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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정진석 회고록72: 해외 선교는 우리 신앙인이 가야 할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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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1-05 ㅣ No.489

[추기경 정진석] (72) 해외 선교는 우리 신앙인이 가야 할 길


북한 선교회 설립 계획, 한국외방선교회로 결실

 

 

정진석 추기경이 2009년 3월 7일 서울 성북구 한국외방선교회 본부 봉헌식에서 테이프를 자르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지금 우리는 마음껏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모두 신앙 선조들과 원로들 덕분이다. 특히 목숨을 바쳐 신앙의 증인이 된 선배 신앙인들의 희생 덕분이다. 많은 이들은 지금 우리가 누리는 신앙의 자유가 자연스럽게 주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신앙은 결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특별히 선교 활동을 위해 먼 나라에서 목숨을 걸고 한국을 찾아 청춘을 바친 많은 선교사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발전이 가능했다. 정진석 추기경은 이제는 그 신앙의 빚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 도움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다른 나라에서 선교 활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한국 교회와 메리놀외방선교회

 

정 추기경은 1970년 청주교구장으로 부임하면서 메리놀외방선교회와 인연을 맺었다. 메리놀외방선교회는 선교회로 설립됐다. 교황청은 중국에 선교사를 보내려고 메리놀외방선교회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당시 정치적 상황으로 중국에 진출하기는 이르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메리놀회 본부는 중국의 이웃 나라인 한국에 진출하게 된다. 1923년 평양에 메리놀회가 파견됐는데 이미 서울대교구장 뮈텔 대주교가 교황청에 편지를 보낸 상태였다. “평안도는 다른 종교가 발을 디딜 틈이 없을 만큼 개신교의 영향력이 대단합니다. 그래서 평안도를 따로 분가하게 해 주십시오.” 교황청은 이를 참고해 메리놀회를 평양에 파견했다.

 

메리놀외방선교회 사제들이 1932년 서포에서 열린 사제 피정에서 평양지목구 사제들과 기념 촬영하는 모습.

 

 

평양에 도착한 메리놀회는 개신교 교세가 상당한 가운데서도 자리를 잘 잡았다. 그런데 1941년 일본의 진주만 전쟁으로 일본과 미국이 적국이 됐다. 일본은 평양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미국 국적의 메리놀회 선교사와 수녀들을 1942년 미국으로 추방했다. 이때 한국에서 쫓겨난 메리놀회 선교사들은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미군 종군 신부로 자원 입대해 한국으로 다시 입국하기도 했다. 1953년 휴전 후 미군은 본국으로 귀환했다. 하지만 메리놀회 신부들은 자신은 나이도 많고 하니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북한에 갈 희망을 품고 한국에 남겠다고 했다. 한국에 남기로 결정한 메리놀회는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를 찾아가 한국에서 사목할 수 있기를 부탁했고, 같은 해 9월 충북에서 활동하라는 허락을 받았다.

 

 

선교 의식, 한국외방선교회 설립으로

 

정 추기경은 청주교구장 시절 메리놀회 신부들과 북한 선교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기에 자연스레 선교 의식이 생겼다. 1974년 부산교구장이던 최재선 주교가 곧 은퇴할 시점이었다. 정 추기경은 최재선 주교를 찾아가 이런저런 조언을 구하다 반가운 이야기를 들었다. “북한을 위해 선교회를 만들면 어떨까요?”

 

최 주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 추기경은 크게 반색했다. “바로 그것이 필요합니다. 주교님!” 한국외방선교회의 시작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설립이 논의됐지만, 이 모든 것이 인간이 알 수 없는 하느님의 섭리였다. 

 

정 추기경은 최재선 주교를 도와 교황청 인가를 위해 한국외방선교회 회칙 작업에 매달렸다. 로마에서 교회법을 공부한 것이 큰 도움이 됐다. 11개국의 해외 외방선교회에도 회칙을 부탁해서 받아 참고했다. 그런데 한국 사목 상황도 만만치 않은데 우리가 외방 선교를 하는 것이 시기상조가 아니냐는 부정적 여론도 없지 않았다. 당시가 1970년대 초이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정 추기경은 주교단 가운데 가장 어린 주교였는데, 다른 주교들이 반대 뜻을 내비쳤다. 그러나 정 추기경은 한국 천주교회도 100주년이 되었으니 이제는 신앙의 빚을 갚기 시작해야 한다며 주교들을 설득했다. 

 

마침내 한국외방선교회 설립이 확정됐다. 정 추기경은 설립을 제안했던 최재선 주교를 총재로 추대하고자 했다. 그러나 교회법적으로 현직 주교여야 총재가 될 수 있었다. 최재선 주교가 은퇴를 해 생각지도 않게 정 추기경이 한국외방선교회 초대 총재가 됐다. 그 후 한국외방선교회는 발전을 거듭하며 지금까지 세계 여러 나라에서 많은 선교 활동을 하고 있다. 정 추기경은 최재선 주교와 함께 이를 준비한 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생각이 더 확고하게 들었다. 세월이 흘러 정 추기경은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됐고, 동시에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직하게 됐다. 어떻게 보면 북한 선교의 후계자요 메리놀회의 후계자가 된 셈이다. 정 추기경은 이 모든 것도 하느님의 뜻이라 생각했다.

 

2015년 10월 3일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 신학대학에서 열린 해외선교의 날 파견 미사 시작에 앞서 수도자와 신학생, 평신도들이 해외선교지도 퍼즐을 들고 입장하고 있다.

 

 

 중남미 교회 위한 선교회

 

서울대교구장 재임 중이던 어느 날, 김택구 신부가 국제선교회 설립을 제안했다. 정 추기경은 김 신부 제안을 처음엔 반대했다. 사제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 신부가 중남미 선교를 해야 하는 당위성을 반복해서 말하니 ‘하느님 뜻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에 파나마 교구장과 협약도 맺었다. 정 추기경이 파나마 대주교를 만나 정식으로 서울대교구 신학생을 파나마로 보내고 파나마 교구는 신학생을 교육시키고 양성을 책임지겠다는 협정을 맺었다. 양성 후 중남미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선교사를 파견한다는 협약도 정식으로 체결했다. 서울국제선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한국외방선교회 설립 때도 반대가 많았는데 국제선교회를 시작할 때도 역시 반대에 부딪혔다. 정 추기경은 걱정스러운 마음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서울국제선교회의 실무를 맡던 김택구 신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서울국제선교회는 나름대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국제선교회가 지금껏 이어지기까지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 추기경은 이 땅은 물질뿐만아니라 교세적으로도 하느님 축복을 받았기에 당연히 해외 선교에 힘을 쏟아야 하고 지금이 그때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중남미 선교가 생각보다 어렵지만 분명히 결실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정 추기경은 후임자에게 짐을 맡긴 것 같아 마음이 안쓰럽지만 하느님의 뜻이면 어떻게든 열매가 맺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11월 5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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