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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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프란치스칸 영성25: 하느님은 우리 인간에게 완전한 자유를 허락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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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1-11 ㅣ No.1523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25) “하느님은 우리 인간에게 완전한 자유를 허락하셨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원죄에 물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참하느님께서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 참인간이 되신 강생의 신비를 묵상하며 하느님의 선을 찬미하였다. 조토, ‘동방 박사의 경배’, 프레스코화,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아시시.

 

 

사랑과 선을 창조하는 동업자로 삼으시다

 

그런데 인간 이해와 관련하여 이렇게 말을 이어가는 것이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인간 존재를 이렇게 이해하게 될 때는 인간이 하느님께 온전히 의존적으로만 존재해야 하는 자유롭지 못한 존재로 이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하느님은 우리에게 온전히 자유를 허락하신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낙원에 두시고, 그다음에 그들이 그곳에서 선악과를 따먹는 이야기는 하느님과 우리 인간의 끊임없는 다람쥐 쳇바퀴 식의 관계성을 말해주는 비유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하느님은 온전한 자유를 허락하시고 인간은 한 가지 제한이 또 다른 자유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을 지배하는 ‘권력’으로 오해하여 계속해서 거기에 반기를 들며, 급기야는 하느님과 똑같으신 외아드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우를 범하는 것이 성경이 말해주는 인간 역사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사실 역사의 주인은 오직 하느님이시기에 그 역사를 주도해가시는 분 역시 하느님이시지 우리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 인간에게 완전한 자유를 허락하시며 당신과 더불어 사랑과 선의 창조를 계속해 가는 동업자로 우리를 삼으셨다.

 

 

코로나19, 관계성 되볼아보는 계기

 

우리는 코로나19 바이러스 위기 시대를 겪으면서 계속해서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말을 듣게 된다. 전염병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한 분명하고도 불가피한 대처이다. 그런데 이 말의 논리를 거꾸로 들여다보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 인간 존재의 핵심부에는 관계성, 즉 함께 있고자 하는 본질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가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지내왔다는 것이고, 또 그 가까움의 갈망이 우리 내면 깊숙하게 심겨 있기에 ‘사회적 거리 두기’의 규칙을 어기면서까지 함께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요즘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라는 전염병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 서로의 관계성과 관련하여 내면 깊이 성찰해보아야 할 것이 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에게만이 아니라 우리 서로에게 그런 함께 함과 관계 맺음의 본성을 강력하게 지니고 있으면서도 함께 할 때 우리가 겪게 되는 불편과 어려움으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가 제한된다는 잘못된 판단 속에서 계속해서 하느님과 서로에게 반기를 드는 삶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원죄’라고 하는 말속에 들어있는 반복적인 인간의 자기 기만을 표현해주는 이야기일지 모른다.

 

 

죄는 인간의 어림석음이고 수치

 

사실 ‘원죄’라고 하는 말도 어찌 보면 ‘죄’라고 하는 단어로 인해 뭔가 잘못된 개념을 우리에게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죄’라는 것은 성경 전통이 분명하게 단언해주는 것이지만, 그 ‘죄’의 본질을 잘 들여다본다면 그것은 오히려 인간의 ‘어리석음’이고 ‘수치’라고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창세기의 ‘원죄’ 이야기에서도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가려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주시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의 이 수치스러운 어리석음은 하느님의 자비를 가져다준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노르위치의 성녀 율리안나는 “처음에 인간의 넘어짐이 있었고, 그다음에 그 넘어짐에서 일어남이 있었다. 이 두 개가 다 하느님의 자비다”라고 말한다.

 

바오로 사도도 이와 맥을 같이 하는 말을 한다. “어떤 선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혹시 누가 죽기를 무릅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에게 대한 당신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으로 있던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우리가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되어 있는 지금에는 더욱 확실히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을 것입니다.”(로마 5,7-9)

 

이것이 바로 성 프란치스코가 하느님의 선을 그렇게도 찬미 찬양했던 이유다.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저희는 저희의 탓으로 추락했나이다. 또한,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저희를 창조하신 것같이, 저희를 ‘사랑하신’ 참되고 거룩한 당신 ‘사랑’ 때문에 참하느님이시며 참사람이신 그분을 영화로우시고 평생 동정이신 지극히 복되시고 거룩하신 마리아에게서 태어나게 하셨으며, 또한 포로가 된 저희를 그분의 십자가와 피와 죽음을 통하여 구속하기를 원하셨으니, 당신께 감사드리나이다.”(「인준 받지 않은 수도 규칙」 23,2-3)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월 10일,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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