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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교회의 근현대사 열두 장면: 1886년 한불조약의 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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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2-18 ㅣ No.803

[한국교회의 근현대사 열두 장면] 1886년 한불조약의 체결

 

 

신앙의 자유를 위한 노력

 

한국 천주교회는 1784년에 설립된 이래 100년 동안 박해를 받았다. 조선 정부는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한 뒤, 1801년과 1839년, 1866년에 척사윤음(斥邪綸音 : 사교를 배척한다는 임금의 명령)을 반포하여 천주교를 탄압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박해령은 개항 이후에도 철회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언제부터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을까?

 

한국교회는 설립 초기부터 서양과의 통교를 통해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1795년에 입국한 주문모 신부는 1796년 북경에 보낸 사목 보고서에서 ‘포르투갈 여왕이 조선에 사절을 파견하여 우호조약을 맺을 것’을 제의하였다.

 

1811년 교황에게 보낸 신자들의 서한에서도 ‘서양 배를 통해 조선 임금에게 선물과 정중한 편지를 보내 설득해 주기를 간청’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자들의 바람은 실현되지 못했다.

 

한편 1836년 이후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였다. 그들은 프랑스와 중국이 황푸조약(1844년)과 톈진조약(1858년)을 맺어 중국에 신앙의 자유를 가져다주었듯이, 조선에서도 그와 같은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조선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그 결과 조선에서 중국과 같은 신앙의 자유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결국 박해시대 신앙의 자유를 위한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고, 1866년 병인박해가 발생하면서 한국교회는 와해되었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신앙의 자유 문제는 개항 이후로 미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과 프랑스의 접촉

 

1873년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흥선대원군이 물러났다. 그리고 1876년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식 조약이며, 이를 통해 조선은 쇄국정책을 버리고 개화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이후 조선은 미국과 영국, 독일 등 여러 국가와 통상조약을 체결했고, 1886년에는 프랑스와도 한불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되었다.

 

조선과 프랑스 사이의 조약 체결은 1886년에 처음으로 시도된 것은 아니다. 1882년 미국이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을 때, 프랑스도 영국과 독일 등과 함께 조선과의 조약 체결을 서둘렀다.

 

1882년 6월 북경의 부레 공사는, 조약의 체결을 위해 톈진의 디옹 영사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그런데 당시 조선은 프랑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프랑스는 1866년에 조선과 전쟁(병인양요)을 치른 나라였고, 천주교를 인정받으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천주교 문제에 대해 조선 정부는 금교(禁敎)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자 당시 양국의 교섭을 돕던 중국의 마건충은 프랑스가 조선과의 조약을 원한다면 조약에 ‘종교 금지’를 밝힐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디옹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종교 문제와 더불어, 디옹 영사가 본국 정부로부터 임명된 전권 사신이 아닐뿐더러, 신임장도 없었기 때문에 조약 체결은 성사될 수 없었다. 결국 디옹은 성과 없이 톈진으로 돌아갔다. 이후 부레 공사는 8월 무렵 직접 조선을 방문하여 조선과 조약을 체결하고자 했으나, 7월에 임오군란(조선의 구식 군대가 일으킨 변란)이 발생하면서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한불조약의 체결 과정

 

임오군란 뒤 조선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강화되자, 고종을 비롯한 개화파 관료들은 중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조선에서 세력 균형을 이룰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런 가운데 1883년 5월 고종은 주한 미국 공사 푸트에게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할 의사가 있음을 시사하였다. 이 내용은 푸트가 미국 국무성에 보고하였고, 다시 주미 프랑스 공사 모르통이 프랑스 정부에 전했다.

 

그런데 프랑스는 1883년부터 안남(베트남)문제로 중국과 분쟁을 겪다가 1884년 6월에 전쟁을 하게 되었고, 조선에서도 1884년 12월에 갑신정변(개화파가 일으킨 정변), 1885년 4월에 ‘영국 함대의 거문도 점령’ 등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양국의 조약 문제는 거론될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가 1885년 북경의 코고르당 공사가 전권 대신으로 임명되면서 비로소 조약 교섭이 시작되었다.

