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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주일 - 가경자 요한 바오로 1세 교황,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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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6-30 ㅣ No.580

교황 주일 - 가경자 ‘요한 바오로 1세 교황’ 그는 누구인가


재위 33일, 온화한 미소와 절제 · 겸손 보여준 교황

 

 

요한 바오로 1세 교황.

 

 

6월 28일은 교황 주일이다. 교황 주일은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이자, 교회 최고 목자인 교황을 위해 특별히 정해놓은 주일이다. 한국 교회는 1930년부터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6월 29일)과 가까운 주일을 교황 주일을 지내고 있다.

 

교황 주일을 맞아, 신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소박한 인간미를 지녔던 사목자 요한 바오로 1세 교황(1912~1978)을 소개한다.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의 일대기는 손희송(서울대교구 총대리) 주교의 저서 「우리 시대의 일곱 교황」과 가톨릭대사전을 바탕으로 정리했다.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

 

본명은 알비노 루치아니(Albino Luciani). 1912년 이탈리아 벨루노교구 포르노디카날레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회주의적인 경향의 아버지 조반니 루치아니와 열심한 신자였던 어머니 보르톨라 탄콘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생명이 위독해 산파였던 마리아 피오코에게 세례를 받았다.

 

1928년 벨루노의 그레고리오 신학교에 입학해 7년 후 벨루노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이후 아고르도 본당의 보좌로 사목하면서 광산기술학교에서 종교 교사를 겸임했다. 1937년부터 벨루노의 그레고리오 신학교 부학장으로 10년간 교양과목을 가르쳤다. 1948년에는 벨루노교구의 교리교육국 책임자로, 1954년에는 교구 총대리로 임명됐다.

 

- 1972년 9월, 루치아니 추기경(오른쪽)과 성 바오로 6세 교황.

 

 

루치아니 신부는 학생들을 뒤로하고 1958년 12월 비토리오 베네토교구 주교로 임명됐다. 사목 표어를 ‘겸손’으로 정한 그는 주교 자격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모든 회기에 참석했다. 1969년 12월 베네치아 총대주교로 임명된 데 이어 1973년 3월에는 추기경으로 서임됐다.

 

루치아니 추기경은 베네치아에서 1976년 ‘권위에 관한 일치 문헌’을 발표한 영국교회-로마 가톨릭교회 국제위원회 회의 등 교회 일치 운동 회의에 참석했다. 1972년부터 3년간 이탈리아 주교회의 부의장으로 활동했으며 해방신학에 엄격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회칙 「인간생명」(1968)의 열렬한 옹호자로, 1972년 이탈리아 정부가 이혼을 허용하는 법을 제정하려고 하자 크게 반대했다.

 

그는 특히 성당을 지나치게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을 싫어했다. 값비싼 성작이나 교회의 귀중품을 팔아 가난한 이들을 돕도록 본당 사제들에게 권장했다. 1971년 서방의 부유한 교회들이 수입의 1%를 제3세계의 가난한 교회를 돕는 데 써야 한다고 제안한 것도 그였다. 또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뿐만 아니라, 독일ㆍ프랑스ㆍ포르투갈ㆍ부룬디ㆍ브라질 등지에 있는 이탈리아 이민자들에게도 특별한 관심을 쏟았다.

 

- 1978년, 고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한 교황. 가톨릭평화신문 DB.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후보자’ 요한 바오로 1세

 

루치아니 추기경은 1978년 8월 6일 바오로 6세 교황이 선종한 후, 8월 26일 제263대 교황으로 선출됐다. 그는 이탈리아 밖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후보자’로 환영을 받았다.

