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레지오ㅣ성모신심

새 번역 교본 읽기: 레지오 단원과 그리스도의 신비체(제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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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2-08 ㅣ No.720

[새 번역 교본 읽기] 레지오 단원과 그리스도의 신비체(제9장)

 

 

한국세나뚜스협의회는 ‘레지오 마리애 공인교본(2014년 영문판)’에 대해 광주대교구 소속 안세환 신부께 번역을 의뢰하였습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번역 교본은 1993년 영문판을 번역한 것으로 1993년 이후로 수차례 부분 수정이 있었습니다. 교본 전체를 새로운 시각으로 번역한 교본의 내용을 본 코너를 통해 계속 게재할 예정입니다.

 

단원들께서는 새로 번역된 교본의 내용을 검토하시고 내용에 대해 건의가 있을 경우 상급 평의회나 월간지 편집실로 의견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보내주신 내용은 검토하도록 하겠으며, 타당한 의견이나 건의에 대해서는 추후 새로운 교본의 인쇄가 결정될 경우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제9장 레지오 단원과 그리스도의 신비체


1. 그리스도의 신비체 교리는 레지오 봉사의 기초이다

 

레지오 최초로 가졌던 바로 그 회합에서 단원들은 자신들이 시작한 봉사가 초자연적인 특성을 지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단원들이 사람들에게 다가설 때에는 마땅히 친절함이 넘쳐야 하겠지만, 그 동기가 순전히 자연적인 동기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모든 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뵐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다른 이들에게 행하는 것, 가장 나약하고 가장 미천한 사람들에게까지 행하는 것이,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하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바로 우리 주님께 해드리는 것임을 기억해야만 했다.

 

첫 회합에서와 마찬가지로 지금까지도 레지오는 이 점을 중요시 여기고 있다. 레지오는 이 초자연적인 동기가 레지오 단원들이 행하는 섬김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것과, 레지오의 규율과 내부 조화가 특히 이 원리에 달려 있다는 점을 레지오 단원들이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여 왔다. 단원들은 자기 간부들에게서 그리고 단원들 서로에게서 그리스도를 알아 뵙고 존경해야 한다. 이 혁신적인 진리가 단원들 마음속에 각인되어 남아있도록, 레지오는 이를 상훈(常訓)에 넣어 매월 첫 주회합에서 낭독하게 한다. 이와 더불어, 상훈은 레지오의 또 다른 원리도 강조한다. 활동을 행할 때에는 반드시 성모님과 일치하겠다는 정신으로 행하여, 실제로 단원들을 통하여 일하시고 활동을 수행하시는 분은 성모님이 되시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레지오 조직의 기초가 되는 이 원리들은 ‘그리스도의 신비체’에 관한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며, 이 가르침은 바오로 성인의 편지들의 중심 주제를 이룬다. 바오로 성인이 이 가르침을 중심 주제로 삼아 편지를 썼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의 회심을 이끌어냈던 주님의 가르침을 단순히 선언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였다. 그리스도인들의 열렬한 박해자였던 사울은 땅에 엎어진 채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그때 그는 저항할 수 없는 말씀을 들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이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하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 9,4-5). 예수님의 이 말씀이 바오로 사도의 영혼에 깊이 새겨졌고 그 결과 이 말씀이 드러내고 있던 진리를 바오로 사도가 늘 말하고 글로 써야 한다는 것은 놀랍지 않다.

 

바오로 성인은 그리스도와 영세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일치를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머리와 그 밖의 지체들 사이에 존재하는 일치와 같은 것이라고 묘사한다. 각 지체는 저마다 독특한 목적과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어떤 지체는 더 고귀하고 어떤 지체는 덜 고귀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지체는 서로 의존하고 있으며, 동일한 생명이 그들 모두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한 지체가 기능이 정지되면 모든 지체가 손해를 보고, 마찬가지로 한 지체가 뛰어나면 모든 지체가 이득을 얻는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이며 그리스도의 충만함이다(에페 1,22-23 참조). 그리스도는 이 몸의 머리이시며 우두머리시요, 없어서는 안 될 완전무결한 부분으로서, 몸을 이루는 다른 모든 지체들은 여기에서 힘을 얻고 생명까지도 얻는다. 세례성사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친밀한 유대로 그리스도께 결합된다. 그러므로 신비롭다는 것이 비현실적인 것을 의미하지는 않음을 깨달아라. 성경의 강렬한 표현을 사용하자면, “우리는 그분 몸의 지체”이다(에페 5,30). 지체들과 머리, 그리고 지체와 지체 사이에는 서로 사랑하고 섬겨야 할 신성한 의무가 있다(1요한 4,15-21 참조). 몸이라는 표상은 이 신성한 의무를 생생하게 깨닫게 해주며, 깨달은 것만으로도 절반은 이 의무를 수행한 셈이다.

