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20일 (목)
(녹)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수도 ㅣ 봉헌생활

봉쇄의 울타리에서: 정말 하느님께서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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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2-26 ㅣ No.618

[봉쇄의 울타리에서] 정말 하느님께서 나를?

 

 

네가 선교사가 된다고? 봉쇄 수녀가 되겠다고?

 

내가 성소를 찾고 있을 때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다. 열네 살에 견진성사를 받으면서 내 마음에는 선교사가 되고 싶은 갈망이 싹텄다.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온 세상에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린 나이였지만 이 갈망은 그때부터 내 마음속에서 서서히 자라났다. 그렇다고 수녀가 되어 봉헌 생활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결혼해서 가족 모두가 선교지로 떠날 계획을 품었던 것이다. 어머니에게 이 갈망을 말씀드렸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아이고, 네가 선교사가 되겠다고?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인 줄 아니?”

 

응원해(?) 주시는 엄마 나름의 방식이셨다. 신앙심이 깊으셨지만 고정 관념도 많으셨던 분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열정과 함께 나의 무능력도 고개를 들었다. 철이 들면서 현실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나처럼 말주변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선교사가 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언제나 내 안에서 들리는 긍정적인 답이 있었다. ‘정말 하느님께서 나를 선교사로 부르신다면 내 부족함도 그분께서 해결해 주실 거야.’

 

내가 열일곱 살 때였다. 우리 본당에서 한 젊은 신부님이 청년 사목을 하셨다. 나는 언니와 함께 젊은 신부님이 지도하시는 기도 그룹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있는 모임에만 참석하고 활동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기도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나에게는 기도할 시간을 찾아낸다는 것 자체가 신비였다. 나는 소풍이며 댄스파티 등 놀러 다니는 데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던 것이다.

 

결국은 열아홉 살에 이르러서야 기도해 볼 결심이 섰다. 잠들기 전에는 예수님께서 요세파 수녀에게 하신 말씀을 엮은 「성심의 메시지」를 펼쳐 몇 줄 읽고 침대에 들어가 묵상을 시도했다. 길어야 10분이나 묵상했을지 모르겠다. 이렇게 짧은 기도였지만 주님께서는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하루는 이런 구절을 읽었다. “나는 봉헌된 이들, 내가 선택한 이들에게 이 말을 전하여라.” ‘선택한 이들’이란 부분을 읽자마자 그들이 특별한 사랑을 받는 이들이란 느낌에 반항심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복받쳐 올랐다. 나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로 울기 시작했다. ‘하느님께서는 어쩜 어떤 사람들만 특별히 사랑하실 수가 있어? 모두를 똑같이 사랑하셔야 하는 거 아니야?’ 봉헌된 이들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일었다. 그날 나는 눈물에 푹 젖은 채 잠이 들었다.

 

 

단 한 번의 의심도

 

사건은 그렇게 끝난 게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홀로 길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 다시 「성심의 메시지」를 읽기 시작했는데 다시금 선교에 대한 강한 갈망이 일었다. 그리고 늘 그랬듯 의심과 두려움도 뒤따랐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선교사가 되지?’

 

곧 ‘나는 네가 선교사가 아니라 관상 수녀가 되길 바란단다.’는 말씀과 함께 그분께서 내게 바라시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주님께서는 내가 봉쇄 수도원 안에서 오로지 그분께만 헌신하기를 원하시는 것이었다. 이렇게 나를 봉헌할 때 선교지를 돌아다니며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충만하게 실현될 것이다. 이것을 깨닫고 나니 내 마음속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솟았다. 하느님께서 당신만을 위해 나를 부르시는 것이었다. 이것이 나의 진정한 성소이며 선교 사명이었다.

 

이런 자의식이 흔들림 없이 내 안에 자리 잡았다.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내 삶은 조금씩 바뀌어 갔다. 기도 시간이 늘어났고 매일 미사와 선행을 실천하는 등 행동에도 변화가 왔다. 당연히 주변 사람 모두가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이를 아신 엄마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셨다. “관상 봉쇄 수녀라! 음, 그게 그렇게 쉬운 줄 아니? 또 지참금은 어떻게 하고?”

