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5‧18 민주화 운동 40주년에: 그날 광주가 보여 준 대동 세상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6-24 ㅣ No.1749

[경향 돋보기 – 그날처럼 살고 있습니까: 5‧18 민주화 운동 40주년에]


그날 광주가 보여 준 ‘대동 세상’

 

 

40년 전에 섬처럼 고립된 지역에서 벌어졌던 5‧18 민주화 운동을 두고 세계사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2011년 유네스코(UNESCO)는 5‧18 민주화 운동의 기록물을 인권을 위한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하면서, “5‧18 민주화 운동은 한국의 민주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냉전 체제를 해체하고 민주주의를 이룩하여 아시아 국가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설명했다.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려면 하나의 사건이나 운동이 한 지역이나 나라의 인권과 평화를 추구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다른 나라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구체적인 사례가 있어야 하며, 원본 기록이 존재해야 한다.

 

유네스코는 광주 지역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군부 독재 권력의 정권 찬탈 음모에 저항했던 시민 항쟁이 한국과 비슷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아시아 여러 나라의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하였다.

 

1980년 5월, 광주의 비무장 시민들은 상상할 수 없는 무자비한 공수부대의 만행에 맞서 두려움과 무서움을 떨치며 총을 들고 싸웠다. 군사 반란을 일으켜 계엄령을 내리고 제도 언론을 장악한 전두환 일당은 광주 시민을 ‘폭도’라고 규정하고, 시민들의 항쟁을 ‘폭동’이라고 매도하고 조작하였다. 광주 시민을 학살한 피 묻은 손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일당은 광주의 진실을 밝히려는 활동을 국가 권력의 힘으로 탄압하였다.

 

1980년 당시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는 5월 25일에 헬기로 광주에 왔던 최규하 대통령이 발표한 담화문에 실망하여, 다음날인 5원 26일 최규하 대통령에게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감정을 있는 그대로 사태의 본질을 전달”하기 위해 편지를 썼다. 이 편지는 6월 초에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상임위원회 이름으로 청와대에 전달되었다.

 

“광주 시민들의 평화적인 시위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계엄군이 광주시 곳곳에서 천인공노할 잔악한 행위를 수많은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행했기 때문에, 자기 아들딸들이 이 군인들의 몽둥이에 얻어맞고 구둣발에 채여 유혈이 낭자한 채 길바닥에 쓰러지고 다 죽게 뻗어 버린 채로 차에 실려 가는 것을 본 시민들이 얼마나 격노하였겠는지 각하께서는 생각해 보셨습니까?”

 

 

무력 진압과 광주의 고립

 

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10일간의 항쟁 기간 첫 나흘 동안, 전두환 일당의 내란에 따른 공수부대의 무력에 맞서 광주의 학생과 시민들은 맨손으로 싸웠다.

 

광주에 동원된 공수부대는 3공수 여단, 7공수 여단, 11공수 여단이었다. 그들은 평온하게 생활하는 시민에게 상상할 수 없는 야만적인 공격을 하였다. 다방에서 차를 마시는 젊은이들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하차하는 승객을 공격하고, 시내버스를 타고 가는 학생들을 끌어내려 구타했으며, 학원과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폭행하고 연행했다. 가혹한 진압과 무차별 공격에 항의하는 어른들까지 공격 대상이 되자 시민들은 두려움과 분노로 치를 떨었다. 그들에게서 “이들은 더 이상 국민의 세금으로 양성된 군대가 아니다.”, “우리도 살기 위해 무장해야 한다.”라는 말이 나왔다.

 

만행이 극에 달한 공수 여단은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앞 금남로에서 비무장한 시민을 향해 집단으로 무차별 발포하였다. 같은 시각, 주변 건물 옥상에 배치된 저격수들의 조준 사격으로 사상자들의 대다수가 머리와 가슴에 총상을 입었다. 그러나 시민들의 계속된 저항에 밀려난 계엄군은 공주를 포위하고 철저히 고립시켰다.

 

윤공희 대주교의 일기에는 그 당시 시민들의 요구 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김성용 신부를 비롯한 사회단체, 재야인사로 수습 위원회가 구성되면서 5월 23일 남동성당 사제관에서 수습 조건으로 ① 현 사태가 공수부대의 살상 행위에 대한 정당방위임을 인정 ② 군 책임자 엄중 처벌 ③ 구속자들의 전원 석방 ④ 계엄군은 투입하지 않고 질서 회복은 경찰에게 맡긴다 ⑤ 보복이나 처벌은 일체하지 않는다 ⑥ 무장은 자진 해제한다 ⑦ 왜곡된 보도 중지(폭도 행위로 오도한 부분 시정할 것) ⑧ 피해 보상은 정부가 책임질 것 등 8개 항을 요구했다.”

 

 

치안 부재의 상황에서 열린 ‘대동 세상’

 

시민들은 ‘대동 세상’이라고 불린 7일 동안 스스로 치안을 유지하고 광주를 공동체 세상으로 만들었다. 총기를 들었던 시민군 중에는 고등학생을 포함하여 사회적 취약 계층이 많았다. 그러나 이들이 총을 들면 사회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와 무법천지가 될 것으로 예단하고 ‘폭도’라고 규정했던 전두환 일당의 기대는 허망하게 무너졌다.

