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종교철학ㅣ사상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 - 자캐오에게 말을 건네다(분도출판사)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1-18 ㅣ No.307

[겨울에 권하는 책 한 권]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

 

 

어느 가을날, 서울 출장길에 내가 다녔던 중학교를 지나쳤다. 널따란 운동장은 그대로였지만 새 건물이 몇 채 들어선 모교는 제법 낯설었다. 특히 우리가 늘 ‘교도소 담벼락’이라 불렀던 학교담은 온데간데없고, 낮게 쌓아올린 소담한 돌무더기가 간간이 작은 철쭉을 품은 채 학교 울타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운동장에 누가 있는지 다 보일만큼, 아이들도 쉽게 넘나들 만큼 낮아진 경계를 보니 예전 풍경 같지 않아 더 어색하게 느껴졌다. 후배들이 쉬는 시간에 분식거리 사들고 담타다 다칠 일은 없겠구나 싶어 살짝 미소만 짓고 차를 돌렸다.

 

불과 십여 년 전이지만, 그 시절 누구나 수업시간이 되면 육중한 철문의 빗장을 걸고 폐쇄적 공간 속 주입식 교육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물론, 많은 변화가 꿈틀거린 시기로 기억하지만 어디까지나 미미했다. 지금처럼, 닫아걸기보다 되려 열어놓음으로써 긍정적 역효과를 기대할 배짱이 없었나보다. 누구나 탁 트인 환경에서 해방과 자유를 느끼며, 열린 자세로 넓은 생각과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이는 비단 학교뿐 아니라 교회의 울타리, 그 ‘세속’과 접점에서도 생각해볼 거리다. 이를 깊이 있게 관찰하여 놀라운 성찰과 대단한 필력으로 정리한 책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 - 자캐오에게 말을 건네다』(분도출판사, 2016)를 소개한다. 이 책의 저자는 체코의 공산 정권 아래에 지하교회에서 비밀리 사제서품을 받고 활동했다. 신에 대한 경배가 무의미한 짓으로 박해받던 시절에 그가 지녔던 사목적 열정은 해방 뒤 사회와 종교의 경계선상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발견한 ‘자캐오’들을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그에게 ‘자캐오’는 교회 울타리 밖, 높다란 나무 위에 올라 큼지막한 이파리에 몸을 사리고 교회를 물끄러미 지켜만 보는 이들이다. 교회 구성원으로 ‘합류할 뜻이 없거나 그럴 수 없는 이들’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에게 무관심하지도 적대적이지 않은 이들’(23쪽)이다. 울타리 밖에서 서성이는 이들, 이를 테면 무신론자로 자신의 신원을 굳혔거나 제도 교회가 저지른 배설물에 신물 난 이들, 갖가지 상처와 고통에 시달리며 하느님의 침묵을 원망하고 지내는 이들 등이 자캐오 무리에 속한다. 저자는 이런 이들과 소극적 연대만을 추구해왔던 교회에 일침을 날리고 스승 예수가 행차했던 길을 따라 그들 각자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보도록 제안하고 있다. 또 그들 각자의 ‘집에 내릴 구원’을 위한 진지한 성찰도 잊지 않았다. 아울러 구원을 독점한 양 행동하기보다 오늘날 의로운 자캐오들, 즉 양심에 따라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노력하는 이들과 함께 가는 방법을 제시한다. 한편, 시대의 자캐오들도 교회의 단편적 측면만 보고 그것이 전부인 양 부각시켜 무작정 거부하려는 시도에서 벗어나 더 넓은 시선으로 안내한다.

 

교부 치프리아누스 성인의 ‘교회 밖 구원은 없다’라는 명제에 대한 한 교수 신부의 말씀이 생각난다. 어느 구절에선가 저자도 비슷한 말을 했다. ‘신을 부정하는 세상 역시, 미래의 교회’이다. 교회 울타리, 경계가 사실 어디 있는가. 가톨릭(Catholic)은 종파가 아니라 ‘보편성’이다. 세례성사의 물줄기를 거부했다고 구원받지 못한다는 판결을 누가 감히 내릴 수 있겠는가. 나의 모교 울타리마냥 개방된 구분은 필요할지언정, 세상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인상 깊은 쪽수 끝을 대체로 접어놓는 습관 탓에, 내 것도 아닌 책을 너무 많이 접어 버렸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6년 겨울호(Vol. 36), 서광호 베네딕도 수사]



2,502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