하여 Karen Armstrong, 정준형 옮김(오강남 감수), 《신을 위한 변론 : 우리가 잃어버린 종교의 참의미를 찾아서》, 웅진지식하우스, 2010, 415~421, 446~469쪽, [원문 : The Case for God, New York : Alfred A. Knopf, 2009] 참조. 교황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신념에 동조하지 않는 모든 이를 억압하려 드는 광신주의(fanaticism)”의 독선적 진리관과 배타적, 공격적 성향에 대하여 지적한다. 프란치스코, 앞의 책, 37쪽(25항) 참조.

 

9) Cf. Alister McGrath, “Bestseller Atheisms : The New Scientism”, Concilium 4, 2010, p. 12.

 

10) 현대의 과학적 무신론을 이끌어가는 몇몇 주요 인물들에 관해서 John F. Haught, God and the New Atheism : A Critical Response to Dawkins, Harris, and Hitchens, Louisville, KY :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8 참조.

 

11) 에드워드 O. 윌슨은 생물학과 사회학을 연결시켜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사회-문화 현상 전체를 해석하고자 시도한 사회생물학의 창시자이다. 이러한 사회생물학 분야의 대표적 저서로는 Edward O. Wilson, Sociobiology : The New Synthesis, Cambridge, MA : Harvard University Press, 1975 참조. 윌슨에 의한 사회생물학적 관점의 인간관에 대해서는 Edward O. Wilson, 이한음 옮김, 《인간 본성에 대하여》, 사이언스북스, 2000, [원문 : On Human Nature, Cambridge, MA : Harvard University Press, 1978] 참조. 사회생물학적 연결과 통합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윌슨은 지식의 단일성을 의미하는 ‘Consilience’라는 핵심 개념을 제시하였고, 국내에서는 이것이 ‘통섭’이라는 용어로 번역되었다. Edward O. Wilson, 최재천 · 장대익 옮김, 《통섭 : 지식의 대통합》, 사이언스북스, 2005, [원문 : Consilience : The Unity of Knowledge, New York : Alfred A. Knopf, 1998] 참조.

 

12) 사회생물학의 주장과 관련된 국내외의 논쟁들에 관하여 김동광 · 김세균 · 최재천 엮음, 《사회생물학 대논쟁》, 이음, 2011 ; Franz M. Wuketits, 김영철 옮김, 《사회생물학 논쟁》, 사이언스북스, 1999, [원문 : Gene, Kultur und Moral : Soziobiologie-Pro und Contra, Darmstadt :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1990] ; Ted Peters · Martinez Hewlett, Evolution from Creation to New Creation : Conflict, Conversation, and Convergence, Nashville, TN : Abingdon Press, 2003 참조.

 

13) Richard Dawkins, 홍영남 옮김, 《이기적 유전자》, 을유문화사, 2002(개정판), 305~310쪽, [원문 : Selfish Gene, New York : Oxford University Press, 21989] 참조.

 

14) Richard Dawkins, 과학세대 옮김, 《눈먼 시계공 : 진화론은 미리 설계된 적이 없는 세계의 비밀을 어떻게 밝혀내는가》, 민음사, 1994, [원문 : The Blind Watchmaker : Why the Evidence of Evolution Reveals a Universe Without Design, New York : W.W. Norton & Company, 31996] 참조.

 

15) Richard Dawkins, 이용철 옮김, 《에덴의 강 : 리처드 도킨스가 들려주는 유전자와 진화의 진실》, 사이언스북스, 2005, [원문 : River Out of Eden : A Darwinian View of Life, New York : Basic Books, 1995] 참조.

 

16) Richard Dawkins, 이한음 옮김, 《악마의 사도 : 도킨스가 들려주는 종교, 철학 그리고 과학 이야기》, 바다출판사, 2005, [원문 : A Devil’s Chaplain : Reflections on Hope, Lies, Science, and Love, New York : Houghton Mifflin Company, 2003] 참조.

