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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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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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3-09 ㅣ No.1366

[복음으로 세상 보기]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1965년 발표된 시인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시는 거대한 구조적인 악에 대항하지 못하면서 일상의 사소한 일, 혹은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게만 분개하는 시인 자신의 모습을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작품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王宮)의 음탕 대신에 / 오십(五十)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 한 번 정정당당하게 /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越南)파병에 반대하는 /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 이십(二十)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

 

시인은 ‘왕궁의 음탕’이라 표현하는 거대한 힘을 가진 자의 불의에는 침묵하면서, 정작 갈비탕에 살코기가 너무 적고 순 기름투성이라는 이유로 설렁탕집 주인에게 대항하는 자신의 모습을 대조시킵니다. 그러면서 자조 석인 말투로 힘 있는 사람의 부정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모습과 사소한 일에 흥분하는 모습 안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평범한 소시민의 삶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며칠 전, 저에게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외부에 일이 있어 오랜만에 차를 가지고 나갔다가 사제관으로 돌아올 때의 일입니다. 제가 사는 노동사목회관은 건물 옆으로 돌아가면 조그만 주차장이 있는데, 그 입구를 다른 차가 막아버리고 차를 대 놓은 것이었습니다.

 

입구를 막았기에 들어갈 수 없었고, 길가에 비상등을 켜고 내려 상대방 차에 있는 연락처로 전화를 했습니다. 통화가 연결되고 몇 분이 흘렀을까요.

 

제 나이 또래의 한 청년이 머쓱하게 오더니 눈도 안 마주치고 “미안합니다” 라고 흘려 말하며 차를 빼려 했습니다. 저는 종종 있는 일이기에 화가 나서 주차장 입구이기에 주차금지라는 저 표지판을 보지 못했느냐며 따지듯 물었습니다. 늦은 밤, 차를 대지 못하고 빨리 숙소로 돌아가지 못하는 마음에 분풀이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청년의 대답은 너무 어이가 없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급한 용무가 있었다거나 미안하다거나 뭐 그런 응답을 기대했는데,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못 봤어요” 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주차 금지 표지판이 구석에 있거나 글씨가 작았다면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그 곳에 차를 대면서 그 금지 문구를 못 볼 수가 없기에 그의 거짓말에 기운이 빠졌습니다.

 

어쩜 그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는지 어이가 없었지만, 보지 못했다는 그의 말에 딱히 뭐라 대꾸할 말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혼자 어이없어 하고 있는 사이 그는 자신의 차를 몰고 어디로 떠나버렸습니다.

 

 

사적 영역의 작은 거짓말보다 공적 영역의 거짓말 난무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제관으로 올라오며 든 생각은 화가 난다기 보다 왜 그는 그 순간 그렇게 뻔한 거짓말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 안에 얼마나 많은 거짓말들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허무하고 기운 빠지고 있는지 떠올랐습니다.

 

장관과 청와대 비서실장, 대통령의 수석 비서관이라는 사람들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모릅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알지 못합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며 느꼈던 그 허무함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음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공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뻔뻔하고 오만한 거짓말이 어떻게 일상의 영역에서 재생산되는지 느끼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루에서 수십 번의 거짓말을 한다는 통계를 본 일도 있습니다. 앞의 사례처럼 객관적 사실을 전면 부인하는 거짓 말고도 과장해서 말하기, 축소해서 말하기, 일부를 전체처럼 말하기 등의 기법(?)을 사용하며 다양한 거짓말을 합니다.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서, 상대방이 충격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는 단서를 붙일 때도 있지만, 아무튼 우리는 사실 그대로를 말하지 않는 것에 너무나 익숙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사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작은 거짓말보다 다수의 대중을 향해 공적으로 하는 거짓말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혹은 지방자치 단체장과 같은 선출직에 나서는 사람들의 공개적인 약속들조차 우리는 불신하게 되었습니다. 고위직 공무원이 되려는 사람들이 거쳐야 하는 인사 청문회에서도 재산형성, 학위취득, 세금납부, 군대복무 등에 대한 질문에 거짓으로 소명하는 사람들도 너무나 많습니다. 걸리지만 않으면, 확인할 수만 없다면 자신을 속이고 세상을 속이는 일을 너무도 자주 접하다보니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서도 거짓이 난무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다 찾아내어 밝혀내고 명명백백 진실을 가리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우기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오히려 당당한 거짓이 소박한 진실을 가리기에 기계적으로 거짓을 선택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몰랐다, 듣지 못했다, 네가 이야기 하지 않았다며 오히려 상대방을 코너로 몰아넣고 자신의 책임에 눈을 감는 것입니다.

 

 

신앙을 간직한 우리는 진실 앞에 솔직해야 함을 고백하는 사람

 

우리의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계명인 십계명의 여덟째 계명은 잘 아는 것처럼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탈출 20, 16)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오 복음 5장 34절 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신앙을 간직한 우리는 당장은 손해를 보더라도 진실의 힘을 믿는 사람들이고, 진실 앞에 솔직해야 함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신앙 선조들은 적당히 타협하는 신앙이란 있을 수 없음을 순교의 모습으로 보여주었기에 분명 우리도 선택해야 합니다.

 

일상의 작은 거짓 앞에서는 흥분하면서 우리는 또 얼마나 권력자와 권세가들의 거짓 앞에 무력해했을까요. 김수영 시인의 노래처럼 왕궁의 음탕에는 고개를 돌리면서 힘없는 설렁탕집 주인만 나무랐을까요. 거대한 거짓을 꾸중하고 책임을 물을 수 있을 때, 일상의 사소한 거짓들도 줄어들 수 있을 것입니다. 주차 시비에만 흥분하고 하느님의 정의를 세우는 일에 소홀했던 저의 모습을 돌아보며 다시 한 번 ‘예’ 할 것과 ‘아니오’ 할 것을 구분하는 용기를 청해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년 3월호, 정수용 이냐시오 신부(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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