 

총을 든 시민들은 유례를 찾기 어려운 모범적인 자치 공동체를 이루었다. 시민군은 지역의 치안을 유지했다. 고립된 도시에는 먹거리를 서로 나누어 주먹밥이 넘쳐나고, 병원에는 헌혈한 피가 남았다. 시민들은 거동 이상자를 체포하여 경찰에 넘기기도 했다. 단 하나의 강력 사건도 총기로 무장한 시민군에 의해 일어나지 않았다.

 

5‧18 항쟁 당시 광주의 양동시장, 대인시장 등에서는 날마다 여성 상인들이 밥을 짓고 주먹밥을 만들었다. 전남도청 인근의 동네 여성들도 주먹밥을 만들었다. 동네마다 쌀과 부식을 리어카에 싣고 나와 시민군에게 전달했다. 목포와 나주, 화순, 영암, 해남에서도 김밥을 만들어 나누었다. 옛 전남도청을 시민군이 접수한 뒤 시민군 지도부와 수습 위원들의 식사는 가톨릭노동청년회 여성 노동자들이 주축이 되어 제공했다.

 

1980년 5월 21일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가 있던 날, 전남대학교 인근 다른 지역에서도 수십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수백 명이 총상을 입었다. 광주 시내의 모든 병원은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수혈이 필요했다. 그러나 피가 모자랐다. 시민들은 방송차를 타고 다니며 피가 부족하다고 알렸다. 소식을 들은 이들은 병원으로 달려갔다.

 

헌혈자는 대부분이 여성이었다. 기록에 남아 있는 헌혈자 명단에는 ‘광주시 임동 100번지’가 주소인 사람이 여럿 있다. 이곳은 ‘전남방직’, ‘일신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기숙사 주소지이다. 이곳에 살던 여성 노동자들이 현혈 대열에 다수 참여했다는 증거이다.

 

주소가 ‘광주시 황금동’인 여성들의 이름도 있다. 이 이름들의 실제 주인공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광주에서는 5·18항쟁에서 전설처럼 전해 오는 이야기가 있다. 광주 시내 술집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내 몸은 더러울지라도 내 피는 깨끗하다.”, “현혈로 민주주의에 동참하고 싶다.”라고 하면서 동참했다는 것이다.

 

박금희는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었다. 5월 21일 낮에 광주기독병원에서 현혈을 마치고 귀가하던 그는 계엄군이 쏜 총탄에 맞고 헌혈했던 광주기독병원으로 다시 실려 왔다. 헌혈 담당 간호사가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박금희 학생의 이야기는 1988년 ‘금희의 오월’이라는 연극으로 만들어져 무대에 올랐다.

 

광주대교구 사제단이 1980년 6월 초에 발표한 성명서 ‘광주 사태에 대한 진상’에는 다음과 같은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계엄군이 외부와의 통신, 교통의 차단시켜 생필품과 식량이 공급되지 않는 가운데도 매점매석 행위나 폭리를 취하는 자가 없었다. 언제 풀릴지 모르는 사태 속에서도 서로 식량을 나누어 먹었고, 총상으로 인한 환자가 급증하여 피가 부족하게 되자 헌혈하는 시민들의 수가 무한히 늘어서 지금도 헌혈받은 피가 남아돌고 있다. 부녀자들은 데모 대원들에게 스스로 음식과 약품을 제공했고, 배고파하는 계엄군에게도 미움을 잊은 채 먹을 것을 제공해 주었다.

 

이른바 치안 부재의 10일, … 어느 때보다 선량했던 세칭 부랑아와 버림받은 이들, 방망이를 휘두른 공수대원 앞에 너무나 섧게 울어버린 어느 아낙의 따스한 마음, 파괴와 방화를 하지 말자며 만류하던 모든 광주 시민들! 그것은 우리가 아는 폭도들의 짓이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공동체 정신

 

2017년 5월 18일, 문재인 대통령은 5·18 기념 행사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오월 광주의 시민들이 나눈 ‘주먹밥과 헌혈’이야말로 우리의 자존의 역사입니다. 민주주의의 참모습입니다. 목숨이 오가는 극한 상황에서도 절제력을 잃지 않고 민주주의를 지켜낸 광주 정신은 그대로 촛불 광장에서 부활했습니다. 촛불은 5‧18 민주화 운동의 정신 위에서 국민 주권 시대를 열었습니다. 국민이 대한민국의 주인임을 선언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를 포함한 인류 전체는 코로나19 창궐로 상상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별히 이런 시기에 40주년은 맞는 5‧18 민주화 운동의 ‘주먹밥과 헌혈, 그리고 대동 세상’이 주는 교훈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한 번 되새겼으면 한다. 바로 지금이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 삶과 정신을 발휘해야 하는 시기이다.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고통이라면 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배려와 희생의 실천을 통해 그 안에 준비된 하느님의 은총을 만나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한다.

 

* 김양래 아우구스티노 – 5‧18기념재단 이사. 1980년 전남대학교 재학 중 5‧18사건으로 구속되어 군사재판에서 1년 형을 선고받았다. 1980년 10월 30일 형 면제로 석방되어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자원 활동가로 봉사하다가 1982년 9월부터 1991년 5월까지 실무 간사로 일했다. 2002년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부위원장, 2015-2018년에는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로 재직했다.

 

[경향잡지, 2020년 5월호, 김양래 아우구스티노]



1,315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