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강론자료

마태오복음 4,12-23 사명을 시작하다 (2017. 1. 22. 연중 3주일)

스크랩 인쇄

남충희 [korangpo] 쪽지 캡슐

2017-01-21 ㅣ No.2159

예수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듣자 다시 갈릴래아로 갔다. 그러나 나자렛에 머물지 않고 즈불룬과 납달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가파르나움으로 가서 살았다. 이리하여 예언자 이사야가 한 말이 이루어졌다.

 

즈불룬과 납달리,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강 건너편, 이방인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겠고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리라.”

 

이때부터 예수는 전도를 시작하였다. “하늘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시오.”

 

 

요한의 체포는 회개의 삶에서 예수와 함께 하는 영적 쇄신의 삶으로 넘어감을 상징한다. 요한의 육신은 구속되어도 그의 영은 자유롭다. 유대인의 왕인 예수는 우선적으로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으로 가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예수는 이런 예상을 깨뜨리고 변두리 지역인

갈릴래아로 물러간다. 그러나 고향인 나자렛에는 머물지 않고 교역의 요충지인 가파르나움으로 간다. 가파르나움은 정치, 종교의 중심지도 아니고, 예수에게 익숙한 그의 고향도 아니고,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뒤섞여 살아가는 흔한 도시들 중의 하나이다.

 

인용된 성서는 이사야서 9:1-2이다. ‘즈불룬선물’, 납달리는 다툼이란 뜻이다.(창세기 30:8, 20) 예수는 서로 다투며 죽음의 길을 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참된 평화의 길을 알려주는 왕임을 암시한다. ‘이방인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모르는 다른 백성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이사야서에는 그늘진 땅으로 되어있는 것을 죽음의 그늘진 땅이라고 하여 하느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죽음의 운명에 처해 있음을 분명히 한다.

 

갈릴래아는 다윗 왕 때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영역이었으나 이스라엘 왕국이 유대 왕국에서 분리된 이후에는 대체로 이방인의 지역에 속하였다. ‘바다는 지중해를 가리키며 상징적으로 이 세상을 지칭한다. 에제키엘 47:1-12를 보면, 성전에서 샘솟는 물이 동쪽으로 흘러 사해(死海)’로 들어가는 것으로 묘사하는데 이때 사해는 이 세상을 상징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예수의 주요 활동무대인 가파르나움은 이사야의 예언을 배경으로 하여 이 세상을 대표하는 도시로 등장한다. 예수의 복음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 온 세상 사람들, 곧 모든 인류를 목표로 하고 있다.

 

하늘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시오.”라는 말은 앞서 요한이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한 것이다.(3:2) 이로써 예수가 베풀 성령의 세례는 요한이 베풀었던 물의 세례를 이어받은 것임을 분명히 한다.

 

 

예수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걷다가 베드로라고 불리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 두 형제가 호수에서 그물로 고기를 잡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나와 함께 갑시다. 나는 여러분에게 사람을 건지는 법을 가르치겠습니다.” 그들은 즉시 그물을 버리고 그와 함께 갔다.

 

그는 계속 가다가 다른 두 형제인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았다. 그들은 제베대오의 아들이었다. 그들은 배 안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예수가 그들을 부르자 그들은 즉시 배와 아버지를 남겨 두고 그와 함께 갔다.

 

구약성서에서는 아우가 형을 제치고 상속권을 얻는 경우가 많다. 카인과 셋, 이스마엘과 이삭, 에사오와 야곱, 제라와 페레스, 요셉의 형들과 요셉, 므나쎄와 에프라임, 아론과 모세, 다윗의 형들과 다윗 등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대체로 영적 자아가 육적 자아를 이기고 삶의 주도권을 잡는 사건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는 형제가 짝을 이루어 예수의 제자가 된다. 영적 자아는 성령에서 오는 통일적인 세계관을 확보하는 동시에 몸과 마음, 감성과 이성, 경험과 논리 등의 분열에서 오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극복한다.

 

그물아버지는 각각 예수가 이끄는 영적 공동체, 성령에서 오는 영적 지혜, 영적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대응한다. 어부들의 그물은 물고기를 잡는도구이지만 예수가 알려줄 영적 지혜는 죽음의 어두움에 잠긴 사람들의 생명을 건지는도구이다. 물고기를 잡는 어부는 사람의 지혜에 의지하고 사람을 건지는 어부는 성령의 지혜에 의지한다. ‘그물은 사람의 지혜와 영적 지혜를 동시에 가리키는 상징어이다. 일종의 중의법(重意法)이라고 할 수 있다.

 

어부들이 즉시예수를 따른 것은 육적인 지혜와 영적인 지혜 사이에는 공통점이 조금도 없음을 시사한다. 두 지혜가 가리키는 길의 종착점은 생명과 죽음으로 분명히 구별되므로 잠시라도 결단을 망설일 이유가 없다. 그들의 단호한 판단과 예수를 따르는 행동은 각각 회개와 물의 세례를 나타낸다. 고기를 잡던 어부들은 이제부터 성령의 세례를 받으며 사람을 건지는 어부로 변화할 것이다.

 

그물은 영적 지혜를 가리킨다. 물고기를 건져 올리는 것은 욕망의 활동이며 사람을 건져 올리는 것은 영적 활동이다. 그물이라는 명사에는 건지다라는 동사가 어울리는데도 모든 성서 번역본은 예외 없이 굳이 낚다로 번역한다. 사람이 사람을 낚는다면 그 목적이 도대체 무엇일까? 종교를 낚시의 미끼로 삼아 사람들로부터 돈과 명예와 권력을 얻으려는 잠재의식이 자신도 모르게 표출된 것이다.

 

 

예수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며 회당에서 가르치고, 하늘나라에 관한 복음을 설교하며, 온갖 병과 장애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고쳐주었다.

 

회당은 이스라엘 백성이 함께 기도하는 장소이다. ‘가르침은 언어를 수단으로 삼아 진리를 전하는 일이다. 예수가 회당에서 가르쳤다는 것은 그가 성서에 기록된 율법과 예언서들의 본뜻을 알려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성서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예수의 가르침을 알아듣기가 힘들 것이다.

 

예수는 또한 세상 사람들에게 하늘나라가 와 있음을 설교한다.’ 예수가 이 세상을 사는 것 자체로서 하늘나라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 ‘설교의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을 포함한 온 세상 사람들이며 그 수단은 예수의 삶 자체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그가 가르치는 바를 실천함으로써 하늘나라에 참여할 수 있다. ‘가르침은 성서의 이치를 들어 하늘나라를 설명하는 것이요, ‘설교는 자신의 삶으로 이 땅위에 하늘나라가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람들이 환자들을 예수에게 데려온 것은 병을 고치기 위해서이다. 예수에게 모든 병을 치유하는 기적의 힘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육신의 병에 걸린 이웃을 동정하고 그들을 도우면서도 정작 자신에게 큰 병이 있다는 사실은 모른다. 예수는 병자들을 치유하는 기적을 일으킴으로서 그가 사람을 치유하는 왕임을 드러낸다. ‘육신'을 치유하는 기적(보이는 기적)의 치유(보이지 않는 기적)를 드러내는 표징이다.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보다 영의 병을 고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3,675 1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