 

17) Richard Dawkins, 김명남 옮김, 《지상 최대의 쇼》, 김영사, 2009, [원문 : The Greatest Show on Earth : The Evidence for Evolution, New York : Free Press, 2009] 참조.

 

18) Richard Dawkins, 이한음 옮김, 《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김영사, 2007, [원문 : The God Delusion, New York : Houghton Mifflin Company, 22008] 참조.

 

19) 리처드 도킨스에 대한 대표적 비판으로는 Alister McGrath, 김태완 옮김, 《도킨스의 신 : 리처드 도킨스 뒤집기》, SFC 출판부, 2007, [원문 : Dawkins’ God : Genes, Memes, and the Meaning of Life, Oxford : Blackwell, 2007] ; Alister McGrath · Joanna Collicutt McGrath, The Dawkins Delusion? Atheist Fundamentalism and the Denial of the Divine, London : Society for Promoting Christian Knowledge, 2007 참조.

 

20) Stephen Hawking · Leonard Mlodinow, 전대호 옮김, 《위대한 설계》, 까치글방, 2010, 9~15, 227~228쪽, [원문 : The Grand Design, New York : Bantam Books, 2010] 참조.

 

21) Hans Kung, 앞의 책, 63쪽.

 

22) 요한 바오로 2세, 송열섭 옮김, 《생명의 복음 : 인간 생명의 가치와 불가침성에 관한 회칙》(1995. 3. 25),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2006, 39~40쪽(12항), 56~58쪽(21항), [원문: “Litterae encyclicae Evangelium Vitae de vitae humanae inviolabili bono”, in Enchiridion Vaticanum : Documenti ufficiali della Santa Sede, vol. 14(1994~1995), Bologna : EDB, 22000, pp. 1206~1445(nn. 2167~2517)] 참조.

 

23) PARK, Junyang, “Fundamentalism and Relativism : Why Young People Are Leaving the Church”, pp. 175~176 ; 박준양, <근본주의와 상대주의 - 젊은이들은 왜 교회를 떠나는가?(초록)>, 38쪽 참조.

 

24) 해석학적 관점에 바라본, 이해의 실존론적 선구조(先構造)와 전이해(前理解) 개념에 대하여 박준양, <성경과 전승의 관계에 대한 해석학적 - 조직신학적 고찰>, 《가톨릭 신학과 사상》 60, 신학과사상학회, 2007, 238~241쪽 ; 심상태, 《한국 교회와 신학 - 전환기의 신앙 이해》, 바오로딸, 21999, 206~209쪽 참조.

 

25) Alister McGrath, 앞의 책, 33, 186쪽 참조.

26) PARK, Junyang, “Fundamentalism and Relativism : Why Young People Are Leaving the Church”, p. 176 참조.

 

27) Jurgen Moltmann, 김균진 옮김,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한국신학연구소, 1986, 230~238쪽, [원문 : Gott in der Schopfung : Okologische Schopfungslehre, Munchen : Christian Kaiser Verlag, 1985] 참조.

 

28) 박준양, 《창조론, 아름다운 세상의 회복을 꿈꾸며》, 생활성서사, 2008, 150~151쪽 참조.

 

29) Cf. John F. Haught, Science and Religion : From Conflict to Conversation, New York : Paulist Press, 1995, p. 203 ; Hans Kung, 앞의 책, 64~69쪽 ; Jurgen Moltmann, 김균진 옮김, 《과학과 지혜 : 자연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위하여》, 대한기독교서회, 2003, 47~53쪽, [원문 : Wissenschaft und Weisheit : Zum Gesprach zwischen Naturwissenschaft und Theologie, Gutersloh : Christian Kaiser/Gutersloher Verlagshaus GmbH, 2002].

 

30) 프란치스코, 앞의 책, 50~51쪽.

 

31) Cf. PARK, Junyang, “Fundamentalism and Relativism : Why Young People Are Leaving the Church”, pp. 176~177 ; 박준양, <근본주의와 상대주의 - 젊은이들은 왜 교회를 떠나는가?(초록)>, 38~39쪽.

