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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죽음에 대한 성찰: 무덤 기행 – 무덤을 여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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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6-23 ㅣ No.394

[죽음에 대한 성찰 - 무덤 기행] 무덤을 여행하다

 

 

별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지 모르지만, 무덤 구경(?)하길 즐깁니다. 유학 시절 유럽 도시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었던 동네 공동묘지에 대한 경험이 그 첫 계기가 되지 않았나 합니다. 그렇다고 뭐 무덤만 찾아다닐 정도는 아니지만, 무덤 구경할 기회가 오면 마다하지 않습니다.

 

 

유럽의 ‘예쁜’ 동네 공동묘지

 

동네 안에 공동묘지가 있다는 것을 의아해하실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직접 보신 분들은 아마도 그 공간에 대한 기억이 그리 나쁘지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 대부분 교회 옆에 자리 잡은 오래된 공동묘지는, 물론 우리에겐 낯선 풍경이지만, 그네들 일상의 일부처럼 느껴집니다. 지하철역 이름에 ‘공동묘지’라는 말이 들어가기도 하는 것을 보면 혐오 시설로 여겨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도시 안에 새로 공동묘지를 만든다거나 증축한다면 환영할 것 같지도 않습니다만.

 

사람들은 묘지 옆을 오가며 출퇴근하고, 날이 따뜻한 오후에는 묘지 안을 산책하기도 합니다. 저도 곧 그 상황에 익숙해졌고 나중에는 그 풍경이 아름답고 평화롭게 느껴지기까지 했지요. 오가는 길에 간혹 시간이 좀 남으면 묘지 안에 슬쩍 들어가 보곤 했습니다. 조금씩 다른 모습의 무덤들, 고인을 기억하는 누군가가 남기고 간 작은 꽃다발, 묘비에 쓰인 날짜와 글귀들을 보며, 그곳에 묻힌 사람들을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떤 인생을 살다 갔을까,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이런 생각은 ‘나도 언젠가는 가겠구나, 나는 누구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산다는 건 대체 뭘까, 어떻게 살아야 하나.’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도 하지요.

 

 

동네 공동묘지의 ‘결과적 장점’

 

수십 년 사이에 화장이 급격히 일반화되었지만 오랜 세월 매장을 해온 우리네 경우와 비교가 되기도 했지요. 동네에 무덤을 쓰게 된 것과 산에 무덤을 쓰게 된 것 사이에는 많은 자연적, 사회적, 역사적 이유가 쌓여 있을 터이기에 어느 쪽이 좋다 나쁘다를 판단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네 공동묘지가 지니는 ‘결과적 장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동네 공동묘지는 무엇보다 일상의 삶에서 살짝살짝 나와 우리의 마지막을 상상할 자연스러운 기회를 제공해 준다 싶었습니다. 먼저 간 가족, 친구, 이웃을 조금은 더 자주 기억할 기회를 주지 않을까도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동네 공동묘지는, 거창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삶에 ‘경건성’이라는 모자를 씌워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너무 가볍지 않게, 너무 무겁지 않게.

 

 

‘죽음의 공간’ 없는 도시

 

삶 안에서 죽음을 ‘건강하게’ 기억할 수 있는 공간, 가끔은 멈춰서서 내가 가는 길의 의미를 성찰할 수 있게 하는 공간이 있다는 사실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집단적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사람은 나고 자라서 병들고 죽는 존재인데, 그 삶의 공간 안에 생로병사가 고르게 자리 잡음이 자연스럽지 않은지요. 그런데 우리가 사는 근대의 도시는 마치 죽음 없는 공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누가 죽기는 죽는 걸까요? 도시 안에서 죽음은 도로 전광판의 교통사고 사망자 숫자와 같은 정보로 무미건조하게 경험되기 일쑤입니다.

 

 

제주의 밭 산담이 소중한 이유

 

이야기가 조금 옆으로 새는 것 같지만, 제주에서 지켜져야 할 단 하나의 ‘문화 경관’을 꼽으라면 돌담, 그중에서도 ‘산담’(제주에서는 무덤을 산, 무덤의 돌담을 산담이라 부른답니다.), 특히 밭에 있는 산담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상적 노동의 공간인 밭에 떡하니 자리 잡은 산담이 한눈에 들어왔던 것은, 유학 시절의 경험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제주 중산간에도 무덤이 많은 것을 보면 밭에 있는 무덤들은 아마도 가난의 결과일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그 풍경의 결과적 긍정성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 밭 돌무덤은 우리에게 왜 제주가 단순히 관광지일 수만은 없는지, 아니 그래서는 안 되는지 온몸으로 웅변하는 듯 보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죽음과 동행할 수 있는 공간이 일상에 존재하는 의미를 우리 사회에 예시처럼 보여 주는 것 같아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죽음을, 아니 삶을 성찰하게 하는 공간의 중요성

 

건축가 승효상 선생님은 자본주의에 포획된 도시 서울이 아직 사람이 살만한 도시라면 그것은 종묘 때문이라는 요지의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진심으로 공감합니다.

 

물론 잘 아시다시피 종묘는 조선 시대 임금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지만, 그곳은 죽은 이를 기억하는 아직 살아 있는 이들의 마음, 아직 살아 있는 이들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를 돌아보게 하는 성찰의 장소로서 보편성을 획득합니다. 부박한 도시의 무게 중심을 잡아주는 공간이라고나 할까, 그런 의미를 종묘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종묘는 옛 임금들의 사당이기를 훌쩍 뛰어넘는 중요한 현재적 의미를 지닙니다.

 

기억 없는 인간이 진정한 인간일 수 없고 성찰 없는 개인이 온전한 개인일 수 없듯이, 기억하지 못하고 성찰하지 못하는 집단 또한 온전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삶의 공간 안에 꼭 무덤이 아니더라도, 질주하는 삶을 한순간이라도 멈추게 하고 되돌아보게 하는 힘을 가진 공간이 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공간 안에 새겨진 ‘삶의 경건성’

 

더 높은 빌딩을 자랑할 일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경건하게 하는 기억과 성찰의 공간들, 아름답고 품위 있는 죽음의 공간이 얼마나 있는지 질문해야 할 것입니다. 기억과 성찰이, 그리고 죽음에 적절한 자리를 내어 주지 않는 곳의 ‘행복 지수’가 결코 높을 수 없다고 자신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어떤 곳에서 ‘삶의 경건성’을 느끼십니까? 당신은 어떤 공간에 가면 ‘성찰하는 인간’이 되시나요? 주변의 그런 공간이 떠오르신다면, 아마도 ‘좋은 곳’에서 살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2019년 문을 연 서울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은 그런 점에서 가톨릭 교회를 넘어 우리 모두에게 참으로 다행스럽고 고마운 공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꼭 한번 가서 머무르시길 권합니다. 가능하면 혼자, 가능하면 오래, 가능하면 스마트폰은 끄시고서 말입니다.

 

* 천선영 율리아나 - 경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20년 4월호, 글 천선영 율리아나, 그림 이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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