 

교회는 이 진리가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라고 말해왔다. 실제로 인간에게 전달된 모든 초자연적인 생명과 모든 은총은 구속이 가져다준 열매이기 때문이다. 구속 그 자체의 토대는, 그리스도와 교회가 함께 단 하나의 신비로운 몸을 구성함으로써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속죄와 그분이 겪으신 수난의 무한한 공로가 그리스도의 지체들 즉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속한다는 사실에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고통당하시고 당신 자신이 범하지도 않은 죄를 기워 갚으신 이유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그 몸의 구원자이신 것과 같습니다.”(에페 5,23)

 

신비체의 활동은 그리스도 자신의 활동이다. 신자들은 그리스도께 합체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고통당하고 죽으며,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다시 살아난다. 세례성사만이 거룩하게 한다. 세례성사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거룩함이 그 지체들인 영혼들 안으로 흘러들어가게 하는 생명 유지에 필요한 연결부를 그리스도와 영혼들 사이에 설치해주기 때문이다. 그 밖의 성사들, 특히 지성한 성체성사는 신비로운 몸과 그 머리 사이의 일치를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존재한다. 게다가 신비체와 머리가 이루는 이 일치는 믿음과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교회 내 통치의 유대와 상호 섬김을 통해, 노동과 고통을 마땅히 감수함으로써,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 생활의 모든 행위를 통하여 그 깊이를 더해 간다. 특히 이 모든 일들을 마리아와 의식적으로 협력하면서 행한다면 효과적인 것이 될 것이다.

 

마리아는 머리와 지체들 모두의 어머니시라는 지위로 말미암아 탁월한 일치의 유대를 형성해주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에페 5,30 참조)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실질적으로 온전히 동등한 방식으로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의 자녀들이다. 마리아가 존재하시는 유일한 목적은 ‘전(全) 그리스도’를 잉태하여 낳는 일이다. 여기서 ‘전 그리스도’란 서로 알맞게 연결되어 있는 완전한 지체들을 모두 갖추고서(에페 4,15-16 참조)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신비체를 가리킨다. 마리아는 이 일을 신비체의 생명이시며 영혼이신 성령에 협력하시고 성령의 권능에 의하여 성취하신다. 바로 마리아의 품 안에서 그리고 어머니로서의 그분의 보살핌 아래에서 우리의 영혼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나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에페 4,13).<후략>

 

 

2. 마리아와 그리스도의 신비체

 

하느님이신 당신 아드님의 실재 몸을 양육하고 보살피고 사랑하시면서 성모님이 수행하신 다양한 직무는, 가장 고결한 형제만이 아니라 가장 작은 형제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구성하는 각 지체와의 관계에서도 여전히 성모님의 직무로 남아 있다. 그 때문에 신비체의 여러 ‘지체들이 서로 똑같이 돌볼’ 때(1코린 12,25), 마리아와 무관하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혹시 그 지체들이 부주의나 무지로 성모님의 현존을 깨닫지 못할 때조차도, 그저 자신들이 쏟는 수고를 성모님의 수고와 연결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들이 하는 일은 이미 성모님의 활동이고, 성모님은 이 활동을 주님 탄생 예고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아하고 분주하게 수행하신다. 이와 같은 이유로 레지오 단원들이 신비체의 다른 지체들에게 봉사할 때에는 그들이 성모님을 모시고 가서 성모님이 자신들을 돕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성모님이 단원들을 불러 당신이 하시는 일을 돕도록 하시는 것이다.