 

32) ‘세속화’와 ‘세속주의’ 개념 및 그 구분에 대하여 Walter Kasper, 심상태 옮김, 《현재와 미래를 위한 신앙》, 왜관 : 분도출판사, 21985, 17~21쪽, [원문 : Einfuhrung in den Glauben, Mainz : Matthias-Grunewald-Verlag, 1972] ; 박찬호 옮김, <가톨릭 교회의 상황>, 《이성과 신앙》 53, 수원가톨릭대학교 이성과신앙연구소, 2012, 190쪽, [원문 : “Situation der Katholischen Kirche”, 《이성과 신앙》 53, 2012, 169~183쪽] ; 노길명, 《민족사와 천주교회》, 한국교회사연구소, 2005, 338쪽 ; 정희완, <세속화, 세속주의 그리고 그리스도교 - 세속주의 문화와 새로운 복음화>, 《가톨릭신학》 22, 한국가톨릭신학학회, 2013, 90~104쪽 참조.

 

33) 이러한 구분에 관하여 PARK, Junyang, “Fundamentalism and Relativism : Why Young People Are Leaving the Church”, pp. 178~179 ; 박준양, <근본주의와 상대주의 - 젊은이들은 왜 교회를 떠나는가?(초록)>, 40~41쪽 참조.

 

34) 요한 바오로 2세, 《신앙과 이성 :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관한 회칙》, 60쪽(46항).

 

35) Joseph Ratzinger(베네딕도 16세), 페터 제발트(Peter Seewald) 대담 및 정리, 정종휴 옮김(유경촌 감수), 《세상의 빛》, 가톨릭출판사, 2012, 85쪽, [원문 : Licht der Welt, Vatican City : Libreria Editrice Vaticana, 2010].

 

36) PARK, Junyang, “Fundamentalism and Relativism : Why Young People Are Leaving the Church”, p. 183 ; 박준양, <근본주의와 상대주의 - 젊은이들은 왜 교회를 떠나는가?(초록)>, 41~42쪽 참조.

 

37) 요한 바오로 2세, 《생명의 복음 : 인간 생명의 가치와 불가침성에 관한 회칙》, 39~40쪽(12항), 56~58쪽(21항) 참조.

 

38) Joseph Ratzinger, 정종휴 옮김, 《그래도 로마가 중요하다 : 신앙의 현재 상황 - 비토리오 메소리(Vittorio Messori)와의 대담》, 바오로딸, 1994, 94쪽, [원본 : Rapporto sulla fede, Roma : Edizioni Paoline, 1985].

 

39) 박준양, <근본주의와 상대주의 - 젊은이들은 왜 교회를 떠나는가?(초록)>, 42쪽.

 

40) Aloysius Pieris, 성염 옮김, 《아시아의 해방신학》, 왜관 : 분도출판사, 1988, 37~38쪽, [원문 : An Asian Theology of Liberation, Maryknoll, NY : Orbis Books, 1988] ; 박준양, 《그리스도론, 하느님 아드님의 드라마!》, 생활성서사, 2009, 79~80쪽 참조. ‘맘몬’ 개념에 관한 보다 자세한 신학적 성찰은 조규만, <하느님과 맘몬(mammon)>, 《가톨릭 신학과 사상》 10, 가톨릭대학교출판부, 1993, 5~34쪽 참조.

 

41) Joseph Ratzinger, 장익 옮김,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 왜관 : 분도출판사, 2007(신정판), [원문 : Einfuhrung in das Christentum : Vorlesungen uber das Apostolische Glaubensbekenntnis, Munchen : Kosel-Verlag, 2000] ; 베네딕도 16세, 《세상의 빛》, 83~98쪽 ; 박준양,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에 나타난 베네딕도 16세의 신학 사상 - 교의신학적 접근>, 《사목연구》 19, 가톨릭대학교 사목연구소, 2007, 145~192쪽 ; 황경훈, <‘새로운 복음화’와 아시아 교회 : 제13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와 FABC의 복음화관 고찰>, 《신학전망》 180, 광주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3, 45~46쪽 참조.