 

한 신부님의 도움을 받아 수녀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내 발걸음을 도미니코회 봉쇄 수도원으로 인도해 주셨다. 더 이상 선교지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스무 살에 수녀원에 입회한 나는 사랑이신 그분께 나를 드린 것을 후회한 적이 없다. 물론 어려움도 많았지만 성소를 의심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내게는 너무나 과분한 아름다운 성소

 

입회하기 넉 달 전 아버지께서 간암 판정을 받으셨다. 일 년을 넘기지 못하실 거란다. 갑작스레 닥친 고통 앞에 나는 성소의 꿈을 접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거기다 내게는 너무나 과분한 아름다운 성소라는 자격지심까지 들었다. 그러나 내가 성소를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신 아버지께서 눈물을 글썽이며 말씀하셨다. “만일 주님께서 너를 부르신다면 내가 걸림돌이 되고 싶진 않단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어렸을 때 미사에 삼 남매를 데려가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렸다고 하셨다. “주님, 당신께서 원하시는 아이를 택하십시오.”

 

어떻게 이 모든 것을 뒤로 남겨 두고 입회할 용기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가끔은 이런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때 내가 이기적으로 행동한 것은 아니었을까?’, ‘고통을 피했던 것일까?’ 그러나 주님께서 모든 것을 이끄셨고 내가 수녀원에 입회한 지 여덟 달이 지난 뒤 아버지는 하느님의 품에 안기셨다. 

 

몇 해가 흐른 뒤 누군가가 내게 말했다, 어려운 집안 살림을 엄마와 언니와 어린 두 동생에게 떠맡기고 입회한 것은 이기적인 행동이었다고. 그러나 주님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느꼈다. “너는 나를 위해 가족들과 함께 있는 기쁨, 언니와 동생들의 결혼식, 조카들이 태어나는 것을 지켜볼 기쁨도 포기하지 않았느냐?” 이 말씀은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사실 주님께서는 내가 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으로 우리 가족들을 보살펴 주셨다. (계속)

 

* 데레사 페론 - 도미니코회 천주의 모친 봉쇄 수도원 수녀. 

* 이 글은 스페인어로 작성된 것을 수녀회에서 우리말로 옮겼다. [경향잡지, 2019년 2월호, 데레사 페론]

 

 

[봉쇄의 울타리에서] 냉잇국 연가

 

 

수련소 생활은 너무나도 행복했다. 수도원 포도밭을 산책할 때면 행복에 겨워 깡충깡충 뛰고 싶을 정도였다. 우리 수녀회는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의 4개 대륙에 수도원을 창립하였다. 그래서 수련소에서는 여러 수도원에서 온 30여 명의 자매들이 함께 살았다. 내가 한국에 파견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삼 년이 지나자 한국에서 선교하던 도미니코회 신부님이 성소자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한국 수도원 창립 가능성을 생각하게 되었지만 아직은 먼 훗날의 일이었다. 우리 수도원을 받아 줄 주교님도 찾아야 했고, 이제 막 수도 생활을 시작한 한국 자매들의 양성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시간이 흘러 지학순 주교님께서 원주교구에 우리 수도원 창립을 요청하실 무렵 한국인 수녀들도 초기 양성을 마쳐 가고 있었다. 한국 수도원 설립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 될 즈음, 카메룬에서도 수도원 창립을 요청했다. 가능성을 알아보던 원장 수녀님은 두 그룹의 창립 구성원들을 지명하셨다.

 

 

나는 아무래도 괜찮아요

 

나는 처음에 카메룬 그룹에 속해 있었다. 늘 아프리카 선교를 꿈꾸어 왔던 나로서는 더없이 기쁘고 행복했다. 그래서 이 기쁨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적인 것인지 의구심이 들어 주님께 아뢰었다.

