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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성모님을 사랑한 성인들: 가경자 빈첸시오 치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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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2-11 ㅣ No.1748

[비바 마리아 - 성모님을 사랑한 성인들] 가경자 빈첸시오 치마티

 

 

우리 가톨릭교회 안에는 참으로 많은 성인들이 계시고, 또한 그 후보자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 한 가지는 성인 후보자들 가운데 우리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큰 죄인이고 한없이 나약한 우리를 성화聖化로 초대하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저는 요즘 성인들에게 각별한 감사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에게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구체적인 길을 친절하게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의 생애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거룩하고 충만한 삶을 살아가도록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삶 자체로 우리에게 아주 좋은 성덕의 이정표가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인전을 참 많이 읽습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그래서 꽤나 호젓하고 음산하기까지 한 수도원 도서관에서, 오래된 책 냄새와 함께 성인들의 향기를 맡는 것은 제게 큰 기쁨입니다. 한 분 한 분 만날 때마다 각별한 기쁨과 감동을 맛보았습니다. 성인전을 읽으면서 크게 느낀 점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들도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나약한 한 인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처럼 부족함 투성이였다는 것입니다. 우리처럼 인간적 미성숙을 안고 자기와의 기나긴 투쟁을 계속했다는 것입니다.

 

성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와 완전 동떨어진 별세계 사람들도 아닙니다. 감히 범접하지 못할 만큼 엄청난 사람들도 아닙니다. 대신 그들은 우리보다 조금 더 기도에 집중했던, 그래서 조금 더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조금 더 긴 호흡을 지녔던 사람, 우리보다 조금 더 넓은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봤던 사람들입니다. 조금 더 겸손했고, 조금 더 따뜻한 인간미를 지녔던 사람들입니다.

 

 

청소년들의 자상한 할아버지, 가경자 빈첸시오 치마티

 

이런 면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가경자’가 한 분이 계십니다. 이탈리아 출신 살레시오 회원으로 일본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셨으며, 예수의 까리따스수녀회 창립에 큰 역할을 하셨던 빈첸시오 치마티 신부님(1879~1965)이십니다. ‘마에스트로’ ‘주님의 음유시인’이라는 애칭으로 불릴 만큼 그는 당대 유명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습니다. 동시에 아주 감미로운 바리톤 목소리를 지니셨는데, 음악회가 끝나면 목소리에 반한 귀부인들이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길게 줄을 설 정도였습니다. 그는 돈 보스코의 정신에 따라 음악을 통해 청소년들이 기쁨 속에 주님을 섬기도록 노력했습니다. 그가 주관한 선교 음악회는 점점 유명세를 타게 되었는데, 일본 전역은 물론 한국과 중국까지 대략 2000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치마티 신부님은 음악뿐만 아니라 문학이나 신학, 영성이나 인품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탁월함과 비범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찬란한 성덕과 비범함을 청빈과 겸손의 덕으로 가리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1935년 미야자키 선교구가 지목구로 승격되자, 그는 초대 지목구장으로 임명되었고, 몬시뇰이라는 칭호가 주어졌습니다. 이를 알게 된 이탈리아 친구들이 아주 멋진 고가의 자주색 몬시뇰 복장을 선물로 보내왔습니다. 그는 즉시 되돌려 보내면서 일본의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쓸 수 있게 그것을 팔아 현찰로 보내라고 했습니다. 그의 복장은 언제나 여기 저기 수없이 꿰맨 자국투성이의 낡은 수단 한 벌뿐이었습니다. 그의 모범적인 수도생활을 눈여겨본 수도회 장상들이 그에게 중책을 맡기려고 여러 번 초대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예의 바르면서도 완강하게 사양했습니다.

 

만년에 도달한 치마티 신부님께서 일본의 가난한 청소년들 사이에 현존하면서 보여주신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그분의 모습은 한마디로 편안하고 따뜻하고 인정 많은 할아버지의 모습이었습니다. 그가 살레시오 회원으로서 늘 강조하였고, 목숨 다하는 날까지 매일 실천했던 일 한 가지는 오락시간 운동장에서의 현존이었습니다. 노인이 되신 신부님은 더 이상 운동장 안에서 청소년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되자, 살짝 한 걸음 뒤로 물러나셨습니다. 청소년들이 신나게 뛰어노는 운동장 주변에서 기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며 격려하셨습니다. 한 아이가 골이라도 넣으면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습니다. 한 아이가 타박상이라도 입으면 재빨리 다가가서 상처를 어루만지며 치료해주셨습니다. 노년기 운동장에서의 그의 현존은 나이 들어가는 저희 살레시오 회원들의 영원한 모델이자 이상향입니다. 그의 모습은 돈 보스코의 모습과 백퍼센트 판박이였습니다. 그래서 저희 살레시안들은 그를 향해 ‘일본의 돈 보스코’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돈 보스코란 성인 한 분이 그저 당신 존재만으로 또 다른 성인을 배출시키는 현상,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치마티 신부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성화의 길은 너무나 쉬운 것이어서 또한 놀랍습니다. 그저 딱 세 가지뿐입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는 마지막 날까지 매일 작은 의무에 항구하게 충실할 것. 성사생활 특히 성체성사와 고해성사에 충실할 것. 그리고 매일의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항상 기쁘게 지낼 것.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가 지녔던 영성을 저희 후배들은 ‘일상日常의 영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틈만 나면 후배 살레시안들과 청소년들에게 외쳤습니다, “큰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것입니다. 날마다 자신의 의무를 단순하게 실행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주님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앞을 바라보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고, 조금 더 하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낙천적이었습니다. “흘러간 물로는 더 이상 방아를 찧지 못합니다. 우리의 미래는 하느님 손안에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합시다.”

 

 

성모님을 향한 극진한 효심

 

치마티 신부님과 동고동락했던 수많은 살레시안들과 청소년들이 기억하는 그분의 인상적인 모습은 언제나 어디서나 묵주를 손에 들고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누군가가 부탁하면, 끊임없이 돌리고 있던 묵주를 들어 보이며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여기 보십시오. 그대를 위해서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을 향한 그의 극진한 효심은 음악을 통해서도 잘 드러났습니다. 그는 직접 ‘아베 마리아’ ‘레지나 첼리’ 등 주옥같은 선율을 작곡하여 성모님께 봉헌했습니다. 당시 인기 절정이었던 음악회 때 성모님 찬가는 단골 주제가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신자가 아닌 수많은 일본 청중들을 성모님께 봉헌하고 의탁하는 마음으로 ‘아베 마리아’를 열창하곤 했습니다.

 

치마티 신부님은 성모님을 ‘우리의 하늘 엄마’라고 즐겨 불렀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12월 8일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에 그는 성모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이런 약속을 드립니다. “찬미 마리아! 사랑하는 성모님, 오늘은 오전 2시와 정오, 두 번에 걸쳐 공습경보가 울렸습니다. 저는 이 어려운 시기, 원죄가 없으시며 그리스도 신자들의 도움이신 성모님을 공경하기 위해 성당을 하나 봉헌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조건은 성모님께서 우리 형제들의 생명을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1945년 도쿄에 폭탄이 투하되었을 때, 차분한 얼굴에 손에는 묵주를 들고, 만나는 모든 사람을 이렇게 격려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뢰를 가지십시오. 성모님께서 우리를 보호해주실 것입니다.”

 

* 양승국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저서로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때까지』 『아저씨, 신부님 맞아요?』 『축복의 달인』 『친절한 기도레슨』이 있다.

 

[생활성서, 2017년 12월호,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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