 

42) 교황 베네딕도 16세는 2009년 6월 13일 교황청 백주년재단이 주최한 국제회의 폐막식에서 전 지구적 금융 위기를 몰고 온 현재의 경제 체제는 재고되어야 하며 연대와 인간 존엄성을 우선하는 새로운 경제 모델(model)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금융 위기 원인이 되고 빈부격차를 심화시키는 현 경제 체제는 새로운 금융 패러다임(paradigm)이 필요하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교황은 또 모든 법과 규범이 무너지고 돈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참석자들 의견에 뜻을 같이하며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십자가 희생을 기억하면서 형제애와 공동선을 위한 경제 활동에 앞장서야 한다고 당부했다(<경제 이익보다 인간 존엄성이 먼저 : 교황 베네딕토 16세, 연대와 인간 우선하는 경제 문화 촉구>, 《평화신문》 2009년 6월 21일자 7면 참조).

 

43) 프란치스코, 앞의 책, 49~50쪽.

44) 같은 책, 37쪽 참조.

 

45) <돈, 권력 아닌 인간과 공동선이 ‘먼저’ : 교황 프란치스코 백주년 재단 설립 20돌 국제회의에서 강조>, 《평화신문》 2013년 6월 2일자 7면 참조.

 

46)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 돌보는 데 앞장서라 : 프란치스코 교황, 브라질 사목방문 및 리우세계청년대회에서 강조>, 《평화신문》 2013년 8월 4일자 7면 참조.

 

47) 요한 바오로 2세, 김웅태 옮김, 교황 권고 《아시아 교회》(1999. 11. 6),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0, 114쪽(49항), [원문 : “Adhortatio apostolica post synodum pro Asia Ecclesia in Asia”, in Enchiridion Vaticanum : Documenti ufficiali della Santa Sede, vol. 18(1999), Bologna : EDB, 2002, pp. 1126~1309(nn. 1772~1937)] ; 박준양, 《삼위일체론, 그 사랑의 신비에 관하여》, 생활성서사, 2007, 15쪽 참조.

 

48) PARK, Junyang, “Fundamentalism and Relativism : Why Young People Are Leaving the Church”, p. 182 ; 박준양, <근본주의와 상대주의 - 젊은이들은 왜 교회를 떠나는가?(초록)>, 43~44쪽 참조.

 

49) Cf. Thomas H. Groome, What Makes Us Catholic : Eight Gifts for Life, San Francisco : HarperSanFrancisco, 2002, p. 35.

 

50) ‘시대의 표징’(signa temporum) 개념에 대하여 박준양,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나타난 성령론적 전망>, 《가톨릭 신학과 사상》 56,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6, 144~148쪽 참조.

 

51) 박준양, <신흥 종교 운동의 도전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응답 - 사목적, 신학적 성찰>, 《사목연구》 24, 가톨릭대학교 사목연구소, 2009, 178쪽 참조.

 

52) 국제신학위원회(International Theological Commission), <기억과 화해 - 교회와 과거의 잘못>(1999. 12),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15,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0, 98~99쪽, [원문 : “Memory and Reconciliation : The Church and the Faults of the Past”, in Enchiridion Vaticanum : Documenti ufficiali della Santa Sede, vol. 18(1999), Bologna : EDB, 2002, pp. 1578~1681(nn. 2310~2406)] 참조.

 

53) 정희완, 앞의 논문, 117~118쪽.

 

54) <교황 ‘교회 내 출세주의 · 권력추구 오래된 죄악 : 진정한 권력은 주님의 희생 따르는 것’>, 《가톨릭신문》 2013년 6월 2일자 10면 참조.