 

루치아니는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성 베드로 대성전 발코니에서 군중에게 첫 강복을 주었는데 친근한 미소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자신의 교황명을 교회 역사상 최초로 이중 이름인 ‘요한 바오로’라고 정했다. 자신을 주교로 임명한 성 요한 23세 교황과 추기경으로 임명한 성 바오로 6세 교황의 노선을 이어 가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그리스도의 손에 제 손을 맡겨 드리고, 그분께 몸을 의지하고서 저도 이제 교회인 배의 키를 잡으러 올라왔습니다. 이 배는 아직 폭풍 중에 떠 있지만 안전하고 든든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아드님의 북돋우시고 다스리시는 현존이 이 배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황은 엄청난 직무에 대한 중압감을 느낀다면서 이같이 전능하신 하느님께 의탁한다는 말로 메시지를 시작했다.

 

교황은 자신이 어떻게 교황직을 수행할지 계획을 발표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유산을 수행하고, 공의회 규범을 준수하고 실천하고, 주저함이나 두려움 없이 지속해서 교회의 쇄신을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

 

- 1978년 9월 23일, 라테라노 대성전 앞에서 군중을 향해 손 흔드는 교황.

 

 

교황 선출 다음 날인 8월 27일, 교황은 삼종 기도 담화에서 이같이 말했다.

 

“나는 요한 교황님의 ‘마음의 지혜’도, 바오로 교황님의 자질과 학식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그 어른들의 자리에 서게 되었으니 교회에 봉사할 길을 찾아야만 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기도로 나를 도와주시리라 믿습니다.”

 

9월 1일 교황은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그 자리에 참석한 기자들은 그에게 매혹당했다. 길고 화려한 전통적인 교황 대관식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삼중관이 아닌 팔리움을 받는 것으로 교황직을 시작했다. 통상적으로 세속적ㆍ교회적ㆍ천상적 세 권한을 상징하는 교황관인 삼중관을 쓰게 되는데,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은 “종들의 종이 쓰기에는 너무 무겁다”며 거절했다. 3일 거행된 교황 즉위 미사에서는 이같이 말했다.

 

“나는 여태까지 착한 목자란 이런 사람이라고 묘사했지만 나 자신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사람이 도달해야 할 완덕의 피안을 보여 주었지만, 나는 아직도 결점과 과오의 파도에 휩쓸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내가 빠져 죽지 않도록 기도로 구원의 판자 조각을 제게 던져 주십시오.”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교황은 물론이려니와 온 세상이 기도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세계가 잘못되어 가는 까닭은 기도보다 전쟁을 택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은 취임 후 바티칸 은행의 불투명한 재정에 대한 개혁을 표명하기도 했다.

 

- 1978년 8월 26일교황 선출 직후 발코니에서 미소 짓는 교황.

 

 

‘하느님의 종’으로 선포

 

순박하고 검소했으며 친근한 미소와 따뜻한 말의 소유자였던 교황은 베드로의 후계자로 선출된 지 33일째인 9월 28일 밤, 심장마비로 선종했다. 교황은 이른 아침, 침대에 앉은 채 「준주성범」을 가슴에 얹고, 숨진 모습으로 발견됐다.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죽음에 세상과 교회는 충격에 휩싸였고, 바티칸 은행을 정리하고 교황청 유력 인사를 교체하려는 계획으로 독살됐다는 근거 없는 추측이 난무했다. 추기경들은 교황이 선출된 지 한 달 만에 선종하는 충격적인 사건 속에서도 하느님의 또 다른 계획을 진지하게 숙고해야 했다.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은 2003년 11월 23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하느님의 종으로 선포됐으며, 현재 시복시성 심사가 진행 중이다. 그의 유해는 성 베드로 대성전 지하 묘지에 안장됐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의 가치는 그의 짧은 재임 기간과 반비례한다고 밝힌 바 있다. 교황청은 2017년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을 가경자로 선포하고, 시복을 위해 그의 전구로 일어난 기적들을 심사하고 있다.

 

교황청은 지난 4월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의 문화ㆍ종교적 업적을 연구하는 ‘요한 바오로 1세 재단’(총재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을 설립했다. 이 재단은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이 남긴 문화 종교적 정신을 전하기 위해 각종 회의와 세미나, 연구 등 다양한 책무를 통해 교황으로서의 삶을 보편교회에 홍보한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6월 28일, 정리=이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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