 

지체들을 섬기는 일은 성모님의 특별하고 고유한 일이므로, 성모님이 은혜로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 누구도 그 일에 참여할 수 없다. 자기 이웃에게 봉사하려 하면서도 성모님의 지위와 특권을 좁히려는 이들이 있다면 신비체 교리에서 나오는 논리적인 결론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해야 한다. 게다가 이 신비체에 관한 교리는 성경을 받아들인다고 고백하면서도 하느님의 어머니를 무시하거나 그 가치를 깎아내리는 이들에게 교훈이 된다.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당신 어머니를 사랑하시고 어머니께 순종하셨다는 사실과(루카 2,51 참조) 그리스도의 모범은 그 신비체의 지체들에게 일종의 의무를 부과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게끔 하자. “…… 어머니를 공경하여라.”(탈출 20,12).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그들은 자녀로서의 효성을 성모님께 드려야 하며, 모든 세대는 그분을 행복하다 노래할 의무가 있다(루카 1,48 참조).

 

성모님과 함께 하지 않고서 어느 누구도 이웃에게 봉사하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듯이, 성모님이 의도하시는 바를 어느 정도라도 따르지 않고서는 이 봉사의 의무를 훌륭하게 이행할 수가 없다. 따라서 성모님과 더 일치하면 할수록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라(1요한 4,19-21 참조)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더 완벽하게 실천할 수 있게 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12월호, 편집실]

 

 

[새 번역 교본 읽기] 레지오 단원과 그리스도의 신비체(제9장)

 

 

3. 신비체 안에서 겪는 고통

 

레지오 단원들은 사명을 수행하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특히 고통 받는 사람들과 가까이에서 접촉한다. 그러므로 단원들은 세상이 ‘고통’의 문제라고 칭하며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깊이 알고 있어야 한다. 누구든지 살다보면 고통의 무게를 짊어지게 된다. 거의 모든 사람이 고통에 직면한다. 고통을 없애버리려고 노력하다가도 그것이 불가능할 때에는 그저 감내할 뿐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구원 계획은 실현되지 못한다. 옷감을 짤 때 씨줄이 날줄을 가로질러 가면서 날줄을 보완하는 것처럼, 구원 계획에 따르면, 열매를 맺는 모든 삶에서는 고통이 자신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통은 인생의 여정을 가로질러 다니면서 훼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생을 완성시켜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모든 성경 구절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필리 1,29)을 주셨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2티모 2,11-12)이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우리의 죽음의 순간은, 우리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이제 막 당신의 사명을 그 위에서 마치시어 온통 피로 넘쳐나고 있는 십자가를 통하여 드러난다. 그 십자가 아래에는 너무도 상심하여 더 이상 삶을 지탱하기도 힘들 것처럼 보이는 한 여인이 서 계신다. 그 여인은 구원하는 자와 구원을 받은 자 양편 모두의 어머니이시다. 십자가 아래에 싼 값으로 흩뿌려져 있지만 세상을 구원한 그 피는 당초 이 어머니의 혈관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이제부터는 그 값진 피가 신비체를 관통하여 흐르면서 모든 빈자리를 생명으로 채워 넣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은총을 누리려면 성혈이 흐름으로써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지를 전적으로 올바로 이해해야만 한다. 고귀한 성혈이 영혼 안에 흘러 들어오면 영혼은 그리스도를 닮는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그리스도는 온전한 그리스도로서, 환희와 영광의 그리스도인 베들레헴과 타보르 산의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고통과 희생의 그리스도 즉 골고타의 그리스도이시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어느 한 모습만 취사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든 그리스도인이 깨달아야 한다. 성모님은 주님 탄생 예고를 받던 환희에 찬 순간조차도 이 사실을 온전히 깨닫고 계셨다. 성모님은 당신이 기쁨의 어머니가 되리라는 부르심만이 아니라 슬픔의 여인이 되리라는 부르심도 받고 있다는 것을 아셨다. 그러나 성모님은 늘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전적으로 맡겨 드리고 계셨기에 하느님을 온전히 받아들이셨다. 성모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아드님의 생애와 더불어 그 생애가 의미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셨다. 그분은 아드님과 함께 천상의 기쁨을 맛보아야 하셨지만 그에 못지않게 아드님과 함께 고통도 기꺼이 감내하셨다.