 

55)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 돌보는 데 앞장서라 : 프란치스코 교황, 브라질 사목방문 및 리우세계청년대회에서 강조>, 7면 참조. 동일한 맥락에서 한국 교회를 향한 평가를 찾아볼 수 있다. 2003년 7월 한국을 방문한 도미니코 수도회의 카를로스 알퐁소 아스피로스 총장 신부는 한국 교회의 급성장에 따른 후유증에 대해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조언하였다. “교회는 비즈니스(business)적 사고를 가지면 안 됩니다. 항상 영성적 시각으로 보고, 생각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따라서 외형이나 결과보다 거기에 도달하는 과정을 더 중시해야 합니다. 교세가 약해도 복음적일 수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까지 한국 사회 특유의 ‘빨리빨리’ 습관이 나타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도미니코 수도회 아스피로스 총장 신부 : 늘 영성적 시각으로 보고 판단해야>, 《평화신문》 2003년 7월 20일자 8면 참조).

 

56) Cf. Eileen Barker, “Changes in New Religious Movements”, in Rethinking New Religious Movements, Michael Fuss(ed.), Rome : Pontifical Gregorian University Research Center on Cultures and Religions, 1998, p. 3.

 

57)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건전한 신앙생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7, 7~10, 33~38쪽 ; 노길명, 앞의 책, 341, 345~350쪽 참조. 한편, 독일 출신의 종교학자 미카엘 푸스(Michael Fuss) 등은 ‘신흥 종교 운동’의 범주를 더 넓게 잡아 뉴에이지를 그 안에 포함시키며, 그 세계적인 흐름을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분류하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말한다. 첫째, ‘여호와의 증인’과 모르몬교, 그리고 통일교 등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가장자리에서 출몰하여 발전하는 집단들의 범주이다. 둘째, 영지주의적(靈知主義的) 밀교 성향을 보이는 범주로서 뉴에이지(New Age) 운동과 ‘과학교’(Scientology)를 들 수 있다. 셋째, 동양의 종교적 전통을 서구에 이식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범주이다. 이 경우는 역사 안에서 동양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던 과정과는 정반대의 흐름을 보인다(Michael Fuss, “L’arcobaleno della nuova religione mondiale”, Lateranum 62, 1996, pp. 446~448 ; John Weldon, “A Sampling of the New Religions”, 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 67, 1978, pp. 407~426 참조). 이하 신흥 종교 운동에 대한 상세한 고찰과 신학적 평가는 박준양, <신흥 종교 운동의 도전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응답 - 사목적, 신학적 성찰>, 169~191쪽 참조.

 

58) 교황청 문화평의회(Pontifical Council for Culture) 종교간대화평의회(Pontifical Council for Inter-Religious Dialogue), 《생명수를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 : ‘뉴에이지’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성찰》,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 30~33쪽, [원문 : Jesus Christ the Bearer of the Water of Life : A Christian Reflection on the “New Age”, Vatican City : Libreria Editrice Vaticana, 2003] ; 노길명, 앞의 책, 344~345쪽 ; 전명수, 《뉴에이지 운동과 한국의 대중문화》, 집문당, 2009, 12쪽 참조.

 

59) 이성과 신앙의 역사적 분리 과정에 대하여 요한 바오로 2세, 《신앙과 이성 :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관한 회칙》, 58~62쪽(45-48항) 참조.

 

60) 노길명, 앞의 책, 338~339쪽 ; 박승찬, <다양성을 인정하는 영원한 진리 추구 : 가톨릭 철학의 흐름과 동향 2(현대 가톨릭 신학의 흐름 18)>, 《가톨릭신문》 2013년 7월 28일자 8면 참조.

 

61) Aloysius Pieris, 앞의 책, 107~109쪽 참조.

 

62) 샤머니즘의 지역적 확산에 대하여 William Johnston, 이봉우 옮김, 《신비신학 - 사랑학》, 왜관 : 분도출판사, 2007, 183쪽, [원문 : Mystical Theology : The Science of Love, Grand Rapids, MI : Zondervan, 1996] 참조.

 

63) 한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건전한 신앙생활》, 41쪽(64항) ; 전명수, 앞의 책, 12~18, 118, 133~134쪽 참조.

 

64) 《보편 공의회 문헌집 제3권(트렌토 공의회 ·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김영국 · 손희송 · 이경상 옮김, 가톨릭출판사, 2006, 809쪽, [원문 : Conciliorum Oecumenicorum Decreta, Giuseppe Alberigo et al.(eds.), Bologna : Istituto per le scienze religiose, 1972] 참조.

