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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협ㅣ사목회

지금 여기 평신도: 평신도에 대한 인식의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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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4-23 ㅣ No.65

[지금 여기 평신도] 평신도에 대한 인식의 전환

 

 

이브 콩가르(Yves Congar, 1904-1995년)는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년)와 함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신학자로 회자된다. 1904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콩가르는 도미니코수도회 사제로, 1950년대 초반 교회 쇄신과 평신도를 다룬 그의 두 권의 저서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교회 안에서의 평신도

 

요한 23세 교황의 부름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위원에 위촉된 콩가르는 공의회 문헌 작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대표작인 「교회 안의 평신도」는 평신도에 대한 인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할 만큼 논쟁거리가 되었다. 그 쟁점 가운데 하나는 평신도들도 사제와 마찬가지로 사제직, 예언자직, 왕직을 갖는다는 선언이다. 평신도 사제직은 직무 사제직의 부산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성직자의 권위가 절대적이었던 당시 상황에서 평신도를 서술할 때 사제를 중심에 놓고 정의하는 것이 아닌 사제를 평신도와의 관계에서 정의하려는 관점의 변화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평신도를 사목에 동원되는 대상 정도로 여기는 한국교회의 현실에 비추어 보면 이러한 관점의 변화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프랑스 혁명은 질서 정연했던 유럽 교회를 갈라놓았다. 혁명 이전 교회 안의 성직자 신분 차이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당시 프랑스 교회의 주교 135명 가운데 평민은 단 한 명뿐이었고 모두가 귀족 출신이었다. 하급 성직자에 해당하는 7만 명의 사제 대다수가 도시 평민 출신이었다는 사실도 이를 잘 보여 준다.

 

프랑스 혁명 이후 기존하던 중세 유럽의 피라미드 조직에서 일탈하는 노동자, 서민과 함께하려던 하위 사제 집단은 무너지는 봉건 귀족 사회와의 유대를 청산하지 못한 주교들로 말미암아 그 뜻이 좌절되거나 교회 밖으로 추방되었다. ‘주교가 있는 곳이 바로 교회’라는 도식으로 나타난 당시의 모습이다.

 

근대 산업화 시기를 거치며 교회 안에서도 역사를 무시하는 신앙은 존재할 수 없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하지만 교회는 이러한 일련의 현상들을 대체로 세속의 도전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응답으로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년)에서는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을 정의하는 데 그쳤다.

 

이러한 흐름을 타고 20세기 전후로 ‘사회 교리’, ‘가톨릭 행동’, ‘가톨릭 노동 청년회’, ‘노동 사제’ 등이 등장하였다. 이는 교회가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한 결과라기보다는 확산하던 공산주의 운동에 수세적으로 응대한 결과라고 여겨진다. 그렇다 해도 성령의 숨결은 당시 교회의 활발한 사회 참여에 큰 힘이 되었다.

 

이 시기는 콩가르가 평신도 신학을 전개한 때와도 정확히 겹친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 교세가 강했던 유럽 교회는 성직자 수가 감소하면서 교세도 약화되었고, 그것과 맞물려 형성된 ‘평신도와 함께하지 않으면 교회가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공론의 목소리는 평신도 신학의 배경이 되었다.

 

 

교회 헌장에서 말하는 평신도

 

기존하던 성직자와 평신도의 수직적 위계 관계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거치며 재구성되었다. 평신도에 대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근본적인 견해는 교회를 하느님 백성으로 보는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이하 교회 헌장) 2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교회 헌장의 순서를 살펴보면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제목의 2장을 3장 ‘교회의 위계 조직, 특히 주교직’ 앞에 두었다. 이는 교회의 위계 조직이 하느님 백성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의식했다는 증거이다. 또한 교회의 여러 과제 가운데 상당 부분이 평신도에게 주어지며, 그리스도의 사명과 더불어 사제직, 예언자직, 왕직에도 참여한다고 강조한다(10-12항, 34-36항 참조).