그 순간 성모님의 성심과 아드님의 성심은 하나가 될 만큼 아주 밀접한 일치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두 심장은 신비체 안에서 신비체를 위하여 함께 뛰게 될 것이다. 그 때문에 성모님은 우리 주님의 지극히 고귀한 성혈을 받아서 전달해 주는 영적인 맥관(脈管)인 은총의 중재자가 되셨다. 성모님이 그렇게 하셨다면 성모님의 자녀들도 똑같이 해야 한다. 하느님께 얼마나 쓸모 있는 사람인가는 그 사람이 성심과 얼마나 밀접하게 일치해 있는지에 늘 달려 있을 것이다. 그는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고귀한 성혈을 바로 그 성심에서 깊이 퍼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심과 성혈과의 일치를 그리스도의 생애의 어느 한 측면만이 아니라 그분의 모든 생애에서 찾아야 한다. ‘영광의 왕’과 ‘비탄의 인간’ 모두 단 한 분이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영광의 왕은 환영하면서도 비탄의 인간을 배척한다는 것은 가치도 없고 쓸모도 없는 일이다. 비탄의 인간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영혼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명에서 아무런 역할도 맡지 못할 뿐 아니라 그 뒤에 이어질 영광스러운 사명에서도 아무런 역할을 함께 나눌 수는 없다.


그러므로 고통은 언제나 하나의 은총이다. 고통은 치유를 허락하지 않는 때라도 힘을 부여해 준다. 고통은 단순히 죄에 대한 처벌이 결코 아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St. Augustine)은 “인간이 고통을 겪는 것은 형법에 의한 것이 아님을 이해하라. 고통은 그 성격상 치료적인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무죄하고 거룩한 이들을 당신 자신과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완전하게 닮게 하시려고, 당신의 고난을 마치 측정할 수 없는 특전처럼 그들의 몸 안에 흘러넘치도록 쏟아주신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고통과 우리의 고통을 교환하고 섞는 일은 모든 고행과 보속의 토대가 된다.


고통을 단지 인간의 몸을 관통하여 순환하고 있는 피에 비유해 봄으로써, 고통이 맡고 있는 역할과 그 목적을 더욱 생생하게 알게 된다. 손을 생각해 보라. 손목에서 뛰고 있는 맥박은 심장의 고동이다. 심장에서 흘러나온 따뜻한 피는 손을 관통하여 흐른다. 손은 몸을 구성하고 있는 일부분으로서 몸과 하나이다. 손이 차가워지면 혈관은 수축되고 피가 순환하는 데에 지장이 발생한다. 손이 더 차가워지면 피의 흐름은 줄어든다. 피의 흐름이 멈출 정도로 손이 차가워지면 동상에 걸리고 세포 조직은 죽기 시작하며 손은 생기를 잃어 쓸 수 없게 된다. 그런 손은 죽은 손과 같아서 그 상태로 내버려두면 괴저(壞疽)가 발생한다.


차가움이 일으킬 수 있는 여러 단계는 신비체의 지체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여러 단계의 신앙 상태를 잘 보여 준다. 신비체의 지체들은 그 몸을 관통하여 흐르는 고귀한 성혈을 수용할 수 없을 정도까지 이르러, 괴저에 걸려 잘라내야 하는 지체처럼 죽을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사지가 얼어붙은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누구나 알고 있다. 얼어붙은 사지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가 다시 순환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수축된 정맥과 동맥에 피를 밀어 넣는 일은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그러나 그 고통은 일종의 기쁨을 드러내는 표지이다.


신앙생활을 실천하는 가톨릭 신자 대부분은 실제로는 동상에 걸리지 않은 지체와 같다. 설령 자기만족에서 신앙생활을 실천하고 있는 때조차도 그들은 자신들이 차갑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들은 우리 주님께서 그들에게서 바라시는 정도의 성혈을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우리 주님께서는 억지로라도 당신의 생명을 그들에게 불어넣으셔야 한다. 그분의 피는 그 피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혈관을 확장시키면서 고통을 일으키며 흐른다. 그리고 이 고통은 삶을 슬프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고통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완전히 이해한다면, 고통으로 인한 슬픔은 기쁨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고통을 느낀다는 것 바로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가까이 계심을 느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겪어야 할 고통을 모두 겪으셨다. 당신이 받아야 할 고통은 조금도 모자람이 없이 다 받으셨다. 그렇다면 주님의 고통이 다 끝났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 머리로서의 고통은 끝났다. 그러나 몸이 겪어야 할 수난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마땅히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몸 안에서 여전히 고통 받고 계시며 당신이 행하시는 속죄 행위에 우리가 함께 하기를 바라신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은 우리가 그분의 속죄 행위에 함께 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지체들의 몸이며, 하나는 다른 하나의 몸이기에,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겪으시는 모든 고통을 머리와 함께 지체들도 겪어야만 하기 때문이다.”(성 아우구스티노 St. Augustine)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3월호,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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