 

65) 국제신학위원회(Internationl Theological Commission), 손희송 · 박준양 · 안소근 옮김, 《오늘의 신학 : 전망, 원칙, 기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2, 57쪽, [원문 : Theology Today : Perspectives, Principles, and Criteria, Washington, D.C. :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2012].

 

66) 요한 바오로 2세, 《신앙과 이성 :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관한 회칙》, 7, 62쪽(48항).

 

67)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건전한 신앙생활》, 40쪽 ; 노길명, 앞의 책, 351쪽 ; 전명수, 앞의 책, 163~174쪽 참조. 전체론(holism)과 일원론(monism), 그리고 범신론(pantheism) 간의 관계에 대하여 Lawrence Osborn, Guardians of Creation : Nature in Theology and the Christian Life, Leicester(England) : Apollos, 1993, pp. 57~58 참조.

 

68) 이러한 논란에 대하여 전명수, 앞의 책, 163~166쪽 참조.

 

69)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죽음 · 심판 · 지옥 · 천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2, 30~31쪽 ; 심상태, 《인간 - 신학적 인간학 입문》, 서광사, 1989, 62~68쪽 참조.

 

70) 뉴에이지 운동의 큰 특징은 상대주의적이며 혼합주의적인 경향성에 있다. 특히, 그리스도교와 여러 동양 종교들 사이의 혼합주의적 전망을 드러낸다. 그래서 뉴에이지는 역사적 예수님의 성장 과정에 그리스도적 자각을 위한 동양 종교들의 깊은 영향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혼합주의적 경향성은 하나의 일원론으로 귀착된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다른 종교들과 함께 물병자리 시대의 전망이 제공하는 전체성(totality)의 한 부분적 조각을 구성하게 된다(박준양, <뉴에이지(New Age)의 ‘우주적 그리스도’(Cosmic Christ) 개념과 전망에 대한 비판적 고찰 - 교의신학적 관점에서>, 《가톨릭신학》 12, 한국가톨릭신학학회, 2008, 49~50쪽 참조).

 

71) 국내에 소개된 대표적인 보완 - 대체적 전인의학 흐름에 관하여 Jon Kabat-Zinn, 장현갑 · 김교현 · 김정호 옮김, 《마음챙김 명상과 자기치유(상 · 하)》, 학지사, 22005, [원문 : Full Catastrophe Living : Using the Wisdom of Your Body and Mind to Face Stress, Pain, and Illness, New York : Bantam Dell, 1990] 참조. ‘영성’(spirituality) 개념을 도입한 전인의학 흐름의 대표적 경우에 관하여 Christina M. Puchalski(ed.), A Time for Listening and Caring : Spiritualty and the Care of the Chronically Ill and Dying, New York : Oxford University Press, 2006 참조. 전인의학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앙적 차원의 접근에 관하여 Daniel P. Sulmasy, 김인규 옮김,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하느님 : 의사와 건강관리 전문가들을 위한 영성》, 가톨릭출판사, 2010, [원문 : The Healer’s Calling : A Spirituality for Physicians and Other Health Care Professionals, Mahwah, NJ : Paulist Press, 1997] ; The Rebirth of the Clinic : An Introduction to Spiritualty in Health Care, Washington D.C. : Georgetown University Press, 2006 ; 박준양, <영적 돌봄의 인간학적 -  신학적 의미>, 《Health & Mission》 17, 한국가톨릭의료협회, 2009, 4~14쪽 참조.

 

72) 박준양, <영적 돌봄의 인간학적 - 신학적 의미>, 4쪽 참조.

 

73) 《보편 공의회 문헌집 제2권 전편(제1-4차 라테란 공의회 · 제1-2차 리옹 공의회)》, 김영국 · 손희송 · 이경상 · 박준양 · 변종찬 옮김, 가톨릭출판사, 2009, 232쪽, [원문 : Conciliorum Oecumenicorum Decreta, Giuseppe Alberigo et al.(eds.), Bologna : Istituto per le scienze religiose, 1972] 참조.