 

1886년 5월 6일 서울에 도착한 코고르당 공사는 이튿날 외아문(外衙門)의 김윤식 독판(督辦)과 회담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선교사 보호 문제만을 논의하다가 결말을 보지 못한 채 헤어졌다. 그리고 5월 11일에 재개된 회담에서도 같은 문제로 시종일관하였다.

 

이때 프랑스 측에서는 전교의 자유를 반드시 문자로 명시하기를 요구한 반면, 조선 측에서는 전교는 금지하지만 선교사를 가해하지 않을 것이므로, 문자로 명시할 필요가 없다고 맞섰다. 5월 25일의 협상에서도 전교 문제가 걸림돌이 되었고, 이에 코고르당 공사는 중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였다가 블랑 주교의 부탁으로 다시 협상을 시작하였다.

 

그런 가운데 ‘특별한 조항으로 전교의 자유를 명시하는 대신, 이미 체결된 다른 나라와의 조약을 수정하여 전교의 자유를 암시하자.’는 타협안이 제시되었다. 그리하여 영국과 맺은 한영수호통상조약의 조규 제9관 2항의 “두 나라 국민은 상대국에 가서 언어와 문자, 법률, 과학, 기술 등을 학습한다.”는 것을 “학습하거나 가르칠 수 있다.”고 수정하여, 선교사들이 장차 교리를 가르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놓았다.

 

그리고 제4관 6항의 “영국인은 호조(여행 증명서)를 지니고 조선의 각처에 다니면서 통상하는 것을 허가한다.”를 “프랑스인은 호조를 지니고 조선의 각처를 여행하는 것을 허가한다.”로 수정했다. 곧 통상 목적으로만 다닐 수 있던 것을, 구체적인 여행 목적을 밝히지 않더라도 호조만 소지하면 조선 각지를 여행할 수 있도록 수정한 것이다. 이를 통해 선교사들의 활동 범위가 확대되었고, 전교 여행도 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타협안이 수용되면서 한불조약은 5월 26일에 타결되어 6월 4일에 조인되었다. 그리고 1887년 5월 북경의 프랑스 참사 플랑시가 내한하여 외무독판 김윤식과 비준서를 교환하면서 발효되었다.

 

 

한불조약의 교회사적 의미

 

한불조약이 체결된 다음 날 코고르당은 블랑 주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은 이 조약에 조인함으로써 사실상 박해를 재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종교 자유의 완전한 승인은 아닐지라도 그 길을 향한 제1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불조약의 내용이 종교의 자유를 당장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조선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고, 치외법권과 영사 재판제도를 통해 법적인 보호를 받으며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선교사들은 서울과 개항지에서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고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개항지 이외의 지방에도 진출하여 공소와 본당을 설립해 갔다.

 

비록 공식적으로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것은 아니지만, 선교사들이 선교할 수 있는 자유가 묵인되었고, 코고르당의 말처럼 신앙의 자유 단계로 나아가는 단초가 마련되었다. 그런 점에서 한불조약의 교회사적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지난 2016년은 병인박해 150주년이자 한불조약이 체결된 지 13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하여 첼리스트인 연세대학교의 양성원 요셉 교수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순교를 기리는 다큐멘터리 영화 ‘시간의 종말’(김대현 감독)을 제작했다.

 

‘시간의 종말’에는 올리비에 메시앙의 ‘시간의 종말을 위한 4중주’가 주제곡으로 쓰였는데, 이 곡은 메시앙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포로수용소에서 지은 곡이다.

 

양 교수가 이 곡을 선택한 것은 죽음을 눈앞에 둔 절망적인 상황에서 위대한 작품을 남긴 메시앙과,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언한 선교사들 사이에서 ‘희망’이라는 연결고리를 찾았기 때문이다.

 

양 교수가 느낀 것처럼 순교는 ‘믿음과 희망’의 소산이다. 한국교회는 믿음과 희망으로 절망적인 긴 박해의 터널을 빠져나왔고,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향한 ‘희망의 제1보’를 내디딜 수 있었다.

 

* 방상근 석문 가롤로 - 내포교회사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역사와 고문서 전문가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19세기 중반 한국천주교사 연구」, 「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을까?」가 있다.

 

[경향잡지, 2017년 2월호, 방상근 석문 가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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