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6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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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16: 첫 사목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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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2-12 ㅣ No.1594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 (16) 첫 사목 활동


반년간 5000리 길… 3800여 명 양떼 보살펴

 

 

- 최양업 신부는 산속 깊은 곳에 숨어 살던 교우들을 찾아다니며 성사를 베풀었다. 사진은 충남 부여 도앙골 교우촌 가는 길. 삽화=문채현.

 

 

다블뤼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준 후 최양업 신부는 충청도에 머물고 있던 페레올 주교를 찾아갔다. 1844년 12월 중국 소팔가자에서 헤어진 후 6년 만의 상봉이었다. 당시 페레올 주교는 최양업ㆍ김대건에게 부제품을 준 후 김 부제와 함께 조선 입국 길에 나섰기에 그와 헤어졌다. 둘은 그간의 사정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았는지 하루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최양업 신부가 1850년 10월 1일 자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쓴 편지 참조).

 

최 신부는 이 자리에서 상봉의 기쁨만큼 애통해 했다. 페레올 주교도 열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선교사 모두 병중에 있는 것을 본 최양업 신부는 이 땅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의 막중함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조선의 선교사들은 늘 과로와 병에 시달렸다.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도 마찬가지였다. 페레올 주교는 “주님께서 저희만이 이 나라에서 일과 피로로 차츰차츰 쇠약해져 죽어가기를 원하시는 것일까요?”(페레올 주교가 1849년 12월 30일 자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바랑 신부에게 쓴 편지에서)라고 반문할 만큼 힘든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은 가난한 조선의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루에 한 끼만 먹고 궁핍하게 살았다.

 

- 최양업 신부가 한 달 간 머물렀던 도앙골 교우촌 터에는 탁덕 최양업 신부 시성 기원비가 서 있다.

 

 

“쌀, 고추, 생선 절임 약간,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것이 조선인과 선교사들의 일상 음식입니다. 조선에는 채소가 중국식 배추밖에 없습니다.… 일상 음료는 쌀을 끓인 물(숭늉)을 마십니다. 이런 절식은 대단히 힘듭니다.… 조선 선교사들에 비하면 트라피스트회 수사들도 식도락가(향락가)라고 했습니다”(베르뇌 주교가 앙리 드 라 부이으리에게 보낸 1857년 9월 15일 자 편지에서). 

 

최양업 신부는 페레올 주교를 만난 후 주저하지 않고 다음날부터 곧바로 사목 일선에 뛰어들었다. 전라도부터 시작한 그의 공소 방문은 6개월 동안 지속했다. 이 기간에 그는 전라ㆍ경상ㆍ충청ㆍ경기ㆍ강원도 등 5개 도를 돌며 신자들에게 성사를 베풀었다.

 

“저는 조선에 들어온 후 한 번도 휴식을 취하지 못했습니다. 7월 한 달 동안만 같은 집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고 언제나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습니다. 중국에서 서울까지 여행한 것을 빼고도 1월부터 지금까지 거의 5000리를 걸어 다녔습니다. 저는 이처럼 긴 여행과 이 모든 고된 일을 하면서도 하느님의 은혜로 건강은 늘 좋았습니다”(최양업 신부가 1850년 10월 1일 자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쓴 편지에서).

 

최 신부는 1850년 1월부터 6개월 동안 신자 3815명을 만나 2401명에게 고해성사를 줬다. 또 1764명에게 성체성사를, 어른 181명ㆍ유아 94명ㆍ보례자 316명에게 세례성사를 베풀었다. 그리고 죽어가는 외교인 아기 455명에게 대세를 줬다.

 

최 신부는 첫 사목 방문 시기인 이때 두 차례나 큰 곤욕을 치렀다. 한 번은 외교인 가족과 사는 여교우 3명에게 성사를 주러 갔을 때였다. 마을에 들어갔다가 주민들이 서양 선교사로 오해하고 이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장은 마을의 모든 연장자를 소집해 최 신부 일행을 잡아 죽일 방도를 논의했다. 온 마을이 최 신부가 들어간 교우 집을 감시하고 있어서 도망칠 수도 없었다. 

 

“우리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보호 아래로 달려들고 하느님의 뜻에 모든 것을 온전히 맡겼습니다. 외교인들의 고함에 조금도 개의치 않은 체하면서 밤새도록 저들이 쳐들어오는 것만을 대비하고, 그곳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버텼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의견이 서로 엇갈려 우리가 아침에 그 마을을 떠나가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같은 편지에서).

 

최양업 신부가 귀국 후 첫 사목 방문을 마친 다음 1850년 7월 한 달 간 머물렀던 도앙골 교우촌. 현재 교우촌 터에 돌 제단와 돌 십자가가 꾸며져 있다.

 

 

또 한 번은 200명이나 되는 신자들이 있는 마을에 머물 때였다. 고해성사를 집전하고 있었는데 사흘째 되던 날 들통이 났다. 이장과 마을 주민들은 최 신부가 있는 집으로 달려와 점심때부터 밤중까지 욕설과 저주, 협박, 공갈을 퍼부었다. 주민들은 최 신부에게 “네가 어디 견딜 수 있나 보자. 너는 내일 붉은 오랏줄에 꽁꽁 묶여 도둑놈들의 감옥으로 끌려갈 것”이라고 소리치다 제풀에 지쳐 흩어졌다. 

 

“저는 공소 회장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한밤중에 일어나서 날이 새기 전에 그곳에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 전날에 고해성사를 받고 영성체 준비를 한 이들이 미사를 간절히 기대했는데도 저는 미사도 드리지 못하고 도망쳤습니다. 성사를 받지 못한 다른 신자들은 다음 날 저를 뒤좇아 100리나 되는 험준한 길에도 불구하고 다른 교우촌까지 와서 성사를 받았습니다”(같은 편지에서).

 

이렇게 박해와 죽음의 위협은 벗처럼 최양업 신부를 따라다녔다. 그는 수난의 올가미에서 벗어날 때마다 안도한 것이 아니라 그 와중에도 교우들에게 성사를 베풀 수 있었던 것에 하느님께 최상의 감사를 드렸다. 아울러 최 신부는 신앙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린 신자들이 지독한 가난 속에 사는 모습에 한없이 가슴 아파하는 부성(父性)을 표했다.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비참하고 궁핍한 처지를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저들을 도와줄 능력이 도무지 없는 저의 초라한 꼴을 보고 한없이 가슴이 미어집니다. …열심인 신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죄악과 세속의 모든 관계를 끊고 산속으로 들어가 담배와 조를 심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산속에서도 오래 살 수는 없습니다. 신자로 사노라면 점차 외교인들한테 알려지게 돼 박해가 따라오기 때문입니다”(같은 편지에서).

 

[가톨릭평화신문, 2016년 12월 11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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