 

74) 박준양, 《창조론, 아름다운 세상의 회복을 꿈꾸며》, 55~58쪽 참조.

 

75) 《가톨릭 교회 교리서》, 주교회의 교리교육위원회 옮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2008, 460항(201쪽), [원문 :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Vatican City : Libreria Editrice Vaticana, 1997] 참조.

 

76) Gisbert Greshake, 심상태 옮김, 《은총 - 선사된 자유》, 성바오로출판사, 21981, 49쪽, [원문 : Geschenkte Freiheit : Einfuhrung in die Gnadenlehre, Freiburg im Breisgau : Herder, 1977] ; 박준양, 《은총론, 그 고귀한 선물에 관하여》, 생활성서사, 2008, 178~181쪽 참조.

 

77) 뉴에이지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자신 안에서 그리스도를 실현하고자 부름을 받았다. 의식의 확장 체험을 통해 성장하면서 자아를 실현한 인간은 신성한 내적 조명에 도달하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자신 안에서 ‘내적 그리스도’를 실현하는 순간이다. 우주적 최종 실재로서의 신적 본성이 한 개인의 내부 안에서 실현된다는 것이다(박준양, <뉴에이지(New Age)의 ‘우주적 그리스도’(Cosmic Christ) 개념과 전망에 대한 비판적 고찰 - 교의신학적 관점에서>, 36쪽 참조).

 

78) 박준양, <뉴에이지(New Age)의 ‘우주적 그리스도’(Cosmic Christ) 개념과 전망에 대한 비판적 고찰 - 교의신학적 관점에서>, 50~51쪽 참조.

 

79) 노길명, 앞의 책, 339쪽 ; 전명수, <개인주의적 영성 운동과 세속화 논쟁>, 《담론201》 13, 한국사회역사학회, 2010, 59~69쪽 참조.

 

80) Cf. Christian Smith · Melinda Lundquist, Soul Searching : The Religious and Spiritual Lives of American Teenagers, New York :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pp. 77~83, 118~171.

 

81) <뉴에이지에 관한 사목적 성찰을 위한 지침들 : 2004년 6월 16일 뉴에이지에 관한 국제회의 총회 토론을 위한 최종안>, 7항(교황청 문화평의회 · 종교간대화평의회, 앞의 책, 217쪽) ;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건전한 신앙생활》, 40쪽 참조.

 

82) 뉴에이지 운동에서 전개되는 ‘영성의 상품화’ 흐름에 관하여 전명수, 앞의 논문, 72~73쪽 참조.

 

83) 교황청 문화평의회 · 종교간대화평의회, 앞의 책, 122~123쪽.

 

84) 뉴에이지의 주장에 따르면, 우주적 그리스도의 정신은 역사 안에서 매번 상이하게 여러 차례 드러났는데, 부처나 마호메트, 그리고 조로아스터 같은 인물들이 그 구체적 경우이며, 역사적 예수님 또한 이러한 범주의 한 인물이라고 한다. ‘우주적 그리스도’가 이처럼 역사 안에서 거듭 자신을 드러내 보여야 하는 것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사랑의 힘을 드러내 보여도 인간은 이를 쉽게 망각해버리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환생’(reincarnation) 이론이 뒷받침된다(박준양, <뉴에이지(New Age)의 ‘우주적 그리스도’(Cosmic Christ) 개념과 전망에 대한 비판적 고찰 - 교의신학적 관점에서>, 35~37쪽 참조).

 

85) 박준양, 《종말론, 영원한 생명을 향하여》, 생활성서사, 2007, 60~61쪽 참조.

86) 교황청 문화평의회 · 종교간대화평의회, 앞의 책, 122~123쪽.