 

교회와 평신도의 동등성은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 「만민에게」’ 21항에서도 잘 나타난다. 21항 ‘평신도 사도직의 증진’에서는 이렇게 전한다. “진정한 의미의 평신도직이 교계와 함께 존재하고 활동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참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고 온전히 살아가는 것이 아니며 사람들 사이에서 완전한 그리스도의 표지가 되지도 못한다.”

 

이러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재평가로 평신도가 교회 직무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졌다. 또한 교회를 하느님 백성이라는 인격체로 정의함으로써 이원화된 교회 양상을 극복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성령의 바람도 평신도들이 교회의 주체, 사목의 주체로 인식되는 방향으로 부는 듯하다. 교세의 위기를 겪고 있는 유럽과 북미 교회는 성직자와 평신도가 서로 협력하는 동등한 관계를 지향하는 추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공의회의 정신을 실현하고자 새로운 기구들이 설립되었다. 교회는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로서 비록 구성원 각각의 임무는 서로 다르더라도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가 다함께 교회 운영에 책임을 진다. 따라서 교구와 본당은 사목평의회(사목협의회)를 두어 운영토록 하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폐막 3년 뒤인 1968년 5월 31일 주교회의 임시 총회에서 평신도 전국 연합회 설립 준비안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성직자나 평신도를 막론하고 ‘교회의 모습은 뭔가 전과 달라지고, 평신도의 권리는 강화되었다.’ 하는 정도의 추상적인 인식이 대부분이었다.

 

이 같은 배경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평신도 사도직 운동은 하향식의 계몽 교육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전국 단위의 평신도 조직이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교구와 본당 단위까지 평신도 단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점을 볼 때 평신도 사도직 운동이 그 촉매제 구실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전국의 모든 본당에서 평협이나 사목평의회 형태로 평신도 지도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세상 안에서의 평신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평신도를 새롭게 규정하면서 평신도에게 새 시대를 열어 주었다. 교회 안에서 절대다수인 평신도들은 더욱 활발히 교회의 삶에 동참하게 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린지 50여 년이 지난 오늘, 한국 천주교회의 평신도의 모습은 공의회가 바라는 모습과 다른 점은 없는지 살펴본다.

 

공의회에서 말한 평신도와 현실 속 평신도의 모습의 차이는 크게 다음과 같다.

 

첫째, ‘거룩함에 대한 열등감’이다. 교회는 거룩한 곳이고 세상은 속된 곳이라 여기는 태도이다.

 

공의회는 “평신도들에게는 세속적 성격이 고유하고 독특하다.”고 전하며, “자기 소명에 따라 현세의 일을 하고 하느님의 뜻대로 관리하며 하느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것”을 평신도의 임무라고 밝혔지만(교회 헌장, 31항 참조), 여전히 우리는 세상보다는 교회 안에서 봉사하는 것을 더 거룩한 것으로 여기는 듯하다.

 

둘째, ‘신앙 따로, 삶 따로’의 모습이다. 교회와 세상의 삶을 분리하는 ‘성속이원론’이 몸에 밴 신자들은 교회 안에서는 거룩함을 찾지만, 성당 문밖을 나서는 순간 복음을 잊는 경우가 많다. 마치 교회 밖에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셋째, ‘개인적인 영성’에 치우치는 경우다. 관련 조사에 따르면, 많은 신자는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신앙생활을 한다. 마음의 평화라는 내적 갈망은 종종 세상 안에서 개인의 안녕과 성취를 바라는 개인적 욕망을 충족하는 데에만 머물러 자신의 주위를 돌아보는 힘을 잃게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말하는 평신도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평신도 스스로가 내면화하지 못한 데에 기인한다. 평신도 영성이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평신도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세상 안’에서 평신도 소명을 강조한다. 그러한 소명을 살고자 평신도 스스로도 ‘성화’되어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고 알린다. 곧 거룩함을 지향하는 신앙생활, 그 성화된 삶을 교회 밖 세상 안에서 몸소 실천하는 것이다. 이것이 공의회가 바라는 모습이며, 평신도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 경동현 안드레아 -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실장. 가톨릭대학교에서 실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8년 4월호, 경동현 안드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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