 

‘주님, 그곳으로 저를 보내시는 분은 당신이십니다. 저는 아무것도 청하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원하신다면….’ 일주일쯤 지나 원장 수녀님이 나를 부르시더니 다소 곤란한 표정을 지으시며 카메룬 대신 한국으로 가도 괜찮은지 물으셨다. 한국 자매들이 한국 수도원 창립 구성원에 스페인 수녀가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청한 것이다.

 

나는 과감히 좋다고, 아무래도 괜찮다고 말씀드렸다. 내 대답을 들으신 원장 수녀님은 이내 자리를 뜨셨다. 그런데 1분, 2분, 시간이 지날수록 내 마음은 기쁨에서 슬픔으로 바뀌어 갔다. 결국 헤어날 수 없는 깊은 슬픔에 빠져들었다. 말할 것도 없이 주변 수녀님들도 이를 알아챘다.

 

사실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원장 수녀님을 찾아가 마지막까지 나를 도와주십사 청했다. 그리고 일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그때 원장 수녀님이 나의 슬픔에 연연해하지 않으셨음에 지금까지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렇다. 주님께서는 이곳 한국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을 때는 마치 끝없는 허공에 던져지는 느낌이었지만 말이다. 몇 년 동안이나 지속된 그 슬픔의 이유를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주님의 영광과 사업이 더욱 빛나도록 그분께서 그리 원하셨던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이곳 한국에서 내 삶을 이끄시는 주님과 진정으로 만났다. 그래서 젊은 수도자들과 사제들에게 이렇게 외치고 싶다. “주님께 ‘아니요.’라고 절대 말하지 마세요! 아무리 어려운 일을 청하시더라도, 설령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지라도 모든 것을 내맡기고 ‘예.’라고 응답하세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무한히 갚아 주십니다!”

 

 

사랑해요, 한국

 

1990년 11월 29일 목요일 한국에 도착했다. 그리고 크고 작은 일을 많이 겪었다. 교구에서 조립식으로 지은 집을 한 채 마련해 주었는데, 지금은 배론 성지 대성전이 서있는 그 자리다.

 

한국에 도착한 그다음 주일에 폭설이 내렸다. 미사에 참례하러 성지로 내려가려고 장화를 신어야 했다.

 

밭에서 일할 때 신는 장화를 신은 채 미사에 참례하다니! 돌아오는 봄까지 맨땅을 보지 못했다.

 

봄이 되자 냉이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한국 수녀들이 냉잇국 맛이 좋다고 해서 오락 시간에 다 함께 냉이를 캐러 갔다. 냉잇국 냄새를 처음 맡았을 때는 도망가고 싶었다. 속으로 기도했다. ‘주님!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 뿌리국은, … 정말 너무 합니다. 하지만 당신에 대한 사랑으로 바치겠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어 국을 맛보았는데, 놀라웠다. 이렇게 맛있는 국이 있다니! 그날 이후 봄만 되면 내가 앞장서서 냉이를 캐러 가자고 수녀님들을 재촉한다.

 

한국어에 대해 말하자면, 거의 30년 동안 한국에 살고 있지만 머릿속에 입력이 안 된다. ‘자, 짜, 차’라든가 ‘조, 저, 주’ 같은 발음은 도무지 구별할 방법이 없다. 가끔 수녀님들에게 한국말을 하면 “뭐라고요?” 하며 내게 되묻는데 그럴 때면 같은 말을 두세 번 반복한다. 그러면 마침내 한 수녀님이 알아듣고 “아, 그거~” 하며 방금 내가 한 말을 똑같이 되풀이할 때면, 정말….

 

공동체와 함께 웃기도 많이 웃었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는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나의 삶은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한국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한국은 나에게 제2의 조국이 되었기에, 아무도 한국을 거스르는 이야기를 내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예수님, 감사드립니다. 모든 것이 주님께 영광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경향잡지, 2019년 3월호, 데레사 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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