 

87) 초대 교회의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us) 이단 계열의 한 분파인 가현설(假現說, Docetismus) 추종자들은, 로고스(Logos)가 인간의 나약하고 비참한 육체적 조건을 외양으로만 취한 것처럼 현시된 것이라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은 역사적 예수님의 지상 행적 중 수난과 십자가상 죽음은 로고스의 신성(神性)에 적합하지 않다고 간주하여 모두 거부한다(박준양, <성령의 보편적 현존과 활동에 관한 식별 - 교의신학적 원리들>, 《가톨릭 신학》 9, 한국가톨릭신학학회, 2006, 30쪽 각주40) 참조).

 

88) 박준양, <뉴에이지(New Age)의 ‘우주적 그리스도’(Cosmic Christ) 개념과 전망에 대한 비판적 고찰 - 교의신학적 관점에서>, 44~45쪽 참조.

 

89) 교황청 신앙교리성(Congregation for the Doctrine of Faith), 최영철 옮김, 《그리스도교 명상 : 그리스도교 명상의 일부 측면에 관한 서한》(1989. 10. 15),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9, 19쪽(20항), [원문 : “Epistula Orationis Formas de quibusdam rationibus christianae meditationis”, in Enchiridion Vaticanum : Documenti ufficiali della Santa Sede, vol. 11(1988~1989), Bologna : EDB, 1991, pp. 1668~1705(nn. 2680~2716)].

 

90) 같은 책, 27쪽(31항).

 

91)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위격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불가분하고 혼합 없는 ‘위격적 일치’(unio hypostatica)를 천명한 451년 칼케돈 공의회(Concilium Chalcedonense)의 가르침(DH 300-303)에 대하여 박준양, 《그리스도론, 하느님 아드님의 드라마!》, 385~395쪽 참조.

 

92) 박준양, <뉴에이지(New Age)의 ‘우주적 그리스도’(Cosmic Christ) 개념과 전망에 대한 비판적 고찰 - 교의신학적 관점에서>, 46~49쪽 참조.

 

93) 최근에는 한국 교회 안에서 신흥 종교 운동의 하나인 신천지 운동의 위협과 피해가 보고되지만, 아직 이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와 신학적 연구가 잘 나와 있지 않은 상태이기에 이는 향후의 과제로 남긴다. 개신교 측의 신천지 운동에 대한 대응과 연구에 대해서는 정윤석 · 진용식 · 장운철, 《신천지 포교 전략과 이만희 신격화 교리》, 한국교회문화사, 2007 ; 최삼경 외 13인, 《이단 신천지 대처법 A to Z》, 안양 : 기독교포털뉴스, 2013 ; 현대종교 편집국 엮음, 《신천지와 하나님의 교회의 정체》, 월간 현대종교, 2007 참조.

 

94) 박준양, <신흥 종교 운동의 도전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응답 - 사목적, 신학적 성찰>, 180쪽 참조.

95) 박준양, 《성령론, 그 신비로운 현존과 작용에 관하여》, 생활성서사, 2007, 50쪽 참조.

 

96) Cf. Segretariato per l’ecumenismo e il dialogo della Conferenza Episcopale Italiana, “Di fronte ai nuovi movimenti religiosi e alle sette : Nota pastorale del Segretariato per l’ecumenismo e il dialogo”(1993. 5. 30), in Enchiridion della Conferenza Episcopale Italiana, vol. 5(1991~1995), Bologna : EDB, 1996, p. 829(n. 1780) ; 박준양, <신흥 종교 운동의 도전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응답 - 사목적, 신학적 성찰>, 176~177쪽.

 

97) 박준양, <신흥 종교 운동의 도전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응답 - 사목적, 신학적 성찰>, 181쪽 참조.

98) Cf. Michael Fuss, “Il fenomeno della nuova religiosita in Europa : Una sfida pastorale”, Sette e Religioni 2, 1992, p. 297.

99) 박준양, <신흥 종교 운동의 도전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응답 - 사목적, 신학적 성찰>, 187쪽 참조.

100) 부정신학의 흐름에 대하여 William Johnston, 앞의 책, 36~41쪽 참조.

 

[교회사 연구 제42집, 2013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박준양(가톨릭대학교 교의신학 교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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